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넘어 보폭 확장하는 재야사학, 작금 핵심은 홍산문화

재야사학 또한 시대에 따른 변신을 거듭하는데,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 보폭 확장이다.
종래 이 재야 논쟁이라면 한반도 삼국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일각 터무니 없는 주장도 있기는 했지만,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으니, 그런 가운데서도 그 핵심은 역시나 고조선 중심지 논쟁이었다.
이 고조선 중심지 논쟁이란 것도 실상 범위를 좁히면 간단해서 기원전 109~108년 한 무제에 의한 위만조선 정벌 병합 당시 그 중심지 왕검성이 어디인가 하는 논란에 국한했으니, 물론 범위를 조금 확대하면, 위만조선한테 무너질 당시 기자조선의 중심지, 혹은 기자 조선 이전에 존재했다는 단군조선(?) 중심지가 어딘가 하는 문제도 있다.
이 고조선 중심지 문제만 해도, 강단사학계에서는 실로 묘해서, 종래에는 압도적으로 죽죽 고조선은 평양에 중심이 있었다 했다가 어느 순간 중심지 이동설이라 해서 요동인가 지금의 만주 지방에 있다가 훗날 최종으로는 평양으로 옮겼다는 이른바 중심지 이동설이 지금은 대세를 점거한다.
이 중심지 이동설은 지들은 아니라 방방 뜨겠지만 실은 생각보다 재야 영향이 굉장히 강하다.
나아가 재야 사학 대부는 놀랍게도 독립투쟁에 투신한 단재 신채호, 그리고 그에서 감발한 위당 정인보다.
재야사학이 기성 역사학을 식민사학이라 비판하는 가장 큰 무기가 바로 신채호다.
다시 본론으로 가서 지들이야 그렇지 않다 주장하겠지만, 고조선 중심지가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로 이동해 왔다는 이 학설이 정립하기까지 재야사학 영향이 실은 굉장히 강하다.
문제는 이런 이동설이라 하지만, 평양 말고는 그 이전 고조선 중심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못한다.
물론 연구자마다 여기 어드메가 이전 고조선 중심지라 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실제 그것을 받침할 만한 고고학적 증거를 결정적으로 들이밀지는 못한다.
그에 견주어 재야사학은, 이것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는 가운데 아예 그 중심지가 평양이라는 주장 자체를 거부한다.
이것이 기존 강단사학과 갈라지는 가장 완고한 대목이다.
이 지점이 실은 강단사학 강점이기도 한데, 무엇보다 평양과 주변 일대에서 활발히 드러나는 낙랑군과 대방군 관련 유적을 결정적인 근거로 댄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자리에 설치한 지방행정 단위들이다.
이것이 종래 재야사학과 강단사학이 가장 크게 갈라지는 대목이며, 재야 강단 논쟁은 이 문제를 두고서 박터지는 싸움을 벌이게 된다.
환단고기는 이런 흐름을 보면 훗날 나중에 가세하게 된다.
이 환단고기는 20세기 한국 내셔널리즘의 발로다.
다시 말해 앞잡아도 19세기 후반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문헌이다.
이 문헌이 80년대에 느닷없이 공개되어 재야사학계와 그 절대하는 종교라 할 만한 대종교 계열 종단을 중심으로 서서히 세를 굳혀간다.
따라서 80년대 이전 재야사학이라 해도 환빠랑은 실은 관련이 없다. 그 전에는 이 문헌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환단고기는 종래 정통 사서와 고고학 증거를 기반으로 박터지게 싸우던 재야과 강단 싸움을 근간에서 변질케 하는데, 이를 통해 무엇보다 재야사학은 보폭을 엄청 넓히게 된다.
환단고기? 이건 실은 우리가 아는 고조선 이전 이야기를 출발로 삼는다. 물론 고조선이 중심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이룩한 더 방대한 신학체계를 구축하는데, 시베리아 대륙 중심주의를 내세운다.
이 시베리아 중심 사관은 좀 더 범위를 좁히면 동북아시아 사관이라 할 만하다.
저들은 한민족 문명이 대략 9천년 전인가? 저 광할한 대륙을 기반으로 구축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문제는 이 환단고기에 의지한 역사관은 무엇보다 이를 받침하는 절대의 성전인 환단고기 자체가 품은 황당함들로 인해 적지 않은 장애에 부닥치게 된다.
무엇보다 이를 받침할 만한 여타 증빙 자료가 없거나 태부족인 상황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고민에 봉착한 환단고기 종사파, 이른바 환빠들이 환장할 만한 고고학적 발견들이 80년대 이후 중국발로 연이어 타전하기 시작한다.
바로 홍산문화紅山文化다.
이 홍산문화는 오늘 현재 분포범위가 굉장히 넓어 요하 서쪽 내몽골을 넘어 하북성 북부까지 침범한 상황이다.
최근 중국 고고학 발굴성과들을 보면 하북성 승덕까지 치고 내려왔다.
이쪽 문화를 정통으로 공부한 복기대는 몇 년 전 낸 홍산문화 단행본에서 홍산문화 포진 남쪽 범위는 천진까지라고 예고한 바 있는데, 놀랍게도 그 예상치가 그대로 맞아떨어지고 있다.
지금의 북경 북쪽, 그리고 요하 서쪽 광할한 스텝지구를 커버하는 이 홍산문화는 신석기문화다.
그 존속 시점은 논란이 많기는 하지만 대략 기원전 6천년 무렵에서 기원전 5000년 무렵이 전성기로 본다.
이 홍산문화는 근래에는 아예 홍산문명이라는 말로도 일컫는데, 청동기도 발명되기 훨씬 이전 신석기 문명임에도, 그 드러난 양상 그리고 근자 드러나는 양상을 보면 도대체 이것이 신석기문화인지, 청동기시대 국가 등장 무렵 단계인지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고도하는 문화 단계에 들어섰음을 본다.
이 홍산문화를 어찌 볼 것인가가 문제가 되거니와, 재야사학?
이를 두고 사이비역사학이니 유사역사학이니 강단에서는 비판하기는 하지만, 저 광대한 홍산문화를 한국사 영역, 특히 그 시원으로 끌어들인 일등공신은 놀랍게도 재야사학이다.
물론 이런 말에 강단사학, 특히 고고학은 딴 말을 할 것이며, 우리도 그 중요성을 다 안다 헛소리 찍찍해대겠지만, 천만에.
저 홍산문화는 한국사 시원이라는 관점에서 분명 접근해야 하는데, 그런 일을 적극적으로 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른바 재야사학이다.
저 홍산문화를 토대로 삼아 그 터전 위에서 이제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본격으로 사용하는 하가점 하층문화와 하가점 상층문화가 등장하며, 이것이 훗날 고조선일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사 시원에서는 결코 빠뜨릴 수도 없고 빠뜨려서도 안 되는 예맥족이 등장한다.
종래 환단고기 신봉파들이 증거가 없는 신도들이었다면, 홍산문화가 본격 부각하면서 재야사학은 아연 모습을 탈바꿈하게 된다.
저 홍산문화는 실체다. 환단고기는 환상이겠으나 홍산문화 혹은 홍산문명 자체는 실체다.
한데 놀랍게도 이 홍산문화가 등장 활개하는 시점이 환단고기가 말한 한민족 시원 시점과 신비롭게도 얼추 맞아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왜 재야사학이 홍산문화에 환장하는가?
그 해답은 바로 이에서 말미암는다.
재야사학이라 해서, 환빠라 해서 무턱대고 그네들을 정신병자로 내칠 수는 없다.
그들도 나름대로 끊임없이 진화해서 오늘에 이르렀고, 내일은 또 내일에 맞는 옷을 갈아입을 것이다.
그네들 주장이라 해서 다 거짓말이니 다 내쳐야 한다?
그러는 지들은 얼마나 제정신인 역사를 하느냐고 나는 매양 질타하거니와, 그 허황함은 도낀개낀이라, 누가 누구를 비난한단 말인가?
저 홍산문화만 해도 제대로 연구한 이가 몇 되지 않는다.
그것을 선구로 연구한 분들, 국내에서는 그 시원은 선문대 교수로 봉직한 이형구 선생이 가장 먼저 열었고, 이후 복기대를 필두로 몇몇 전업 연구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신통방통하게도 저 홍산문화를 주되게 논급한 사람은 모조리 기성 강단사학계에서는 다 재야, 혹은 재야성 연구자로 매도하지 않았던가?
핵심은 날아가고 변죽만 남은 희한한 환빠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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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날아가고 변죽만 남은 희한한 환빠 논쟁
이번 소위 환빠 사태 발단은 그 시작이 이재명 대통령의 입이었으니 동북아역사재단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느닷없이 환빠니 환단고기를 거론한 까닭이다.이날 이 대통령이 질의하고 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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