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주년 맞은 성 베드로 대성당: 세상에서 가장 웅장한 교회의 비밀

성 베드로 대성당St. Peter’s Basilica이 올해 뜻깊은 기념일을 맞이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 성 베드로 대성당이 400주년을 맞이해 전 세계 가톨릭 순례자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로 향할 것이다.
율리우스Julius 2세 교황이 새 성당 주춧돌을 놓은 지 120년 후인 1626년 11월 18일, 우르바노Urban 8세 교황은 이곳을 기독교 세계의 새로운 중심지로 공식 봉헌했다.
영원한 도시 로마eternal city of Rome를 내려다보며 웅장한 돔을 자랑하는 이 성당은 이제 도시의 상징이 되었으며, 바티칸의 보석jewel of the Vatican이라 불리며 수많은 건축가, 교황, 반대자, 도시 약탈, 교회 분열 등 온갖 역경을 견뎌냈고, 건설 비용은 수억 달러에 달했다.
예수의 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 무덤 위에 세운 이 성당의 엄청난 건축비는 종교 개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놀라운 역사적 건축물의 400주년을 기념하는 흥미로운 비밀들을 함께 살펴보겠다.
가톨릭 신자들이 아름다움을 뽐내기 전, 전차 경주가 펼쳐지고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잃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금 자리 잡은 저지대 습지대는 교회가 되기 수 세기 전, 네로 황제의 거대한 전차 경주장인 키르쿠스(Circus of Nero)가 있던 곳이었다.
북쪽에는 황제들이 정원을 조성한 바티칸 언덕Vatican Hill이 있었다.
바티칸 언덕에 위치한 네로 키르쿠스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악명 높은 장소가 되었다.

네로의 원형 경기장은 길이 160미터, 폭 90미터였다. 경기장 중앙에는 화려한 조각상과 기둥, 그리고 웅장한 오벨리스크가 있는 높은 단상인 스피나spina가 있었다.
높이 25미터, 무게 140톤에 달하는 이 붉은 화강암 거석은 서기 37년 칼리굴라 황제 시대에 이집트에서 로마로 운반되었다.
바로 이 스피나에서 죄수들이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그중 많은 이가 기독교인이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의 연대기(서기 116~117년경)에서 잔혹한 네로의 모습을 소름 끼치도록 자세히 묘사했다.
"네로는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을 거짓으로 고발하고, 그들의 가혹한 행위로 악명이 높은 자들을 가장 잔인한 형벌로 처형했다."
전설에 따르면, 서기 64년에서 67년 사이 어느 날, 사도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원형 경기장(키르쿠스)의 스피나(돌탑)에 거꾸로 매달린 채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한다.
이 오벨리스크는 베드로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힌 강렬하고 잊히지 않는 이미지는 유럽 미술에서 수없이 재현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웅장한 돔을 둘러싼 2미터 높이 라틴어 글자에는 놀라운 교회의 영적 정당성이 새겨 있다.
멀리 아래에서도 읽을 수 있는 이 글자들은 영어로 다음과 같다.
“너는 베드로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고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 (마태복음 16:18)

그의 유골을 찾아 내 교회를 세우겠다
지상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은 거대하고 웅장하며 위엄 넘치는 건축물이다.
하지만 지하에는 고고학, 역사, 비밀, 무덤, 보물로 가득한 새로운 지하 세계가 펼쳐져 있으며, 두 개 지하층과 성 베드로 무덤이 있다.
가톨릭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 지하에는 지상의 금, 돌, 예술 작품보다 훨씬 더 귀중한 보물, 바로 성 베드로 유골이 묻혀 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원형 경기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후, 그의 시신은 경기장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나 있는 코르넬리아 거리Via Cornelia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곳은 인근 바티칸 언덕 남쪽 경사면에 세워졌으며, 이후 바티칸 공동묘지Vatican Necropolis라고 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가난한 자의 무덤Poor Man’s Grave"이라고 불리는 소박한 무덤에 묻혔는데, 이 무덤은 천막 모양 커다란 기와 여섯 장으로 덮인 작은 도랑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네로의 원형 경기장은 버려지고 폐허가 되었다.
비아 코르넬리아를 따라 무덤들이 계속해서 들어섰고, 특히 성 베드로 무덤은 특별한 존경을 받았다.
서기 150년경, 초기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자의 무덤" 위에 트로피trophy 모양 기념비를 세웠다.
몇 년 후, 이 "트로피" 양쪽에 벽이 추가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 벽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낙서가 가득했고, 지금은 "낙서 벽Graffiti Wall"이라고 한다.
서기 318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공동묘지 위에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을 때, 그는 전리품을 대리석과 자수정으로 만든 상자에 넣어 새 성소의 중심 장식물로 삼았다.
조나단 페린Jonathon Perrin의 '희망의 해, 이탈리아Italy in a Year of Hope'
이 글의 재능 있는 작가이자 탐험가인 조나단 페린은 최근 신간 '희망의 해, 이탈리아: 로마와 아말피 해안의 모험Italy in a Year of Hope: Adventures in Rome and the Amalfi Coast'을 출간했다.
이 책은 2025년 희망의 희년Jubilee Year of Hope에 로마, 폼페이, 아말피, 베수비오를 여행한 그의 여정을 담았다.
더 자세한 정보는 http://www.jonathonperrin.com 에서 확인하라.
공동묘지에 대한 현대적 발굴은 1940년 교황 비오Pius 12세 주도하에 시작되었는데, 그는 성 베드로 실제 무덤과 유해를 찾고자 했다.
1950년에는 원래의 '가난한 자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불행히도, 그 안에서 발견된 뼈들은 한 명 성인 남성 것이 아니라 네 명 유골(50대 남성 두 명, 40대 남성 한 명, 70대 노년 여성 한 명)과 동물 뼈가 섞여 있었고, 베드로의 것이 될 수 없었다.
15년 후, 학자들은 잘못 분류된 또 다른 유골들을 발견했다.
이 유골들은 원래 낙서 벽 움푹 들어간 곳에서 발견되었지만 오랫동안 행방불명되었던 것이다.
60~70세 정도 건장한 체격의 남성 유골이었으며, 발을 제외한 신체 주요 부위 뼈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유골들은 황제와 고위 관리들만이 사용할 수 있던 로마식 자주색 염료로 염색되어 있었다.
또한, 유골이 발견된 곳 옆 벽 작은 조각에는 그리스어로 "PETR... EN I"라고 쓰여 있었는데, 이는 "베드로가 안에 있다"라는 뜻이다.
1968년 6월 30일자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지난주 교황 바오로 6세는 수천 순례자가 참석한 일반 알현에서 1953년 성당 아래에서 발견된 유골이 성 베드로 유골로 확인되었다고 발표했다."
유골은 19개 작은 상자에 담겨 원래 있던 낙서 벽감에 다시 보관되었으며, 현재는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발굴 현장 특별 투어를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르네상스 시대 가장 위대한 토목 공학적 업적 중 하나가 성 베드로 대성당과 관련이 있다.
바로 1585년에서 1586년 사이 13개월에 걸쳐 바티칸 오벨리스크Vatican Obelisk를 옮긴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첫 번째 대성당을 지을 당시, 오벨리스크는 원형 경기장 안 원래 위치에서 옮겨지지 않았고, 모든 역경에도 옛 대성당 남쪽 벽 바로 바깥쪽에 그대로 서 있었다.
1586년 당시 로마에는 (놀랍게도) 유일하게 남은 오벨리스크가 바로 이 오벨리스크였다.
당시 로마 재건에 열중하던 교황 식스투스Sixtus 5세는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에게 오벨리스크를 성당 앞쪽으로 옮겨 순례자들을 맞이하도록 의뢰했다.
오벨리스크는 남쪽으로 다소 치우친 위치에 있었음에도 항상 성당의 중요한 상징물이었다.
330톤에 달하는 화강암 거석을 거의 274미터(900피트)나 이동시켜 다시 세우는 일은 엄청난 공학적 난제였으며,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벨리스크를 옮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폰타나는 그 도전에 성공했다.
그는 식스투스 5세에게 선보이기 위해 자신이 고안한 새로운 기계, 즉 '카스텔로(castello, '성'이라는 뜻)'라고 이름 붙인 거대한 기계의 작동 모형을 설계하고 제작했다.
이 기계는 절반은 비계, 절반은 크레인으로 이루어진 형태였다.
오벨리스크를 옮기는 데는 900명이 넘는 인부, 140마리 말, 다섯 개 거대한 철제 레버, 그리고 44개 대형 윈치가 동원되었다.
1586년 4월 30일, 폰타나는 거대한 카스텔로 기계를 제작한 후 작업을 시작해 오벨리스크를 오래된 받침대에서 들어 올려 극도의 정적 속에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놓았다.

R.A. 스코티Scotti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팔 소리가 한 번 울리자, 그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채찍이 휘둘러지고, 밧줄이 삐걱거렸다. 윈치winches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목격자는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마치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열릴 것 같았다고 전했다."
잠시 동안 모든 움직임이 멈추고 밧줄이 끊어질 듯했다.
한 선원이 "아쿠아 알레 푸니Acqua alle funi!"(밧줄에 물을 뿌려!)라고 외쳤다.
밧줄에 물이 뿌려지자 오벨리스크가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종일 걸렸지만, 해가 지기 직전, 흠집 하나 없이 마침내 오벨리스크는 땅으로 내려졌다.
이후 폰타나는 축하의 북소리와 나팔 소리에 맞춰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몇 달에 걸쳐 오벨리스크는 흙과 나무로 만든 길을 따라 교회 앞 새 자리로 옮겨졌고, 마침내 1586년 9월 10일에 세워져 26일에 봉헌되었다.
놀랍게도 폰타나는 이 모든 과정을 자신의 저서 《바티칸 오벨리스크의 운송과 교황 시스토 5세의 건축[Della trasportatione dell'obelisco vaticano et delle fabriche di nostro signore Papa Sisto V]》에 기록했는데, 이 책은 1590년에 출판되었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토목 공학적 업적 중 하나였으며,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오벨리스크 건립 사례였다.

(하얀) 코끼리, 방 안의 외면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힌 가장 기이한 것은 베드로 유해가 아니라, 한노Hanno라는 이름의 알비노 코끼리albino elephant일지도 모른다.
한노는 1514년, 당시 사치스러운 교황 레오Leo 10세에게 포르투갈 마누엘Manuel 왕이 대관식 선물로 준 것이다.
마누엘 왕은 인도와의 무역 특혜를 확보하고 교황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당시 포르투갈은 동방의 풍부한 향신료 무역으로 무역 제국을 빠르게 확장하고 있었고, 마누엘 왕은 교황의 도움과 재정 지원을 간절히 원했다.
한노와 같은 이국적인 애완동물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새 교황을 매료시키기에 완벽한 선물이었다.
로마 제국 황금기 이후 이탈리아에서 코끼리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온 나라가 한노를 보기 위해 들떠 있었다.
본명은 안노네Annone였지만 영어식으로 하면 "하노"가 된 이 코끼리는 인도에서 포르투갈을 거쳐 로마까지 70마일(약 113km)을 행진하고 있었다.
스코티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한노는 교황의 것과 똑같은 붉은 구두 두 켤레를 신고 바티칸에 도착해 세 번 무릎을 꿇었다. 레오 교황은 매료되었다."
은빛 탑을 등에 얹은 한노는 공중에서 세 번 코를 울리고는 코로 물을 빨아들여 모인 모든 사람, 심지어 레오 교황에게까지 뿌려 웃음과 박수갈채를 자아냈다.

한노는 로마 상징이자 교황 레오의 새로운 애완동물이 되었다.
바티칸 정원 성 베드로 대성당 옆에는 그를 위한 특별한 건물이 지어졌고, 로마 시민들은 매주 주말마다 그를 방문할 수 있었다.
슬프게도 하노는 겨우 7살밖에 살지 못했다.
1516년, 그는 호흡 곤란을 겪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의사들은 그가 변비에 걸렸다고 진단하고 금이 함유된 좌약을 처방했지만,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로마 전체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한노는 1962년 겨울, 바티칸 안뜰에 새로운 냉난방 시스템을 설치하던 인부들이 커다란 이빨과 거대한 턱뼈 조각들을 발굴해내기 전까지는 거의 잊힌 상태였다.
스미스소니언 역사학자 명예교수 실비오 베디니Silvio Bedini는 1997년 『교황의 코끼리The Pope’s Elephant』를 출간했는데, 이는 성 베드로 대성당 근처에 산 코끼리에 대한 가장 철저한 연구서다.
베디니는 발견된 뼈가 한노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며 이 특별한 동물을 다시금 주목받게 했다.
레오 10세는 한노에게 바치는 묘비명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거대한 언덕 아래 나는 묻혔다 / 마누엘 왕이 동방을 정복하고 / 포로로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위대한 코끼리. 로마 사람들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짐승에 놀라워했고, 내 짐승 같은 가슴속에서 인간적인 감정을 보았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문.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문Holy Door (Porta Santa)은 1949년 비코 콘소르티가 조각한 청동 문으로, 자비와 용서를 묘사한 16개 장면이 새겨 있다.
이 문은 패널에 하느님의 자비를 통한 죄와 구원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어 "위대한 용서의 문Door of the Great Pardon"이라고도 일컫는다.
이 특별한 문은 희년Jubilee에만 열려 순례자들이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며, 이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향하는 길을 상징한다.
저는 2025년 희년에 성문을 통과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희년의 문을 여는 예식은 1300년 보니파시오 8세 교황가 시작했었으며, 그는 이 예식을 100년마다 반복하도록 제정했다.
이후 클레멘트 6세는 50년으로, 우르바노 6세는 33년으로, 그리고 바오로 2세는 25년으로 주기를 줄였다. 2025년 희년 이후, 성문은 약 3,200개 벽돌로 내부가 봉쇄되었다.
이 문은 2033년 예수 탄생 2,0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행사 때 다시 열릴 때까지 봉쇄된 상태로 유지될 것이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분열시키다
가톨릭 교회의 심각한 낭비와 무모한 사치는 1500년 무렵에 극에 달했다.
1510년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Augustinian friar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그는 로마 교회의 부패를 직접 목격했다.
그는 성직자들의 부도덕과 성물 상업화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로마를 족벌주의, 성직매매, 그리고 신앙의 전반적인 상업화로 특징짓는 "불의의 바다sea of iniquity"라고 유명하게 묘사했다.
이러한 불경건함의 특히 악랄한 사례로 교황의 은행가 아고스티노 치기Agostino Chigi가 꼽힌다.
스코티는 이렇게 전한다.
"건장한 하인들이 공중으로 들어 올린 아고스티노 치기의 금 접시들은 원반처럼 정원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횃불에 잠시 빛나던 접시들은 강 위에 떠 있다가 하나씩 검은 강물 속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하인들의 뒷정리 수고를 덜어주자'라고 주인은 농담을 던졌다... 교황 레오 10세는 볼거리를 좋아했다. 난쟁이들의 음탕한 재주를 부리는 것부터 자신만의 동물원까지 모든 것을 갖춘 교황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오락거리였다." (치기는 앞서 강바닥에 그물을 깔아 두었다.)

이 시기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초기였으며, 그 건축과 미래의 종교 개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듯 보인다.
레오 10세는 대성당 건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리스도 정신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전대사全大赦plenary indulgence를 1515년 3월에 발행했다.
이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은 연옥purgatory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힘들게 번 돈을 기꺼이 내놓은 수많은 사람 희생 위에 세운 것이다.
금전적 기부에 대한 대가로, 그 사람의 모든 죄가 사면되었다는 공식 교회 서한이 발급되었다.
심지어 죽어서 연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도 산 사람이 그 사람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사면 즉시 해방될 수 있었다. [이 면죄부는 잘못이며 면벌부라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레오 교황은 특히 선동적인 판매원인 요한 테첼Johann Tetzel을 고용했는데, 그는 독일 도미니코회 수도사Dominican friar이자 독일 면죄부 대사Grand Commissioner for indulgences였다.
테첼은 최초의 상업용 광고 음악을 만들었다.
"헌금함에 동전이 들어갈 때, 연옥의 영혼이 해방됩니다."

면죄부indulgences 판매는 현대의 헌금 운동과 유사했지만, 영적인 약속을 포함해 결국 루터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소외케 했다.
이는 종교 개혁 시대 주요 쟁점이 되었다.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 성 교회Castle Church in Wittenberg 문에 95개조 반박문Ninety-five Theses을 게시하여 영적인 선물을 파는 행위에 항의했다.
그는 특히 새로 지은 성 베드로 대성당과 그것이 상징하는 부패를 혐오했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여전히 면죄부가 존재하지만, 그 판매 관행은 1567년에 폐지되었기 때문에 순전히 영적인 의미만 지닌다.
불행히도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했고, 개신교가 탄생하면서 가톨릭 교회는 가장 위대한 통합의 상징이던 면죄부를 두고 분열되었다.
생일 초대
2026년 성 베드로 대성당 400주년 기념 행사에 방문할 행운을 누린다면, 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더욱 자세히 둘러볼 새로운 디지털 도구들을 이용할 수 있다.
이에는 AI 기반 미사 통역 도구, 인파 관리를 위한 스마트 패스 예약 시스템, 그리고 집에서 누구나 탐험할 수 있는 대성당 전체 3D 디지털 트윈 모델이 포함된다.
지구상에 성 베드로 대성당만큼 역사, 스캔들, 개성, 예술과 건축의 승리, 부패, 그리고 최고 걸작이 풍부하게 담긴 건축물은 없을 것이다.
이곳은 박물관이자 보물창고이며, 묘지이자 고고학 유적이기도 하고, 수많은 순례자에게는 신성한 공간이다.
베드로에서 시작한 2천 년 계승을 상징하는 이곳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일상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인간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연결하는 데 그 어떤 건축물보다 더 가깝다.
이곳은 영혼을 고양하고, 건축가들이 기대한 바로 그 경이로움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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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나단 페린Jonathon Perrin은 작가이자 탐험가다. 그는 최근 신간 『희망의 해, 이탈리아: 로마와 아말피 해안에서의 모험』을 출간했다.
이 책은 희망의 해인 2025년에 그가 로마, 폼페이, 아말피, 베수비오 화산을 여행한 여정을 기록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http://www.jonathonperrin.com에서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