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0) 이영훈론(3) 내친 김에 천마총도 까발리자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8. 1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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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을 까발린 날

 
황남대총 특별전에서 독특했던 점은 누가 뭐라 해도 질보다는 양을 앞세운 전시였다는 점이다.

이영훈은 그 개막에 즈음해 기자들에게 “5세기에 신라인들이 만든 황남대총을 21세기의 우리가 다시 만들어 본다는 생각으로 준비했다”고 했다.

유물등록대장에 오른 출토 유물 5만8천여 점 중에서도 전시 가능한 유물 5만2천여 점을 모두 전시하는 파격을 시도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한다. 

그런 까닭에 그의 말마따나 “전시기법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으며 황남대총을 통해 마립간 시대 신라인들이 무덤, 특히 왕릉을 어떻게 꾸몄으며, 어떤 유물을 어디에다가 어떻게 부장했는지를 보여주고자”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단순한 전시지만 신라 왕릉을 이해하기에는 이만한 전시가 없다고 본다”는 자신감도 피력했다. 

이를 위해 전시는 마립간 시대 신라 어느 왕을 묻은 남분(南墳)과 그의 왕비가 묻힌 북분(北墳)의 두개 봉분을 마치 쌍둥이처럼 이어 붙여 만든 이른바 쌍분(雙墳)인 황남대총 유물을 철저히 남분과 북분으로 갈라놓는 한편, 해당 유물 또한 출토된 지점에 맞게 전시하는 기법을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전시 기법을 생각한다.

왕관을 눞혀서 내놓은 것이다. 그 이전까지 왕관 전시라고 하면 예외 없이 세운 상태로 보여줬다. 

하지만 금관이나 금동관은 시체를 뉜 상태에서 머리에 쓴 까닭에 역시 뉜 상태로 발견되기 마련이다.

이에 의해 왕비가 묻힌 북분에서는 이곳 출토 금관이 목관 안에 뉜 상태로 전시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이영훈은 “이런 방식으로 해야만 신라 왕릉 구조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전시 가능한 유물을 모두 내놓는다는 방침에 따라 압도적인 수량을 차지하는 각종 철기 유물과 토기는 거의 전량을 내놓았다.

토기는 양이 너무 많아 대체로 기종(器種)별로만 나누고 포개쌓기 방식으로 전시했다.

아예 수장고 박스 그대로 옮겨다 놓기도 했다.

무수한 철기는 대강 오와 열을 맞추는 선에서 포개고 늘려서 전시했다.

나아가 시신을 매장할 즈음 제사용 음식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각종 동물뼈도 공개했다.

복어뼈가 있는가 하면, 지금은 서해안 지방에서만 난다는 배골이라는 조개류도 포함됐다.

출토 수량이 역시 만만치 않은 구슬류는 다발로 만들어 내놓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주말인 2011년 1월30일 박물관 개관 이래 1일 관람객 최대인 6천500명이 쏟아져 들어왔다.

같은 날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실크로드 특별전 관람객은 3천500명이었다.

특별전에 맞춰 마련한 특별강연회는 청중이 대강당을 꽉 채우고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해 다른 방에서 모니터를 통해 강연을 청취하는 진풍경을 연출하는가 하면, 아예 발길을 돌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

좌석 곳곳이 텅텅 비어 버리곤 하는 여느 박물관 강연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연출했다. 

이 특별전은 사실 학예사들의 반대가 심했다.

유물을 전부 내놓을 전시 공간이 부족하다는 반론도 있었고, 온전한 정리나 충분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유물을 전부 내놓기는 곤란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반대를 뒤로하고 이영훈은 밀어붙였다.

이렇게 해서 전시 유물 수량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를 특별전 담당 학예사조차 모르는 이상한 특별전이 개최된 것이다.

그래서 특별전이 끝났을 때 막상 학예사들은 유물을 어떻게 다시 수장고로 넣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 특별전은 결국 이영훈이 고고학계의 욕을 되바가지로 먹어가면서 박물관 뒤편에 주차장 부지로 새로 매입한 곳을 고분 전시관으로 세우자는 결심으로 발전한다.

이를 위한 주차장 부지 발굴은 나중에 두고두고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다.

이 발굴은 나중에 여유가 되면 다루어 볼까 한다. 

자신감이 붙어서였을까?

황남대총을 까발린 이영훈은 내친 김에 천마총도 해체한다.

천마총으로 가는 중간인 2011년 9월 6일부터 그 다음달 30일까지는 발굴 90년을 맞은 금관총을 재조명하는 ‘금관 최초 발견 90년-금관총’ 전을 열기도 했다.

1921년 9월, 경주 노서동 어느 주막 공사 현장에서 드러난 금관총 발굴품 200여 점을 모은 자리였다.

금관총은 한국 고고학과 역사에서 최초의 금관 출토라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만 그 전체 면모를 살필 기회는 없었다는 점에서 이 전시 또한 황남대총이나 천마총만큼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다가 2014년 봄 기획전으로 마침내 천마총을 선택한다.

전시 방식은 황남대총의 그것과 흡사했다.

발굴 41년 만에 그 출토 유물 136건 1천600점을 전시장에 쏟아낸 것이다.

천마총 출토품은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1만1천526점이라고 하지만, 무수한 구슬 하나하나를 센 수치이기 때문에 실제는 이번에 전시한 유물이 천마총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때면 이미 천마총 특별전은 ‘신라 능묘 기획전’이라는 시리즈 명칭이 붙는다.

황남대총 기획전 때만 해도 이런 명칭이 있었는지 기억에 없다.

아마 황남대총에서 자신감을 얻어 이리 나가지 않았나 한다. 
 

천마총 특별전 전시 개막장에서 이영훈

 
‘천마, 다시 날다’를 슬로건으로 내건 천마총 전시는 2014년 3월 17일 이곳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했다.

발굴 이후 이 무덤 이름을 확정케 한 천마도(天馬圖) 말다래를 비롯한 각종 유물이 선보였다.

개막식에서 이영훈은 “우리 박물관 소장품 거의 전부를 내놓는 이번 특별전 전시품이 천마총의 모든 것을 망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해 6월 22일까지 계속한 이 전시에는 천마총 출토품 중 국가지정 문화재는 모두 나왔다.

그에 앞서 언론에 공개된 백화수피(白樺樹皮)로 만든 천마도 말다래 2점과 대나무로 짠 밑바탕에 역시 같은 천마 문양을 넣은 금동 투조판 장식 말다래도 선보였다.

또한 같은 신라 회화라는 희귀성으로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그동안 실물이 공개되지 않던 기마인물문 채화판과 서조문(瑞鳥文) 채화판도 처음 외부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회화 자료는 보존 차원에서 조도 80럭스 이하를 유지해 전시하고, 전시 기간 또한 3차례로 제한됐다.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내거나 보존처리한 유물도 선보였다.

예컨대 보존처리 과정에서 깃발을 꼽던 기꽂이가 새로 확인됐다.
 

 
천마총 발굴보고서에는 ‘금동제 선형금구(扇形金具·부채모양 금속제품)’라고 적었지만 이렇게 드러난 것이다.

금을 상감한 큰칼 조각도 역시 보존처리를 거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칼 조각에 금으로 박아 넣은 무늬는 피기 전의 연꽃 봉우리와 구름무늬로 추정된다.

금을 상감한 칼은 삼국시대 중에서는 백제와 가야 유물에서는 비교적 자주 보이지만 신라에서는 오직 호우총 출토 유물 1점에 지나지 않았다. 

발굴보고서에서는 금으로 만든 장식을 매단 목이 긴 항아리형 토기라 해서 ‘금제(金製) 영락부(瓔珞附) 장경호(長頸壺)’라고 이름 붙인 유물도 무덤에 묻을 당시 모습대로 복원한 상태로 전시됐다.

발굴보고서에 실린 출토 상태를 보면 토기는 깨진 상태였으며, 몸체 주둥이 위로 가지런히 금으로 만든 영락이 놓인 상태였다.

하지만 이번 보존처리 과정에서는 토기 뚜껑까지 찾아내고 영락 원래 자리를 찾아 그대로 달았다. 

잇따른 이런 특별전은 요컨대 ‘다 보여주기’를 겨냥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간 찔끔찔끔, 혹은 명품 선별 위주 전시가 주류였다면, 그에서 탈피해 특정한 유적 발굴성과를 몽땅 드러내는 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질보다 양을 앞세운 전시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이영훈 천마총 기획전 개막 자리에서 “앞으로 박물관이 해야 할 일은 수장고 발굴”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시대 환경도 변했다. 과거에는 모든 발굴품은 국립박물관이 독점해 발굴 완료와 동시에 모든 유물이 박물관으로 넘어왔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국립박물관 말고도 여타 공공박물관이나 발굴조사기관 자체에서도 발굴품을 소장하고 관리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경주박물관에는 1970년대 당시 박정희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주관광개발계획에 따른 대규모 발굴조사 성과물들이 수장고에 있다. 

이영훈은 경주박물관이 앞으로 해야 할 주요한 업무로 바로 이들 과거 발굴성과 정리를 지적했다. 

천마총 전시회 역시 대성공이었다.

이에 힘입어 그 즈음 경주박물관은 상설전시실 또한 이런 방식으로 개편했다.

종래 상설전시실이라면 이곳저곳에서 출토되거나 기증받은 유물 중에서 보기도 좋고 금빛 찬란한 것들을 골라 배치하는 명품 코너 전시가 주류였지만, 이에서 탈피해 유적 중심으로 꾸몄다.

물론 이런 전시가 경주박물관이기 때문에 가능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전시가 가능한 것과 실제 그런 전시를 해 보는 것은 다르다.

그의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이랬던 그가 올해 3월 10일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임명됐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올해 만 60세로 정년퇴직할 운명이었다.

많은 이가 장래의 국립박물관장 감이라 한 까닭에 그의 퇴임을 아쉽게 바라보는 시선 역시 많았다.

그의 관장 임명은 박물관 내부 출신의 관장 시대를 재개했다는 점에서 다른 의의가 있다.

박물관장은 차관급으로 격상하면서 중앙박물관은 이건무를 마지막으로 내부 관장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김홍남, 최광식, 김영나로 이어지는 외부 낙하산 임명직 관장 시대를 한동안 맞았다. 

이 외에도 그에 대해 생각나는 일화가 많지만, 혹시 나중에 이런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그때를 위해 아껴두고자 한다.

그때까지 나는 살아있어야 한다. (2016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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