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왕 고을불리] (3) 압록강 배로 오가며 소금장사를 하는 고구려 왕자

고구려 군주 미천왕美川王은 즉위 이전에도 그렇고 심지어 죽어서도 갖은 곤욕을 맛본 희유한 사람이다.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하는 그의 행적은 삼국사기 미천왕본기에 비교적 자세하거니와, 그것을 새삼 음미한다.
생전 이름이 을불乙弗 혹은 우불憂弗이라고도 하는 그는 고구려 제13대 군주 서천왕西川王(재위 270~292) 손자다.
아버지는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라, 비록 왕의 손자라 하지마는 아버지가 왕이 아님에도 왕이 되었으니 일단 이에서 권력투쟁을 의심해야 한다.
돌고한테 불운은 서천왕 맏아들이 아니라는 데서 비롯한다. 그 형이 봉상왕烽上王(재위 292~300)이라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엄마가 달랐는지 어쩐지 알 수는 없지만, 이럴 때 동생이 핍박을 받기 마련이다.
봉상왕은 의심이 많았던 듯, 그런데가 언제건 돌고가 쿠데타를 일으켜 내 자리를 뺏어간다 해서 마침내 각종 이유를 달아 죽이니, 그 자식 을불은 도망쳐 훗날을 기약하게 된다.
처음에는 수실촌水室村이란 마을로 들어가 음모陰牟라는 사람 집에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게 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턱이 없는 그를 음모는 혹사케 한다.
그 집 곁에 늪이 있어 산란철인 봄, 혹은 한창 활동기인 여름이면 개구리가 심하게 울어대니 잠을 잘 수 없다 해서 음모는 을불한테 밤마다 기와조각이나 돌을 던져 울음소리를 못내게 했고 낮에는 나무를 해오라 못살게 굴어 "잠시라도 쉬는 꼴을 보지 못했다."
이 증언을 통해 우리는 고구려 사회 단면을 엿보게 된다. 저 개구리 사건은 실제 중국 남조 시대 황제한테서 일어나는데, 그것을 참지 못한 개구리꾼이 그 일을 시킨 황제를 시해하기도 한다.

그런 일을 대략 1년 정도 하다가 이대로는 못살겠다! 갈아보자! 해서 음모를 떠나 이번에는 동촌東村이라는 마을 사람 재모再牟랑 동업해서 소금장사를 하게 된다.
음모, 재모...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신라사람들이 무슨 지[知 혹은 智]를 그 끝에 썼듯이, 牟라는 글자를 참말로 좋아한 듯하다.
이 소금장사를 하다 일어난 유명한 일화를 미천왕본기는 다음과 같이 채록한다.
[을불이 아마도 동업자 재모랑 함께] 배를 타고 압록鴨淥에 에 이르러 소금을 내려 놓고 강 동쪽 사수촌思收村 사람 집에서 기숙했다.
그 집 할멈이 소금을 좀 달라하자 한 말쯤 주었지만, 조금 더 달라 하자 주지 않았더니 그 할멈이 원망하며 성을 내고선 소금 속에 몰래 신을 넣어 두었다.
을불이 알지 못하고 짐을 지고 길을 떠났는데, 할멈이 쫓아와 신을 찾아내고선 을불이 신을 숨겼다고[신발을 훔쳐갔다고] 꾸며 압록재鴨淥宰한테 고소했다.
압록재는 신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할멈에게 주고 볼기를 때린 다음 놓아 주었다.
이리하여 얼굴이 야위고 옷이 남루해 사람들이 보고도 그가 왕손인 줄 알지 못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 당시 물자가 유통하는 극히 희귀한 장면을 목도하거니와, 개중에서도 염업을 어찌했는지 그 일단을 생생하게 들여다 보게 된다.
일단 이 경우를 보면 염업을 을불은 동업을 했다. 어느 정도 사업규모는 있었다는 뜻이 된다.
둘째, 그것을 유통하는 주된 무대가 압록이라는 강이었다. 강을 통해 오르내리면서 상품을 구해다가 그것을 실어나르면서 을불은 마을마다 들려서 팔아먹었다.
돈 받고 팔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 고구려는 내내 물물교환이었고, 화폐경제는 꽝이었다.
일단 저에서 신발 이야기가 나왔는데, 소금을 넘기고서 신발 같은 상품으로 바꾸는 물물교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노파가 잃어버렸다고 신고한 신발이 짚신이라면 그것이 어찌 절도감이 되겠는가? 값나가는 신발이었음에 틀림없다.
당시 고구려 경제를 지탱하는 기반은 압록강이라는 수운 기반이었다. 물론 육상 교통을 이용하기도 했겠지만, 수도를 중심으로 저 압록강이 차지하는 막강 위상을 무시할 수 없다.
저 압록이 지금의 압록일까? 그럴 수밖에 없다. 고구려 지도 펼쳐놓고 배로써 소금을 실어나를 정도가 되는 강은 오직 압록강밖에 없다. 혹 지금의 압록강 본류가 아니라 해도, 국내성을 관통하는 혼강일 수도 있다. 다만 이 혼강이 저 시대에 배 통행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다.
이 압록강이 차지하는 막강한 위상은 저 압록강 수운을 관장하는 관청을 고구려가 별도로 두었다는 사실에서 명확히 본다. 그 대장을 압록재라 표현했다. 저 압록재는 간단히 말해 해당 지역 압록강 수운을 관장하는 지방 장관이었다.
앞서 나는 고구려 시대 염전은 아래 지도와 같다 했다.

이제 이해가 될 것이다. 저 압록강이라는 수운을 생각하면 해상 기반 물자가 어디에서 생산되어 어떤 경로로 고구려 중심으로 이동되었는지 이제는 한밤중 모닥불을 보는 일만큼 선명해졌다.
동해? 고구려가 동해안에서 해산물을 구해와?
웃기는 소리 하덜덜 마라!
압록강은 고구려의 심장이었으며 그 압록의 절대 기반은 바다였다.
이 압록이라는 물길을 통해 고구려는 바다와 육상을 연결했다.
[미천왕 고을불리] (2) 고구려의 바다 염전은 어디에?
https://historylibrary.net/entry/micheon-2
[미천왕 고을불리] (2) 고구려의 바다 염전은 어디에?
이것이 뭔가?고구려가 바닷물로 소금을 생산한 지역이다.나는 줄곧 고구려는 동해안에 진출하지 않았거나 못했다는 말을 했다.물론 이 경우도 한정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함경도 해변을 말
historylibrar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