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칼보다 칼집인가? 영천 완산동 무덤의 경우

영천시가 의뢰하고 계림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한 경북 영천 완산동 고분군 발굴성과를 보면 서기 500년 무렵 아마도 이 지역 토호가 묻혔을 것으로 보는 적석목곽분이 드러나고 그에서 그 시대 지역 지배층 무덤에서는 전형으로 보이는 양상이 드러났으니
이 발굴이 조금 특이한 점은 환두대도 두 자루를 얼굴 양쪽으로 나란히 놓았다는 사실이며
나아가 그 칼은 역시나 칼집에다가 금속칼이 아닌 나무 모조품 칼을 넣었다는 사실이다.
왜 나무칼인가?
그에 대해서는 아래 글들에서 우리는 집중으로 탐구했다.
이 문제를 제대로, 그리고 심각히 짚은 글을 나는 본 적 없다.
저 출토 양상에서 주목할 다른 지점도 있으니
매장주체시설 중에서도 환두대도 두 자루는 시신을 장식한 직접 장착물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저를 준비한 데가 상주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같은 칼이라 해도 부의품으로 들어오는 종류가 모조일 수는 없다.
문상객들이 낸 부의품은 왕실이나 조정 직접 하사품을 제외하고선 부장곽으로 간다.
한국고고학은 이 점을 결코 구분할 수 없었다.
왜? 그 무수한 장송의례 연구가 있지만 단 한 사람도 부의품을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 기이하기 짝이 없다.
부의품이 짜가일 수는 없다.
같은 성격 껴묻거리라 해도 부의품이냐 아니냐는 이만큼 중요하다.
짜가품은 상주만이 준비하는 특권이었다.
내실은 눈꼽만큼도 중요하지 않은 칼, 가오는 오직 칼집!
https://historylibrary.net/entry/%E3%85%87-707
내실은 눈꼽만큼도 중요하지 않은 칼, 가오는 오직 칼집!
요새 폭증하다시피 해서 단검, 개중에서도 청동으로 제작한 청동단검bronze daggers 이야기를 했거니와개중에서도 이른바 비파형동검 이야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거니와 그 이야기는 아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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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칼날보다 칼집인가? 금관총 목도木刀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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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범성을 나는 누구도 제대로, 아니 더욱 정확히는 그 의미를 탐구하지 않았다고 본다. 물론 이런 말 하면 꼭 나오는 전가의 보물을 안다. "누구나 다 안다"나도 하도 이런 말 많이 듣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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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보다 칼집, 티베리우스 칼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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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청동검 칼집을 보면 참 공을 많이 들이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저 칼집에 꽂은 칼 도대체 몇 번이나 뽑아 사람들 보는 데서 휘둘렀을까. 일본 에도시대에는 사무라이 칼이 완전히 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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