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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 전 비잔틴 금제 인장 반지에 새긴 여성 이름 판독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9. 1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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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스쿨레나Maria Skulena 라는 이름을 새긴 14세기 비잔틴 금제 인장 반지. (사진 제공: 니콜라이 오프차로프 교수)

 

약 7세기 전, 마리아 스쿨레나Maria Skulena라는 여성은 단순한 금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 물건을 소유하고 있었다. 바로 자기 이름을 문서에 날인할 수 있도록 제작한 반지였다.

이 14세기 비잔틴 금제 인장 반지는 불가리아 동부 로도페Eastern Rhodopes 산맥 즐라토그라드Zlatograd 인근에서 발견되었으며, 자기 이름으로 문서를 인증할 권한을 지닌 여성의 희귀하고도 특별한 흔적을 간직한다.

반지에는 "sevasta Maria Skulena"라는 이름이 새겼다. 이 시기 여성용 인장 반지는 남성용보다 훨씬 희귀하기 때문에, 이 반지는 단순한 비잔틴 장신구로서의 가치를 넘어, 자신의 신분으로 법적 또는 행정적 의미를 지닌 여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여겨진다.

반지와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고고학자 니콜라이 오프차로프Nikolay Ovcharov 교수는 이 반지가 로도페 산맥 동부의 아크리도스Achridos 지역과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정확한 발굴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반지는 즐라토그라드 근처에서 발견되어 나중에 엔지니어 알렉산더 미투셰프Alexander Mitushev의 공식 등록 개인 소장품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9월 5일 즐라토그라드에서 반지가 공개되었을 때 이를 보도한 불가리아 통신사(BTA)는 좀 더 정확한 지리적 정보를 제공했다. BTA에 따르면, 이 반지는 즐라토그라드에서 그리스 국경 방향으로 뻗어 있는 4~5km 구간에서 발견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언뜻 보면 이 반지는 중세 시대 부와 과시의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귀금속이 아니라 표면에 새긴 글자다.

인명학 전문가 디미타르 스토이메노프Dimitar Stoimenov는 그리스어 명문을 "세바스타 마리아 스쿨레나(sevasta Maria Skulena)"라고 해석했다.

글자는 음각이며 반지를 부드러운 밀랍에 눌러 찍으면 글자가 정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이러한 실용적인 기능은 이 물건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꿔놓는다. 이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마리아가 자신의 이름과 직함을 새겨 넣은 인장을 찍어 문서의 진위를 확인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비잔틴 제국 말기 문서에서 이러한 여성 흔적은 흔하지 않다. 공식 문서에 서명하고 인장을 찍은 사람은 남성이 훨씬 많으며, 따라서 현존하는 이름을 새긴 인장 반지는 대부분 남성 소유자다.


마리아 반지는 단순히 문서로 기록된 직함보다 역사가들에게 더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이 반지는 그녀가 손에 쥐고, 착용하고, 사회적 권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한 물건 뒤에 숨은 특정한 여성을 보여준다.


14세기 비잔틴 금제 인장 반지, 그리스어로 '세바스타 마리아 스쿨레나'라는 이름을 새긴 근접 사진. 이미지 제공: 니콜라이 오프차로프 교수.

 

후기 비잔틴 엘리트 계층의 여성

명문의 고문자학적 특징은 14세기 중반, 아마도 1330년대에서 1350년대 사이 것으로 추정한다. 오프차로프 교수는 이 반지가 팔레올로고스 시대Palaiologan period에 비잔틴 제국의 지방 공방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마리아의 직함은 그녀가 산 시대를 엿볼 또 다른 단서를 제공한다. 그리스어 '세바스토스sevastos'의 여성형인 '세바스타Sevasta'는 '존경받는revered' 또는 '숭고한exalted'과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에서 유래했다.

세바스토이sevastoi라는 칭호는 한때 비잔틴 제국의 위계질서에서 훨씬 더 높은 지위를 차지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의미는 변했다. 13세기와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세바스토이는 지방 엘리트나 중하위급 사법 및 재정 관직에 있는 사람들과 더 자주 연관되었다.

따라서 마리아를 황실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 중 한 명으로 단정짓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반지가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녀가 지위, 재산, 그리고 문서상의 권위가 중요한 사회 계층에 속해 있었고, 자신의 이름이 어떤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오히려 이 유물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마리아는 익명의 "비잔틴 귀족 여성"이 아니라, 제국 말기의 복잡한 지방 사회에서 분명한 위치를 차지한 여성으로 드러난다.

마리아 스쿨레나는 누구일까요?

그녀의 성씨가 그 사회 계층을 좁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스쿨레나Skulena는 스쿨레스Skules라는 성씨에서 유래한 여성형으로, 이 성씨는 14세기 테살로니키Thessaloniki, 세레스Serres, 할키디키Chalkidiki, 그리고 에게해에 접한 로도페Rhodopes 산맥 일부 지역을 포함한 여러 지역 문서에 기록되었다.

이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다양한 사회 계층에 속했다. 그중에서도 미카엘 스쿨레스Michael Skules는 1370년에서 1371년까지 "로마인 총재판관general judge of the Romans"이라는 직함을 지닌 저명한 인물이다.

오브차로프Ovcharov는 또한 1338년 문서에서 세레스 평원Serres plain 동부에 토지를 소유한 세바스트 스쿨레스(Sevast Skules)를 언급한다. 그는 마리아 스쿨레나(Maria Skulena)가 이 남자의 아내였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현존하는 증거만으로는 그 관계를 확실하게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가설은 지리적으로 타당성이 있다. 에게해 마케도니아, 테살로니키, 할키디키 및 주변 지역에 걸쳐 스쿨레스라는 성씨가 분포한다는 사실은 이 사회 계층 구성원들이 동부 로도페 산맥 지역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살았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오브차로프 교수 주장처럼 마리아는 아크리도스Achridos에 재산을 소유했거나 심지어 거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확실한 고고학적 발굴지나 그녀를 명시적으로 지칭하는 문서가 없기 때문에, 그녀의 생애 중 이 부분은 확정된 사실이 아닌 근거 있는 가설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14세기 비잔틴 시대 마리아 스쿨레나 금제 인장 반지를 현대 여성 손에 끼워 크기와 착용 방식을 보여주는 사진. 이미지 제공: 니콜라이 오브차로프 교수.

 

페르페리콘Perperikon과 에게해 사이

즐라토그라드Zlatograd 주변 지역은 비잔틴 세계와 단절되어 있지 않았다. 아르다Arda 강과 바르비차Varbitsa 강을 따라 이어지는 길들은 동부 로도페 산맥과 에게해 연안, 그리고 테살로니키, 크산티Xanthi, 드라마Drama, 세레스 등의 도시 중심지를 연결했다.

이러한 연결망 속에 중세 시대 히페르페라키온Hyperperakion(오늘날 페르페리콘과 동일시됨)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곳은 아크리도스의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다. 이 지역 전반에 걸친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우스트라Ustra, 므네아코스Mneakos, 크리부스Krivus, 파트모스Patmos, 에프라임Ephraim과 같은 지역을 포함하는 중세 시대 밀집된 경관이 드러났다. 

이러한 연결 고리는 로도페 산맥과 에게해 마케도니아 사이의 정치적, 경제적 지형을 넘나들었을 가능성이 있는 한 여성의 가족 관계나 재산 소유권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마리아가 정확히 어디에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이름을 새긴 반지가 어떻게 즐라토그라드 주변 지역에 도달했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발굴 맥락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은 이 유물의 가장 큰 한계다.

고고학자들은 반지를 특정 거주지, 유적층, 또는 분실 시점과 확실하게 연결할 수 없으며, 이러한 맥락의 부재는 반지의 마지막 여정에 대한 재구성을 제한한다.

작은 유물, 희귀한 여성의 목소리

그럼에도 남아 있는 정보는 매우 직접적이다. 금은 부, 장인 정신, 유행을 알려주지만, 이 반지 명문은 고고학적으로 보기 드문, 여성의 이름과 권위의 행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마리아 스쿨레나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그녀가 정확히 어디에 살았는지, 어떤 문서에 봉인을 했는지,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알 수 없으며, 심지어 남편의 신원조차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 반지는 그녀의 이름이 금에 새겨지고, 필요할 때마다 밀랍으로 복제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거의 7세기가 지난 지금, 이 작은 개인적인 도구는 비잔틴 여성의 이름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기록 체계 속에서 그녀가 한때 지닌 영향력을 엿보게 한다.

출처 : 니콜라이 오프차로프 교수 Prof. Nikolay Ovchar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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