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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 신종 무게를 재던 날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0. 1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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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바이 김영일

 
경주시정소식지 "아름다운 경주 이야기" 가을호에 실은 글입니다.

가볍게 한 번 읽어보시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의 무게는 왜 18.9톤일까?

1997년 8월 11일 오후 2시 국립경주박물관 앞마당의 종각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왜냐하면 성덕대왕신종이 만들어진지 1226년만에 처음으로 그동안 막연하게 당시에 통용된 1근(斤)을 200g정도로 추정하여 24톤 정도로만 생각하였던 종의 실제중량을 확인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종합학술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이날 측정은 국내 최대의 전자저울 메이커인 ㈜카스의 지원을 받아 특별히 제작한 변형량감지센서가 부착된 첨단 측정기기를 사용하여 이루어졌는데 측정결과 18,900kg(18.9톤)으로 밝혀졌다.

더불어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로 확인되었다. 

『삼국유사』와 신종의 명문에 의하면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이 돌아가신 어머니와 부왕의 명복을 빌고자 종을 만들기 위해 구리 12만근을 희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통용되던 중국 한(漢)나라의 기준인 1근 250g으로 계산하면 30톤이 된다.

그러나 구리 12만근을 이 수치에 바로 대입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종을 주조할 때 투입된 원료의 무게에 비해 크게는 30~40%의 손실오차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덕대왕신종은 주조과정에서 37%의 손실오차가 발생한 셈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사용된 도량형(度量衡)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도(度)는 길이, 량(量)은 부피, 형(衡)은 무게를 뜻한다. 도량형은 시대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었다.

저울의 단위는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서인 『한서(漢書)』에 의하면 ‘수(銖)·량(兩)·근(斤)·균(鈞)·석(石)의 5단위인데, 수는 기장(黍) 100립(粒)의 무게이고, 량은 24수이고, 근은 16량이고, 균은 30근이고, 석은 4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단위는 한 대부터 시작하여 거의 지속되었으나, 석은 주로 양기(量器)의 단위로 사용되었다.

이 기록을 g(그램)으로 환산하면 기장(黍) 100립(粒)의 무게인 1수(銖)는 0.6511g이므로 1량(兩)은 24수(銖)이니 15.6264g, 1근(斤)은 16량(兩)이니 250.0224g이 되므로 전한(前漢)시대의 1근은 250g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보다 빠른 시기인 춘추시대(BC 770~BC 403) 초(楚)나라 유물인, ‘구리로 만든 고리모양 저울추(銅環權)’들의 무게를 측정하여 평균치를 산출한 결과 1수(銖)는 0.6527g, 1량(兩)은 15.66g, 1근(斤)은 250.65g으로 전한(前漢)시대 1근인 250g과 비슷한 수치를 얻을 수 있어서 중국 상고시대부터 사용되었던 1근의 무게가 약250g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유물들의 출토상황은 다음과 같다.

1933년 안휘성(安徽省) 수현(壽縣) 주가집(朱家集)에서 나무저울(木衡)과 함께 출토된 6개의 동환권(銅環權), 1945년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근교에서 출토된 10개의 동환권(銅環權), 1954년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좌가공산(左家公山)에서 나무저울(木衡)과 함께 출토된 9개의 동환권(銅環權), 1958년 호남성(湖南省) 상덕(常德)에서 출토된 6개의 동환권(銅環權), 1975년 호북성(湖北省) 강릉(江陵) 양태산(兩台山)에서 출토된 7개의 동환권(銅環權) 등이 있다.

한편 1978년 하북성(河北省) 역현(易縣)의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BC 221) 연(燕)나라 고묘(古墓)에서 출토된 8종의 금장식장신구에서 중량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를 합산한 평균치가 1수(銖) 0.647g, 1량(兩) 15.525g, 1근(斤) 248.4g으로 보고되어 춘추시대 초나라의 중량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진, 한, 삼국, 서진(西晉)시대까지는 시대에 따라 다소의 증감이 있기는 하였지만 1근(斤)의 중량이 250g을 전후하여 통용되었음을 여러 자료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통용되는 1근(斤)의 무게를 600g으로 사용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학계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남북조시대의 북위(北魏, 386~534) 때부터이다.

시대에 따라 약간의 증감은 있었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 기록된 다른 유물들의 중량을 살펴보고 실제 무게를 환산해 보자. 먼저 574년(진흥왕 35)에 주성된 황룡사 장륙존상은 본존불의 무게가 35,007근, 좌우보살상은 12,000근이었다고 한다.

역시 1근을 250g으로 환산하면 본존불은 약 8.75톤, 좌우보살상은 3톤이 된다.

다음 754년(경덕왕 13)에 황룡사종을 주조하였는데 길이는 1장 3촌(309cm)이요, 두께는 9촌(27cm), 무게는 497,581근이었다. [고려] 숙종 때 다시 새로운 종을 완성하니 길이가 6척 8촌이었다.

역시 1근을 250g으로 환산하면 약124.4톤이나 되는 엄청난 대종이다. 

이렇게 엄청난 황룡사종은 높이가 3.09m로 성덕대왕신종의 3.66m보다도 오히려 57cm나 낮다.

기록대로라면 우리가 생각하거나 흔히 보았던 범종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펑퍼짐한 모양의 범종으로 생각된다.

이 종을 고려 숙종 때 줄여서 다시 만들었는데 길이가 원래의 1장 3촌에서 6척 8촌(204cm)으로 줄었다.

이를 단순비례로 계산하여 체감비로 환산해보면 새 황룡사종의 무게는 328,500근으로 약82톤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처음 종을 만든 뒤 약 350년이 지난 고려 숙종(肅宗, 재위 1095~1105) 때 새로 만들었으니 종의 모양이나 형식이 크게 달라져서 단순비례로 추정한 모습과는 달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한 이듬해인 755년(경덕왕 14)에는 분황사 약사여래동상을 주조하였는데 무게가 306,700근이었다.

이를 역시 같은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76.68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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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경주시 퇴물 관료 이채경 선생 글이다.

팔척 거구인 그는 생평 경주시에서 학예직으로 일하다 문화재 과장까지 해 먹고 정년 퇴직해서 지금은 룰루랄라 탱자탱자한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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