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의 저주받은 무덤 곽장초묘郭庄楚墓, 무덤 주인은 여전히 미스터리
삑사리난 춘절 폭죽에 도굴 덜미
(2026-09-22 11:17) 수차례 도굴당한 이 '흉한 무덤[흉묘凶墓]'을 조사하던 고고학도들은 무시무시한 전설이 아닌, 전국시대 장인들이 유사流沙[흘러내리는 모래]를 이용해 만든 도굴 방지 시설과 지하에 갇혀 버린 후대 도굴꾼들 흔적을 발견했다.
2005년경, 하남성河南省 주마점시驻马店市 상채현上蔡县 곽장촌郭庄村에서 고고학자들은 여러 차례 파헤친 흔적이 있는 구덩이를 발견했는데, 처음에는 청동 유물이 아닌, 토양에 비정상적으로 촘촘한 교란 흔적을 발견했다.
현장 조사는 증거에 의존했고, 무너진 여러 개 터널은 소문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곽장촌은 중원 지역 중심부에 위치한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상당한 규모의 초나라 귀족 무덤이 자리한다.
독특한 구조와 심각한 도굴로 후대에 주목을 받게 되었고, "중국 최고의 흉한 무덤[中国第一凶墓]"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주장은 널리 퍼져 있지만, 공식적인 고고학적 결론은 아니다.
무덤 발굴 과정에서 고고학자들은 매장 구덩이 주변에서 후대 도굴꾼들이 만든 여러 개 수직 갱도와 경사 터널을 발견했다.
이 터널 중 일부는 무너져 내렸고, 다른 일부는 서로 연결되어 여러 시대 사람들이 같은 지하 공간을 반복적으로 도굴했음을 시사한다.

토양층 분석 결과, 이러한 도굴은 일회성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덤을 둘러싼 가장 흔한 소문은 "80명이 묻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골 수, 신원 확인, 사망 원인 등을 정확히 밝히려면 지층 분석, 유물 분석, 위치 분석, 유골 감정 분석 등이 필요하다. 소문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실제로 유사층과 도굴꾼들이 파놓은 터널 근처에서 원시적인 도구 조각과 의복 조각과 함께 일부 유해가 발견되었다.
이는 일반 무덤에서 시신과 함께 묻힌 것과는 확연히 다르므로, 반복적인 도굴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80명 도굴꾼"이라는 숫자는 여러 기록에서 과장됐다.

더 정확한 표현은 "오랫동안 80명 무덤으로 간주된 이 무덤 안에서 도굴꾼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유해가 발견되었다"일 터이다.
곽장 초묘郭庄楚墓가 진정으로 위험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건축 방식 때문이다.
전국시대에 초나라는 끊임없이 중원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과거 채나라[채국蔡国] 영토였던 곳이 초나라 지배하에 들어오면서 그 중심지 상채上蔡 지역은 점차 중요한 정치, 군사, 귀족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무덤은 고립되어 더는 지어지지 않았고 도시, 귀족 거주지, 그리고 확립된 의례 질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비록 무덤 주인이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무덤 세부 사항을 통해 그의 사회적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거대한 매장 구덩이, 복잡한 매립 구조, 그리고 상당한 부장품은 일반 평민 무덤이라고는 볼 수 없다.
무덤 주인은 적어도 초나라 귀족이거나 고위 지방 관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고대 사람들은 무덤을 만들 때 단순히 매장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관 위치, 무덤 통로 방향, 그리고 부장품 조합은 모두 사회적 지위와 관련이 있다.
청동 제례 용기의 배치, 악기 배열, 그리고 옥기류 조합은 모두 사회적 규범을 반영했다.

무덤방은 마치 묻힌 신분 기록과 같다.
비록 무덤 주인 이름은 사라졌을지라도, 그 체계 흔적은 남았다.
곽장초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다진 흙 아래에 두꺼운 모래와 자갈층이 있다는 대목이다.
대부분 무덤은 황토와 다진 흙으로 채워 비교적 안정적인 구조를 이루지만, 이 무덤은 다량의 모래와 자갈을 사용해 독특한 단열층을 형성한다.

이러한 유형의 무덤을 일반적으로 적사묘积沙墓, 모래채움무덤이라 한다.[신라 적석목곽분도 실은 이와 유사하다.]
단순히 구덩이에 모래를 쏟아붓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획적이고 정교하게 설계된 복합 구조물이었다.
외부는 다진 흙으로 형태를 고정하고, 내부는 모래와 자갈로 채운 다음, 관과 부장품은 더 깊숙한 곳에 안치했다.
모래층은 쉽게 이동하기 때문에 구덩이 벽이 불안정해지고, 도굴꾼들은 무너지는 위험을 쉽게 감수해야 했다.
경험이 풍부한 도굴꾼들은 보통 흙무덤 측면에서 파헤쳐 앞쪽 통로를 피하고, 매장실 근처로 돌아가는 방식을 택한다.
황토로 이루어진 무덤에서는 이 방법이 힘들기는 했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래층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조사에 참여한 한 연구원은 이 구조를 이렇게 간단하게 묘사했다. "흙으로 파면 진행 상황을 확인할 수 있지만, 모래로 파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 같다."
이 말은 현장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모래로 채운 무덤 특징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요약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유사가 고정된 벽이 아니라 굴착이 진행됨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원리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도굴꾼이 모래층에 터널을 파기 시작하면 주변 지지력이 급격히 약해진다. 위쪽 모래와 자갈이 미끄러져 내려와 이미 좁은 통로를 더욱 막는다.
안에서는 몸을 돌릴 수도 없고, 빛도 극히 제한적이다. 동료가 다치면 다른 사람들이 구조하기가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모래층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돌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붕괴가 발생하면 질식뿐만 아니라 갑작스러운 무게 낙하로 인한 위험도 있었다.
무덤이 깊을 경우, 지상 사람들이 소란을 듣더라도 제때 구조에 나서기 어려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무덤에서 여러 구 유골이 발견된 이유다.[도굴하다 묻힌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사태로 즉사하는 사람도 있고, 위태로운 상황에 갇히는 사람도 있다.
무덤 밖에 있던 사람들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해 후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흙이 옛 입구를 덮었고, 시신들은 도굴꾼들이 만든 터널과 함께 땅속으로 가라앉았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단순히 "무덤 주인이 함정을 파서 죽였다"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모래로 채운 무덤에는 신비로운 힘이 없으며, 모래수렁이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쫓아다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무덤은 공학적 구조와 물리적 변화로 형성되었으며 위험은 판단 착오, 지반 붕괴, 그리고 구조 자원 부족에서 비롯된다.
바로 이 점이 유령 이야기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전국시대 귀족 무덤에서는 돌, 숯, 모래를 쌓는 방식이 모두 같지는 않다.
쌓은 돌은 보강 역할을 했고, 쌓은 숯은 습도를 조절했으며, 쌓은 모래는 단열과 도굴 방지 역할을 했다.
이는 당시 무덤 건축 기술이 이미 재료 선택, 응력 제어, 환경 보호와 같은 개념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대 장인들은 현대 공학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어떤 토양이 무너질지, 어떤 재료가 습기를 차단할지, 어떤 매립 방법이 발굴 난이도를 높일지 알고 있었다.
따라서 무덤은 단순히 의례용 구조물이 아니라 당시 토목 공학 기술의 집약적인 결과물이기도 하다.
반복적인 도굴에도 곽장 초묘에는 여전히 상당수 유물이 보존되었다.
유물에는 청동기, 옥기, 기타 장례 용품이 포함되며, 일부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았다.

이러한 유물 가치는 재료 자체 가치뿐 아니라 구성 성분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있다.
정鼎、궤簋、호壶와 같은 청동 제례 용기는 초나라 귀족들이 사용한 물건들 위계질서를 보여주며, 종钟과 경磬 같은 악기는 제사와 연회와 관련이 있다.
옥 유물 형태와 가공 흔적은 당시의 미적 감각과 장인 정신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만약 이러한 유물들이 약탈 과정에서 파괴되었다면, 그 고고학적 가치는 크게 떨어졌을 것이다.
청동 유물은 개별적으로는 유물로서의 가치를 지니지만, 파괴된 후에는 특정 지층에서의 원래 위치, 주변 유물과의 관계, 특정 의례적 조합을 이루었는지 여부와 같은 정보를 복원하기 어렵다.
바로 이러한 "위치적 관계"가 고고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정보다.

유물의 중요성은 명문뿐 아니라 매장실과의 거리, 다른 유물과의 배치에서도 드러난다.
무덤이 도굴된 후에도 유물은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역사적 맥락은 단절된다.
곽장초묘의 지하 구조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도굴꾼들이 파놓은 터널 중 일부가 매장실 중심부까지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도굴 행위 자체도 무덤 내부에 또 다른 차원의 정보를 남겼다.
도굴꾼들이 파놓은 터널 방향이 제각각인 것은 후세 사람들이 매장실을 찾아가는 경로를 보여주고, 무너진 깊이가 각기 다른 것은 도굴꾼들이 얼마나 깊이 들어갔는지를 알려준다.
또한, 남은 도구와 부서진 유물들은 도굴 방법을 추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고고학적 작업은 단순히 무덤 주인이 남긴 것을 치우는 것만이 아니다. 후대 침입자들이 남긴 흔적 또한 역사 일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곽점 초묘는 두 시대 흔적을 담고 있다.
하나는 초나라 전국시대의 귀족 제도, 의례, 그리고 공예 기술을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후대 도굴꾼들이 남긴 사회적 격변, 부의 개념, 그리고 지하 토목 기술의 경험을 보여준다.
이 두 시대 흔적이 겹치면서 곽장초묘는 단순한 매장지가 아닌 복잡한 역사 유적으로 거듭난다.
민간 설화에서는 도굴꾼들을 탐욕에만 사로잡힌 집단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한 시각이다.
척박한 땅과 어려운 삶 속에서 지하 보물은 많은 이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어떤 이들은 소문에 의존하고, 어떤 이들은 경험에 의존하며, 또 어떤 이들은 단순히 지인을 따라 도굴에 나섰다.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도굴은 본질적으로 엄청난 위험을 수반한다.

무덤이 깊을수록 공기 질이 나빠지고, 흙이 약할수록 무너지기 쉬우며, 도구가 조잡할수록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많은 이가 관에 도착하면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돌아오는 길에 짊어져야 할 무게를 고려하지 않는다.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힘에 달렸지만, 살아남아 나오는 것은 판단력에 달렸다.
곽장 초묘에는 무덤 주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명문이 없어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전국시대에는 무덤 계층 구조가 복잡했고, 유물에 새긴 글자는 가문, 유물 출처, 또는 의례적 용도 정도만 나타낼 뿐, 반드시 무덤 주인 이름을 명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고학자들은 무덤의 규모, 유물 구성, 시대 특징, 그리고 지역 맥락을 통해 무덤 주인의 사회적 지위를 추론할 수 있지만, 전설에 맞춰 역사적 인물을 억지로 특정할 수는 없다.
무덤 주인이 중요한 인물일수록 후세 사람들이 추측하기는 쉽지만, 학문적 판단은 반드시 증거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중국 최초의 저주받은 무덤"이라는 명칭은 주로 민간 설화와 언론 보도에서 유래했다.
이 명칭은 유사, 유해, 도굴 등 여러 가지 인상적인 요소들을 잘 나타내어 기억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전문적인 관점에서 무덤 가치는 묻힌 사람 수에 달려 있지 않으며, 미스터리가 고고학적 증거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
곽장 초묘가 진정으로 희귀한 점은 귀족의 매장 풍습, 전국시대 토목 기술, 그리고 후대 도굴 행위가 한 유적에서 모두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래 속에 묻힌 유골은 위험한 결과물이며, 청동과 옥기류는 체계적인 문화 흔적이고, 도굴꾼들이 파놓은 터널은 후세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다.
이러한 단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무덤 주인은 자신의 신분, 부, 그리고 질서를 땅속에 봉인하려 했고, 장인들은 흙을 다지고 모래를 쌓아 무덤을 보호했다.

후세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덤 입구를 찾아 헤매다 결국 자신들이 판 터널에 갇히게 되었고, 고고학자들은 층층이 흙을 제거하며 원래는 혼란스러웠던 무덤을 알아볼 수 있는 역사적 구조물로 복원했다.
무덤에는 주인 이름이 남지 않았지만 그들의 사회적 지위, 시대, 생활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무덤에 들어간 사람들은 완전한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고, 뼈와 도구, 모래에 의해 끊어진 통로만을 남겼다.
따라서 고고학적 기록은 그들의 마지막 흔적, 즉 무너진 무덤, 해골, 파편, 그리고 흐트러진 모래층만을 보존한다.
https://tv.cctv.cn/2022/07/30/VIDEoRwVBxiGmmSubLGV9kKm220730.shtml
[探索·发现]郭庄楚墓墓主人设疑冢防盗
郭庄楚墓墓主人设疑冢防盗。
tv.cctv.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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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기존에 블로그가 다룬 관련 아티클에 트래픽이 일어나 하나 골라 소개한다.
상당히 잘 쓴 고고학 아티클이다. 도판 설명이 없고 도판 질이 좋지 않아 아쉽다.
일부 도판은 딴 데서 빌려왔다.
원문은 아래 참조
https://baijiahao.baidu.com/s?id=1877000390272983631&wfr=spider&for=pc
被称“中国第一凶墓”的神秘古墓,80名盗墓贼惨死其中,墓主身份至今成谜!
一些遗骸确实出现在流沙层和盗洞附近,旁边还能见到简陋工具残片、衣物附件等遗存。它们与正常墓葬中的陪葬者明显不同,因此被认为与历次盗掘有关。可“八十名盗墓贼”这个数字,在不
baijiahao.baidu.com
곽장초묘郭庄楚墓, 전국시대 초나라가 채나라를 분봉한 무덤?
https://historylibrary.net/entry/%E3%85%87-612
곽장초묘郭庄楚墓, 전국시대 초나라가 채나라를 분봉한 무덤?
중국 하남성 상채현上蔡县 대호리향大路李乡 곽점촌郭庄村에 소재하는 전국 시대 초나라 무덤이다. 총 두 개 무덤으로 구성된다. 개중 남쪽에 위치한 주묘主墓는 대형 적석적사묘积石积沙墓다
historylibr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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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관련 아티클 하나를 더 본다.

2005년 춘절을 앞두고 허난성 상차이현 궈좡 마을에서는 폭죽 소리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큰 폭발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동쪽 끝으로 달려가 보니 농경지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고, 가장자리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폭죽이 터진 것이 아니라 도굴꾼들이 폭발물로 파낸 구덩이였다.
경찰에서 연락을 받고 출동한 고고학 발굴팀은 놀랍게도 그 아래에 묻혀 있던 2,000년 된 "저주받은 무덤"을 발견했다.
무덤 주변에는 전국시대 흙구덩이부터 현대의 폭발 구멍까지 120개가 넘는 도굴 구덩이가 벌집처럼 빽빽하게 나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무덤 안에서 80구가 넘는 도굴꾼의 유해가 발견된 것이었다.[이것이 과장된 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시신들은 모래에 묻혀 미라가 되었고, 어떤 시신들은 돌에 맞아 뼈가 부서졌다.

한, 당, 명, 청 왕조에 걸쳐 묻힌 이 무덤에서 가장 최근에 발견된 것은 21세기 청바지 조각이었다.
"이건 고대 무덤이 아니라, 도굴꾼들의 집단 매장지나 다름없어!" 당시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나중에 그들은 이 전국시대 초나라 무덤 도굴 방지 대책이 소설에 나오는 함정이나 숨겨진 무기보다 훨씬 더 정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께 2미터 흙더미를 파내자 일반적인 황토가 아닌 7미터 두께 고운 모래층이 드러났다.

이 모래는 길이 25미터, 너비 17미터 무덤 내부를 완전히 채우고 있었다.
이 모래는 특별했다. 다른 곳에서 운반해 온 고운 황하 모래를 세 번이나 체질하고, 강한 불에 말려 물보다 더 유동성이 높은 상태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모래층에 수십 킬로그램에서 150킬로그램에 이르는 수백 개 돌이 섞여 있었고, 그 모서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는 점이다.
도굴꾼들이 땅굴을 파고 들어가면 모래가 산사태처럼 쏟아져 들어와 순식간에 그들을 묻어버릴 것이다.
모래가 흐르면서 돌들을 쓸어내려가, 심하면 다리가 부러지거나 완전히 납작해지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모래와 돌무덤'의 무자비한 본성이다.

발굴 과정에서 고고학팀은 전국시대 도굴꾼이 파놓은 구멍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서는 앞으로 기어가는 자세의 해골이 발견되었다.
모래가 일곱 개 구멍으로 모두 쏟아져 들어와 이빨 사이까지 메워져 있었다. 또한 명청시대 도굴꾼 유골도 발견되었는데, 그는 100킬로그램짜리 돌에 가슴을 맞아 뼈가 산산조각 나 있었다.
발굴 책임자인 마쥔차이马俊才 팀장은 "고대인들의 지혜는 정말 놀랍다!"고 감탄했다. "이건 진시황릉의 수은 기반 도굴 방지 시스템보다 400년도 더 앞선, 훨씬 단순하고 잔혹한 방식이야. 네가 구덩이를 파면 내가 모래로 널 산 채로 묻어버릴 테니까. 첨단 기술은 필요 없어."
하지만 모래만으로는 부족했다. 무덤 주인은 치밀한 계략을 꾸며놓았다.
발굴팀이 더 깊이 파 들어가자, 먼저 깨진 도기 조각 몇 개만 들어 있는 빈 관 두 개가 눈에 띄었다. 이것들은 도굴꾼들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가짜 관"이었다.
"봐, 보물은 여기 다 있어, 더 이상 파지 마!" 가짜 관들을 지나쳐야 비로소 진짜 무덤이 있는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관이 열리자 모두는 경악했다. 관은 재로 변해 있었고, 안에는 온전한 해골은 없고 주사朱沙로 뒤덮인 두개골 반쪽만 남아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한나라 도굴꾼들 소행이라고 분석했다.

도굴꾼들은 관뚜껑을 부수고 시신을 끌어내 부장품을 꺼냈는데, 몸통에서는 옥 펜던트와 금박 조각을 가져갔다.
두개골에는 값진 것이 없었기에 '옥으로 만든 입 장식[함옥含玉]'을 가져다가 무덤 안에 던져 넣었고, 무너져 내린 관뚜껑에 의해 두 동강이 난 것이다.
"분명히 무덤 주인은 초나라의 고위 귀족이었을 것이다!" 발굴팀은 부장품에서 단서를 발견했다.
청동정青铜鼎 다섯 개(주나라 예법에 따르면 봉건 영주는 일곱 개 정을 사용했는데, 여기서는 두 개가 없어진 것으로 보아 도난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용귀와 호랑이 모양 받침이 있는 큰 사각 항아리龙耳虎座大方壶(전국에서 단 두 쌍만 남아 있습니다), 옥 손잡이가 달린 청동 검玉柄青铜剑, 그리고 망자와 함께 묻힌 여성 13명 유해(아마도 아내, 첩, 또는 하녀였을 것이다). '甲'자 모양 묘실과 동쪽을 향한 배치(동쪽에서 오는 상서로운 자색 기운을 상징)를 근거로 전문가들은 그가 초나라 왕의 후손, 아마도 초나라 평왕 가문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그의 정확한 신원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 무덤의 도굴터는 도굴 기법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전국시대 도굴꾼들은 청동 도구를 사용하여 비스듬한 터널을 파고 옆쪽에서 모래층을 우회하려 했지만, 무너지는 돌에 깔려 죽었다.
한나라 도굴꾼들은 낙양삽을 사용해 무덤 위치를 파악하는 등 더 교묘한 방법을 사용했지만, 여전히 모래 함정에 빠졌다.
명나라와 청나라 도굴꾼들은 나침반을 가지고 무덤 중심을 찾아 파헤치려 했지만, 가짜 관에 걸려 허탕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의 도굴꾼들은 더욱 무자비하게 폭발물을 사용하여 모래층을 폭파하려 하지만, 모래의 유동성 때문에 폭파된 구멍은 순식간에 메워지고, 결국 무너져 내리는 바위에 묻히고 만다.
마쥔차이는 "제가 가장 감탄하는 것은 무덤 주인의 '선견지명'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도굴꾼들이 대대로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복잡한 함정을 설치하지 않고 모래와 돌만으로 단순하고 잔혹하지만 효과적인 방어책을 마련했습니다. 마치 현대판 '수동 방어 시스템'과 같습니다. 도굴꾼이 오지 않으면 안전하지만, 일단 오면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죠."
발굴 결과, 무덤에서는 희귀한 '네 귀 달린 둥근 거울'(고대 냉장고), 명문이 새겨진 종, 그리고 밀랍 주조법으로 제작된 청동기 등 200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 청동기들은 같은 시기 진나라 무덤의 유물보다 훨씬 뛰어난 장인 정신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도굴꾼들 유해다.
한 당나라 도굴꾼은 허리에 술이 반쯤 담긴 청동 항아리를 차고 있었는데, 아마도 무덤에 들어가기 전 용기를 북돋기 위해 마셨던 술이었을 것이다.
명청나라 도굴꾼 한 명은 나침반과 단검을 소지한 채 주묘에서 불과 3미터 떨어진 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고고학 팀의 한 관계자는 "그들은 무덤의 장치를 해독할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무덤 주인의 도굴 방지 시스템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고대인들은 '무덤 속의 평화'를 믿었지만, 도굴꾼들은 돈 때문에 죽은 자조차 용서하지 않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한 벌을 받은 것입니다."
현재 곽장초묘는 보호문물로 지정되었다. 도굴 흔적은 메워졌고, 그 모래와 돌들은 전국시대 토목 기술 연구를 위한 표본으로 활용한다.
무덤 주인의 신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앞으로 더 많은 초나라 죽간이 발견된다면 답이 밝혀질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불길한 무덤'은 죽은 자, 특히 부유한 자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교훈을 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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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절 폭죽 소리 이용해 폭약을 터뜨렸으나 삑사리가 나는 바람에 꼬리가 밟혔다.
교훈? 도굴도 리듬감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