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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시험2

기어이 곤장 맞고 죽은 쪽집게 과거시험 대리자 과거를 치르려면 경전과 시서에 통달해야하는 것은 기본이요, 과거에만 쓰이는 양식의 시와 문장에 익숙해야했다. 시의 경우 과시 또는 공령시라 했고 문장은 과부라고 했다. 이는 엄청나게 형식화해(중국 명청대의 팔고문만큼은 아니지만) 채점하기는 편했지만 제대로 된 시문으로 평가받기는 힘들었고 문집 같은 데서도 산삭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과거를 치르려면 꼭 필요했기에 선비들은 이런 과시들을 손수 베껴 익혔다. 과거 모범답안집을 만든 것이다. 가끔은 그런 데서 퍽 의미있는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이 사진이 그 한 예인데, 이는 17세기 문인인 이재영(1553-1623)이 지었다는 과시이다. 그는 서출이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군공을 세워 면천되고 정시문과에 장원할 정도로 문장에 뛰어났다. 그를 조선통신사 수행원으.. 2023. 4. 19.
차천로는 왜 과거시험을 대리했을까 조선 선조 때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개성 교수(開城敎授)를 지냈고, 1583년 중시에도 입격하였습니다. 1586년 정자(正字)로 있던 그는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주는 불법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문제는 대충 쓰면 될 일이었지만 그 문장력 때문에 여계선이 장원 급제하여 일이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차천로는 이 일로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가 글재주가 있다는 이유로 1588년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속사정을 음미하면 당시의 부조리가 모조리 담긴 사건이었습다. 첫째, 그는 비교적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던 까닭에 문과에 중시까지 거쳤어도 승진이 되지 않았습니다. 글 솜씨 좋다는 평가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2020.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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