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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팔을 잃고도 불평 한 마디 없었다는 상이용사 바이필드, 하지만 그는 처절했다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1. 15.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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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 병사 회고록이 폭로한 장애 참전 용사의 혹독한 삶

 
by 톰 알메로스-윌리엄스Tom Almeroth-Williams, 케임브리지 대학교

2011년 PBS 다큐멘터리 "1812년 전쟁The War of 1812"에서 섀드랙 바이필드Shadrack Byfield(가운데) 역을 맡은 배우 크리스 맥케이Chris McKay. 이 전투 장면은 1813년 1월 프렌치타운Battle of Frenchtown 전투를 재현한 것으로, 바이필드는 이 전투에서 목에 부상을 당했다. 사진 제공: 톰 푸르니에

 
19세기 자서전을 포함한 기록 보관소 자료 발견으로, 1812년 전쟁 참전 용사이자 자신의 절단된 팔을 묻고 맞춤형 의수를 제작한 영국군 병사 섀드랙 바이필드Shadrack Byfield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새롭게 바뀌었다.

미국과 캐나다의 TV 다큐멘터리, 서적, 박물관 전시에서 자주 등장한 바이필드는 불평 한마디 없는 영국군 병사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증거는 바이필드가 참전 용사 혜택을 얻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고 고통, 가난, 그리고 경찰과의 힘겨운 싸움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와서 나를 밀치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내가 그들을 때리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하면 내 연금을 빼앗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들은 내가 집사 두 명을 쏘려고 했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63세 장애를 지닌 참전 용사 섀드락 바이필드는 1850년대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 한 마을 예배당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이렇게 묘사한다.

마을 침례교도들Baptists 사이 심각한 분쟁에 휘말린 바이필드는 훗날 나무 의수wooden arm의 갈고리iron crook로 증오하는 사람 얼굴을 베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재발견된 자서전 다른 부분에서 바이필드는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되는 전쟁 부상 후유증에 대해 한탄한다.

"주님께서는 이제 제 오른쪽 어깨에 심한 류머티즘 통증을 주시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곳에는 [총알]이 박혀 있었습니다. 저는 거의 3년 동안 이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종종 손을 머리 위로 올리거나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팔 하나로 정원사로 일하면서 고용주가 제대로 된 임금을 주지 않자, 바이필드는 "한 팔로 나와 경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단언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역사학자 에이먼 오키프Eamonn O'Keeffe 박사는 섀드락 바이필드 자서전 "어떤 영국 군인의 역사와 회심History and Conversion of a British Soldier"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본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이 자서전은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출판되었지만, 현존하는 유일한 사본은 3,700마일 떨어진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웨스턴 리저브 역사 협회Western Reserve Historical Society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오키프 박사 연구 결과는 『영국학 저널(Journal of British Studies)』에 게재되었다.

오키프 박사는 "바이필드 전쟁 경험에 대한 회고록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회고록 뒤에 숨은 그의 진정한 모습은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의 삶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냄으로써, 영국으로 귀환하는 병사들 고통과 회복력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1812년 전쟁은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마무리되어 가던 시기에 북미에서 미국과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미국과 캐나다의 국가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역사가들은 샤드락 바이필드의 첫 회고록을 그레이트 레이크 지역에서 싸운 평범한 영국 병사의 시각을 제공하는 중요한 사료로 여긴다.

바이필드 이야기는 PBS 다큐멘터리 "1812년 전쟁(The War of 1812)"(2011)을 비롯한 여러 역사책과 다큐멘터리에서 비중 있게 다뤘다.

바이필드는 그레고리 새스Gregory Sass가 1985년에 쓴 아동 소설 《레드코트》(Redcoat) 주인공이며, 온타리오주 포트 이리 방문자 센터Fort Erie Visitor Center에는 그를 기리는 전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바이필드는 1850년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오키프가 발견한 그의 1851년 회고록과 신문 및 기록 보관소에서 나온 추가 증거들은 그의 놀라운 삶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샤드락 바이필드는 1789년 윌트셔Wiltshire 직물 도시인 브래드퍼드어폰에이번Bradford-on-Avon 근처에서 태어났으며, 1807년 18세 나이로 윌트셔 민병대Wiltshire militia에 입대했다.

바이필드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그의 결정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말을 잃고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바이필드는 곧 정규군에 자원입대해 1809년 캐나다로 건너가 제41보병연대41st Regiment of Foot에 합류했다.

1812년 6월 미국이 전쟁을 선포했을 때, 그는 나이아가라 강Niagara River변 포트 조지Fort George에서 복무 중이었다.

그는 여러 중요한 전투에 참전해 목을 다친 채 살아남았으나, 1814년 머스킷 총알에 왼쪽 팔뚝이 산산조각 났다.

바이필드 팔은 마취도 없이 팔꿈치 아래에서 잘려 나갔고, 의무병은 그 자른 팔을 거름 더미 위에 버렸다.

바이필드는 분노에 차서 잘린 팔을 되찾고 제대로 매장해 주겠다고 고집하며, 판자 몇 개를 엮어 임시 관을 만들었다.

1년 후, 그는 군인 연금 심사를 위해 런던의 첼시 왕립 병원Royal Hospital Chelsea에 갔지만, 하루 9펜스라는 적은 연금 액수에 "매우 불만족스러워했다".

두 개의 매우 다른 회고록

바이필드는 브래드퍼드어폰에이번으로 돌아와 처음에는 농장 노동자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장애 때문에 직조공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이필드가 훗날 쓴 것처럼, 어느 날 밤 그는 팔뚝이 없어도 베틀을 조작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는 지역 대장장이에게 그 설계도를 제작해 달라고 의뢰했다.

또한 그는 장애를 딛고 인근 바스Bath에서 "운송 도우미chairman"로 일하며 수입을 보충했다. 그는 휠체어나 가마를 이용해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도시의 가파른 거리에서 실어 날랐다.

바이필드는 더 높은 연금을 받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퇴역 육군 장교이자 저명한 군사 역사가인 윌리엄 네이피어 경Sir William Napier 도움으로 1836년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840년에 첫 장편 회고록인 "경보병 소대원의 복무기(A Narrative of a Light Company Soldier's Service)"를 출간했다.

바이필드가 문맹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지만, 오키프는 네이피어 서류에서 바이필드 본인 친필로 쓴 이 자서전 초고를 발견했다.

오키프는 "1840년 회고록에서 바이필드는 자신을 성실한 군인이자 훌륭한 참전 용사로 내세워 부유한 후원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 했다"고 말한다.

"반면, 1851년 회고록은 반항적인 죄인에서 독실하고 회개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영적인 구원 이야기입니다."

바이필드는 자신의 전시 복무를 회상하며 무단으로 막사를 이탈해 동료 병사들과 함께 약탈에 가담한 사실까지 인정했다.

오키프는 "이처럼 호의적이지 않은 일화들은 바이필드의 이전 군 복무 회고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1851년 회고록에서 그는 영국으로 돌아온 후 빚, 질병, 실업 등으로 고통받은 시기를 자세히 묘사하는 반면, 이전 회고록에서는 의수weaving prosthesis를 이용해 거의 20년 동안 가족을 '편안하게' 부양했다고 썼다."

바이필드는 고용주가 자신에게 한 손으로 베틀을 돌리라고 명령한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저는 최선을 다했지만 팔이 너무 피곤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거의 몰랐습니다. 침실로 들어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일할 힘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주님의 영광과 찬양을 위해, 그 팔도 다른 팔처럼 일을 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배당 소동

바이필드는 이후 글로스터셔의 호크스베리 업턴Hawkesbury Upton으로 이주했다가 마을 침례교 예배당Particular Baptist chapel을 둘러싼 치열한 분쟁에 휘말렸다.

이 분쟁은 소송, 싸움, 방화, 기물 파손 등으로 이어졌고, 결국 1853년 6월 예배당에서 발생한 폭동으로 절정에 달했다.

오키프는 신문 기사와 법률 기록, 그리고 바이필드 1851년 회고록을 연구해 이 사건을 조사했다.

바이필드는 "밀치면서" 싸움을 시작했고, 의수 팔의 쇠갈고리로 상대방의눈과 얼굴을 베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다음 날, 그는 2년 전 공공장소 음주 혐의로 자신을 기소했지만 실패한 경찰관 시드니 쇼트Sidney Short한테서 소환장을 받았다.

쇼트는 예배당 목사인 바이필드와 또 다른 남성이 자신에게 "맹렬한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으며 거리까지 쫓아갔다고 주장했다.

바이필드는 앞서 발생한 음주 사건에서 쇼트가 허위 증언을 했다고 비난했다.

바이필드는 폭행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의 파벌은 결국 예배당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교구민 18명이 보퍼트 공작Duke of Beaufort에게 청원하여 워털루 전투 장군인 에드워드 서머셋 경Edward Somerset을 기리는 30미터 높이 기념비 관리인 직에서 바이필드를 해임하도록 했다.

바이필드는 통행료 징수원tollkeeper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군사 회고록을 공작에게 팔아 그 자리를 얻었고, 그 대가로 작은 오두막집에 거주할 수 있었다.

1856년, 바이필드는 브래드퍼드어폰에이번으로 돌아와 두 번째 아내와 결혼했다.

그는 윌리엄 네이피어 경Sir William Napier으로부터 연금을 계속 받았으며, 1860년에는 후원자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바이필드는 연금 인상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867년에는 마지막 회고록인 "절망적인 희망(The Forlorn Hope)"을 출간했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재 남아 있는 사본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74년 1월,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키프는 "바이필드의 1851년 회고록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특히 장애를 지닌 참전 용사들에게 전후 사회 복귀의 어려움을 잘 보여준니다. 또한, 제대 군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지원을 얻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도 보여준다"고 말한다.

"제 연구는 바이필드가 항상 시키는 대로만 하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통념을 깨뜨립니다. 그는 매우 강한 의지를 지녔지만, 동시에 많은 고난과 심리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More information
From Amputee to Author: Shadrack Byfield and the Making of a War of 1812 Veteran, Journal of British Studies (2026). DOI: 10.1017/jbr.2025.10169 

Provided by University of Cam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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