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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포렌식 팀이 미스터리 중세 공작이 누군지 확인하다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1. 7.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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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Eötvös Loránd University
 

부다페스트 마르게리타 섬Margaret Island에 있는 13세기 도미니크 수도원Dominican monastery에서 발굴된 유골. 사진: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Eötvös Loránd University

 
헝가리 연구진이 주도한 국제 프로젝트에서 아르파드Árpád 왕조와 류리크Rurik 왕조 출신 막소 공작Ban of Macsó 벨라Béla의 유해가 성공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번 조사는 수 세기 동안 제기되어 온 고고학적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 

타마스 하이두Tamás Hajdu (외트뵈시 로란드Eötvös Loránd 대학교ELTE TTK 과학부 인류학과)가 조정한 연구에서 ELTE RCH 고고유전체학 연구소 안나 셰치니-나기Anna Szécsényi-Nagy와 노에미 보르벨리Noémi Borbély는 유전자 분석을 담당했다.

이 결과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협력을 통해 역사적 데이터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검증하고 과거의 폭력적 죽음을 전례 없는 세부 사항까지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새로운 연구는 저널 Forensic Science International: Genetics에 게재되었다. 

1915년, 부다페스트 마르가레테 섬Margaret Island에서 고고학 발굴 작업을 하던 중 도미니크회 수도원Dominican monastery의 성구실sacristy에서 한 젊은 남성 골유골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의 정황, 역사적 자료, 매장 장소, 그리고 유골에 남아 있던 외상 흔적 등을 바탕으로, 이 유해는 아르파드 가문House of Árpád의 공작, 막소 공작Duke of Macsó 벨라Béla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막소 공작 벨라Béla of Macsó (1243년 이후 출생~1272년 11월 사망)는 외가 혈통으로는 헝가리 국왕 벨라Béla 4세의 손자였고, 친가로 보면 서기 9세기 이래 700년에 걸쳐 수많은 키예프 대공Grand Dukes of Kiev을 배출한 북부 스칸디나비아계 류리크 왕조Rurik dynasty에 속했다. 

13세기 오스트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헤데르 가문Héder family의 반 헨리크Ban Henrik "쾨세기Kőszegi"와 그의 동료들은 1272년 11월에 막소 공작 벨라를 암살했다.

당시의 자료에 따르면, 심하게 훼손된 막소 공작 벨라의 유해는 마르기트Margit (벨라의 자매)와 에르제베트Erzsébet (벨라의 조카딸)가 수습해 섬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에 매장했다. 

발굴 후 유해는 부다페스트 대학교 인류학 연구소(현 ELTE TTK 인류학과)의 라요스 바르투츠Lajos Bartucz에게 전달되어 생물인류학적 분석을 받았다.

바르투츠는 이 남성 유골에서 23개 칼자국과 두개골에서 여러 개 치명적인 부상을 확인했다.

바르투츠에 따르면, 공작은 결투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에서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공격을 받았고, 심지어 바닥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바르투츠는 1936년 신문 기사에서 이 유골에 대해 언급했고, 1938년 자신의 저서에 두개골 사진을 게재했다.

그 후 2018년까지 유골에 대한 소식은 나오지 않았다.

인류학자들은 이 유골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2018년에 헝가리 자연사 박물관 인류학 컬렉션에 있는 수만 명 인류학 컬렉션 나무 상자에서 우연히 후두개골이 발견되었고, 두개골은 ELTE 인류학과 아우렐 퇴뢰크Aurél Török 컬렉션에 보관되어 있다. 

2018년, 타마스 하이두Tamás Hajdu (ELTE TTK 생물인류학과) 주도 하에 인류학자, 유전학자, 고고학자, 고식물학자, 안정 동위원소 및 방사성 탄소 전문가, 그리고 치과의사로 구성된 국제 연구팀이 구성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주요 목표는 유골에 대한 복잡한 법의학적 및 생물고고학적 분석을 수행하여, 유골의 유전적 신원을 확인하고 공작의 삶과 죽음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이 유골 발견은 벨라 3세의 유해를 제외하고, 막소의 벨라가 현재 아르파드 가문의 거의 완전한 유골이 보존된 유일한 후손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다.

더욱이, 이 연구는 아르파드 가문의 유전적 배경뿐만 아니라 류리크 왕조의 유전적 배경에 대한 데이터도 제공할 것이다. 

이번 국제 협력에는 빈 대학교, 볼로냐 대학교, 헬싱키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연구진, 그리고 ELTE 생물인류학과, ELTE RCH 고고유전체학 연구소, 부다페스트 역사 박물관, 헝가리 자연사 박물관, 헝가리 핵연구소, 데브레첸 대학교 치과대학의 헝가리 연구진이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 틀 안에서 재수행된 생물인류학적 분석 결과, 마가렛 섬 도미니카 수도원 성구실 바닥 아래에 묻힌 유골은 20대 초반 젊은 남성으로 밝혀졌다.

유골 샘플의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은 두 개의 독립적인 실험실에서 동시에 진행하여 정확한 연대를 확인했다. 첫 번째 14C 연대 측정 결과는 예상보다 더 이른 시기(13세기 후반)로 나타났다.

(이 대목에 뭔가 기술이 누락한 듯하다.) 

그러나 데브레첸Debrecen 원자력연구소Nuclear Research Institute 연구원들이 수행한 일련의 측정 결과, 이러한 현상은 식단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해당 유골은 다량의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했으며, 그중 상당량의 수생 동물(어류 및 아마도 조개류)은 고대 탄소원을 섭취하여 뼈에 소위 "저장소reservoir" 효과를 일으켰다. 

유골 치석calculus 을 분석하여 식단 재구성을 더욱 심화했다.

치석에는 1,000개가 넘는 미화석microfossils 이 보존되어 있었다.

확인된 전분 알갱이는 밀과 보리에서 유래되었으며, 제분, 조리, 굽기 등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는 익힌 밀 세몰리나wheat semolina와 구운 밀빵baked wheat bread을 섭취했음을 시사했다. 

과거 개인의 이동성을 나타내는 스트론튬 동위원소 비율strontium isotope ratios 측정에 따르면, 조사 대상 남성은 매장된 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유년기를 보내지도 않았다.

유년기 수치는 부코바르Vukovar와 시르미아Syrmia 지역(현재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에 속함. 이전에는 이 지역이 중세 헝가리 왕국의 막소 바나트Macso Banat 에 속했음)을 비롯한 카르파티아 분지Carpathian Basin의 여러 지역에서 측정된 수치와 일치한다.

유년기 후반에 해당 남성은 다른 지역(현재 부다페스트 주변 지역일 가능성도 있음)으로 이주했다. 

조사 대상 남성의 확실한 유전적 신원 확인은 ELTE RCH 고고유전체학 연구소 안나 셰치니-나지Anna Szécsényi-Nagy와 노에미 보르벨리Noémi Borbély가 수행했다.

역사적 자료에 나타난 계보는 상호 강화되는 여러 유전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다.

이 자료는 막소 공작 벨라가 벨라 3세의 증손자(4촌)였음을 명백히 증명하며, 이 사실과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공작과 성 라디슬라우스Saint Ladislaus의 유전적 거리는 약 두 배다. 

전체 유전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유전적 구성 추정 결과는 스칸디나비아 유전적 구성 요소(거의 절반)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상당량의 동지중해 구성 요소와 소량의 초기 중세 중부 유럽 구성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예외적으로 높은 양으로 존재하는 북부 구성 요소는 조사 대상 개인의 류리크Rurik 기원을 뒷받침한다. 

동지중해와의 연관성은 조사 대상 남성의 외할머니를 가리킬 수 있다.

막소 공작 벨라의 외할머니는 벨라 4세의 아내이자 비잔틴 황실 일원이었던 마리아 라스카리나Maria Laskarina였다.

Y 염색체 연구는 조사 대상 개인의 류리크 부계 혈통에 대한 역사적 데이터를 확인했다. 

2023년, 러시아 고고유전체학 연구에서 13세기 류리크 왕조(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Dmitry Alexandrovich)의 유해가 동일한 부계 혈통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부계에서 왕조의 계보는 야로슬라프 Yaroslav1세(야로슬라프 블라디미로비치Yaroslav Vladimirovich, 현자 야로슬라프Yaroslav the Wise로도 알려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생존하는 류리크 왕조 후손들의 유전적 자료도 벨라 공작이 류리크 왕조와 부계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공작의 사망 경위를 정확하게 재구성하고 알려진 역사적 자료와 비교하기 위해 상세한 법의인류학적 분석도 수행되었다.

유골에 대한 법의인류학적 및 치과학적 분석 결과, 두개골에 9개, 후두골에 17개, 총 26개 사망 전 손상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모두 단일 폭력 사건으로 인한 것이다.

이러한 손상은 세 사람의 동시적인 공격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명의 공격자는 정면에서 피해자에게 접근했고, 다른 두 명은 좌우에서 동시에 피해자를 공격했다.

손상 부위를 보면 공작은 암살자들과 정면으로 대치하며 공격을 인지하고 있었고, 자신을 방어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공격자들은 세이버saber와 롱소드longsword, 두 가지 유형 무기를 사용하여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

선명하고 깊은 자상은 암살 당시 피해자가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공격 순서를 새롭게 재구성한 결과, 공격은 머리와 상체에 칼을 휘두르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피해자가 추가 타격과 베임을 막으려다 심각한 방어 부상을 당했다.

마지막으로 공격자들은 피해자를 옆구리에 추가 타격하여 영구적으로 무력화했다.

그들은 공격을 계속했고, 공작이 땅에 쓰러지자 공격자들은 머리와 얼굴에 치명적인 부상을 냈다. 

공격의 강도와 얼굴에 가한 수많은 베임과 베기는 피해자의 격렬한 감정적 반응(예: 갑작스러운 분노, 증오)을 시사하는 반면, 부상의 조직적인 양상은 계획적인 살인을 시사한다.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볼 때, 1272년 11월 막소 공작 벨라의 암살은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계획된 것이었지만, 결코 냉혈하게 자행된 것은 아니다. 

More information: Tamás Hajdu et al, Murder in cold blood? Forensic and bioarchaeological identification of the skeletal remains of Béla, Duke of Macsó (c. 1245–1272), Forensic Science International: Genetics (2026). DOI: 10.1016/j.fsigen.2025.103381 

Provided by Eötvös Loránd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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