NEWS & THESIS

흑사병 생존자 명단이 알려주는 영국 농민들의 흑사병 극복기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5. 14. 11:37
반응형

by Alex Brown, Grace Owen, The Conversation

카스타프의 얀John of Kastav, <죽음의 춤Dance of Death>(1490). 출처: 슬로베니아 국립 미술관

 
영국 도서관British Library의 중세 소장품을 연구하던 중, 우리는 흑사병Black Death(1346~1353) 대유행 생존자들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는, 이전에는 주목받지 못한 문서를 발견했다.

헌팅던셔Huntingdonshire 워보이스Warboys에 있는 램지 수도원Ramsey Abbey manor of Warboys 영지의 장부에 끼워져 있던 양피지 조각인 이 문서는 농민들이 역병에 걸렸을 때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쉬었는지를 기록한다.

또한 생존자들 이름과 고용주들이 회복에 걸릴 것으로 예상한 기간도 밝힌다.

바니 슬론Barney Sloane과 공동으로 발표한 최근 논문에서 우리는 역병에 걸려 몇 주 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회복한 것으로 추정되는 22명 소작농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했다.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 중 하나인 흑사병은 중세 유럽 인구  3분의 1에서 3분의 2에 해당하는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엄청난 규모 때문에 많은 역사가는 사망자에 대한 세부 정보를 밝히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흑사병에 걸렸다가 회복한 사람들 이야기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았다.

치명적인 질병이었음에도 흑사병에서 회복하는 것은 가능했으며, 중세 연대기 작가들은 가능성은 낮았지만 생존에 대해 언급했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셔Oxfordshire 스윈브룩Swinbrook 서기였던 제프리 르 베이커Geoffrey le Baker는 다음 10년 동안 회복 여부는 환자의 증상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느 날까지만 해도 행복에 가득했던 사람들이 다음 날 갑자기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몸 여기저기에 갑자기 돋아나는 종기에 시달렸는데, 그 종기는 너무 딱딱하고 말라 있어서 째도 거의 액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들 중 많은 이가 종기를 째거나 고통을 참아내며 살아남았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온몸에 작은 검은 고름이 돋았습니다. 이들 중 극소수, 아니 거의 아무도 건강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회복했을까?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죽었고,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았을까?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시간"은 얼마나 길었을까?

안타깝게도 중세 사료들은 질병보다는 사망률에 대한 정보를 주로 기록하기에 이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족하다.
 

이 문서인가?


독특한 흑사병 생존자 명단

워보이스 영지 기록에는 1349년 4월 말부터 8월 초 사이에 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특이한 내용이 담겨 있다.

램지 수도원 수도사들은 영주 땅에서 일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병든 소작인들 명단을 작성하고,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쉬었는지 자세히 기록했다.

사람들은 흑사병을 겪으면서 각기 다른 영향을 받았다.

가장 빨리 회복한 사람은 헨리 브라운Henry Broun으로, 단 일주일만 일을 쉬었다.

반면 존 더워스John Derworth와 아그네스 몰드Agnes Mold는 훨씬 더 오랜 기간 병을 앓았고, 둘 다 9주 동안 일을 쉬었다.

평균 병가는 3~4주였으며, 4분의 3은 한 달 안에 일에 복귀했다.

당시 그들에게는 최대 1년 1일의 병가 권리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들의 빠른 회복 속도는 더욱 놀랍다.

생존자 명단에는 영지 내 넓은 토지를 소유한 소작농tenants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흑사병이 신분,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죽였는지, 아니면 가난하고 노인들이 더 취약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부유한 소작인이 다수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높은 생활 수준 덕분에 가난한 이웃들보다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었음을 시사할 수 있다.

아마도 2차 감염과 합병증을 예방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2명 중 19명이 남성이었다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이는 흑사병의 성별 선택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영지 소유 구조에서 나타난 성별 편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22명이라는 숫자가 많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1340년대 평년에는 여름철에 결근하는 사람이 두세 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는 영지 내 질병 발생률이 10배나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병든 소작인들은 단 13주 동안 91주 분량의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한 셈이다.

흑사병의 영향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엄청난 사망자 수에 의해 좌우되곤 했다.

그러나 병에 걸렸다가 회복한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생각할 때 비로소 이 전염병이 사회에 미친 엄청난 충격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럽 전역의 마을과 도시에서는 생존자보다 사망자, 죽어가는 사람, 병든 사람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중세 기록과 연대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한 기록에는 "하인과 노동자가 너무 부족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적었다.

높은 사망률, 전례 없는 질병, 그리고 혹독한 날씨가 겹쳐 1349년과 1350년 두 해 수확은 중세 영국 역사상 최악의 흉작으로 기록되었으며, 1315~1317년 대기근보다도 더 심각했다.

이번 기록 발견은 흑사병 시대에 질병과 회복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게 해 주며,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 속에서도 회복이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증거는 중세 농민들의 놀라운 회복력을 드러낸다.

그들 중 다수는 병상에 누워 흑사병의 전형적인 증상인 사타구니와 목의 림프절이 붓고 염증이 생기는 종창을 보이며 피를 토하고 고열에 시달렸지만,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불과 몇 주 만에 직장으로 복귀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