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oking back to Seongsan Sanseong Fortress in 2006

2006년 12월 19일 함안 성산산성 발굴현장이 배경이다.
바라보는 이 기준 시커먼 바닥에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 노중국 당시 계명대 교수와 전덕재 교수다. 전덕재 선생은 아마 저 당시 경주대 재직 중 아니었나 싶다.
내가 선 지점이 성벽 위일 것이요, 뒤쪽이 성벽 안쪽이라, 여느 산성이 그렇듯이 계곡을 따라 성 안쪽에는 연못이 있기 마련이고 그 점에서 성산산성 또한 한 치 예외가 없다.
저 성산산성은 신라 목간을 다량으로 출토한 곳이라 해서 이름이 높거니와, 목간은 한반도에서는 저 성산산성 이전에는 경주 안압지 출토품뿐이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쏟아져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한반도에서는 거의 실종사태였다가 성산산성을 통해 비로소 그 갈증을 풀었으니, 그때가 1995년 무렵이었다.
이때는 나는 문화재 담당 기자가 아니었고, 체육부에 재직 중이었다.
98년 문화부에 합류하고 문화재를 전담하게 되면서 이내 저 성산산성을 조우하고, 그 목간을 알게 되었으니 이 일은 훗날 할 이야기가 많은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저 성산산성 손을 댄 데는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였으니, 95년 무렵 저 산성을 처음 조사할 때 소장이 신창수 선생이었다.
저 2006년 발굴 당시 소장은 내 기억에 아마 김성범 소장 아니었나 싶다.
90년대 조사 이래 중단한 성산산성 조사는 2000년대에 재개되었으니 조사단은 여전히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했으니, 사진이 배경으로 삼은 저때 역시 성 내부 발굴을 통해 적지 않은 신라 목간을 수습했다.
당시 내 기억에 발굴조사는 성벽까지 아울러 했으니 그 성벽 내부와 성벽을 통과하는 지점 아래로는 신라시대 그 특유한 배수로가 완연히 노출되었다는 기억이 있다.
조사단은 당시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라 했다가 훗날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로 바꾸고 지금은 다시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로 간판을 바꾼다.
저 2006년 무렵 발굴 재개는 성산산성 목간에 국한해서는 새로운 국면 전환이 있었다.
1995년 조사 당시 연못 출토라고 한 목간 출토 지점은 10년 뒤 조사 결과 연못이 아니라 성벽 안쪽 기저부 쪽 퇴적토였을 것이다.
이런 오류를 바로잡았다 해서 당시 담당 학예연구사 이성준이가 한참이나 자랑하던 기억이 또렷한데 이 친구 근자 아마도 그렇게나 대학으로 튀고 싶어하더니만 모교인 충남대로 튀어 교수질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사진이 담은 저 당시 아마 목간 실물 공개는 함안군청에서 하고, 현장으로 이동하지 않았나 싶은데 모르겠다. 이젠 하도 오래되니 기억도 오락가락이다. 이래서 즉각잭각하는 기록을 남겼어야 하는데, 또 당시 일기처럼 적기한 것들이 있었을 법한데 다 망실하지 않았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