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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개발 시추 열풍과 함께한 개형충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2. 1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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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형충

 
편집자주) 다음은 국립대구과학관 과학도 최병도 선생 글이라, 넘겨버리기 힘든 여러 사항이 포진해 전재한다. 
 

내가 처음 개형충이라는 존재를 두 눈으로 본 시기는 대학교 3학년이었던 2010년이었다.

당시 대학 졸업논문을 쓰기 위해 강원도 정선에 분포하는 여러 고생대 지층들을 조사 중이었다.

그 일환으로 바다 환경에서 퇴적물이 쌓여 만든 회동리층이라는 지층에서 개형충 “껍질들”을 찾았다.

이 지역들을 조사 지역으로 선정한 이유는 개형충 때문은 아니었다. ‘코노돈트conodont'라는 아주 작은 화석을 찾기 위함이었다.

여담이나 코노돈트는 원시적인 무악어류(턱이 없는 물고기)의 1mm 정도 되는 아주 작은 이빨이다.

이 물고기는 몸이 매우 연한 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전체 몸이 화석으로 남는 일이 아주 드물지만, 인회석화한 이빨은 전 세계를 통털어 무척 흔하게 발견된다.

또한 진화가 무척 빨라서 고생대부터 쥐라기 초기까지의 지질시대를 세분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곤 한다.

즉, 화석을 기반으로 지질시대를 구분하는 생층서학Biostratigraphy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가 코노돈트다.

회동리층은 논란이 많은 지층이다. 어떤 이는 고생대 중에서도 오르도비스기에 생성됐다고 하지만, 또 다른 이는 그 후 시대인 실루리아기에 쌓였다 한다.

이러한 학술적 논쟁도 코노돈트에서 비롯한다.

학부생이던 나에게 이 문제는 너무 어려운 주제였지만 졸업논문으로 시도할 만한 주제이기는 했다.

연구를 위해 석회암을 잔뜩 실어 실험실로 갔다. [요새 같음 국가유산법 위반으로 감옥 가야 한다.] 

이 암석들은 빙초산에 넣고 몇 주를 기다리면 모두 녹아 없어지는데, 이는 석회암이 탄산칼슘 성분이라 산성에 잘 녹기 때문이다(석회동굴이 물에 녹아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단단한 석회암이 화학적 풍화에 얼마나 약한지 알 수 있다).

반면 탄산칼슘이 아닌 물질은 녹지 않고 가루처럼 남는다. 이 “가루들”을 체로 걸러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아주 작은 미화석들을 만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여다 본 현미경 두 렌즈에서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왜냐면 코노돈트는 거의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꿩 대신 닭이었던가? 결과로 보면 그랬다. 대신 조리퐁 과자 같이 생긴 껍질들을 수백 개 넘게 찾았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감이 안 잡혔다. 지도교수셨던 故 박수인 교수님께 보여드리고 여쭈니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개형충이잖아! 이것도 몰라?”.

세상에 개형충이라니!

사실 그땐 개형충에 별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고생물학 수업 시간에 개형충을 배우긴 했지만 내가 아는 형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개형충을 몰라본 가장 큰 이유는 이 화석들이 규소로 치환된, 다시 말해 규화한 껍질들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 껍질에 규소가 들어오면서 형태가 심하게 변해 원래 껍질 형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앞서 이 개형충을 품은 석회암도 탄산칼슘이기 때문에 산성에는 녹는다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개형충의 탄산칼슘 껍질이 규소로 치환된 덕분에 빙초산 실험에도 녹지 않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무튼 이 일은 내가 개형충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절지동물 출현과 진화에 흥미가 있던 참에 대학원에서 개형충을 공부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이때다.

그렇다면 개형충은 어떤 동물이고, 누가 연구를 했는지 당연히 궁금했다.

개형충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놀랍게도 북아메리카(미국 남서부와 멕시코 북서부)에 ‘모골론 문화’를 꽃피우던 신대륙 원주민들일 가능성이 높다.

모골론 문화를 융성하게 만든 사람들은 기원전 200년부터 서기 15세기 중반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시기까지 번성했으며, 이들이 남긴 도기에는 기하학적 그림이 드러난다.

서기 1000년~1150년 즈음에 그린 삽화에는 껍질 속 여러 갈래 다리, 그리고 눈을 그린 동물이 여럿 관찰된다.

이 형태는 놀랍도록 개형충을 닮았다 이들이 그린 것이 정말 개형충일까?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개형충이 아무리 작다 해도 육안으로 충분히 볼 수 있을 만큼 큰 개형충(길이 2mm 이상)도 여러 대륙에서 관찰되니까.

모골론 사람들이 개형충을 무어라 불렀는지는 알 수는 없다.

과학 발전이 처음 이루어진 지역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유럽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일어난 문화 부흥은 과학 혁명 토대를 이끌었고, 그 기운이 무르익은 18세기 유럽 지식인들은 자연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지식 교류를 기반으로(그리고 부유한 영주 도움도 빌려) 끊임없이 세상을 탐구했다.

당시 피렌체는 르네상스 유산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계몽사상이 끓어오르던 용광로이자 예술과 과학이 풍성한 지성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문화적 풍부에서 균류학 아버지라 일컫는 미켈리 Pier Antonio Micheli는 생물과 광물 표본 수집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훗날 그가 모은 표본들이 피렌체의 제국 물리 및 자연사박물관(지금의 피렌체대학교 자연사박물관)에 매입되었고, 이 중 일부는 “개형충”을 담은 유리병이었다. 

미켈리는 1718~1737년에 채집한 이 동물들에 “Musculus”와 “Pectunculus”라는 속명과 함께 두 종 이름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정식으로 과학계에 소개되지는 않았다.

이후 1742년 토스카나 대공 주치의이자 자연사학자인 구알티에리 Niccolò Gualtieri가 최초로 “Musculus”를 정식 출판물을 통해 소개한다.

그의 저작물 속 개형충을 묘사한 그림은 마치 원뿔 모양 과자 같으며 전혀 개형충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그림은 유럽인이 개형충을 처음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알려졌다.

나는 훨씬 이전 북미 모골론 문화를 꽃피운 사람들이 더 사실적으로 개형충을 묘사하였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느낀다.

아무튼 당시 피렌체 학자 모두 개형충을 “작은 조개” 정도로만 생각했다.

비슷한 시기 토체티 Ottaviano Targioni Tozzetti도 “특이한” 동물로 개형충을 언급했다. 즉, 피렌체 지식인들은 개형충을 개형충으로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개형충을 최초로 기술하고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현대 과학기술인이 보기에는 보잘것 없을 수는 있지만 이러한 초기 연구 활동이 누적하면서 과학은 점차 정교함을 장착하고 마침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된다.

한편 피렌체 지식인들이 발견한 개형충들은 박물관에 고스란히 보존된 덕분에 현대 분류학 힘을 빌려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각각 Herpetocypris reptans, H. incongruens, H. salina, 그리고 Cypridopsis vidua라는 이름을 지닌 개형충들은 현재도 매우 흔하게 보는 담수 종으로서, 일부는 전 세계에 널리 분포한다(심지어 한반도에도 말이다!).

“분류학의 아버지” 카를 폰 린네 Carl von Linné (1707–1778)도 개형충을 언급했다.

그는 1746년 살아있는 ‘날개 없는 곤충’(당시는 개형충을 곤충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을 관찰해 “Monoculus” 속(genus)이라 이름 붙이고, 거기에 속하는 9종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림으로 나타내지는 않아서 현재는 그가 관찰한 종이 어떤 분류군에 속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 시대 현미경 성능으로는 조그마한 ‘곤충’을 살펴보기도 쉽지 않거니와 갓 태동하기 시작한 진정한 분류학 체계에서 이 동물을 설명하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1753년 영국의 헨리 베이커 Henry Baker가 현미경 관찰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는데, 이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인의 편지를 소개했다.

편지에는 “네 개 팔과 네 개 껍질을 지닌 갑각류와 닮은 곤충”이라는 명칭의 도판이 있다. 개형충의 다리와 껍질이 네 개는 아니지만 말이다!

비록 오류가 포함된 묘사지만 베이커가 소개한 도판들은 과학 출판물에 개형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최초 사례다.

이후 1776년 덴마크 자연사학자인 뮐러 Otto Friedrich Müller는 린네가 Monoculus conchaceus라 명명한 종을 Cypris pubera라고 다시 분류하면서 곤충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뮐러 역시 개형충을 여전히 ‘껍질을 지닌 곤충’으로 분류했다.

1802년에 이르러 프랑스의 라트레유 Pierre André Latreille가 드디어 ‘개형충’이라는 분류군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라트레유는 “곤충학의 왕자”라고 별칭이 있듯이 자연사 연구에 획기적 공헌을 했다. 또한 절지동물 분류를 체계적으로 시도한 최초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793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고 충성 서약을 하지 않아,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연구에 대한 열정이 그를 살려냈다. 지하 감옥 바닥 딱정벌레를 살펴보던 중 죄수들을 진찰하던 의사가 지역 박물학자 생뱅상 Jean-Baptiste Bory de Saint-Vincent에게 이를 알렸고, 그의 학술적 성과를 알고 있던 생뱅상 노력 덕분에 석방되었다.

만약 그가 그대로 사형되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개형충을 무엇이라 불렀을지 상상되지 않는다.

19세기 개형충 연구는 현생 분류군에서 화석으로까지 확장한다.

당시까지 제안된 개형충 ‘속’ 이름은 겨우 Cypris와 Cythere 두 개였기에 여러 학명이 계속 등장하게 된다.

또한 이 학명들을 묶어낼 높은 분류 체계가 필요했다. 따라서 종과 속 이름뿐만 아니라 ‘과’(Family)에 대한 연구도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한편 식민지 개발 열풍과 더불어 각 지역에 대한 이해와 기초과학에 대한 지적 탐험도 개형충 연구를 촉진하는 기폭제가 된다.

영국에서는 브래디 G. S. Brady가 첼린저 호(HMS Challenger)를 타고 1872년부터 1876년까지 세계 해양을 누비면서 수많은 개형충을 발견한다.

첼린저 호에 승선한 브래디를 비롯한 첼린저 탐험대는 대서양과 태평양, 그리고 남극해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거리(127,580km)를 항해하면서 바다의 수심, 온도와 해류부터 퇴적물 기원과 생명체 분포를 조사하고자 했다.

이 항해를 통해 발견한 생물만 해도 4,000여 종이 넘는다. 첼린저 호에는 237명 승무원이 있었지만 탈영과 질병에 의한 사망 등 여러 이유로 인해 144명만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인명 손실은 안타깝지만, 이들의 과학적 성취는 그 이전까지 알지 못한 바다에 대한 지식을 크게 진전케 한다.

브래디는 첼린저 호 탐사를 바탕으로 총 221종 개형충을 <첼린저 호 탐험 보고서>(1895년)에 기재한다.

이 연구는 개형충 분류학에 대한 이해를 크게 향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 종내 변이가 종 분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언급함으로써 진화 연구에 기여한다. 

당시는 다윈이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을 <종의 기원>(1859년)이라는 혁명적인 책을 통해 소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다. 따라서 변이가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로 이어질 수 있는 증거를 개형충이 보여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개형충은 너무 작아 당시 기술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고, 전문 삽화가 손길을 빌려 그림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개형충 분류학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는 현미경 기술이 크게 향상하면서도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1960년대 주사전자현미경(SEM: Scanning Electron Microscope)이 보편화하면서 개형충을 비롯한 미화석 연구에 혁신이 일어난다.

아마 린네와 뮐러가 이 현미경 기계를 알았더라면 기절초풍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 기계로 찍은 섬세한 다리와 껍질 내부 사진들까지 봤다면 의자 뒤로 자빠지고 말았으리라.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이 끝날 무렵 석유는 이전보다 전략적으로 더욱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새로운 유전 탐사가 시작하면서 석유가 존재할 만한 지층에 관한 연구가 필요해졌고, 이는 시추와 원유 정제 기술 진보와 더불어 지질학 발전을 이끌게 된다. 

석유는 퇴적암에 집중하므로 석유를 부존한 지층에 대한 퇴적환경과 시대를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적은 시료에서 많은 개체를 확보할 수 있는 미화석 연구는 이러한 정보를 제공해 줄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이렇듯 석유를 비롯한 화석 연료 개발에 힘입어 개형충 연구가 활발해졌다.

서방 석유회사들은 개형충 연구자를 다수 채용하고, 소련에서도 광물 자원 탐사를 위한 개형충학자가 다수 배출되었다.

특히 1972년에 이르러 소련의개형충학자는 무려 180명에 이르렀다. 소련 붕괴와 더불어 개형충 연구도 예전만 못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활발한 연구 덕분에 지질시대 개형충 분포와 층서 연대에 대한 이해는 높아졌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여전히 제한적으로만 알려졌다. 특히 진화와 고생태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불분명했다.

아쉽게도 석유회사에서 개형충 인기는 시들어져 갔다. 지금도 석유회사들은 지질학적 이해를 높이기 위한 투자를 계속하지만, 개형충학자를 직접 채용하는 일은 드물다.

개형충보다는 탄성파 탐사나 다른 지질학적/자원탐사적 연구가 더 중요해졌고, 미화석 특히 개형충은 부가적인 자료가 되었다. 물론 아직도 유용하게 쓰이긴 하다만 말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형충은 해양 환경 변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크게 공헌하게 된다.

심해 현생 개형충 분포 연구와 더불어 심해저 시추사업이 여러 바다에서 이루어지면서 지질시대 동안 일어난 개형충 변화를 깊숙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현재의 심해, 그리고 역사 시대 이전의 심해에 얼마나 다양한 생물이 살았는지 제한적으로 알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구를 통해 짐작한 것보다 더 다양한 생명이 깊은 바닷속에 살아 숨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해양에서 일어난 변화(수온, 해류, 해저지형 등)와 같은 환경 압력에 대한 적응으로 개형충이 진화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후에도 개형충 분류학 연구와 응용은 계속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연구를 선도한다.

이 두 나라의 경우 자원 탐사와 더불어 순수과학적인 이유로 개형충을 연구한다.

지금까지 수천 종 개형충이 보고되었을 뿐 아니라 이 결과로부터 지질시대와 환경, 그리고 진화를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몽골에서도 좋은 화석이 많이 발견되어 보고된 바 있다. 하지만 아직 정밀한 해석이 더 필요하고, 따라서 연구자들에게는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80~1990년대에 신생대 해양 개형충 연구가 많이 이뤄졌고, 중생대(백악기)와 현생 개형충 연구는 극히 적었다.

2000년대 이후로 신생대 개형충 연구는 정체한 상태지만 내가 수행 중인 백악기 담수 개형충과 일부 생물학자가 수행하는 현생 종 연구가 늘어났다.

개형충의 생층서학적 활용은 앞서 말했듯이 지질시대 구분에 매우 유용하다. 특히 해양 미화석이 산출되지 않는 담수와 기수 환경 퇴적층에서 개형충 화석은 가치가 크다. 개형충은 물이 있는 모든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이러한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졌지만, 언제부턴가 개형충의 “분류학적 및 생층서학적 가치”는 (적어도 서구권의) 지질학자들과 고생물학자들 사이에서 등한시되기 시작했다.

필자의 학문적 멘토인 독일 출신 고생물학자 벤야민 자메스 Benjamin Sames는 2010년 기고문에서 “지난 몇 년간 만난 많은 연구자들이 담수와 기수 환경의 개형충 화석이 지닌 근본적인 응용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미고생물학자들까지도!)...심지어 정확한 분류학은 경시된다”고 한다.

이러한 세간의 인식에 반발한 자메스 박사는 개형충 분류학을 기반으로 아프리카 쥐라기와 북아메리카 백악기 지층에 대한 세부적인 지질시대 정립과 고생태학적 및 분포에 대한 해석을 이끌기도 한다.

그는 또한 “개형충 생층서학 적용은 육성 퇴적층 연대 규명을 정밀화하는 데 중요하고, 대륙-해양 간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추가적인 증거를 제공할 것이다”고 한다.

즉, 정밀한 분류학적 해석은 연대측정의 오차를 줄이고, 고대 세계의 환경을 복원하는데 핵심 열쇠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고리타분할 수 있는 분류학이 지질시대를 구분하는 데 결정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동일 종을 바탕으로 시대를 구분해야 하는데, 하나의 종을 다른 종으로 나누어 버리면 시대를 대비하기에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의 종은 수백만 년을 존속한다. 하지만 지질시대를 세분하더라도 이들 존속 기간은 충분히 포함되거나 몇몇 시대에 걸쳐질 뿐이다.

2012년의 나는 다시 현미경 앞에 앉았다. 개형충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 대상은 2년 전 본 고생대 석회암이 아니라 백악기 호수에 쌓인 흑색 셰일 안 화석이다.

개형충이 많이 나오길 기대하며 렌즈에 눈을 댔다.

이윽고 1억 600만 년 전을 산 수많은 개형충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 순간이 개형충을 진정 사랑하고 연구하게 된 시작점이 된다 하겠다.

관찰로 시작해 백악기 개형충의 진화, 고생태, 고지리, 그리고 생층서에 이르는 연구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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