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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고고여행] (5) 맥족 청동칼? 그에서 성찰하는 비파형동검 칼집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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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시 시 · 중국 랴오닝 성

중국 랴오닝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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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국경을 맞댄 중국 기준 동북 지방 요녕성辽宁省이 있고, 그 요녕성 산하 기초 자지 단체로 본계시本溪市 라는 데가 있으니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번시시 라는 곳이라 
 

 
그 위치는 저와 같아, 딱 보다시피 저짝은 훗날 고구려 산하에 들어갔고, 그 이전에도 고조선 문제는 영역 논란이 적지 않거니와, 그와 일정 기간 밀접할 수밖에 없으니 

저짝에 본계시박물관本溪市博物馆이라는 데가 있다.

이 박물관은 내가 대략 10년이 더 지난 시절에 잠깐 다녀온 적 있거니와, 마침 그때 새로 개장한 직후라 특히 볼 만했다 기억한다. 

이 박물관 소장품 중에 전국 정자병 곡인 주척 청동 단검 战国丁字柄曲刃铸脊青铜短剑 이라 이름하는 청동칼이 있으니,

이를 살피기 전에 위선 이 말 뜻을 풀어야 한다. 

전국이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생성된 시점이 전국시대라라는 뜻이니

그 시작점에서는 기원전 476년인가 혹은 기원전 403년인가 하는 논란이 없지는 않으나

그리 낙폭이 크지 않으니 대세에 지장이 없고, 그 종점은 기원전 221년이라, 이해에 시황제에 의한 중국 통일이 완성된다.

따라서 저 칼은 대략 기원전 400~200년 어간에 만든 기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다. 

정자병丁字柄이란 한자 고무래 丁 글자 모양으로 생긴 자루[柄]이라는 뜻이니, 칼자루, 곧 슴베라고 일컫는 칼을 손으로 직접 쥐는 부분이 이렇게 생겼다는 뜻이다.

요새야 한자를 모르니 간단히 “T”자 모양이다 이리 이해하고 넘어간다. 

다음 곡인曲刃이란 칼날이 굽었다는 뜻이요, 주척铸脊이 요상해서 주铸란 쇳물을 녹여 주물한다는 뜻이요 척脊이라 간단히 척추다.

등골이 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등골이 바로 척추다.

곧 주척이란 척추를 주물했다는 뜻이니, 이 맥락에서 주철을 내가 어찌 이해해야 할지 자신은 없으나

동검 중간 지점을 지나는 등굽이를 말하는데, 그것이 생긴 양태가 사람으로 치면 꼭 척추 같다 해서 일컫거니와, 암튼 그렇다 하고 넘어가자. 

청동 단검 青铜短剑 이란 청동이라는 재료를 활용해 만든 칼 중에서도 비교적 근거리 살상용이라는 뜻이다. 
 

 
객설이 길었다.

실물을 본다. 

저리 생겼다. 

보다시피 이 칼은 완벽한 세트다.

가오다시 잡는 칼집까지 완벽히 갖춘 세트다. 

세부를 본다. 
 

 
저게 2천년 이상 지나면서 녹이 슬어 그렇지 막 만들어냈을 때는 간지 났다. 
 

 
저걸 하나하나 분리 하면 이렇다. 

칼날 몸통은 비파형동검 비슷하기는 한데 그 전형하는 모습은 아니다.

비파형 동검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 변형이라 볼 여지도 많다. 

저쪽 박물관 설명을 보면 이걸 남긴 주체로 맥족貊族을 거론한다.

예맥족 할 때 그 맥족 말이다.

우리는 이 맥족이라 하면 고조선 고구려를 연동한다. 

생김을 보면 앞부분이 평평하고 뒷부분은 구부러져 있으며, 가운데에는 기둥 모양 능선棱线과 중심 능선이 있고, 양쪽에는 각각 혈조血槽가 있다.

칼자루는 'T'자 모양으로, 세밀한 삼각형과 사선 무늬로 장식했고 철광석을 갈아 만든 가중기加重器를 장착한다.

저러 칼은 그 자체로는 가벼워서 무게감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끄터머리에 일부러 무게감을 주는 철광석처럼 무거운 장식을 달게 된다.

같은 야구선수라 해도 날쌘돌이 이종범과 뚱땡이 이대호가 같은 무게 배트를 쓸 수는 없는 법이다. 딱 이 차이다. 

검부리剑钩는 뱀 대가리 비슷하고 검 다트剑镖는 납작한 원통 모양으로 기하학 무늬와 돗자리 무늬를 장식했다.

이 칼은 1978년 가을, 본계시 만족满族 자치현自治县 부가루향富家楼乡 유가초촌刘家哨村이라는 마을에 사는 주민 관경신关庆信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앞에다가 채소를 저장할 구엉이를 파다가 우연히 석관묘石棺墓 하나를 발견하고 그에서 수습한 것이라 

이것이 나중에 관에 들어가 감정 결과 진짜 유물이라 해서 제대로 평가를 받고 지금은 본계시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저 칼 자체를 너무 깊이 파고들고픈 생각은 없다.

다만, 동칼을 저런 식으로 칼집을 씌워서 보관 휴대했다는 사실,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비파형동검도 저런 식으로 당연히 관리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데 어찌하여 단 한 놈도 칼집 문제를 거론하는 놈이 없단 말인가? 

고고학은 물질 너머를 엿보는 학문이다.

그 너머를 봐야 한다. 

없다고 안 본다?

그럼 때려쳐야 한다. 

 
[또라이 고고여행] (4) 동검 껍데기, 가오다시 칼집은 어디갔나?

[또라이 고고여행] (4) 동검 껍데기, 가오다시 칼집은 어디갔나?

앞에서 신동훈 교수께서 주로 의식용 장식용 칼을 두고 하신 맥락으로 이해하거니와, 이런 칼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칼이라는 그 알맹이보다 그 거죽떼기, 곧 칼집이라는 말씀을 하신 바 위세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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