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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장6

[귀주대첩] (13) 노복 터진 강감찬 강감찬은 빌빌 쌌다. 948년, 고려 정종定宗 3년에 태어난 그는 빌빌 싸다 서른여섯 중늙은이가 다 된 983년, 성종成宗 2년에야 최승로崔承老가 시험감독관 총대장이 되어 실시한 과거 시험 갑과甲科에 강은천姜殷川이라는 본명으로 등단해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나이에 견주어 출세는 굉장히 늦어 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주장하는 조정 대세에 맞서 홀로 몽진을 주장해 관철함으로써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래도 계속 빌빌 쌌다. 이렇다 할 요직을 지낸 적도 없다. 이런 그가 역사의 주역으로 등단하기는 제3차 고려거란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전운이 한창 감돌던 그 무렵, 현종은 지난날 몽진, 곧 일단 튀고 보자 전법을 제시한 강감찬을 기억하고는 그를 서경유수로 임명하고, 나아가 서북면을 지키는 총.. 2024. 2. 24.
의자랑 지팡이를 하사받는 장면을 담은 조선시대 그림 대개 중신重臣이 나이 칠십을 넘으면 퇴직을 신청하게 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임금이 기다렸다는 듯 사직 처리해 버리면 가오가 상하는지라 거개 처음에는 반려하는 모양새를 취하기 마련이라 그래도 나이는 들었으니 그동안 수고했으니 앞으로도 잔소리하지 말고 가끔 조정에 나와서 후배들 밥이나 사라 해서 지팡이랑 의자를 선물로 내리게 되는데, 이 세트를 보통 궤장几杖이라 한다. 그렇게 받은 의자 지팡이 실제로 사용했겠는가? 임금님께서 내려주신 것이라며 금지옥엽 대개는 집안 사당에다 쿡 쳐박아두고는 가보라 해서 전하기 마련이다. 그리 받은 안석이 수천 점 수만 점일 텐데 그럴 듯한 세트 모양으로 현전하는 것으로는 경기도박물관이 그 집안에서 기증받은 이경석 할배 오직 한 건이라는 점이 신통방통할 뿐이다. 이 건은 여러 .. 2023. 8. 24.
늙으면 물러나야, 노퇴老退와 궤장几杖 하사 앞선 강의 혹은 글에서 나는 595년생인 김유신이 만 70세가 되는 해(664) 정월에 사표를 집어던지는 장면을 근거로 70세가 되면 치정致政한다는 예기禮記 왕제王制편 언급이 불문률처럼 통용하는 신라사회 한 단면을 소개하면서, 이런 모습이 고려시대에는 더욱 극성을 부리면서, 때로는 이것이 중요한 정치역학 구도가 되어 정적을 퇴출하는 방법으로 작동하기도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아가 70세 퇴직을 허락하면서, 혹은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 무렵이면 임금이 그 원로신하한테 궤장几杖이라는 지팡이와 의자를 하사하면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기를 기원하는 의식과 더불어, 그런 사람이 궁궐을 출입할 적에는 허리를 굽히지 아니해도 되고, 임금 앞에서는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아니해도 되며, 가마를 타고 들락거릴 수 있게 .. 2020. 9. 16.
이팝 아래서 하염없이 눈물만 안경이 없으면 책은 읽을 수도 없고 썬구리 끼지 않으면 여름날 낮엔 다닐 수도 없고 그런 날 이팝나무 아래선 하염없이 눈물만 질질 흐르며 버스나 쟈철을 타서 앉지 않으면 힘이 든다. 궤장几杖은 70이 아니라 50에 하사해야 한다. 지난 오년간 일어난 신체변화인데 기억나는 것만 적어둔다. 2019. 5. 7.
김유신의 정년퇴직과 삽질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武王) 上에는 이 왕 재위 4년(664) 봄 정월에 "김유신이 늙었음을 이유로 정년퇴직하겠다고 했지만, 윤허하지 아니하고 궤장을 하사했다(春正月 金庾信請老 不允 賜几杖)"고 한다. 궤장이란 등받이 의자인 안석(案席)과 지팡이라, 늙은 신하에게 내리는 최고의 하사품이다. 이를 하사받으면 그런 신하는 예외없이 대궐에 들어서면서 내리지 않아도 되고, 그 문을 들어설 때는 허리를 굽히지 아니해도 된다. 물론 이런 영광이 있으려면, 그에 걸맞는 공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궤장은 곧 은퇴의 의미이기도 했으니, 세대교체를 위해 이제 그만 골방 늙은이로 물러나 있으라는 완곡한 뜻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왕조시대에 정년퇴직은 70세였다. 이는 이미 《예기(禮記)》에서 규정한 것으로,.. 2018. 3. 20.
김유신론 (번외판) 70세에 사표 던진 김유신, 맘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 효소왕본기를 보면 원년(692) 8월에 "대아찬 원선(元宣)을 중시로 삼았다(以大阿飡元宣爲中侍)로 삼았다"고 하고, 그 3년 뒤인 같은 왕 4년(695) 겨울 10월에는 "중시 원선이 늙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中侍元宣退老)"고 한다. 이 원선은 김원선(金元宣)이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그 계보가 보이지 않으나,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흠순(金欽純)의 아홉 아들 중 여섯째다. 그가 언제 출생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출생 시기를 대략 짐작할 근거는 있다. 그의 아버지 김흠순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생몰년이 없지만, 김유신 동생이라 했으니, 형이 태어난 595년 이후 출생해야 한다. 《화랑세기》에는 그가 599년, 건복(建福) 16년이자 진평왕 21년에 태어나 8.. 2018.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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