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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는 중세 영국 왕실 사치품, 흑사병이 흔한 동물로 만들어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10. 19.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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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렉스 브라운Alex Brown, 더럼 대학교

 

 

오늘날 유럽 토끼는 영국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토끼는 영국 제도의 토착종이 아니며, 가장 파괴적인 외래종 중 하나다.

영국 제도에서 토끼의 초기 역사는 중세 영국 사회 변화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왕과 노르만 귀족이 선물하는 귀한 사치품이던 토끼는 흑사병Black Death (1346~1353년) 이후 가난한 사람들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점점 더 흔해졌다.

중세 서적에 등장하는 토끼에 대한 풍자적인 묘사는 오늘날에도 어색하지 않을 사회적 왜곡에 대한 냉소적인 유머를 보여준다.

왕의 선물

노르만족이 들여온 것으로 여긴 토끼는 이후 로마 시대 브리튼 섬에서도 뼈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영국 제도에서 토끼에 대한 기록은 노르만 시대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가장 초기 기록 중 하나는 실리 제도Scilly Isles에서 발견된 십일조tithe (소산물의 십일조)다.

1176년, 지주 리처드 드 위카Richard de Wyka는 자신이 기르는 토끼에 대한 십일조를 내지 않았다고 고백했는데, 그 이유는 "이런 종류의 것에는 십일조를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이러한 오해는 토끼가 당시에는 생소한 동물이었음을 시사한다.

 

라틴어로 쓰인 『Historia scholastica』(‘Ashridge Petrus Comestor’) 234쪽에서 발췌한 나팔을 든 토끼 미니어처 세부 그림. 영국 도서관British Library 소장.



토끼는 1200년대에도 여전히 왕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을 만큼 희귀한 동물이었다.

1235년, 헨리 3세는 잉글랜드 지주English landowner이자 우스터셔Worcestershire 소재 마틀리 영주Lord of Martley 제프리 데스펜서Geoffrey Despenser에게 길퍼드Guildford에 있는 그의 공원에서 살아있는 토끼 열 마리를 선물했다.

몇 년 후, 왕은 사람들을 보내 길퍼드 공원에서 토끼 30~40마리를 잡도록 했다.

토끼 굴에 토끼가 충분히 있을 때만 잡으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왕이 토끼 개체 수가 줄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당시 토끼는 고기와 털을 얻기 위해 사육했다.

헨리 3세는 13세기 초 여러 연회를 위해 사슴고기, 멧돼지, 생선, 백조, 공작, 닭, 달걀, 산토끼 등을 주문했다.

그가 주문 목록에 토끼를 추가한 것은 1240년 크리스마스 연회 때였다.

토끼는 닭보다 4~5배나 비싼 진미였다.

토끼 주인들은 밀렵과 포식자로부터 토끼를 보호하기 위해 망루와 돌로 만든 오두막을 지을 정도였다.

사회 변화

하지만 토끼는 더 이상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유럽 인구 3분의 1에서 3분의 2를 죽음에 이르게 한 흑사병(1346~1353년)은 생존자들의 생활 수준 향상을 가져왔다.

토지는 더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고,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 생활 방식을 따랐다.

1363년에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사람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을 제한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토끼가 도입된 이유는 "사람들의 재산 수준에 맞지 않는 과도한 옷차림으로 인해 토지가 심각하게 파괴되고 황폐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토끼는 이러한 사회 변화를 반영했다.

14세기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토끼는 더욱 흔해졌는데, 부유한 농민들은 토끼고기를 먹었고, 장래가 유망한 장인들은 토끼털을 입었기 때문이다.

흔한 회색 토끼털은 보온용으로 사용되었지만, 일부 토끼 사육장에서는 희귀한 은회색이나 검은색 토끼를 전문적으로 사육하기도 했다.

 

영국 도서관 소장, MS Royal 2. B. VII에 있는 메리Mary Psalter 여왕 시편집의 "족제비로 토끼를 사냥하는 여인들Women hunting rabbits with a ferret"

 

토끼는 여전히 왕에게도 적합한 식재료였으며, 헨리 7세는 검은색 토끼털로 만든 잠옷을 주문하기도 했다.

토끼 개체 수가 번식을 통해 증가함에 따라 토끼로 인한 피해에 대한 불만도 늘어났다.

영주들 회계 장부에는 영주의 토끼로 인한 농작물 손실과 토지 훼손에 대한 반복적인 항의가 기록되었다.

동시에 토끼를 비롯한 사냥감 사냥은 체제 전복의 위험 요소로 여겨지기도 했다.

1381년 농민 반란 이후, 1390년 의회는 노동자와 장인들의 밀렵과 사냥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사냥을 가장해 이들이 왕에 대한 반란을 모의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왕은 이 법률에 동의해 "사냥개와 족제비, 건초, 그물, 털가죽 파이프, 끈, 그리고 숲의 짐승이나 토끼, 또는 귀족들의 다른 사냥감을 잡거나 죽이는 데 사용하는 모든 도구" 사용을 금지하는 범위까지 확대했다.

풍자적 이미지

집토끼와 산토끼는 중세 사회의 풍자적 유머를 드러내기도 한다.

몬티 파이튼과 성배Monty Python and the Holy Grail (1975)에 등장하는 가상의 치명적인 토끼, 카에르바노그의 살인 토끼The Killer Rabbit of Caerbannog는 중세 토끼와 관련된 이러한 아이러니한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토끼는 중세 필사본 여백을 장식하기도 하다.

토끼가 달팽이 등에 올라타 결투하는 모습을 익살스럽게 묘사한 그림들은 중세 문화 전반에 만연한, 기사도 정신에 대한 은근한 자조적 풍자를 보였다.

살인 토끼 신화와 더욱 가까운 맥락에서 어떤 그림들은 토끼가 사람을 폭력적으로 공격하고 복수하는 모습으로까지 묘사했다.

1340년대 런던에서 제작된 채색 필사본인 스미스필드 교령집(Smithfield Decretals)에는 이러한 풍자를 가장 정교하게 표현한 그림 중 하나가 담겼다.

이 책에서는 토끼가 사냥꾼들을 역습하여 사로잡고, 재판에 회부한 후, 사냥꾼과 사냥개까지 처형하는 모습이 있다.

이러한 그림들은 중세 문화에서 사회를 뒤집어 세상을 희극적으로 묘사하는 경향과 잘 어울린다.

비슷한 예로는 더럼에서 소년을 하루 동안 주교로 선출하는 풍습이나, 5월 1일 노동절 축제에서 '혼란의 군주lord of misrule'를 뽑는 풍습 등이 있다.

1555년경 스위스 박물학자 콘라드 게스너Conrad Gesner는 "토끼가 번식하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토끼가 서식하는 곳은 영국이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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