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재수필容齋隨筆과 수서隋書 사이, 옹골찬 김장배추 vs. 씨래기

번역본이기는 하나 둘 다 그 기준으로 분량이 만만찮기는 마찬가지긴 하거니와
또 꼭 그 경계지점이 저 둘이 선다 하긴 힘들지만 대략하는 상징 혹은 레프리젠터티브로서
저 둘이 나한테는 뚜렷한 분기를 이루니
간단히 말하면 용재수필容齋隨筆로써 나는 무엇인가 새로움을 채우는 성장이 완전히 끝나고 도태로 들어섰으니
그 도태한 증언이 저 수서隋書다.
저 정도 전질로 내가 잡는 순간 내리 죽죽 통독한 마지막이 용재수필이란 뜻이며
수서는 저 용재수필 여운이 채 가시지 아니하고선 그 출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바로 통독에 달라들었다가
더는 구미도 땡기지 아니하고 무엇보다 체력이 받침하지 아니해서 본기 조금이랑 열전 조금, 제사지 조금 들춰보고선 이내 팽개치고 말았으니
이후 단 한 번도 펼치지 못하고선 지금은 먼지만 뒤집어 쓰고 말았다.
용재수필까진 참말로 겁없이 달렸으니 통독으로 만족할 수는 없어 저 전질을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당장 필요한 것들, 혹은 훗날 요긴할 수도 있다 생각한 것들, 그리고 그에서 내가 발분해 내 스스로가 깨친 것들이라 생각하는 그것들은 다 하나하나 따로 갈무리해 두었으니 그 메모장들이 내 컴퓨터 어딘가에는 파일로 갈무리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메모장을 차기箚記라 하며, 이 차기가 결국 기자이자 연구자인 나로서는 기사거리, 논문 거리, 책 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생산성이 용재수필로써 끝나버리고 이제는 야부리로 사는 시대로 접어든다.
야부리는 소비한다는 뜻이다. 충전은 없이 끊임없는 방전만 거듭한다.
간단히 용재수필까지는 충전, 수서 이래는 방전이 되겠다.
그랬더니 이젠 빈 배터리만 남았다.
아니 빈 깡통이라 소리만 요란하지 실속은 없다.
한땐 나 스스로를 속이 옹골찬 김장배추를 견주었지만, 뜨거운 물에 들어갔다 나온 씨래기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