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 이모저모

상상만으로도 전염을 부른다, 기억조차 지워야 했던 흑사병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7. 15.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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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렉스 브라운Alex Brown,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

사진 제공: 미하일 닐로프, 펙셀

 
전염병에 대한 기억은 종종 논쟁의 여지가 있다.

불편하고, 정치적인 쟁점이 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점차 멀어져 가는 지금, 정부, 지역사회, 그리고 가족들은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개인적인 추모부터 공식적인 추모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 사회가 전염병을 어떻게 기억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코로나19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1346년부터 1353년까지 발생한 흑사병은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 중 하나였다.

중세 유럽 인구 3분의 1 내지 3분의 2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흑사병은 사라지지 않았고, 이후 수 세기 동안 사회는 반복적인 발병으로 고통받았다.

내 연구에서 밝힌 바와 같이, 흑사병은 만연했음에도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금기시되는 주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인 추모 시도는 여전히 남아 있다.

금기Taboo

당시 사람들이 흑사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린 이유 중 하나는 이 질병이 상상 자체를 통해서도 전염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흑사병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고 두려워했다.

흑사병이 창궐한 후 10년 뒤에 집필된 그의 연대기에서 카르멜회 수도사Carmelite friar 장 드 베네트Jean de Venette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348년과 1349년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어서 그와 같은 일은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었다. 죽음과 질병은 상상이나 타인과의 접촉, 그리고 그로 인한 전염을 통해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도 흑사병에 대한 걱정이 병에 걸릴 확률을 높인다고 생각했다.

중세 의사 벵트 크누트손Bengt Knutsson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즐겁게 살며 오래 살기를 바라라"고 조언했다.

흑사병을 떠올리는 것은 곧 흑사병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일부 생존자가 흑사병 발생을 떠올리기를 꺼리는 데에는 트라우마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흑사병을 겪은 사람들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어 공동묘지가 가득 차자, 거대한 구덩이를 파서 시신을 층층이 쌓아 매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피렌체 연대기 작가 마르키온네 디 코포 스테파니Marchionne di Coppo Stefani는 집단 매장지에 흙과 시신을 겹겹이 쌓아 올린 모습을 "라자냐에 치즈를 겹겹이 쌓는 것"에 비유하며 섬뜩하게 묘사했다.

어떤 기억들은 차라리 묻어두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흑사병에 대한 기억의 논쟁적인 성격은 15세기 말 북요크셔에서 발생한 전염병으로 공동체가 분열된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한쪽은 희생자들이 흑사병으로 죽었다고 믿었고, 다른 쪽은 그 병을 "피네드 세케네스(pyned sekenes)"라고 불렀는데, 이는 아마도 폐 질환이었을 것이다.

질병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그 병에 대한 기억의 양상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의견 차이는 매우 중요했다.

그것을 역병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세 시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 전염병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것을 다른, 어쩌면 덜 민감한 범주에 넣는 일이었다.

역사가들은 흑사병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극도로 꺼려 "집단 기억으로서 흑사병은 역사에서 지워지는 과정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중세 영국 법률 관행에서 그 대표적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상속인이 토지를 상속받을 나이가 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증인들은 상속인의 생애 동안 발생한 중요한 사건들, 예를 들어 출생, 사망, 결혼 등을 증언해야 했다.

그러나 1246년부터 1430년까지 기록된 10,181건 증언 중 흑사병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은 단 13건에 불과했다.

흑사병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이러한 침묵에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내용은 대부분 우연히 얻은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개인적인 경험담을 남긴 사람은 드물었고, 법률이나 재정 기록은 대개 정형화한 문서였기에 개인적인 비극을 장황하게 회상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가 흑사병에 대한 기억을 이해하는 것은 남아 있는 자료들에 의해 좌우된다.

비록 흑사병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되살리기는 어렵지만, 이 질병이 중세 문화에 미친 지속적인 영향은 분명하다.

죽음의 신이 사회 각계각층 사람을 이끌고 마지막 춤을 추는 모습을 묘사한 ‘죽음의 춤(Danse Macabre)’의 등장은 갑작스럽고 준비되지 않은 죽음에 대한 광범위한 불안감을 반영한다.

중세 사람들은 또한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는 더욱 개인적인 방법들을 찾았다.

교회 벽에 새긴 낙서는 흑사병의 공포와 개인적인 추모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하트퍼드셔Hertfordshire 애쉬웰Ashwell 의 성 마리아 교회St. Mary's Church에 새긴 비문은 흑사병을 “가련하고, 맹렬하고, 폭력적”이라고 묘사한다.

노퍽Norfolk 에이클Acle의 성 에드먼드 교회St. Edmund's Church에 새긴 또 다른 비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짐승 같은 흑사병이 시시각각 날뛰는 동안, 기도와 기억으로 죽음의 치명성을 애도합시다.” 

날짜가 알려지지 않은 다른 비문들은 더욱 개인적인 상실의 아픔을 드러낸다.

캠브리지셔Cambridgeshire 갬링게이Gamlingay에 있는 성 메리 교회St. Mary's Church 한 비석에는 "여기 마거릿이 열 살 나이로 잠들어 있다"라고만 적었다.

이처럼 흑사병은 많은 생존자에게 금기시되는 주제가 되었고, 그들은 그 참혹함을 잊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러한 침묵은 역사가들이 의존하는 사료 종류에 따라서도 형성된다.

살아남은 목소리는 우연, 기록 보관 방식, 그리고 누구의 경험이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는 오늘날 중요한 교훈을 준다.

미래의 역사가들이 코로나19 팬데믹을 어떻게 기억할지는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한 것뿐만 아니라 기록되고, 보존되고, 기념된 것에도 달려 있다.


More information
A. T. Brown, Plague, Popular Memory, and Witness Testimonies in Late Medieval England, Journal of Medieval History (2026). DOI: 10.1080/03044181.2026.2697949 

Provided by The Convers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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