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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0) 이영훈론(2) 중앙을 향한 황남대총 쿠데타

by taeshik.kim 2024.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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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쏟아낸 황남대총 전시

 
남북으로 잇대어 나란히 누운 경주 황남대총. 길이 80m, 봉분 높이 각각 23~24m인 이 무덤은 크기에서 단연 국내 최고다.

더구나 경주 평지에 땅을 대략으로 다진 다음 이 거대한 봉분을 흙과 돌로 쌓아올렸으니, 그 공력은 크기보다 더 컸다.

아마도 4~5세기 신라라는 왕국을 통치한 어느 왕과 그 왕비를 묻었을 이 무덤은 1천600년 전 봉인된 다음 두 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로 이 무덤을 풀어헤친 이 김정기요, 그렇게 다시 봉인한 무덤 빗장을 연 이 이영훈이다. 

2010년 12월, 국립경주박물관장 이영훈은 김정기가 1970년대에 발굴해 남겨준 황남대총 출토 유물 5만 점을 깡그리 공개한다.

이는 혁명이요, 쿠데타였다. 무엇에 대한 혁명이며 무엇에 대한 쿠데타인가?

박물관이란 자고로 이런 데라는 관습 혹은 나태에 대한 혁명이며, 전복이었다.

그 아이디어가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에게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사연이 무엇이건 이런 일을 결단한 인물은 박물관에서는 오직 이영훈이 있을 뿐이었다. 
 

다 쏟아져 나온 황남대총 유물

 
14일 경주박물관에서 개막한 기획특별전 ‘신라왕, 왕비와 함께 잠들다’는 역대 어느 국내 문화재 관련 전시보다 가장 단순 무식하면서 그것이 주는 메시지는 더욱 강렬했다.

실은 이 전시는 순회전 성격도 있었다.

한데 이영훈은 이를 전복한 것이다.

그에 앞서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은 황남대총 특별전을 열었다. 말로만 한국의 투탕카멘 무덤이라는 황남대총은 사실 그 명성에 견주어 제대로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중앙박물관 전시는 자못 조명을 받았다. 

하지만 이 전시는 고고학이나 역사학 종사자에게는 비교적 큰 호평을 받았지만 여러 모로 많은 아쉬움을 안겨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반인의 눈에는 너무 어려웠고, 전시품 또한 이른바 명품 위주였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이영훈은 경주박물관이 그 출토 유물 대부분을 소장한 기관이라는 이점을 마음껏 살려 새로운 특별전을 기획해 선보인다.

이 특별전을 당시 나는 “가장 단순한 메시지를 가장 간결한 전시기법으로 일반에 전달하기 위한 전시”라고 평가했다. 
 

더는 나올 것도 없는 황남대총. 오른쪽 끝에 이영훈이 보인다.

 
이듬해 2월 6일까지 계속된(아마 연장되지 않았나 하는데 추후 확인해야겠다) 이 전시는 내 표현을 빌리면 “무엇보다 전시 가능한 황남대총 출토유물이 모두 다 선보인다. 이에 따라 1973~75년 발굴 이래 처음으로 황남대총 유물의 전모가 공개된” 자리였다.

당시 내 기사를 보면 특별전 담당 학예연구사인 김현희조차 “정확한 전시품 숫자가 얼마냐는 질문에 ‘모른다. 대강 5만여 점이다’면서 ‘전시가 가능한 유물은 모두 다 나온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황남대총은 마립간 시대 신라왕 부부가 각각 묻힌 곳으로 생각되는 무덤 2개를 남북 방향으로 이어 붙여 만든 이른바 쌍분(雙墳)으로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표주박 모양이라 해서 이런 무덤 양식을 표형분(瓢形墳))이라 일컫기도 한다.

황남대총 출토 규모를 보면 공식으로 남분 2만2천700여 점에 북분 3만 5천648점이다.

이렇게 많은 출토 유물을 한꺼번에 꺼낸 까닭엔 이 특별전은 “또 특수한 전시기법에는 그다지 주안점을 두지 않”았으며 “조명을 잘하고 유물끼리 조합을 잘해 전시를 멋있게 하려는 ‘포장’은 일절하지 않기로” 했다.

일례로 부장품만 따로 넣는 공간인 부곽(副槨) 한 군데서만 40여 점이 출토된 대형 옹(甕) 토기들은 되도록 발견 당시 모습에 맞춰 그대로 쌓아두는 방식으로 내어놓았다.
 

금관도 뉘였다.

 
이것이 언론이나 학계는 물론이고 고고학 혹은 신라 문화 전반에 대한 지식이 높지 않은 일반 관람객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 전시를 본다고 이웃 일본 고고학도들이 줄을 이어 찾았다. 

이 전시를 개막하면서 이영훈은 “황남대총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 규모가 가장 방대한 무덤이며 출토유물 또한 가장 화려하고 풍부하다”면서 “이번 전시는 말로만 듣던 황남대총이 얼마나 큰 지, 그리고 어떠한 유물이 얼마만큼이나 출토됐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황남대총에 대해 일반이 궁금해 하는 사항들을 풀어주는 데 전시의 초점을 맞췄다는 뜻이다. 

남분과 북분 출토 유물을 뒤섞은 그 직전 중앙박물관 전시와는 달리 철저하게 전시 구역을 남분과 북분으로 나눈 맥락도 그래서다. 

당시 그는 “우리 전시가 중앙박물관 전시를 계승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단순히 경주로 옮겨오는 데 만족할 수는 없다”면서 “21세기에 다시 왕릉 속에 이들 출토 유물을 다시 부장(副藏)하듯이 남분과 북분을 구분해 거의 모든 부장품을 내놓기로 했다”고도 했다. 
 

그의 반란은 이랬다.

 
중앙에 대한 지방의 반란이라는 불순한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

중앙을 향해 우리도 이렇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반란에서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2016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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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0) 이영훈론(1)조폭형 보스의 배신 행보
 
 
https://www.yna.co.kr/view/AKR20140317165100005

 

<새로운 전시기법으로 주목받는 국립경주박물관> | 연합뉴스

(경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이영훈 국립경주박물관장은 17일 천마총 기획전 개막과 관련해 "앞으로 박물관이 해야 할 일은 수장고 발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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