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인이 격발한 논어 공부, 그리고 안중근 이야기 by 이주화, 안중근기념관
공공기관에 근무하다 보면 국민신문고 민원을 응대해야 하는데 대개는 이미 인지하고 있는 사안이거나, 시급하나 사정상 시정하지 못하고 있는 사안을 지적해주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이번 건은 매우 조심스러웠는데 『논어』를 인용한 안중근 의사 유묵의 해석이 正解가 아니라면서 민원인은「학이」편의 그 유명한 문장[빈이무첨貧而無諂 부이무교富而無驕]을
"아첨하지 않기에 (물질은) 빈곤하나, 교만하지 않기에 (마음은) 부유하다"
라고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시 설명에 쓴 해석의 근거를 대라는 것이 민원의 요지였다.
아......어차피 한문 실력이 일천하기에 순간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요즘은 대학에서 강의하는 자들도 학문의 깊이가 깊지 않으니 굳이 담당자를 나무라지는 않습니다."라는 문장[민원인이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쓴 구절인 듯하다-인용자]에서 퍼뜩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배운대로 썼습니다'라거나, 고전번역원 성백효 선생님 '파란책' 보세요는 통할 답변이 아니라는 걸 그 문장이 말해주고 있었다.
해석의 전거를 대라니 문득 궁금해졌다.
논어만큼 역주서가 많이 나온 책도 없을진대 우리말풀이를 처음 실은 간행본은 누가 언제 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1590년(선조 23)에 교서관에서 간행한 언해본이 도산서원에 있었다.
임란 이전 선조는 일종의 문예진흥을 장려했는데(소위 목릉성세穆陵盛世라 하지만 전쟁 전의 태평가였을 뿐, 이어진 당쟁으로 그 유산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재위 중 임란을 맞이하고 옥사가 빈번했으며 후계까지 변덕을 부린 왕의 능호가 穆이라니...) 다수의 언해본 간행도 이때 진행된다.
이 언해본 간행 과정이 재미있는데 선조의 명을 받은 이는 미암 유희춘이었으나 미암은 율곡이 경학에 밝다며 율곡을 추천한다.
하지만 율곡은 언해를 마치지 못하고 초고만 남긴채 졸하고 율곡의 초고를 가지고 미암과 송강 정철, 아계 이산해, 그리고 교서관에 근무하던 퇴계의 문인들까지 참여해 1590년 『논어언해』를 간행한다.
실무적인 일이었겠지만 關與官員列銜을 보면 동서인을 망라해 간행에 관여했다.
1612년(광해 4) 중간본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19세기까지 이 판본은 꾸준히 간행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영조대에 도암 이재가 율곡의 초고를 다시 모으고 담와 홍계희가 편찬을 주도해 1749년(영조 25)에 간행한 것이 『논어율곡언해』다.
이 논어율곡언해는 18세기까지 전해지던 家傳本 율곡의 초고를 바탕으로 간행했다고는 하나, 언해에 나타난 한글이 16세기 표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크게 평가받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도암이나 담와의 편집이 영향을 미쳐서 어디까지 율곡의 해석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스토리가 너무 재밌는데다가 하나 같이 네임드들의 이름만 나오니 역시 예로부터 경전 해석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아무튼, 이 언해본들에 나오는 해석은 다음과 같다.

"貧빈하야도 諂텸홈이 업스며 富부하야도 驕교홈이 업소대 엇더하니잇고" (1590년본 『논어언해』)

"貧빈코 諂텸이 업사며 富부코 驕교ㅣ업사면 엇더하니잇고" (1749년본 『논어율곡언해』)
(※ 편의상 아래아는 ㅏ로 표기하고 띄어쓰기 하였음)
두 언해본 모두 대의는 같은 문장이다.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해석하고 있다.
뒤에서부터 해석하여 '○○하기 때문에 ■■하나, □□하기에 ●●하다'라고 풀지 않는다.
이 문장들이 시대에 따라 표기가 달라져왔을 뿐, 그 내용은 입에서 입으로, 스승에서 제자로, 활자에서 전자텍스트로 이어져 온 것이다.
아마도 논어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우리말 해석은 그대로였으리라.
그런데 혹시 우리만 이런 해석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이어졌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다르게 알고 있다면 어쩌지 하는 생각 말이다.
다행히도 국내에 중국, 일본 학자들의 논어 역주본도 출간되어 있었다.
명청대 李卓吾, 王夫之, 劉寶楠, 일본의 伊藤仁齋, 荻生徂徠, 宮崎市定 등 주자註에서 자유로운 인물들도 본문 풀이는 대동소이했다.
보다 확실한 전거를 민원인에게 회신하고 한결 마음의 짐을 덜었다.
덕분에 큰 공부를 했다.

안중근 의사가 사서와 통감을 인용한 글이 많기에 기본부터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리고 노산 이은상 이래 현재 통용되는 『논어』 역주본을 낸 모든 연구자들께 감사드린다.
(확인한 판본-성백효, 박헌순, 홍승직, 정태현, 이기동, 김원중, 김용옥, 이유기, 이강수, 소준섭, 장현근, 김영민)
#論語 #貧而無諂富而無驕
#가난해도아첨하지않고부유해도교만하지않는다
#논어언해 #논어율곡언해
#경전해석이가장어렵습니다
#흰것은종이요검은것은글씨로다
#많은가르침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