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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이 날아가면 고인돌이 되어버리는 석실분, 일본 석무대 고분의 경우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7. 31.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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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청동기시대 유산을 대표한다는 소위 고인돌은 그 형식에 따라 상다리 모양으로 울뚝한 탁자식(북방식)과 옴팡하니 돌뚜껑이 바닥에 찰삭 들어붙은 바둑판식(남방식), 그리고 뚜껑은 돌판으로 덮어버리고 그 아래다가 매장 주체 시설을 마련한 개석식(지하석곽식) 세 가지로 흔히 구분하거니와 

저 중에서도 마지막 개석식은 실상 고인돌이 아니라 완연한 석실분이라, 고인돌로 볼 수도 없거니와 문제는 나머지 둘, 곧 상다리 탁자식과 배깔고 바닥에 누운 바둑판식이 되겠거니와 

저 배깔고 누운 바둑판식도 이런 시설을 만들던 당시(대체로 청동기시대) 지표 사정을 알기 힘든 경우가 많거니와, 이 경우는 돌뚜껑 자체를 봉분으로 썼다 봐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고인돌이라 할 때 그 마스코트와 같은 탁자식. 그 대표주자가 앞서 여러 번 소개한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이라 아래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고인돌, 곧 dolmen이나 menhir가 아니라 실상은 석실분 매장 주체부였다가 그 위와 옆을 덮은 흙무더기가 몽땅 날아가 버리고 남은 뼈다귀라 했거니와 

저 상태로는 결코 무덤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고인돌이라 해서 요새는 모두 무덤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소위 고인돌이 대체하는 기능이 무덤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저 상태로는 결코 무덤 고인돌일 수 없는 이유는 저 상태로는 무덤이라면 모름지기 갖추어야 하는 봉인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저 고인돌은 본래 아래와 비스무리한 상태였다고 봐야 한다.
 

 
물론 저 시대 저걸 처음 만들 적에는 저만치 흙을 쌓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적어도 무덤이라면 흙을 저 비스무리한 상태로 덮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야 봉인 기능을 비로소 장착하기 때문이다.

그 비교사례로써 우리가 생각해야 할 보기가 고대 일본 석실분을 대표하는 아스카 지방 소위 석무대 고분石舞台古墳이라

이 무덤은 우리한테도 매우 친숙하거니와 한반도와도 밀접한 인물로 고대 일본 권신인 소가마자蘇我馬子, 소가노 우마코そが の うまこ가 묻힌 곳으로 간주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현재하는 몰골은 다음과 같다.
 

 
한국과 일본고고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횡혈식석실분た横穴式石室 전형이라, 보다시피 무덤 주인공을 묻은 매장 주체시설을 돌덩이로 덮고 그 벽면은 쌓았으며 바닥 역시 돌덩이로 깔아 무덤방을 만들었으며, 무덤 바깥에서는 안쪽으로 통하는 무덤길을 길다랗게 만들었다.

적어도 저 현재 양태로 말할 것 같으면, 바로 저것이 앞서 살핀 고인돌 세 가지 양식 중에서는 놀랍게도 바둑판식과 개석식을 겸하기도 한다. 

저 지하 아래 무덤방이 없었으면, 무덤길이 없었으면, 딱 저게 고인돌이다.

저 무덤 본래 저 모양이었을 것 같은가?

간단하다. 

저리 구조물 만들고선 흙을 덮어 우리한테 익숙한 그 무덤으로 만들었다가 장구한 시간이 흐르면서 흙더미만 모조리 날아가고 저 몰골로 남은 것이다.

흙은 왜 사라졌을까?

첫째 흘러내려 다 사라졌다. 둘째 인근 건축물을 만들면서 혹은 농사 지으면서 흙을 채취해가는 바람에 저리됐다.

나는 둘 다로 본다. 

요새 한국사회도 그렇지만 봉토분은 적어도 매년 한두 차례 관리하지 않으면 다 흙이 흘러내린다.

그런 점에서 경주 평야에 무수하게 포진하는 적석목곽분 혹은 석실분들이 놀라운데, 생각보다 잘 버텨서 오늘에 이른다.

물론 남아있는 기준으로 보면 그 숫자가 무척이나 많은 듯하지만, 놀랍게도 그 남은 것은 백분지 일도 되지 않다는다. 나머지는?

전부 사라졌다.

적어도 봉분만큼은 다 사라졌고 나아가 그 대부분은 밑창까지 달아났다.

흙더미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렸고,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훗날 그곳을 터전으로 집을 짓거나 농사짓는 사람들이 다 흙을 파갔다!

탁자식? 혹은 북방식 고인돌?

개소리다.

그건 돌멘이 아니다. 그건 석실분 매장주체부가 흙뚜껑이 모조리 날아가버리고 저런 몰골로 남았을 뿐이다.

고인돌?

미안하지만 고인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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