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 이모저모

2,000년 전 동한 시대 공짜 노동력 죄수들의 묘지명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3. 29. 11:03
반응형
낙양박물관 소장 '흉평' 형도묘전["朐平”刑徒墓砖]'

 
이 무덤 벽돌은 2천여 년 전 동한 시대 형벌 제도 진정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다

(光明网 2026-03-27 15:55)

낙양박물관洛阳博物 전시실에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전시품이 하나 있는데, 바로 동한 시대 죄수 무덤 벽돌[동한 형도 묘전东汉刑徒墓砖]이다.

청동기의 화려함이나 옥의 따뜻함은 없지만, 단순한 형태만으로도 2천여 년 전 동한 시대 형벌 제도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 '흉평' 형도묘전["朐平”刑徒墓砖]'은 낙양 박물관이 소장한다.

1964년, 고고학자들은 한위 낙양 고성 유지汉魏洛阳故城遗址(현재 하남성 낙양시 낙룡구洛龙区 전장진佃庄镇 서대교촌西大郊村) 남서쪽 구석에서 동한 시대 죄수 묘지를 발견했다.

약 5만 제곱미터 면적에서 500개가 넘는 무덤이 발굴되었고, 800점 이상의 죄수 묘벽돌이 출토되었다.

소위 이 죄수 묘벽돌[형도묘전刑徒墓砖]은 고대에 사망한 죄수의 신원 정보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한 명문이 있는 벽돌이다.

일반 청색 벽돌에 글자를 각사[青砖刻写铭文]한 이 묘벽돌에는 장식 없이 글자만 새겼다.

명문은 간결하고 표준화한 상태이며 집행 기관, 형벌 종류, 출신지, 이름, 사망 시기 등 죄수 신원 정보를 기록한다.

이 묘벽돌은 고대 중국의 법률 및 형벌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다.

낙양 박물관에 소장된 '흉평' 묘벽돌은 이러한 유물군의 대표적인 예다.

이 벽돌에는 "右部无任乐安博昌髡钳朐平永初元年五月廿五日物故死在此下"이라는 완전한 명문이 새겨 있다.

이 단 27자 글자는 단순한 비문이 아니라, 풍부한 역사적, 법률적 정보를 담은 축소판 법률 기록 보관소다.

이 "기록 보관소"를 글자 하나하나 분석해 보겠다.

비문 초반에 언급된 "우부右部"는 장작대장将作大匠[국토관리청장 비스무리한 자리다] 휘하 우교右校를 가리키며, 죄수들 노동 복무를 관리하는 기관이다.

우교는 주로 사당, 궁궐, 능묘 등 국가 사업 건설에 죄수들이 참여하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학계 주류 견해는 "무임无任"이 특별한 기술이 없거나 보증인이 없는 죄수를 가리키는 반면, "오임五任"은 노동 복무에 유용할 만한 특정 기술이 있는 죄수를 가리킨다고 한다.

"낙안박창乐安博昌"은 죄수 출신지다. 낙안은 郡이고, 박창은 박창은 현縣으로, 청주사사부青州刺史部에 속했으며, 대략 현재 산동성 박흥博兴에 있었다.

"곤겸髡钳"은 "곤겸성단용髡钳城旦舂"의 줄임말로, "성단용"은 남성 죄수에게 적용되는 노동형으로 주로 도시 건설과 같은 고된 육체노동을 포함한다)도 언급된다.

"용舂"은 여성 죄수에게 사용되었으며, 주로 쌀을 찧는 등의 일을 시켰다.

이는 후한 시대에 굴욕과 구속을 결합한 형벌이었다.

"곤髡"은 머리 삭발이며, "겸钳"은 목에 거는 쇠고리다.

"우리 몸과 머리카락과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감히 훼손할 수 없다"는 말이 진실이었던 한나라 시대에 머리를 삭발하는 일은 몹시도 굴욕적인 형벌이었다.

"곤겸髡钳"은 5년형으로, 당시 가장 가혹한 형태의 강제 노동형이었다.

"흉평朐平"은 죽은 사람 이름이다.

"永初元年五月廿五日物故死在此下"는 사망 시간을 정확하게 기록한다. "물고物故"는 한나라 법문서에서 사망을 나타내는 표준 용어였으며, "此下"라는 글자는 매장 장소를 명확히 나타내어 죄수 매장 관리가 표준화헤 있었음을 보여준다.

흉평 무덤 벽돌 말고도 고고학 발굴에서 발견된 다른 죄수 무덤 벽돌에는 대부분 유사한 형식의 명문이 있으며, 길이는 단순한 것부터 복잡한 것까지 다양하다.

어떤 명문은 이름만 기록한 반면, 흉평 무덤 벽돌처럼 행정 조직, 신분 표시, 출신지, 죄목, 이름, 사망 날짜와 같은 자세한 정보가 기록된 것도 있다.

심지어 "이곳 아래"라고 명시하여 매장 장소를 명확히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공식 기록부 사본과 같은 형식화한 이 비문들은 후한 왕조가 죄수 관리를 위한 엄격한 등록 제도를 확립했음을 보여준다.

이 무덤 벽돌들은 또한 후한 시대 형벌 제도를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데 가장 직접적인 물리적 자료를 제공한다.

비문에 따르면, 당시 가장 흔한 형벌은 "삭발과 목 차꼬 채우기[髡钳]""였다.

다른 형벌로는 "완성단完城旦", "귀신鬼薪", "사구司寇" 등이 있었으며, 각각 다른 형기와 노동을 수반했다.

"삭발과 목 차꼬 채우기[髡钳]"는 5년형으로, 죄수는 머리를 삭발하고 목에 차꼬를 매야 했으며, 종종 수도의 주요 건설 사업에 동원되었다.

"완성단完城旦"은 4년형으로, 도시 방어 시설 건설에 집중되었다.

"귀신鬼薪"은 3년형으로, 조상 제사를 위한 땔감을 모으는 일을 담당했다.

그리고 "사구司寇"는 2년형으로, 국경 방어와 토목 공사 지원에 대한 책임을 묻는 형벌이었다.

이처럼 명확하게 구분된 형벌 분류 체계는 한 문제文帝 재위 13년(기원전 167년)에 시행된 형벌 개혁의 연속이자 발전된 형태다.

문제 재위 13년(기원전 167년)에 그는 신체 절단형을 강제 노동 및 기타 형벌로 대체하는 형벌 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다양한 유형의 죄수에 대한 형벌 기간과 노동 규정을 명확히 했으며, 고대 형법이 신체적 처벌에서 제도화한 규제로 전환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냈다.

죄수 무덤에서 발견된 이 비석들은 한나라 시대 성숙한 형벌 제도를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물증이다.

만약 서로 다른 형벌의 구분이 동한 시대 형벌 제도의 큰 틀을 형성했다면, 비석에 새긴 "무임无任"과 "오임五任”의 병치는 동한 시대 죄수 관리의 세련된 접근 방식과 차별화한 원칙을 드러낸다.

'오임'을 받은 죄수들은 기술이나 보증인이 있으면 무거운 족쇄를 채우지 않고 기술 노동에 투입되었고, '무임'을 받은 죄수들은 기술이나 보증인이 없으면 탈출을 막기 위해 쇠고리나 다른 족쇄를 채워야 했으며 고된 육체노동을 강요당했다.

이러한 구분은 다양한 유형의 작업에 대한 필요성을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형벌 집행의 유연성을 보여준다. 

더욱이, 묘비 명문은 이 죄수들이 낙양뿐만 아니라 남양군南阳郡, 여남군汝南郡, 천류군陈留郡 등 여러 지역에서 왔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며, 이는 후한 시대 형도 동원이 전국적인 규모였음을 확인한다.

중앙 사법 기관과 지방 군·현은 협력하여 죄수들을 낙양과 같은 핵심 지역에 고르게 배치하여 주요 국가 건설 사업에 참여시켰다.

이러한 지역 간 죄수 이동은 포괄적인 호적 및 사법 등록 제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죄수의 신분, 형벌의 종류, 그리고 거향去向은 모두 국가 차원에서 통일적으로 관리되었으며, 이는 후한 시대에 중앙 정부가 사법 업무를 총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처럼 전국적이고, 위계적이며, 표준화한 죄수 관리 체계는 고립된 것이 아니었다.

이 체계는 한나라의 『구장률九章律구법』을 핵심 법률 체계로 삼고, 『위율尉律』과 『옥관령狱官令』과 같은 전문 규정을 보완해 완벽한 법적 보장 체계를 구축했다.

남조 시대 범엽范晔이 편찬한 『후한서: 예의지后汉书·礼仪志』와 관련 죽간 및 목간에 따르면, 한나라는 죄수들의 식량, 의복, 그리고 의료에 관한 명확한 규정을 두고 있었다.

죄수들은 매달 기장粟米 2石과 1년에 한 벌 겨울옷冬衣을 지급받았다.

'죄수 의사[도의徒医]'가 임명되어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부상이나 질병을 당한 죄수는 의사의 진단서를 제출하면 노동 시간을 단축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규정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일부 무덤에는 철제 관못이 여전히 남아 있어 정부가 규정에 따라 죄수들에게 관을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무덤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으며, 매장은 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죄수 사후 중앙집권적인 매장 방식을 반영한다.

무덤 벽돌은 대부분 재사용된 조각들이며, 간결하지만 완전한 절차적 명문이 새겨 있어 죄수 관리에 표준화하고 절차적인 운영 규범이 확립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동한 시대 죄수 무덤 벽돌은 단순한 형태 속에 귀중한 법률 유산을 보존하고 있다.

명문이 말하는 이름, 출신지, 죄목, 날짜는 동한 시대 사법 제도를 연구하는 중요한 표본이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나라 시대 형벌 제도의 실제 작동 방식을 엿볼 수 있고, 중국 전통 법률 문화의 심오한 유산을 이해할 수 있다.


转自:检察日报·绿海周刊
作者:黄超 刘亚雯
来源:检察日报正义网
 
 
****
 
중국 법률에 대한 전형하는 국뽕식 해설이라, 저런 법률 정비는 이유가 간단하다.

공짜로 노동력을 징발하기 위한 꼼수다. 

왜?

월급을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중죄인이면 다 죽이다가 이러다가 공짜로 써먹을 인력이 없어질 판이었다.

멀쩡한 농민들 동원하자니, 소는 누가 키운단 말인가?

저들 죄수는 오분대기조였다.

문제는 그 이후.

아무리 죄수라도 불만이 없겠는가?

탈출이 빈발하고 그것은 반란의 씨앗이 되었다. 

당장 공짜라 해서 써먹기 좋았지만, 두고두고 골치였다. 

월급은 없었지만 저 운용에도 적지 않은 예산이 투입됐다.

나아가 지역별로 대체로 인구 비율에 따라 형도 숫자가 할당될 수밖에 없다. 보나마나다.

왜 저들이 때마다 인구센서스를 했겠는가? 개폼으로?

또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억울한 죄수가 양산되었겠는가?

저들 중 일부는 군대에도 징발해서 주로 총알받이로 썼고, 또 일부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지만 누군가는 가야 할 곳, 예컨대 서역 같은 데다가 쳐박아 여긴 우리 땅이요 했으니, 이른바 사민 동원이 대상이 되기도 했으니,

이 역시 웃긴 것이 우리 사람 심으면 그 땅이 곧 내 땅이라 했지만, 현지에 정착한 그들은 언제나 중앙을 향해 반기를 치들었다는 사실이다.

작금 중화민족주의가 우리 사람들을 많이 현지에 심으면 된다 하겠지만 천만에. 역사가 그리 호락호락할 것 같은가?

외침이야 대비라도 하지, 내부에서 싹트는 반란은 징조조차 없이 느닷없이 등장해서 느닷없이 권력을 엎어버린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