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한 가족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가 드러나다

(2025년 5월 3일) 서기 79년 8월 24일 아침, 베수비오 화산이 격렬하게 폭발했을 때 폼페이 주민들은 갑작스러운 재앙에 직면했다.
최근 발굴된 소름 끼치는 유물들은 그 재앙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 가족의 필사적인 노력을 보여준다.
폼페이 고고학 공원Pompeii Archaeological Park 소속 고고학자들은 비아 델 베수비오Via del Vesuvio 거리에 위치한 한 가옥 유적을 발굴했는데, 이곳은 현재 '엘르와 프리소의 집House of Elle and Frisso'으로 일컫는다.
이 소박한 집 안에서 고고학자들은 다가오는 재앙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몸부림친주민들 모습을 담은 가슴 아픈 증거들을 발견했다.
침대가 침실 문에 바짝 붙어 있었는데, 아마도 분출하는 화산의 분노로부터 방 안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방 안에서는 최소 네 개체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가장 비극적인 것은 어린아이 유골이었다.
“폼페이를 발굴하고 방문하는 것은 예술의 아름다움과 마주하는 동시에 우리 삶의 위태로움을 직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폼페이 고고학 공원 책임자인 가브리엘 주흐트리겔Gabriel Zuchtriegel은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작고 아름답게 장식된 이 집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애쓴 거주자들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침대가 놓인 작은 방 입구를 막아놓았고, 우리는 그 침대 석고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이 공포의 집으로 변모한 순간
2018년에 발견된 엘르와 프리소의 집은 방 안에 걸려 있던 신화 속 그림에서 이름을 따왔다.
발굴 결과, 중앙 아트리움atrium으로 이어지는 넓은 현관, 침실, 그리고 정식 식사 공간이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화산 폭발 초기 단계에 분출된 미세한 화산암 조각인 라필리lapilli가 아트리움 지붕 구멍을 통해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
원래 빗물을 모으기 위해 설계된 이 건축물이 의도치 않게 조기 경보 시스템 역할을 해 주민들에게 임박한 위험을 알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이른 경보 덕분에 가족은 침대를 방패 삼아 침실에 몸을 숨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주흐트리겔은 설명했다. "결국 화산쇄설류pyroclastic flow가 닥쳐왔고, 매우 뜨거운 화산재가 이곳을 비롯한 모든 방을 가득 채웠습니다.
지진 충격으로 이미 많은 건물이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서기 79년 8월 24일, 이 도시를 덮친 불지옥과도 같은 재앙의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발굴 과정에서 고고학자들은 인골뿐만 아니라 아이가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불라bulla'라는 청동 부적amulet도 발견했다.
이 부적은 고대 로마에서 어린 시절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통과의례였으며, 아이가 성인이 된 후에야 벗었을 것이다.
발굴팀은 집 식료품 저장실에서 암포라(고대 그리스 항아리) 여러 개와 청동 주방용품 세트를 발견했는데 이에는 국자, 손잡이가 하나 달린 주전자, 바구니 모양 병, 조개껍데기 모양 컵이 포함된다.

폼페이의 멸망: 갑작스럽고, 격렬하고, 완전한 파괴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여러 마을을 매몰시켜 엄청난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 폼페이, 오플론티스Oplontis, 스타비아에Stabiae는 화산재와 파편에 묻혔고,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은 진흙탕에 휩쓸렸다.
이탈리아 서부 해안에 위치한 베수비오 화산은 유럽 본토에서 유일하게 활화산이며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화산 중 하나로 여겨진다.
폭발 당시 섭씨 500도에 달하는 치명적인 화산쇄설류가 폼페이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모든 주민을 즉사시켰다. [이는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적지 않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다수는 실은 대피했다.]
화산쇄설류Pyroclastic flows는 뜨거운 가스와 화산 파편으로 이루어진 밀도가 높고 빠르게 움직이는 흐름으로, 용암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다. 시속 700km에 달하는 속도로 흐르며 온도는 섭씨 1,000도에 육박할 수 있다.
로마 행정관이자 시인이던 소小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는 멀리서 화산 폭발을 목격하고 1500년대에 재발견된 편지에서 그 공포를 묘사했다.
그는 우산 소나무 모양 거대한 구름이 화산에서 솟아올라 주변 마을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낮을 밤처럼 어둡게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은 횃불을 밝히고 어둠 속으로 도망쳤지만, 그들의 외침은 쏟아지는 화산재와 부석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화산 폭발은 약 24시간 동안 지속되었지만, 가장 치명적인 단계는 자정 무렵 화산 기둥이 무너지면서 초고온 가스와 암석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헤르쿨라네움에서는 해변 아케이드에 피신해 있다 죽은 수백 명 손에는 귀중품을 쥐어져 있었다.
폼페이에서도 많은 사람이 건물 안에 남아 있다가 탈출을 시도했지만, 화산재에 묻혀 같은 운명을 맞았다.
플리니우스는 정확한 사상자 수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을 "예외적인" 사건이라고 묘사했다.
오늘날 추산에 따르면 사망자 수는 1만 명을 넘어 로마 역사상 유례없는 대재앙을 초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산 폭발은 이 번성한 도시들 종말을 알렸지만, 동시에 약 1,700년 동안 그 모습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보존해 주어 현대에 재발견될 수 있게 했다.
한때 번화한 무역 중심지 폼페이와 아름다운 해안 휴양지 헤르쿨라네움 발굴은 로마 제국 시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제공했다.
고고학자들은 화산 폭발로 파괴된 도시 중 가장 큰 규모였던 폼페이에서 계속해서 획기적인 발견을 하고 있다.
최근 발굴된 유적 중 하나는 잘 보존된 가옥들이 늘어선 좁은 거리로, 발코니에는 여전히 암포라(포도주와 기름을 저장하는 데 사용되었던 테라코타 용기)가 놓여 있었다.
발코니는 대부분 온전한 상태로 원래 색깔 그대로 칠해져 있어, 재앙이 닥치기 전 폼페이 사람들 삶이 어떠했을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화산재가 최대 6미터 두께로 도시를 덮으면서 대부분 위층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유적에서는 2층 건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최대 3만 명이 이 참극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까지도 새로운 유골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