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0년 전 우라르투 왕들은 청동 그릇을 휴대용 선전 도구로 활용했다

우라르투 왕들 이름을 새긴 100점 이상 청동 그릇은 단순한 식기가 아니었다.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이 그릇들은 왕실 메시지를 전달하는 휴대용 도구로서 정치적 권위, 신성한 정당성, 그리고 왕조의 연속성을 정교하게 구성해 왕국 전역에 전달했다.
Antiquity에 발표된 이 연구는 안나리타 스테파니아 본판티Annarita Stefania Bonfanti, 로베르토 단Roberto Dan, 느즈데 예라냔Nzhdeh Yeranyan, 아스그 포고샨Astgh Poghosyan이 수행했다.
연구진은 루티프리Lutipri의 아들 사르두리Sarduri 1세부터 루사Rusa라는 이름을 가진 왕들에 이르기까지, 우라르투 통치자들에게 귀속된 것으로 알려진 모든 명문을 새긴 청동 그릇을 조사했다.
이 그릇들은 기원전 9세기 후반부터 7세기 초까지, 우라르투Urartu가 서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철기 시대 왕국 중 하나였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진은 직접 관찰, 접사 촬영, 디지털 트레이싱, 비교 고문자학 등의 방법을 사용해 그릇의 쐐기 문자, 조각 기법, 왕실 상징 변화를 분석했다.
그 결과, 우라르투 통치자들이 아시리아 궁정 문화 영향을 받은 그릇들을 어떻게 자신만의 권력을 표현하는 독특한 도구로 변모시켰는지 알 수 있었다.
왕 이름을 새긴 100점 이상의 그릇
가장 많은 그릇은 현재 아르메니아 예레반에 있는 고대 우라르투 도시이자 궁전 요새인 테이셰바이니Teishebaini 유적인 카르미르-블러Karmir-blur에서 출토되었다.
예레반 남서쪽 흐라즈단 강 좌안에 위치한 이 유적은 우라르투 왕국 말기에 가장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다.
1949년 발굴 조사에서 25번 저장고 안에서 최소 97점 명문 있는 청동 그릇이 발견되었다.
1958년에는 23번 방에서 추가로 이전에 공개되지 않은 유물들이 발굴되어 연구자들이 조사한 그릇 수는 100점이 넘었다.
각 그릇 안쪽 중앙에는 원형으로 새긴 쐐기문자가 있다.
명문은 간결하지만, 당시 통치하던 군주 신원을 밝힘으로써 그릇과 왕실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적인 의미에서 이 그릇들은 단순한 실용적인 용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청동의 품질, 명문의 정교함, 그리고 왕의 이름은 서로 강화하는 요소로서, 엘리트 계층 모임에서 과시하기 위해 제작된 휴대용 문서였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그릇들은 왕실의 선전 도구와 유사한 기능을 했다.
즉, 통치자의 정체성을 궁정, 의례, 그리고 어쩌면 종교 활동 중심에 놓는 역할을 했다.

우라르투는 아시리아의 위엄 있는 물건을 변형했다
이 연구에서 가장 오래된 그릇들은 기원전 840년에서 830년경에 통치한 사르두리 1세와 관련이 있다.
이 그릇들에 새긴 글들은 특히 길고 좁은 쐐기 모양 사용에서 신아시리아 설형문자Neo-Assyrian cuneiform와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성은 우라르투 왕국 형성 과정에서 아시리아의 강력한 영향력을 반영한다.
늑골이 있는 그릇ribbed vessels은 기원전 9세기 아시리아 수도 님루드Nimrud 부조에서 자주 발견되며, 아시리아 왕비 무덤에서 발견된 명문이 있는 금 그릇들은 귀중한 물건에 왕실이나 헌정의 글을 새기는 관습을 보여준다.
우라르투 왕들은 이러한 권위 있는 시각적 언어를 차용했지만, 단순히 모방은 아니었다.
사르두리 1세 이름을 새긴 늑골 있는 그릇은 아시리아 그릇 유형에서 이후 우라르투 왕실 생산품 특징이 된 단순한 청동 그릇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과정을 단순한 모방이 아닌 능동적인 문화적 변혁으로 설명한다.
기원전 820년경부터 785/780년경까지 통치한 미누아Minua 왕 시대에 쐐기 문자 조각들은 더 짧아지고, 더 삼각형 모양이 되었으며, 더 촘촘해졌다.
명문 또한 점차 표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우라르투 문자 전통의 등장과 맞물린다.
처음에는 아시리아 문자 체계에서 파생된 이 체계는 점차 지역 권력을 전달하고 우라르투 궁정 요구를 충족하도록 재구성되었다.

사자, 신전, 그리고 신성한 권위
기원전 785/780년경부터 756년경까지 통치한 아르기슈티Argišti 1세 시대에 이르러 그릇의 정치적 메시지는 더욱 시각적으로 변모했다.
금속 세공인들은 왕실 명문 옆에 상징들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초기 디자인에는 오목한 변을 지닌 정사각형과 새 머리가 포함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나중에 창이 꽂힌 탑tower crowned with a spear(종종 수시 신전susi temple으로 해석됨)과 포효하는 사자 머리와 같은 더욱 일관된 모티프로 발전했다.
두 상징 모두 왕실에서 즉시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담았다.
사자는 힘과 왕권을 상징했고, 신전 이미지는 군주를 신성한 권위와 연결했다.
왕의 이름과 결합된 이러한 모티프들은 각각의 그릇을 통치, 종교, 군사력에 대한 간결한 표현으로 변모시켰다.
사르두리(Sarduri)와 루사(Rusa)라는 이름을 가진 왕들과 관련된 후대 그릇들은 이러한 확립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이러한 디자인이 공식적인 왕실 시각 언어의 일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문자 그 자체가 권력의 과시 수단
청동에 쐐기문자를 새기는 것은 돌에 새기거나 점토에 찍는 것과는 다른 기술을 필요로 했다.
우라르투 장인들은 곡선형 금속 표면에 맞춰 쐐기 모양 기호의 비율, 깊이, 각도를 조정해야 했다.
따라서 이 그릇들은 서기관의 관행뿐만 아니라 서기관, 조각가, 금속 세공가 사이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를 보존한다.
완성된 그릇은 세 가지 기능을 겸비했다. 의례용 도구이자,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소유물이며, 왕실의 문서화한 유물이었다.
이러한 기능의 조합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비롯되었다.
왕의 권위는 글자 자체뿐 아니라 귀중한 재료, 숙련된 장인 정신, 그리고 그 주변 절제된 이미지들을 통해서도 전달되었다.
이 명문들은 우라르투에서 문자가 단순한 정보 기록 수단 이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문자는 일상적인 형태를 권력의 물질적 선언으로 바꿀 수 있는 왕실 기술로 발전했다.

카르미르-블루르Karmir-blur는 한 왕조의 기억을 보존했을지도 모른다
카르미르-블루르에서 이렇게 많은 왕실 그릇이 집중적으로 발견된 것은 우라르투 왕국의 마지막 수십 년에 대한 중요한 증거를 제공할 수도 있다.
연구에 따르면, 고고학적 지층은 이 그릇들이 요새가 파괴되기 전에 의도적으로 안치되었음을 시사하며, 공격 중에 흩어지거나 정복의 혼란 속에서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다른 우라르투 유적에서는 이와 유사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연구진은 여러 왕궁에 흩어져 있던 그릇들이 왕국의 마지막 정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카르미르-블러에 모였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전 왕들 이름을 새긴 그릇들을 한데 모은 것은 불안정한 시기에 왕조의 연속성을 보존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과거 왕들의 소유물을 모음으로써, 우라르투 마지막 거주자들은 왕실의 기억을 담은 물리적 기록 보관소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 유적은 기원전 6세기 중반경에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써 그릇들이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최종적으로 수집되는 긴 과정이 막을 내렸다.
남아 있는 것은 우라르투 왕들이 어떻게 권력을 이동 가능하게 했는지에 대한 특이한 기록이다.
왕 이름을 새겼고 사자, 사원, 그리고 정교하게 변형된 쐐기문자를 새긴 이 청동 그릇들은 왕정의 메시지를 궁궐 담장을 훨씬 넘어 전했으며, 거의 3천 년 동안 그 메시지를 보존했다.

Bonfanti, A. S., Dan, R., Yeranyan, N., & Poghosyan, A. (2026). Memory of the kings of Bia/Urartu: inscribed royal bowls from Western Asia. Antiquity, 1–9. doi:10.15184/aqy.2026.10395 SocialSci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