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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함락4

신라는 왜 1만 군사를 내주었는가를 다시 묻는다 앞서 나는 순망치한이라는 논리로 475년 신라가 쓰러져가는 백제를 구원하고자 1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백제로 파견했다고 했다. 그걸로 모든 의문이 명쾌히 해명되는가? 앞서 말했듯이 저 파견이 신라로서는 실상 고구려와의 전면전 선언이었다. 고구려가 7일 낮 7일 밤만에 백제 왕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참수한 다음 그대로 한성에 주둔한 상태였다면 한성에서는 2차 대전이 벌어질 것임은 한밤중 불을 보듯 뻔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신라 조정과 자비마립간은 왜 고구려와의 전면전을 불사했는가? 첫째 신라 내부의 자신감이었다. 우린 어느 누구와 붙어도 그네들을 깨뜨린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그것이 아니라 해도 이참에 고구려를 확실히 꺾어놔야 한다는 매파가 득세했다. 나는 그 진원지로 벌지와 덕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 2023. 5. 5.
신라의 결단, 백제 구원병 1만의 무게감 475년 백제가 실상 고구려에 멸망하고 개로왕까지 사로잡혀 참수된 참혹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간과한 중차대한 사실이 있으니 이 난국에서 신라가 취한 자세다. 왕도가 포위된 위급한 상황을 알리면서 구원병을 청한 백제 문주한테 신라와 자비마립간은 물경 1만에 이르는 대군을 파견했다. 이 1만이 주는 무게감을 아무도 심각히 보지 않았다.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에 이르기까지 삼국이 총력전 체제에서 동원가능한 군발이 숫자는 3만~5만 명이었다. 일통삼한 전쟁 와중에 신라가 전국에서 징발한 군발이는 5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것도 보급부대까지 합친 규모다. 장수왕이 개로왕 목을 딸 때 동원한 군대도 3만이었다. 저 무렵 삼국 공히 국가 명운을 건 전쟁에 동원 가능한 숫자는 삼만이 최고였다. 광개토 담덕가 5만을 동원.. 2023. 5. 5.
시공을 달리하나 묘하게 닮은 남송南宋과 백제百濟 남송과 백제는 존속한 기간도 다르고 장소도 달리하는 왕조로 비교가 어려울 듯하지만, 남송 역사를 보면 백제사와 관련하여 매우 의미 심장한 부분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정강의 변-. 오대의 혼란을 종식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160여년간 번영한 북송은 휘종-흠종 대에 이르러 금의 침공에 궤멸적 타격을 입고 수도 개봉부가 함락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북송이 얼마나 큰 타격을 받았는가를 하면 당시 휘종의 비, 후궁, 왕자에 이르기까지 깡그리 납치당하여 금으로 끌려가는 통에 황실 적통의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휘종의 처첩과 왕자 등 직계존속 등 금으로 납치된 사람이 수만 명에 달했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강남에서 휘종의 아홉번째 아들인 조구가 남송 초대황제로 즉위할 즈음에는 그 많던 .. 2022. 12. 8.
개로왕蓋鹵王 백제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55~475년이다. 이름이 경사慶司 혹은 경餘이며, 근개루近蓋婁)라 부르기도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가수리군(加須利君)으로 나타난다. 비유왕(毗有王) 맏아들이며 부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재위기간 내내 고구려와 충돌해 그 정벌을 위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청하기도 했다. 이는 결국 고구려 반격을 불러 장수왕이 이끄는 3만 대군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그 자신은 포로로 잡혀 아차산 아래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삼국사기 권제25(백제본기 제3) 개로왕 조 : 개로왕蓋鹵王은 이름이 경사慶司이고 비유왕毗有王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14년(468)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에 일식이 있었다. 15년(469)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2018.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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