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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7)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앞서 우리는 중국에서는 곤충, 나무뿌리나 도굴꾼 침범을 막고자 주자朱子가 실용적인 목적으로 채택한 요장묘가 주자가례朱子家禮 형태로 한반도에 수입될 때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살펴 보았다. 그리고 불교의식으로 점철한 고려시대 제반 장송葬送松 의례를 개혁하고자 하는 조선시대 신진사대부들이 일련의 개혁 일환으로 고려시대에 유행한 석실石室 대신 주자가례에 기록된 대로 회곽묘를 도입하고자 한 것도 앞에서 이야기했다. 이제는 이렇게 도입한 회곽묘가 실제 조선 역사에서 어떻게 변천하고 발전하였는지를 살펴야겠다. 조선시대 회곽묘의 발굴상황 앞에서 이야기했 듯 조선 회곽묘는 그 원류라 할 중국에서 기술적인 도입한 것이 아니라, 주자가례가 기술한 내용을 지남指南으로 삼아 그..
이성계의 장송의례와 수릉壽陵 태조실록 권제7, 태조 4년(1395) 3월 4일 정유 첫 번째 기사로 이성계가 자기가 묻힐 묏자리를 둘러본 일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상께서 과주(果州)로 거둥하여 수릉(壽陵) 자리를 살폈다. 돌아올 때 도평의사사 주최로 두모포(豆毛浦) 선상(船上)에서 술상을 차리고 여러 신하가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정도전이 나와서 말하기를 “하늘이 성덕(聖德)을 도와 나라를 세웠으매, 신들이 후한 은총을 입고 항상 천만세 향수(享壽)하시기를 바라고 있사온데, 오늘날 능 자리를 물색하오니, 신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고 흐느껴 눈물 흘리니, 임금이 말했다. “편안한 날에 미리 정하려고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우는가?” 왕심촌(往尋村) 노상(路上)에 이르러 임금이 말을 달려 노루를 쏘려 했지만, 마부 박부금(朴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