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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 이부시랑 호굉胡紘 묘지명 전문 번역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1. 1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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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중국 절강성浙江省 여수시丽水市 경원현庆元县 송원가도松源街道에서 드러난 남송 시대 이부시랑 역임한 고위 관료 호굉胡纮(1137~1203) 무덤과 그의 묘지명을 소개했거니와 

이 묘지명 석문 전체를 고려사 전공인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강민경 선생이 번역했다. 

 
[원문] 
宋通議大夫華文閣待制胡公紘,字幼度,生於紹興丁巳之三月。自上世□□五季亂,為龍泉著籍,至父彥光,始以儒學教公。年未冠,已頭角嶄然,見於□□□。己卯舉鄉書,庚辰入太學,擢癸未進士第,授迪功郎中,丙戌儒學官,分教會(稽),再主金陵學,淳熙戊戌,関陞從事郎,已亥隨使出疆,回授文林郎,繼為楚之錄掾,以慶典循儒林郎邊賞,轉承直郎,丁未用剡薦,改奉議郎,宰饒之鄱陽,以光廟登極恩,轉承議郎磨勘,轉朝奉郎,癸丑秩滿,以縣最除進奏院。 今上登極,轉朝散郎,乙卯遷司農寺簿,越三月,改秘書郎,又二月,除監察御史,排擊奸偽,風望凜然。丙辰春,轉朝請郎,夏,除太常少卿,歷左右史兼玉牒檢討,以忠鯁結知。丁已權工部侍郎兼實錄院修撰。遇郊賜開國食邑,戊午除權禮侍,秋,轉朝奉大夫,冬,試吏部侍郎,賜金帶,已未參典文衡,去浮取實,以言(譣)歸里,冬,奉祠命,庚申起知夔府,改知和州,轉朝散大夫,復帥東廣屬,傜寇猖(獗),公蕩平之,辛酉以功進華文閣待制,壬戌丐祠,得請磨勘,轉朝請大夫,居,無(祗)召赴行在,公自知與時落落,抗章力辭。言者因復排之,由是放意林泉,雖憂時憫俗,不能去懷,然,無復用世之心矣。嘉泰癸亥十月,以微疾請老,轉朝議(大)夫。 夫致仕竟以疾終,享年六十有七。訃聞,天子贈通議大夫。公娶吳氏,封令人。子二人,長紳卿,授承務郎,娶蔡氏,先公而卒;次正卿,魁銓闈,授修職郎,松溪簿,娶何氏;女三人,長適吳元琰,次黃極,季永興主簿項得一;孫女二人,曰院,曰居。初,令人葬釜山,不利,今以開禧乙丑十二月庚申,與公合葬於魏溪之原。 公立朝,大節當在國史,行有述,志有銘文,有集行於世,姑撫其始終之梗概,以納諸土宮。悲夫,銘石之藏,其與天地相為長久也歟! 孤哀子正卿泣謹書。
 

[번역] 
송나라 통의대부 화문각 대제待制 호공 굉胡公紘은 자字가 유도幼度이며, 소흥紹興 정사년(1137) 3월에 태어났다.

선대는 오대五代의 난을 피해 용천龍泉에 정착하였고, 부친인 언광彥光이 비로소 유학으로 그를 가르쳤다.

성년이 되기 전부터 이미 재능이 두드러져 사람들 주목을 받았다.
기묘년(1159)에 향시에 급제하고, 경진년(1160)에 태학에 입학하였으며, 계미년(1163)에 진사로 급제하여 적공랑중迪功郎中에 임명되었다. 

병술년(1166)에는 유학교관으로 회계會稽에 파견되었고, 다시 금릉金陵의 부학府學을 주관하였다.

순희淳熙 무술년(1178)에는 종사랑從事郎으로 승진하였고, 기해년(1179)에는 사신을 따라 국외에 나갔다가 돌아와 문림랑文林郎에 임명되었다.

이후 초楚 지방(지금의 호남성 일대) 녹연錄掾을 지냈고, 경사로운 은전을 입어 그에 따라 유림랑儒林郎으로 포상받았으며, 이어 승직랑承直郎으로 승진하였다. 

정미년(1187)에는 천거를 받아 봉의랑奉議郎으로 임명되었고, 요주饒州 파양鄱陽의 현령을 지냈다. 광묘光廟께서 즉위하면서 승의랑承議郎으로 승진하고, 곧 조봉랑朝奉郎으로 전임되었다.

계축년(1193)에 임기를 마치자 군현 중 최우수 평가를 받아 진주원進奏院에 임명되었다. 

지금 황제께서 즉위하자 조산랑朝散郎으로 승진하였고, 을묘년(1195)에는 사농시부司農寺簿로, 석 달 뒤에는 비서랑秘書郎으로, 다시 두 달 뒤에는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임명되었는데 간신을 탄핵하고 기풍이 엄정하여 풍도와 명망이 늠연하였다.

병진년(1196) 봄에는 조청랑朝請郎으로, 여름에는 태상소경太常少卿으로 임명되었고, 좌우사左右史와 옥첩검토玉牒檢討를 겸임하며 충직함으로 이름을 떨쳤다. 

정사년(1197)에는 권權 공부시랑工部侍郎과 실록원 수찬을 겸임하였다. 교제郊祭에 참여하여 개국 식읍을 하사받았고, 무오년(1198)에는 권 예부시랑으로, 가을에는 조봉대부朝奉大夫로, 겨울에는 시試 이부시랑을 맡고 금대金帶를 하사받았다.

기미년(1199)에는 과거 시험 감독에 참여하며 실질을 중시하고 형식은 제거하였는데, 직언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겨울에는 봉사奉祠의 명을 받았다. 

경신년(1200)에는 지기부知夔府로 복직하였고, 지화주知和州로 전임되었으며,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옮겼다. 다시 동광東廣 지역을 다스렸는데 요구傜寇가 창궐했으나 공이 이를 평정하였다. 

신유년(1201)에는 공로로 화문각 대제로 승진하였고, 임술년(1202)에는 봉사직을 청하여 허락받고 조청대부朝請大夫로 전임되었다. 조정[行在]에서 부름이 있었으나 공은 스스로 시대와 어울리지 않음을 알고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니 이에 거듭 물리쳐졌고, 이로 말미암아 뜻을 놓아버리고 숲과 샘을 벗 삼아 살았다. 비록 시속을 걱정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겼으나 세상에 나아갈 뜻은 없었다. 

가태嘉泰 계해년(1203) 10월, 가벼운 병을 이유로 정년퇴직을 청하여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전임되었는데 끝내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7세였다.

부고가 전해지자 황제께서는 통의대부를 추증하였다. 

공은 오씨吳氏와 혼인하였고, 그녀는 영인令人으로 봉해졌다.
아들은 둘이라, 장남 신경紳卿은 승무랑承務郎에 임명되었고, 채씨蔡氏와 혼인하였으나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차남 정경正卿은 과거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수직랑修職郎과 송계松溪 현령을 지냈고, 하씨何氏와 혼인하였다.

딸은 셋을 두었으니, 맏이는 오원염吳元琰에게, 둘째는 황극黃極에게, 막내딸은 영흥주부 항득일項得一에게 출가하였다. 손녀는 둘로, 이름은 원院과 거居이다. 

처음에 영인은 부산釜山에 묻혔으나 지리가 좋지 않아, 개희開禧 을축년(1205) 12월 경신일에 공과 함께 위계魏溪 언덕에 합장되었다.

공이 조정에 있을 때의 큰 절의는 마땅히 국사에 기록되어있으며, 행적은 기술되어 있고, 묘지명도 있으며, 문집도 세상에 전해진다.

일부러 그 생애의 대략을 정리하여 묘[土宮]에 함께 묻는다.

슬프도다, 비석에 새긴 글이여, 하늘과 땅처럼 길이 오래 남으리라! 

고애자 정경이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쓴다.
 
남송 이부시랑 호굉胡紘 묘지명
https://historylibrary.net/entry/hogwoeing

남송 이부시랑 호굉胡紘 묘지명

2014년 중국 절강성浙江省 여수시丽水市 경원현庆元县 송원가도松源街道에서 공사 중 남송 시대 이부시랑을 역임한 고위 관료 호굉胡纮(1137~1203)과 그의 부인 묘가 발굴됐거니와 그 소식은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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