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학예사의 문화유산 다시보기] 껍데기 관리마저 떠넘긴 중앙... 묘수는 '산림청 모델'뿐(by엄원식)
<이 글은 전직 문경시 문화예술과장, 문화예술회관장, 가은읍장 등 26년간 지역 문화 행정 현장에서 겪은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기획 연재의 세 번째 글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마지막 4편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가유산청의 대통합이 가져올 글로벌 경쟁력 강화와, 국가유산 행정 혁신을 완수하기 위한 정책적 제언을 종합적으로 다룰 예정입니다. 지방 소멸 시대, 우리 역사 자원을 지켜낼 대안 찾기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지난 편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500만 관람객' 흥행 이면에 방치된 지역 향토유산의 서글픈 현실을 짚었다. 지자체가 예산을 투입해 유적지를 정비하면 핵심 유물(알맹이)은 중앙의 수장고로 들어가고, 비바람 맞는 빈 터(껍데기)의 유지·보수 책임만 지방정부로 떠넘겨지는 기형적 구조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지정유산'만큼은 중앙정부가 온전히 책임지고 있을까? 지표를 들여다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국가 관리는 고작 16.7%… 나머지 90% 유산도 100% 지방 몫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 현장관리체계 전략 구상'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12월 기준 전체 국가지정 및 등록유산 중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비중은 고작 16.7%(879건)에 불과하다. 반면 지자체 위임이 34.9%, 민간 단체 위임이 35.7%다. 무려 70.6%의 무거운 짐이 인력도 예산도 부족한 지방과 민간에 떠넘겨져 있다.
하지만 현장의 절망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국가가 책임을 논하는 이 '국가지정유산'은 대한민국 전체 문화유산의 10%도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 90% 이상을 차지하는 방대한 시·도지정문화재와 비지정 향토유산의 관리 책임은 애초부터 100% 지방정부의 몫이다.
사실상 대한민국 문화유산의 절대다수를 열악한 일선 지자체가 뼈를 깎으며 홀로 지탱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위임 행정은 현행법의 취지와도 정면으로 어긋난다. '지방자치법' 제15조는 고도의 기술과 재정이 필요한 사무를 '국가사무'로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국가지정유산의 발굴과 복원, 전통 재료 취급은 일선 지자체의 일반직이나 극소수 학예사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결코 아니다.
국가가 이 무거운 짐을 지자체에 억지로 내맡기는 이유는 단 하나다. 국가유산청에 산림청이나 경찰청처럼 일선 현장을 직접 지휘할 '지방 관할 조직(지방청)'이 없기 때문이다. 손발이 없으니 지자체에 권한만 위임하고 책임은 방기하는 참담한 행정 공백이 발생한 것이다.
현장 붕괴 막을 묘수, '산림청 모델'
이 공백을 메울 현실적인 묘수는 이미 나와 있다. 국가유산청 산하에 현장 집행 기구인 '지방관서(가칭 지방문화유산청)'를 신설하는 이른바 '산림청 모델'이다.
조직 확대나 막대한 예산 낭비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현재 국가유산청 산하에는 국립경주, 부여, 가야, 나주 등 7개의 국립지방문화유산연구소가 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연구소들의 기능과 조직을 확대 개편해 현장 관리의 거점으로 삼으면 된다.
2271억 원의 족쇄 풀면 지역 향토유산이 산다
지방관서가 신설되어 국가가 국가지정유산을 직접 책임지게 되면, 벼랑 끝의 지자체는 거대한 숨통이 트인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예산 구조'에서 시작된다.
현재 지자체가 국가지정유산을 보수·정비할 때, 중앙정부 지원은 70%이고 나머지 30%는 지자체가 의무적으로 지방비(매칭 예산)를 부담해야 한다.
2025년 기준 국가지정유산 보수·정비 사업 총예산 7570억 원 중, 지자체가 빚을 내서라도 감당해야 하는 지방비만 무려 2271억 원이다.
지방관서가 설립되면 지자체는 이 30%의 매칭 부담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매년 2271억 원의 막대한 재량 예산과 인력의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이 잉여 예산이 엉뚱한 개발 사업으로 빠지지 않도록 합동평가 지표 등을 통해 제도화하면 된다. 지자체가 온전히 시도지정문화재와 사각지대의 비지정 향토유산을 발굴하고 가꾸는 데 집중 투자하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국가는 국가의 몫(국가지정유산)을 온전히 책임지고, 지방은 온축된 역량으로 지방의 몫(향토유산)을 살려내는 진정한 '호혜적 국가유산 관리체계'의 완성이다.
진정한 국가유산 100년 대계의 완성, 부처 대통합

지방관서 신설로 행정 공백을 메웠다면, 이제 국가유산 행정의 질적 도약을 이룰 차례다. 진정한 혁신을 위해서는 더 큰 결단이 필요하다.
발굴·조사에 특화한 연구소 인력과, 전시·보존에 탁월한 전문성을 지닌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13개 지방 국립박물관의 최고급 학예 인력을 한데 묶어 권역별 '지방유산청'으로 융합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국립박물관이 국가유산청으로 편입되면 학예 인력이 행정 잡무에 내몰릴 것이라며 방패를 친다. 이는 조직의 파이를 지키려는 관료주의적 핑계에 불과하다.
학예연구관들에게 건축 인허가 민원을 떼라는 것이 아니다. 일본처럼 박물관을 '독립행정법인' 형태로 묶어 유연성을 주거나, 직군을 명확히 분리하면 학술 연구의 자율성은 완벽히 보장된다.
수장고에 갇혀 있던 탁월한 보존 기술과 역사적 식견이 지역 유적지 곳곳으로 수혈될 때, 그들의 전문성은 비로소 만개할 수 있다. 전문성을 핑계로 흙먼지 날리는 현장을 외면하는 탁상행정이야말로 국가유산 100년 대계의 가장 큰 적이다.
알맹이(유물)와 껍데기(사적지)를 갈라치기 하는 분절된 행정을 멈추고, 국립중앙박물관과 국가유산청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
이원화한 관리 체계를 단일 지휘 체계로 통합하여 발굴부터 보존, 관리, 전시, 활용에 이르는 생애주기형 통합 관리가 현장에서 즉각 실현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은 지역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강력한 국가 경쟁력이 될 것이다.
부처 간 알량한 밥그릇 싸움과 기득권의 저항을 뚫어내기 위해, 이제 국정 최고 책임자의 거시적인 결단이 절실한 시점이다.
국가유산 행정의 패러다임을 바꿀 국립박물관과 국가유산청의 대통합, 그 구체적인 청사진은 다음 4편에서 이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