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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9

징비록懲毖錄, 통절한 반성을 표방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회개는 없는 희유한 책 "백성들이 떠돌고 정치가 어지러워진 때를 만나 나처럼 못난 사람이 나라의 중책을 맡아 위기를 바로잡지 못하고 무너짐을 떠받치지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로대 그럼에도 외려 시골에 눈끄고 살면서 구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어찌 나라의 관대한 은혜가 아니겠는가? 근심과 두려움이 조금 진정되어 지난 일을 생각할 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으니 이에 한가한 때에 임진년에서 무술년(1598)에 이르는 사이에 보고 들은 일을 대강 적어 모으니....어리석은 신하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지만 공을 세우지 못한 죄를 드러내고자 했다." 류성룡柳成龍(1542~1607)은 징비록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으니, 이를 보면 자신의 지난날 잘못이 많았음을 참회하는 심정으로 점철한 책인 듯하다.. 2023. 8. 19.
죽을 죄를 지었다며 자기 반성은 눈꼽만큼도 없는 징비록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임란 코너엔 어김없이 그 처절한 증언이라면서 당시 재상으로 봉직한 퇴계학파 동인 서애 류성룡 저술 징비록을 실물 전시하며 제목에 이르기를 류성룡, 임진왜란과 자기반성을 기록하다 라 하고 그 서문 두 대목을 인용하기를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 후의 일을 기록 한 것이다. 한편, 임진왜란 전의 일도 가끔 기록한 것은 임진왜란이 그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백성들이 떠돌고 정치가 어지러워진 때에 나 같은 못난 사람이 나라의 중책을 맡아 위기를 바로잡지 못하고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떠받치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중략)… 비록 볼만 한 것은 없지만 이 또한 그때의 일이니 버리지 못한다. 《시경》에 이르기를 "나는 지난 일을 징계하여.. 2023. 4. 15.
이유 설명이 없는 《징비록》, 담을 넘는 구렁이 나는 서애西厓가 일본의 침략이 없다고 보고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을 《징비록懲毖錄》에서 시종일관해서 감싸고 두둔하려 했다고 했거니와 그것이 어떻게 《징비록》에서 구현되는지를 보자. "(임금 선조가)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김성일을 잡아서 옥에 가두려 했으나 (압송한 김성일이) 서울에 이르기 전에 (죄를 용서하시고) 도리어 초유사招諭使로 삼았다" 이것이 임란 발발 초반기에 일어난 일이다. 한데 이 대목에서 세심히 볼 것은 서애는 도대체 선조가 왜 느닷없이 전란의 와중에 경상도지역 군사를 관할하는 최고책임자인 학봉을 체포했는지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선조는 왜 김성일을 잡아들였는가? 이는 실록을 보면 의문이 풀린다. 김성일은 임란 발발 직전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 일원에서 넘버 2인 부사副使로 일본에 가.. 2021. 3. 6.
《징비록》의 이순신 로직 logic 조선군이 궤멸한 상황에서 오직 이순신이 있었기에 누란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나도 동의) 그의 군사적 활동은 영웅적이었다. (나도 동의) 그런 이순신을 누가 등용했어? 나야 나...나 류성룡이야 이런 영웅의 등장에는 곡절이 있어야 한다.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면 재미없자나? 서애가 무슨 말 하는지 들어보자 "내가 순신을 천거하였더니 정읍현감에서 수사(水使)로, 차례를 뛰어넘어 임명되어서, 사람들이 혹시 그가 갑작스레 승진된 것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내 말 맞지??? (2015. 3. 5) *** 이것이 서애 류성룡이 《징비록》을 쓴 이유 중 하나다. 아니 가장 큰 목적이다. 이렇게 해서 서애는 임진왜란 책임론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징비록》이 참회록이 아니라 변명록이 된 가장 큰 줄기가 바로 이순신이.. 2021. 3. 5.
《징비록懲毖錄》의 이데올로기 《징비록懲毖錄》 초반부를 관통하는 얼개는 1. 일본의 침략은 없다고 호언장담한 김성일에 대한 무한한 옹호 변명 2. 신립에 대한 무차별한 공격 3. 그에 대비되는 이순신의 등용 이 세 가지다. 이것만 봐도 류성룡柳成龍이 《징비록》을 통해 무엇을 겨냥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무엇을 겨냥했는지가 왜 《징비록》을 쓰야했는지에 대한 답이며 그것이 곧 《징비록》의 이데올로기다. (2015. 3. 5) *** 임란 직전 통신사 일행 중 넘버투 부사副使로 일본을 댕겨온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그런 의도가 없다는 보고서를 올린다. 하지만 임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야마 꼭대기까지 돌아 김성일을 추포해 국문케 하거니와 이때 서애西厓(1542~.. 2021. 3. 5.
김성일 변호와 이순신 열전의 교집합 《징비록》 드라마 징비록 몇 번보다 짜증나서 책 《징비록懲毖錄》 다시 꺼내들었다. 《징비록》을 읽는 키워드는 간단하다. 첫째 황윤길 김성일 사건 둘째 이순신 이 두 키워드가 빚어낸 교집합이 《징비록》 이다. 서애는 정세 판단 잘못해 패가 망신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전쟁의 모든 책임이 그한테 귀결한다. 《징비록》 엔 이를 둘러싼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일관한다. 그런 서애에게 서광이 비쳤으니 그것이 바로 이순신이다. 이순신 없었으면 서애는 멸문지화였다. (2015. 3. 1) *** 실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염려는 없다는 학봉 김성일은 임란이 발발하자 곧바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다가 류성룡이 적극 구원함으로써 극적으로 살아나 전장에서 죽음으로써 멸문지화를 면했다. 《징비록》 은 반성문이 아니라.. 2021.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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