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리피데스 비극, 그 미묘함에 대하여

책이란 것이 본래 요물이어서 평소에서는 쳐다도 안 보다가 막상 그런 책이 보이지 아니하면 애타게 찾기 마련이라
나로선 이 에우리피데스 비극(단국대출판부, 1999)이 딱 그러했으니
이 책은 내 기억에 서울 시내 헌책방에서 발견하고는 사다가 서재에 꽂아놓고선 단 한 번도 펴보지 않았을 것이로대
어찌하여 그런 책이 눈에 띄게 되었으니

혹자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그 블록버스터 디 오디세이 영화 영향이 아닐까 하겠지만, 이번 사연은 실상 그 영화가 화제가 되기 전이었으니
지난 3월 26일 어머니가 쓰러지는 통에 내가 다시금 찾게 된 책이다.
직후 나는 엄마가 구미에서 입원 혹은 재활 생활을 하던 꼬박 두 달 동안 아예 본거지를 김천으로 옮기고선 김천과 구미를 오가는 생활을 계속했거니와
개중 처음 한 달은 아예 병원에 상주하며 간병인 생활을 했고, 그 다음 한 달은 김천과 구미를 매일 출퇴근하는 생활을 했다.
그 생활을 시작할 즈음, 남영동 서재를 뒤져 혹 여가에 볼 요량으로 책 두 종을 뽑았으니, 하나는 한시집이요, 다른 하나가 바로 저 에우리피데스였다.

문제는 이 두꺼운 에우리피데스 반전집(현존하는 에우리피데스 작품 중 거의 절반을 뽑아 천병희 선생이 옮긴 것이다)은 비극집이라고 하지마는 그 전체가 저만치 두터워서 620여 쪽을 헤아리어니와, 실은 저 간병 생활 두 달 동안 단 한 쪽도 꺼내어 읽을 수가 없었다.
노화에 따른 독서력 퇴화도 원인이겠지만, 무엇보다 정신이 나간 엄마가 나를 가만 두지를 않아서 도통 책을 꺼낼 여력도 없었고,
그나마 쉬는 시간이라 해도 도대체가 정신이 사나워 그냥 뻗어버리기 일쑤였으니 암튼 그렇게 저 책은 그 두 달 동안 그냥 김천 집에 쳐박혀 있는 신세였다.
그러다가 무슨 일이 생겼는지 책을 망실하고 말았다.
분명 김천 집에 둔 것으로 기억하는데, 도통 보이지를 아니해서 아 그러면 내가 김천 생활을 정리하면서 도로 서울로 가져갔나 해서 남영동 서재를 뒤져도 도통 보이지 않았다.
그새 변수가 생겼다. 익히 알다시피 저 영화 오디세이가 개봉하고, 그것이 공전의 화제가 되었으니, 그럴수록 깜쪽 같이 사라져버린 저 책이 아쉽기 짝이 없어 김천에 올 때마다 뒤지고, 남영동 서재도 틈날 때마다 뒤졌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저 새로운 판본을 따로 구득할 생각도 나지 않았으니, 괜한 용심이었다고 해 둔다.
그러면서 접때 김천에 왔을 적에 엄마한테 우연히 블라블라해서 책이 없어졌는데, 혹시 엄마가 찾아보시오 하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한데 오늘 김천에 도착하니 떡 하니 내가 근자 마련한 간이 책상에 저 책이 있는 것 아닌가?
엄나 저걸 어디서 찾았소? 하니 저 아랫방에 있더라 하시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그 반가움에 내가 저 책을 바로 독파하려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아니 딱 이뿐이다.
그렇게 애타게 지난 몇 달을 찾던 책을 찾았노라 하는 안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엄마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가?
쓰러지고 재활하고 나서 영 이전과는 달라져 걱정이 이만저만 아닌데, 오늘 하는 말을 들으니 "이제 내가 힘이 좀 생긴 것 같다" 하시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나간 엄마 정신이 저 책과 더불어 다시 돌아왔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