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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영·정조 시대에 이른바 북학파(北學派) 일원으로 중국에 다섯 차례나 다녀왔으며, 그 오야붕 연암 박지원을 추종한 이른바 ‘연암그룹’ 일원이기도 한 이희경(李喜經·1745~1805 이후)이란 사람이 남긴 잡글 모음 필기류인 《설수외사(雪岫外史)》란 책에 나오는 일화다. 




(한양도성) 서문(西門) 밖에 서른이 넘도록 개가(改嫁)하지 않은 과부가 있었으니, 그 이웃에는 아내 없는 홀아비가 살고 있었다. 사내가 결혼하자 아무리 꼬드겨도 여자는 듣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마을에서 그녀를 정조가 있다고 해서 정려문을 세워주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이 치면서 세찬 비가 내리더니 여자 집에 벼락이 쳤다. 이웃 사람들이 깜짝 놀라 가서 보니 집은 전과 같이 온전했지만 남녀가 부둥켜안은 채 쓰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정녀로 소문난 그 여자와 이웃집 홀아비가 한창 잠자리를 하다가 번개가 갑자기 방에 내리치자 남녀가 모두 겁에 질려 기겁한 것이다. 이웃집 사람이 오줌에 약을 타서 먹이자 한참만에야 깨어났다. (진재교 外 옮김, 《설수외사(雪岫外史)》,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1.2, 19쪽) 



이 일화가 주는 교훈은 간단하다. 이르노니, 천둥벼락 치는 날엔 몰래 여자를 만나지 마라. 아님, 피뢰침 시설 잘 완비한 호텔이나 모텔에서 만나든가... 


아울러 위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요즘 한문학계를 중심으로 한창 논의가 활발한 이른바 ‘열녀의 탄생’이라는 그 허망한 보기를 알 수 있거니와, 그에 더불어 벼락 맞고 기절한 사람에게 쓴 약이 '오줌'이라는 사실도 확인하는 부수입을 얻는다. 오줌은 응급처치약이기도 했다.  


덧붙이건대, 편의상 두 사람 행동을 '바람'이라 했지만, 그것은 지극한 인간의 정리 그 발로였으며,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다만, 이 일화를 수록한 까닭은 소문에는 열녀라는 평판이 자자한 여인에 대한 조롱이다. 

또 하나, 저 일화 소재 혹은 배경이 천둥 번개라, 이에 얽힌 경험이 있다. 천둥 번개...난 이걸 찍는 방법을 모른다. 한 번도 그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언제런가? 터키로 가족 여행을 간 적 있다. 그때 안탈랴인지 어디에 숙소를 잡았는데 밤인지 새벽에 천둥번개가 쳤다. 저 멀리 하늘을 보니 번쩍번쩍이라, 저거 한 번 찍어볼끼라고 카메라 매고 해변으로 나갔다. 경험이 없으니, 이래저래 버벅였다고 기억한다.  TV 모드로 갖다놓고, 연사 촬영 모드로 변환은 하고 기다린 듯한데, 니미럴....번개가 언제 칠 줄 모르니, 방법이 없었다. 다시 그런 기횔 만나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내가 번개 맞아 죽거나, 번개가 나한테 잡아먹히거나. 


연암 박지원...조선후기 영정조 시대 재야 문단의 영수지만, 실은 노론 적통에 재산 졸라리 많은 부자요 권력자였다. 뭐, 과거로 출사하는 길을 포기하고, 그러면서도 안의현감인지는 잘해 잡수시면서, 박제가 놀러 오니 안의현에서 관리하는 기생 중에서도 가장 앳된 애를 골라다 수청 들게 해 주는가 했으니, 이런 식으로 수하엔 말 잘 들을 수밖에 없는 또릿한 똘마니들 몇몇 거느리고 재야를 호령했거니와, 박제가 말고도 유득공도 있었다. 나이도 젤로 많고, 그 자신은 적통이지만, 똘마니들은 다 서출이라, 대장 노릇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럼에도 저이를 높이쳐야 하는 까닭은 그 속내가 무엇이었건, 그래도 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인간 대접했다는 점이다. 뭐 이런 동호회 그룹을 요새는 백탑 근처에서 많이 놀았다 해서 백탑파 그룹이라 하는 모양이다. 





한데 이런 연암으로서도 자존심 왕창 상하는 일이 있었으니, 그 똘마니 시다들이 모조리 중국 가서 선진문물 맛보고 온 데다 그걸 기초로 《북학의》니 하는 책 먼저 내서 왕창 성공을 거두었는데, 정작 오야붕인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니, 그래서 할 수 없이 본인도 나중에 연행길 나서는 육촌형님인지 쫄라서 쫄래쫄래 종사관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따라나선다. 


부담이 컸다. 엄청난 부담이었다. 왜인가? 이미 먼저 다녀온 박제가 유득공은 물론이요, 그 선배들이 기라성 같은 연행록을 냈기 때문이다. 늦게 갔으니, 그들을 모조리 뛰어넘어야 했다. 


그의 《열하일기》는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고충이 토로한 기행문이다. 이 《열하일기》를 대할 적에 나는 그의 이런 부담감을 고려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데 이런 그에게 천만다행인 점은 《열하일기》로 전대를 모조리 갈아 엎었고, 후대에도 그것을 뛰어넘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열하일기》는 글자 그대로 선풍이었다. 대성공이었다. 다만, 이 때문에 그에 구사한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다 해서 정조한테 쿠사리 쫑크 먹고 협박까지 받는 처지에 내몰렸지만, 그는 알았다. 정조가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이거나 유배에 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조는 성질이 더럽고 욱하면서 걸핏하면 화를 내곤 했지만, 그는 역시 호학의 군주요, 그런 까닭에 재목들은 잘 알아보았으니, 그러면서도 내가 저런 연암 같은 놈 유배 보내거나 죽여 역사의 오점을 남길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연암은 참말로 시대를 잘 만났다. 

연암처럼 공식 사절단 일원이 아니면서, 문물 맛보러 가는 사람들한테는 하나의 강박이 있었으니, 중국에서 문명으로 이름 떨치는 한 놈쯤은 사귀어야 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동아시아 세계의 간판급 주자라는 점을 각인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대개 그때까지 자신이 지은 시문 중에서도 짱꼴라들한테 내놓아서 부끄럽지 않은 것을 골라 여러 장 베껴가야 했다. 이걸 내밀며 나 이런 사람이요라고 소개하고, 그런 공작이 성공하면 "아! 동방에 이런 군자도 있었네"라는 소리 듣기 십상이니, 이런 방식으로 연암보다 후대에 대성공을 획책한 자가 추사 김정희다. 


그렇다면 연암은 무엇을 가져갔는가? 자기 자랑할 글을 한 편 골랐으니, 이것이 바로 아래 내가 2006년 기사에서 소개한 누이 제문이다. 이 제문은 그야말로 명문 중의 명문인데, 하필 연암이 이 글을 골라 베껴 간 까닭이 바로 이 정도 글이면 중국 식자층에서 뻑 갈 것이라 확신한 까닭이다.  


북역본 열하일기. 헌책방에 나온 것을 내가 쌔벼왔다.



<산문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2006.04.05 15:36:30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강가에 말을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銘旌)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그만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문득 강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이 시집가는 날 쪽진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당시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수채화 같이 명징(明澄)하면서도 레퀴엠만큼 장중하다. 먼저 세상을 등진  손윗누이를 실은 상여가 배에 실려 사라져 가는 모습을 이렇게 읊고는 다시 노래한다.


"떠나는 이 정녕코 다시 오마 기약하지만/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  적시거늘/이 외배 지금 가면 언제 돌아오리/보내는 자 쓸쓸히 강가에서 돌아가네."


다시 돌아온다 약속하지만, 그 떠남이 죽음이며, 그가 떠나는 길이 상여이고 보면 어찌 떠난 자가 돌아오겠는가? 


300자에도 모자라는 이 짧은 만가(輓歌)에서도 왜 연암(燕巖)인지가 드러난다.


연암을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희병 교수는 이렇게 묻는다.


"이런 글을 명문이라 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글을 명문이라 할 것인가?"


하지만 이 글을 강평한 그의 문하생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1741-1793)도 만만치는 않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 안에 수미산(須彌山)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겠다."


37세가 된 영조 37년(1773) 무렵, 박지원(朴趾源)은 이덕무 등과 함께 통행금지가 내려진 밤 12시가 넘어 운종가(雲從街)로 나아가 종각(鍾閣) 아래서 달빛을 받으며 거닐다가 수표교(水標橋)에 이르러 다리를 죽 뻗어 걸치고는 야경을 감상했다.


"개구리 소리는 완악한 백성들이 아둔한 고을 원한테 몰려가 와글와글 소(訴)를 제기하는 듯하고, 매미소리는 엄하게 공부시키는 글방에서 정한 날짜에  글을  외는 시험을 보는 것만 같고, 닭의 소리는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여기는 한 강개한 선배의 목소리만 같았다."


절친하게 지내던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1730-72)가 죽었다. 당파로는 소북(小北)이며 남인(南人) 계열 이가환(李家煥)의 처남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持平) 정언(正言)과 같은 간관직에 있었으니 친구만큼이나 적도 많았다.


이에 그의 죽음을 두고 연암은 이런 제문(祭文)을 지었다.


"석치에게 원한이 있던 자들은 평소 석치더러 병들어 죽어버려라고 저주를 퍼붓곤 했거늘 이제 석치가 죽었으니 그 원한을 갚은 셈이다. 죽음보다 더한 벌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는 한편) 세상에는 참으로 삶을 한낱 꿈으로 여기며  이  세상을 노니는 사람도 있거늘 그런 사람이 석치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껄껄 웃으며 '진(眞)으로 돌아갔구먼'이라 말할 텐데, 하도 크게 웃어 입안에 머금은 밥알은 벌처럼 날고 갓끈은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지고 말테지."


사람이 죽는 일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해 부인의 죽음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장자(莊子)의 우화를 빌려 연암은 석치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연암을 읽는다'(돌베개)는 박지원을 영문학의 셰익스피어나  독문학의  괴테에 비견하는 한국문학의 대문호로 간주하는 박희병 교수가 그의 산문 20편 가량을 골라 우리가 왜 연암을 다시금 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말로만 "연암! 연암!"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를 외면하는 현재의 우리에 대한 저돌이기도 하다. 연암의 문학이 이토록 천의무봉(天衣無縫)한데, 어찌하여 당신들은 이걸 모르느냐는 박 교수의 분통이 느껴진다. 464쪽. 1만5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1. 연건동거사 2018.10.21 19:57 신고

    이런 심리는 2018년 오늘날도 한반도에 사는 식자층에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한국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지도.

식민지시대 조선 땅 문화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명이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다. 가만...한자 표기가 맞는지 자신이 없다. 내 기억에 의하면 이 친구 1927년 공주고보 한문교사로 부임해 1940년인지 강경여고로 옮기기까지 이 학교에서 죽 생활하면서 송산리 고분군을 비롯한 공주 일대 고분을 무허가로 천기 가까이 도굴했다. 이 와중에 일어난 유명한 사건이 벽화분인 송산리 6호분 도굴사건이다. 


공주고등학교 발간 <공주고60년사>



2000년 무렵, 무령왕릉 발굴 30주년을 코앞에 두고 그의 행적을 추적한 적이 있다. 가루베에 대해서는 공주 지역 일부 연구자가 學的으로 주목한 적이 있으나 당시까진 글다운 글이 없었다. 그나마 풍문에 의지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개뼉다귀냐?


가루베는 일본 제국 패망과 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가 미에현인지 어디에서 교수로 봉직하다가 1970년인지, 69년인지 무령왕릉이 발견되지 직전에 죽었다. 그가 죽은 직후 그의 글을 모은 유작이 단행본 2권으로 나왔는데 이것이 그의 연구를 위한 제1의 문헌이다. 


한데 이에 수록한 글이라든가 식민지시대 신문 잡지 등등을 뒤져보면 그의 조선 행적이 더러 보이기는 한다. 이 중에서도 그가 애초에는 평양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기차를 타고 공주에 입성하는 장면을 자못 비장하게 그려놓은 글이 있거니와, 참으로 잘 쓴 小文이다.


그의 행적을 추적하던 당시 내가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 고리로 삼은 것이 바로 공주고등학교 敎史였다. 공주고보 후신인 공주고 역사를 정리한 그 교사에는 무엇인가 그와 관련한 행적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공주고 정도면 교사도 틀림없이 여러 번 나왔을 것이라 짐작했다. 한데 이를 어디에서 구한다는 말인가? 




그 무렵 공주에 들렀을 때다. 아마도 대통사지 인근, 혹은 공주고 근처였다고 기억하는데 거기에 헌책방 하나가 있었다. 나는 헌책방 다니기를 좋아하거니와, 무엇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 케케한 냄새와 공기가 좋다. 무료하거나 마음이 산란할 때 헌책방처럼 멍 때리기 좋은 데도 없다. 그날도 이런저런 구경 삼아 훑어보는데, 내가 관심 있는 분야로 국한하자면, 이곳이 아무래도 공주라 그런지 공주지역 발굴보고서가 많았다.   


이날 이 헌책방에서 두 가지 중대한 자료를 구했으니, 하나는 정확한 책 제목이 지금 지금은 기억나지 않으나, 해방 직후 경성제국대학(당시 이름이 바뀌었나 모르겠다) 사학과 교수 학산 이인영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만든 두툼한 한국사 개설이었으니, 그에는 손진태 서문이 붙었고, 집필에 참여한 제자들로는 손보기와 한우근, 김성준 등등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이 책은 희귀본으로 분류되거니와, 한데 이 책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머지 하나가 바로 공주고 교사敎史였다. 그런 교사로 2종인가 찾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60년사와 80년사. 가루베 행적이 있다면 《공주고60년사》가 나을 듯했다. 왜냐? 이에는 가루베를 기억하는 이 학교 출신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대강 펼쳐보니 이 교사에는 학창시절을 추억하는 이 학교 출신자의 회고담이 꽤 있었다. 그것을 대강 훑어보니 아! 이럴 수가? 온통 가루베 얘기였다. 그리고 역대 교사 명단을 보니 역시 그의 이름이 보였다.


본국으로 귀환한 가루베는 1969년 조선 땅을 다시 밟는다. 이 귀국 장면이 가루베의 글에 보이는데, 강경여고 제자들이 공항으로 마중나온 사실을 감격스레 그려놓았다. 이 때 한국 여행에서 가루베는 명지대에서 강연을 하기도 한다. 당시 나는 그가 왜 명지대에서 강연을 했을까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왜???? 왜????? 왜???? 


이를 나는 공주고보 교사를 보고 알았다. 명지대 설립자는 공주고보 5회인지 6회였거니와 그가 바로 가루베의 제자였다.


그의 행적에서 참으로 수상쩍은 또 다른 대목은 이런 그가 1940년 강경여고로 갔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한 궁금증을 당시 나는 강경여고 교사를 찾아서 실마리를 잡고자 했다. 하지만 이 작업도 이내 흐지부지되어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령왕릉 발견 30주년을 맞아 우리 공장에서 그 특집을 기획하고, 내가 15회 분량인가를 집필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직후 단행본을 준비하면서 그와 관련한 자료조사를 더했으니, 그때 조사성과가 근자 《직설 무령왕릉》으로 정리되어 나온 것이다. 


저 공주교보 60년사는 그때 내가 무령왕릉 특집을 비롯해 더러 인용하면서 요긴하게 써먹었으니, 이후 다른 사람들의 관련 글을 보니, 이 교사가 빠지지 않고 인용되고 있음을 보았다. 역사를 쓸 적에 교사가 그만큼 요긴하다. 


내가 특집과 책을 쓸 때 참고한 가루베 관련 책 두 종은 두번째 첨부사진이니, 저 자료집을 그때만 해도 나는 국립민속박물관 소장본을 이용했으니, 지금 내 서재 있는 저들은 현재 일본 규슈에 안식년을 보내는 대전대 이한상 교수가 마침 그곳 헌책방에 들렀다가 발견하고는 나한테 요긴하리라 해서 사서 일본에서 발송해온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이 교수께 다시금 감사하다는 말을 남긴다. 

 


가루베 지온






지난 10일, 민속학 분야 독보의 위치를 구축한 도서출판 민속원 홍기원 창업주 겸 회장이 타계했다. 조문을 이튿날 받기 시작한다 해서 11일 저녁 나는 적십자병원에 차린 빈소로 조문을 갔다. 고인과는 직접 인연이 거의 없다시피 하나, 그 장남으로 민속원을 물려받아 운영 중인 홍종화 사장과는 친분이 남다른 데다, 그것이 민속원 그 자체에 대한 예의 표시라 생각한다. 저녁 약속으로 좀 늦은 시간이었으니, 빈소엔 홍 사장과 친분이 남다른 동료 출판인, 그리고 민속원과 홍 회장한테 음덕을 입은 역사학도들이 삼삼오오 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방선주 박사



중앙일보 북한 전문기자 출신인 정창현 형은 어부인과 함께 왔다가, 어이된 셈인지 나를 보자마자 자리를 일어난다. 다른 일정이 있단다. "세상도 바뀌었는데, 승님도 한 자리 제대로 찾아보슈"라고 인사를 건네고 앉아 도서출판 선인 대표 윤관백, 국사편찬위 편사연구관 김광운, 율 브린너를 연상케 하는 빡빡이 도서출판 학고방 대표 하운근 형 등과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 자리서 관백 형이 보도자료 비스무리한 서류 한 뭉치를 넘겨주는데 보니, 북조선실록인지 뭔지 하는 자료집 마흔권짜리를 냈다면서, 곧 출판기념회를 하니 기사 잘 써 달래서 대뜸 "또 안 팔리는 책 내는구만"하고 말았다. 


앞자리에 광운 형이 앉아서인지 모르나, 갑자기 방선주 박사 근황이 궁금했다. 연세로 보아 생존해 계실까도 의심스러웠으나, 부고를 접한 적이 없으니, 적이나 궁금했으니, 그리하여 광운 형한테 방 박사 요즘 어찌 지내시는지 물었더니, 옆자리 있던 관백 형이 대뜸 "우리가 방 박사님 저작집 세 권 냈어. 출판기념회 내일 이화여대에서 해" 하는 거 아닌가? 엥? 무슨 소리여? 근데 왜 연락을 안줘 하는 둥의 얘기가 오가는데, 광운 형이 상지대 이사장 이만열 선생과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를 열어준다. 보니, 이만열 선생이 내일 방 박사 출판기념회에서 참석한다는 내용이었다. 


듣자니, 건강은 안 좋으신 편이지만, 내일 출판기념회에 직접 참석하신단다. 잘 됐다 싶었다. 이튿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학술 담당하는 박상현 차장한테 출판기념회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고는 현장 취재를 부탁했다. 다행히 그 시간에 특별히 중요한 일정이 없다 해서, 박 차장이 직접 현장을 갔으니, 식이 끝날 무렵 박 차장한테 카톡이 왔다. 출판기념회 소식과 방 박사 인터뷰는 내일 써서 일요일자로 내보겠단다. "다른 기자들 있더냐?" 물으니, 기자는 혼자라 해서, 그리하라고 했으니, 그렇게 해서 조금 전에 막 나간 기사가 다음 두 건이다. (클릭하면 기사 본문으로 연결된다.)  


한국사 사료 발굴의 전설 '방선주 저작집' 출간

방선주 박사 "사료 찾았을 때 흥분은 아직도 기억나요"


첫번째 기사는 박 차장이 보낸 제목을 약간 손질했으니, '전설'이라는 말을 부러 붙여봤으니, 방 박사는 전설을 넘어 신화다. 미국 국가가기관이 소장한 한국 근현대사 자료 중 90%는 그의 손을 거쳤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일을 해낸 분이거니와, 이 분야 종사자들은 방선주라는 이름을 놓칠 수 없지만, 그런 그의 면모가 일반에는 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 나는 언제나 이런 일이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연합뉴스 기자로 입사해 문화부로 전근해 문화재와 학술을 전담하기 시작한 때가 1998년 12월 1일이었다. 그 즈음 이미 나는 방선주라는 이름을 너무 자주 접했다. 특히 근현대사 관련 논문이나 책에서 그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떤 분이기에 이리 이름이 많이 나오냐 했더랬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방선주 개인사를 논급한 그 어떤 글도 나는 보지 못했다. 있는데 내 검색이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언론에서도 방선주를 정리한 글이 없고, 역사학계도 마찬가지라, 방선주 방선주라고 하면서, 신화적인 인물이라고만 할 뿐, 그 어떤 누구도 이 분 생애를 정리한 것이 없었다. 


당시까지 방 박사는 그가 미국에서 발굴한 자료들을 국사편찬위원회와 한림대를 통해 주로 발간했거니와, 그런 까닭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대체로 국편과 한림대 사람들은 잘 아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이 공적인 문서로 정리가 되지 않으니, 근거없는 이야기들만 떠돌아다니는 실정이었다. 그런 까닭에 내가 기회가 되면, 직접 방 박사를 인터뷰하고 그의 일생을 대강이라도 정리하리라 작심에 작심을 거듭한 것이다. 다만, 주된 활동무대가 미국이라, 내가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는 한, 그의 입국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런 때가 생각보다 일찍 왔다. 방 박사가 입국한다는 소식이 들어온 것이다. 이때다 싶어, 그를 만나러 갔다. 이 만남을 토대로 쓴 인터뷰 기사가 1999년 4월 15일 연합뉴스를 통해 송고한 다음이다. 

 

<인터뷰>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일본인들이 흔히 우리를 가리켜 과거에만  매달린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처럼 과거를 쉽게 잊어버리는 민족은 아마 없을 거예요".


이는 재미사학자 방선주(方善柱.65.워싱턴 거주) 교수가  일본과의  과거청산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는 한국인을 꼬집어 평소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말이다.


15일 1주일 남짓한 한국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는 이  말을 잊지 않았다.


민족이나 국가,더 좁혀 가족사를 알아야 하며 이를 기록으로 반드시 남겨야  한다는 이런 신념이 어쩌면 방교수를 마오쩌뚱의 홍역 기록까지 소장하고 있다는 서울운동장 16배 크기의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와 의회도서관 서고로 내몰았는지 모른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총독부 문서를 거의 다 파괴해 버렸고 미군정이나 한국전쟁 관련 사료는 대부분 미국에 있어요. 국내에 남아있는 자료가  절대부족인 상황에서 미국 자료발굴과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데 일제시기나 한국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지금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도  증언집이 통 나오지 않고 있어요.증언 채록과 기록집 발간은 개인 연구자나 특정 연구기관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만큼 정부차원에서 나서야 해요.


일본을 보세요.일본은 이미 60년대에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중인 일본관련 자료들을 정부가 전부 복사해 갔고 태평양전쟁 관련 증언집만 100권이  넘어요.반면 우리를 보세요. 제대로 된 증언집이 몇권이나 됩니까".


일반인에게 방선주라는 이름이 아직 낯설지만 한국 근.현대사,특히  미군정이나 한국전쟁을 공부하는 국내.외 학자치고 그가 발굴,정리한 자료집을  인용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시피 할 정도로 그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신화적 인물이다.


한국전쟁 연구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나 일본의 와다  하루키도 방교수가 발굴한 사료에 절대의존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가 한국과 관련된 사료수집에 헌신하게 된 것은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방교수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추적하다 보면 마친 굴절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일제치하 1934년 평양에서 태어나 선교사인 아버지 방지일 목사를 따라  중국에서 가서 22살까지 그곳에서 보냈고 1956년 반동분자로 몰려 중국에서 추방된 뒤  한국에 돌아와 숭실대와 고려대에서 한국고대사로 석사학위를 따고는 미국으로 떠났다.


"처음 미국 가서 먹고 살기 위해 별짓 다 했어요.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중국 고대사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그때 갑골학에 심취했는데 아직까지  갑골학에  대해 저만큼 아는 사람은 국내에는 아마 없을 거에요".


이처럼 한-중 고대사로 출발한 그는 능통한 중국어와 일본어,영어 실력을  십분발휘하며 70년대 이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한국  근.현대사로 연구분야를 옮기게 된다.


"당시 문서보관소에서 나한테만 특별히 개인복사기를 안에다 설치할 수  있도록 해줬어요.처음 미국사람들이 제가 미국에 이로운 공부만 하는 줄 알았나봐요.나중에 그런게 아닌 줄 알았지만요.내 자료집을 보고 문서보관소를 들락거리던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이 미국을 해롭게 한다고 해서 출입금지를  당했지요".


이렇게 해서 방선주라는 개인이 미국립문서보관서나 의회도서관 같은 곳에서 발굴해 복사한 자료가 대락 150만건이라는 천문학적 숫자를 가리키고 있다.


이를 정리해 한림대나 국가보훈처 등지에서 책으로 묶어져 나온 자료집만  해도 1백권 남짓.미군정 자료집이니 한국전쟁 당시의 피로 물든 빨찌산 자료집이니  미국 독립운동사자료집 하는 따위가 모두 방교수가 발굴한 것이다.


그는 한국 관련 사료를 뒤지다 간간이 출현하는 위안부 관련  자료도  빠짐없이 정리해 글을 발표하곤 했다. 이 분야 연구를 일본인들이 주도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이 그나마 체면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방교수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쎄, 절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왜 내가 사료발굴에 열성적으로 매달리게 됐는지 물어보더군요. 그때마다 전 이렇게 대답해요.진실을 알기 위해서라고. 아마 제가 힘이 있는 한 한국사 관련 사료발굴은 계속 할 겁니다".


그러나 이젠 자료나 사료발굴보다 글을 쓰는데 힘쓸 작정이라고 말한다.


"요즘은 올해안 출판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국전쟁사」와  「한국전쟁사전」 편찬 준비 때문에 정신없이 바빠요".


키 167㎝ 가량에 몸무게는 60㎏이 될까말까한 깡마른 체구,뿔테 안경과 좋지 않은 청각 때문에 보청기를 낀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이 거인에게 이제 그 흔한 국가 서훈으로나마 그 노력을 보상할 때가 된 것이다.

taeshik@yonhapnews.co.kr(끝)



이후 방 박사를 정리한 박스 기사 하나를 별건으로 처리한 일이 있었으니, 앞 기사에서 언급한 훈장 수여를 거부한 그가 2007년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하고는 입국한 그를 만나러 일부러 현장을 갔으니, 다음 기사가 이를 계기로 작성한 것이다. 송고시점은 2007년 4월 4일이다. 

  

<NARA 터줏대감 방선주 박사>

부친 방지일 목사 이어 부자 '국민훈장'

한국근현대사 자료집만 150만건 300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99년 무렵 국내 근현대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재미사학자 방선주(方善柱. 73. 워싱턴 거주) 박사에 대한 국가서훈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한국근현대사 자료정리에 기여한 그의 지대한 공로 때문이다. 하지만 방 박사는 "훈장 받으려 한 일이 아니다"며 이를 거부했다.


그런 그가 최근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지난달 7일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교육인적자원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2006년도 국민교육발전 유공자들에 대한 국민훈장 수여식에 방 박사는 부인과 함께 참석했다. 


그의 독특한 이력에 비춰볼 때 이날 국민훈장 수훈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은 한 달이 가까워 오는 데도 관련 학계에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방 박사의 부친은 올해 97세인 방지일 목사. 9년 전인 1998년에는 방 목사가 이미 기독교계 대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므로 부자가 국민훈장을 받은 드문 기록도 세운 셈이다. 


그에 대한 국민훈장 서훈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추진했다. 건국대 신복룡 교수를 필두로 고려대 사학과 대학원 동료인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위원장, 전기호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장,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권영빈 전 중앙일보 사장, 유영구 명지학원 이사장 등도 힘을 보탰다.


이런 면면들에서 방 박사가 이룩한 업적의 일단이 드러난다. 그는 한국근현대사 관련 사료의 보물창고라고 일컫는 미국국립문서기록청(NARA)의 '터줏대감'으로 불린다. 


숭실대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도미한 그는 1973년 워싱턴대학에서 석사학위, 1977년에는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중국 서주(西周)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고도 미국 내 대학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자 1979년 이후 NARA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직원으로 취직한 것이 아니라 자료관 일반 이용자의 한 사람으로서 NARA 직원과 같이 출근해 문을 닫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한국근현대사와 관련한 자료조사와 수집이라는 한 우물을 파게 된다. 이후 서울 동대문운동장 16배가 된다는 자료 더미를 뒤져 복사하는 일상을 지금까지 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찾아낸 자료 중 정식으로 간행된 것이 올해 3월 현재 무려 300책을 헤아린다. 1999년 연합뉴스 기자와 만났을 때 방 박사는 자신이 발굴한 자료가 150만 건 정도 된다고 했었다.


그가 발굴한 자료를 가장 요긴하게 이용한 저명한 연구자로는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와 일본의 와다 하루키 교수 등을 들 수 있다. 한국근현대사 연구자 가운데 그가 발굴한 자료를 이용하지 않는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 중에 미군이 습득한 이른바 '북한군노획문서'라든가 미군 측 자료, 중국군 관련 문서 등은  한국현대사를 새로 쓰게 했다. 이 외에도 광복 직후 미군정의 방대한 자료, 미국 특수부대 OSS의 관련 문건, 독도에 관한 연합군 자료, 일본군 위안부 운영과 관련한 문건 등 그가 자료를 발굴해낼 때마다 한국근현대사는 요동을 쳤다.


그가 발굴한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한림대,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등을 통해 간행되곤 했다. 


이런 방 박사가 지금껏 갖고 있는 공식직함이라고는 국사편찬위원회 국외사료조사위원 정도 뿐이다. '돈벌이'가 안 되는 이런 활동을 위해 방 박사는 자그마한 미국 대학에 자리 잡은 부인 정금영 씨의 내조에 의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윤덕영 편사연구관은 "선생이 걸어온 지난 시기의 역경과 노력, 업적에 비해 이번 서훈은 뒤늦은 감이 있다"면서 "많은 연구자와 국내 자료수집기관,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데도 이를 방관해 왔던 것이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저 앞에 첨부한 인물 사진이 이때 내가 촬영한 것이다. 

그 두 번의 만남에서 방 박사는 이미 건강이 좋지 못했다. 워낙 깡마른 체구인데다, 당시에도 보청기를 낄 정도로 청력이 좋지 못했다. 더불어 이런 청력이 좋지 못하는 사람들한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 있어, 당신이 하는 말을 독해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런 그의 저작집이 발간됐다. 박상현 기자가 일부러 기사에서는 뺐는데, 치매 증상이 있어, 기억이 왔다갔다 하며, 같은 말을 무한반복했다고 한다. 

논문 수백편 쓴다 해서 방 박사 업적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거봉이요, 전설이며, 신화다.  


천고마비(天高馬肥). 말 그대로 가을은 청명한 날씨와 함께 오곡백과가 풍성한 수확의 계절임을 압축시켜 전한다. 하지만 원래 이 말 속에는 말을 타고 중국을 끊임없이 노략질했던 북방 유목민, 특히 흉노(匈奴)의 음산한 바람이 분다. 


몽골고원


이 말이 등장하는 가장 오랜 문헌은 한(漢)나라 반고(班固.AD 32∼92년)가 당대 역사를 기록한 《한서(漢書)》의 흉노전(匈奴傳)과 같은 책 조충국전(趙充國傳). 이곳에서 반고는 '천(天)'자 대신에 가을 추(秋)를 사용해 추고마비(秋高馬肥)라는 말을 쓰거니와 글자 그대로 가을 하늘은 높아지고 말은 살찐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흉노는 가을이  되고 말이 살찌며 활이 팽팽해지기 시작하면 (중국) 변방에 (쳐)들어왔다"고 한다. 즉, 천고마비 원형인 추고마비는 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흉노가 중국을 대상으로 노략질을 일삼는 시기라는 게 원 뜻인 것이다.


유목민족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몽골고원이나 고비사막 등지에는 초목이  빨리 시들 뿐 아니라 겨울도 일찍 찾아왔다. 따라서 양식과 말먹이가 부족한 유목민들이 가을에 접어들 무렵부터의 생존수단은 약탈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오랑캐라 불리던 유목민 중에서도 중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존재는 우리나라 고대 역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흉노였다. 나아가 북방의 말 역시 계절 변화에 무척이나 민감해, 겨울철을 버티기 위해서는 그 문턱인 가을에 엄청난 여물을 먹어 살을 찌워 놓아야 했다. 그 찌운 살로 혹독한 겨울을 나야했기 때문이다. 


이동과 전쟁 수단으로 말을 쓰는 유목민 침입을 막기 위해 중국 역대왕조는 가을이면 백성들을  군인으로 징발, 변방에 내보냈고 또한 군대를 먹여살리기 위해 인민한테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 때문에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은 백성은 고통스럽고 말 또한 비참한  천고마비(賤苦馬悲)의 시기였던 셈이다. 그런 사정이 꼭 한나라 때가 더 극심한 것은 아니었으니, 시대를 통털어 중국 전사에 걸친 고역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기라성을 방불하는 시인이 쏟아져 나온 당(唐)나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몽골고원의 아이들



이태백(李太白)과 함께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인물이 두보(杜甫). 그의 조부는 두심언(杜審言.648?~708)인데, 이 할애비 또한 문명이 높아 이교(李嶠)·최융(崔融)·소미도(蘇味道)와 함께 '문장4우'(文章四友)로 일컫기도 했다. 그가 남긴 시로 현존하는 43편 중 다음 '소미도에게'(贈蘇味道)가 특히 유명하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혜성 떨어지고 

가을하늘 높아지며 변방 말은 살 오르네 

힘차게 말 달리며 날랜 칼 휘두르며 

붓 놀려 격문을 날리리라 


雲淨妖星落

秋高塞馬肥 

據鞍雄劍動 

搖筆羽書飛 


이 시가 바로 가을철을 묘사하는 천고마비(天高馬肥), 그 원류인 추고마비 출전 중 하나다. 주의할 것은 두심언은 '추천색마비'(秋高塞馬肥)라고 해서 '추고마비'(秋高馬肥)로 썼다는 사실이다. 이에서 물론 '추(秋)'는 '추천(秋天)', 즉 가을 하늘을 뜻한다. 


가을 하늘이 지닌 푸르름과 높음의 상징은 대한민국 애국가 제3절 첫  소절이 '가을하늘 공활(空豁)한데'인 데서도 확인한다. 이런  '추고마비'(秋高馬肥)가 어느 새인가 천고마비(天高馬肥)로 바뀐 것이다. 


소미도는 왜 변방으로 떠나야 했을까? 두심언 시 어디에도 가을철 낭만은 털끝만큼도 찾을 수 없다. 불길함의 대명사인 혜성이 떨어지고 변방과 칼이 등장하며, 전장의 긴박한 상황을 알리기 위한 격문이 소재로 활용된다. 두심언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거나 전운이 감도는 변방으로  떠나는 친구 소미도에게 무사귀환하기를 바라는 뜻을 시에 담아 보낸 것이다. 


사실 '추고마비'는 당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북쪽 유목국가, 예컨대 돌궐의  침략을 알리는 전령과도 같은 불길한 징조였다. 말은 풀 먹이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가을철이 가까워지면 본능적으로 살을 찌운다. 마찬가지로 돌궐 사람 또한 겨울철을 대비해 약탈을 감행하게 된다. 


이런 음산한 천고마비가 어느 새 가을 낭만을 묘사하는 대명사와도 같은 지위를 점하니, 격세지감일까? 이 가을 몽골 고원으로 말을 타러 가고 싶다. 


*** 이 글 역시 지난날 내가 쓴 글 두어 종을 버무린 것이다. 


좀 먼 시대 이야기이긴 하나, 1996년 9월 한국마사회가 당시 과천 서울경마장 주로를 달리던 경주마 1천300여 마리를 대상으로 계절별 체중 변화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더러브렛종 경주마가 매년 9~11월 중 평균 체중이 6.3kg가량 더 늘어난 것을 비롯해 전체 경주마가 가을철 체중 증가세가 뚜렷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국산 경주마는 가을철에 살찌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 호주, 뉴질랜드산보다  평균 0.3kg가량 더 몸무게가 불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비단 경주마뿐만 아니라 말을 비롯한 동물이 가을에 살이 더 찌는 현상은 본능적으로 겨울철에 건초 부족 등으로 먹이를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미리 체내에 에너지를 비축하고자 하는 데다 특히 가을철에 성장호르몬 분비가 촉진되는 점이 주된 원인으로 분석됐다. 흔히 가을을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 해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  하거니와 하늘이 더 높아지는 지는 모르겠으나 말이 살찐다는 속설은 참말인 셈이다. 


몽골고원



술만 마시면 시가 절로 나왔다던 중국 최대 시인 이태백(706~762). 그를 흔히  남이야 굶어죽든 얼어죽든 저 혼자만 부어라 마셔라 흥청대던 이기주의 시인의 대표쯤으로 알지만 사실 이태백만큼 서민들의 애환을 잘 읊은 시인은 드물다. 태백은 특히 그칠 줄 모르는 전쟁에 따라 민중이 겪는 고통을 잘 알았다. 그의 4편 연작시인 자야오가(子夜吳歌) 중 제3편을 보자.


長安一片月

萬戶擣衣聲

秋風吹不盡

總是玉關情

何日平胡虜

良人罷遠征


장안(長安)에 조각달 걸렸는데  

집집마다 다듬이질 하는 소리 

가을바람 불어 그치지 않으니 

이는 모두 옥관(玉關)의 시름

언제나 저  오랑캐 쳐부수고

님께선 먼 원정 마치실꼬  


장안은 당나라 서울이고 옥관은 감숙성에서 신장성으로 가는 군사 관문. 이태백은 이 시를 통해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밤늦도록 다듬잇소리를 내는 여인네 입을 빌어 그들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계절적 배경이 가을이다. 그의 다른 시 중에 새하곡(塞下曲)이 있는데 새(塞)란 말할 것도 없이 변방이다.  연작시 5편 중 제2편 역시 계절 배경이 가을인데 이렇다. 


天兵下北荒

胡馬欲南飮

橫戈從百戰

直爲銜恩心

握雪海上飡

拂沙隴頭寢

何當破月氏

然後方高枕


천명 받은 군대는 북쪽 벌판으로 치달리는데 

오랑캐 말은 남쪽으로 달려 물 마시려 하네 

창을 비껴 들고 온갖 전투에 임하는 까닭은 

바로 성은(聖恩)을 머금었기 때문이라네 

눈을 움켜쥐곤 청해에서 밥해 먹고 

모래 툴툴 털고 농산에서 잠을 자네

언제쯤 월지 맞아 깨뜨리고

그런 다음 높은 베개 베고 자려나 


천자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는 북쪽으로 말을 몰아 유목민들을 몰아내고자  하는데 북쪽 오랑캐 말들은 남쪽, 즉 중국으로 내달리고자 한다는 이태백의 바로 이  시에 우리가 낭만적으로 알고 있는 천고마비 그 본래의 뜻이 숨어 있다. 천고마비는 그 뜻이 글자 그대로지만 원래 이 말은 음산하고 피비린내가 난다.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한 중국 변방은 고도가 높기 때문에 가을과 겨울이 일찍 온다. 그러면 초목이 말라 버려 말이나 사람 할 것 없이 먹을 것이 없어진다. 이때 말은 본능적으로 겨울을 나기 위해 가을철 초목을 닥치는대로 먹으려 한다. 하지만 초목은 이미 매말라 버렸다. 이렇게 되면 목축을 생업으로 하는  유목민들은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친다. 바로 약탈이다. 그래서 가을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찌는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중국은 언제 북방 유목민족들이 밀려내려와 닥치는대로 약탈을 일삼을 지 바짝 긴장했다.


북방 유목민족 혹은 국가 중에서도 한나라 때 강성함을 자랑한 흉노와 오환은 특히 중국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이 중에 고구려도 가끔 끼어든다. 중국은 고구려 왕 중에서도 걸핏하면 북경 근처까지 쳐든 태조왕과  동천왕을 특히나 두려워 했다. 그래서인지 중국역사에는 태조왕과 동천왕은 마치 괴물처럼 그린다.


이런 유목민족들의 약탈을 막아내고 때로는 원천봉쇄하기 위해 중국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고 백성들을 군대로 강제징발해 변방으로 내몰았다. 천고마비가  중국민중들에게는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천고마비 고통을 가장 잘 노래한 시인 중 한 명이 이태백이었다. 


** 이는 2000년 10월 17일 연합뉴스를 통해 송고한 내 기사 '<천고마비(天高馬肥)와 이태백>'을 약간 손질한 것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은 말총머리 스타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를 위한 대회였다.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당대 축구계를 호령한 이 스타는 이탈리아인으로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불교도다. 이런 점에 주목해 대한불교 조계종에서는 이 축구스타를 불교 홍보에도 좀 써먹을 요량으로 초청을 하려 했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리처드 기어. 늙을수록 섹시함을 더 풍기는 이 유명 헐리웃 스타는 양키로서 희한하게 불교도다. 열렬한 티벳 독립 지지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 자본이 물밀듯이 흘러들어간 헐리웃 영화에서는 그 중국 자본 견제로 영화 출연이 힘들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바조나 리처드 기어가 생각보단 한국 불교계에서 그리 인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반색을 하고 반길 텐데, 실은 정반대였으니, 특히 바조의 경우 초청까지 하려다가 포기한 이유가 다름 아닌 그가 남방불교(혹은 티벳 불교)라 해서였다고 내가 기억한다. 내가 기억에만 의존해 쓰는 까닭에 혹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교시 부탁한다. 

그렇다면 왜 남방불교는 증오했는가?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 불교계에 팽배한 한국불교=대승불교=좋은불교, 남방불교(혹은 티벳불교)=소승불교=나쁜불교라는 도식이 절대의 구분으로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릴 적 세계사를 배울 적에도 저런 도식으로 외웠다. 그래서 남방 소승불교는 아주 나쁜 불교인 줄로만 알았다. 

기원전후 무렵에 기성 불교교단의 부패상에 대한 개혁을 부르짖고 독립한 대승불교가 애초 그 출발에서 혁신성과 참신성이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으니, 이는 기성 기독교에 칼을 들이댄 마르틴 루터의 프로테스탄티즘과 같다고 보아 대과가 없다. 그런 대승불교가 출발이 그랬다 해서, 그에서 비롯하는 후대 대승불교가 그렇다는 등식은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다. 개신교 역시 루터나 쯔벵글리 혹은 위클리프 당시에는 개혁적이었을지 모르나, 그것이 시간이 흘러 이땅에 상륙한 이 개신교는 썩은 내 풀풀 풍기거니와, 명성교회 사태는 그 말류적 증상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상대적이긴 하나, 시간이 흘러 어쩌다 보니, 그 본류가 지류보다 상대적으로 깨끗해 보이기도 하니, 기독교를 볼 적에 전반으로 보아 개신교보다는 가톨릭이 좀 깨끗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불교 역시 애초 출발은 개혁과 참신이었을 대승불교가 어찌하여 더 개판이 되어 걸핏하면 쌈박질이니, 그에 견주어 소승불교가 상대적으로 끼끗하게 보임은 어쩔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출가자들한테 시종일관 하루 한끼 식사에 그 식사는 시종일관 탁발로써 구하라고 했으며, 누구보다 그 자신이 그렇게 생활했다. 나 어릴 적에는 그런 전통이 희미하게 남아, 그 먹을 데 없는 우리 집에도 가끔 탁발승이 와서 밥과 반찬을 동냥하곤 했다. 요새 이러는 중이 없다. 탁발하는 중 안 본지 오래다. 물론 시대가 변해서 그리하기 곤란하다는 사실은 잘 안다. 

하지만 여전히 저 동남아 불교는 저 탁발 전통을 철저히 지킨다는 사실을 어찌 설명해야 하는가? 스님을 공양하는 저 어린아이를 볼 적마다, 눈물이 난다. 

그런 남방 소승불교가 이제는 썩어빠진 한국 대승불교를 반추하는 거울이 되고 있다. 실제 쳐다볼 수록, 저 남방불교가 석가모니 부처님에 훨씬 더 가깝더라. 

중들이여, 동냥하라! 

생소한 도덕 윤리 관념으로 무장한 불교가 바다를 건너고,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서, 혹은 동지나해를 지나 동아시아로 침투해 서서히 저변을 넓혀가자, 그것이 못마땅하기 짝이 없던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그 타도의 기치를 높이 쳐들었으니, 그 플랑카드엔 언제나 "저 외부 귀신들은 애미 애비도 모르는 상놈"이라는 문구가 선두를 차지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출세간出世間을 지향하는 불교는 필연적으로 혈연의 단절을 전제할 수밖에 없으니, 그리하여 부모도 버리고 형제자매도 팽개치며, 석가모니 자체가 그랬듯이 피붙이 자식조차 팽개치고는 더 큰 구제를 내걸었으니, 그들에게 혈연은 무엇보다 단절해야 할 괴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는 필연적으로 노우 섹스로 흘렀으니, 자식도 생산하지 아니하고 대중을 자식으로 받아들인다고 선언했다. 


이는 사바세계 통치권력자들에게도 눈엣가시와도 같았다. 이들은 소득이 없었으므로(적어도 그리 선언했고, 초창기 승가에서는 분명 구걸을 통해 연명하고자 했으므로 분명히 그랬다) 물릴 세금이 없었다. 출세出世를 했다 하므로, 사바세계 권력과 국가가 그들을 노동 현장에 동원할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그들의 수행처인 사찰은 탈세脫稅, 둔세遁世의 온상이라는 비난이 잇따랐다.


집안에서는 孝를 버렸고, 밖에서는 忠을 버린 존재, 그들이 불교의 승려들이었다. 


2003. 8. 12 충남 계룡산 갑사에서 열린 백중행사. 스님과 신도들이 함께 천도제를 행한다. 음력 7월 15일은 불교의 우란분절과 농사일을 잠깐 쉬는 민간의 백중이 겹쳐진 날로 예부터 돌아가신 조상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제를 거행한다.(연합DB)



이런 도전과 공격에 줄기차게 시달린 불교는 처음엔 아니라고 발악했지만, 결국 그 압력에 굴하고 말았다. 《우란분경》이며 《부모은중경》이니 하는 새로운 불교 경전을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이라 해서 조작해 내고는 그들을 공격하는 자들을 향해 "봐라, 우리 불교도 얼마나 효와 충을 강조하는지"라고 자신있게 떠들기 시작한 것이다. 


목련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우란분경》과 그 자매편 《부모은중경》은 적어도 언설만으로는 忠과 孝라는 윤리가 강고하기만 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불교가 뿌리내리고 튼신하게 자리잡기 위한 몸부림의 처절한 흔적이다. 이 두 경전을 조작함으로써 비로소 불교는 어느 정도 불교는 뿌리째 박멸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사리는 개뼉다귀나 진배없으니 태워버려야 한다는 저 한유의 공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을 비롯해 임진왜란이라는 누란의 위기에서 왜 이 땅의 승려들이 창과 칼을 잡고 도탄에 빠진 백성과 임금을 구하겠다고 일어섰겠는가? 도전에 대한 응전이었다. 무엇에 대한 도전이었고 무엇을 위한 응전이었는가? 저 까까중들은 부모도 모르듯이 임금도 모른다는 그 항변에 대한 응전이 이른바 승병僧兵 의거였다.


김해 선지사 소장 불설부모은중경. 조선시대 통털어 이 은중경은 가장 빈번한 출판을 기록했다. 불교는 애미애비로 모르는 잡놈들이라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일환이었다.(연합DB)


더불어 살아남고자 세금도 내기 시작했고, 원래 승려는 부모는 물론이고 임금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지만, 마침내 그에 굴복해 임금 앞에서는 臣이라 자칭하기도 했고, 남한산성을 쌓고 그것을 보수하는 일을 자발로 떠맡아 오분대기조 역할도 했다. 


석가모니가 인도에서 불교을 제창했을 적에, 그에는 孝와 忠이 깃들만한 구석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효와 충은 사카무니가 말한 그 깨침과는 전연 반대의 도덕윤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래서 반열반에 이르기는 과정에서 반드시 퇴출해야 하는 괴물 중 상괴물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공격이 하도 거세지니, 스스로 살아남고자 효를 조작하고 충을 급조하기에 이른다. 우리 불교도 역시 충과 효에 충실하다는 그 논리가 필요했던 것이며, 그 도덕을 체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 눈물겨운 투쟁이 산스크리트어 혹은 팔리어 초기 불경 번역사에서도 고스란하다. 내가 알기로 인도 불경, 특히 아함 계통 경전에는 孝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하기야 있을 리 있겠는가? 하지만 이를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문에도 없는 孝라는 말이 조작되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불교도의 이 조작 공작은 나중에 어느 정도 방어막을 형성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해 준다. 남북조시대 말기, 특히 도교를 중심으로 또 한 번 불교 타도의 깃발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을 때, 불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불경에 석가모니가 孝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권장했다는 증거들로써 바로 조작한 불교 경전 번역본들을 들이밀곤 했기 때문이다. 


불교가 이 땅에 상륙한 순간, 어쩌면 가장 비불교적인 孝를 장착한 새로운 동아시아 불교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불교는 공격에 시달렸다. 작금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신교가 욕먹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부패의 온상으로 몰려 거센 공격에 시달린 것이다. 이런 공격은 조선왕조 개창이 더욱 부채질을 해 댔으니, 그 과정에서 나온 불교 공격이 삼봉 정도전의 《불씨잡변》이다. 덧붙이건대 이 잡변은 수준이 형편없기 짝이 없어, 기존 중국 땅에서 나온 불교 공격론의 짜깁기요 우라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를 침소봉대하여, 그것이 새 시대를 연 좌표인양 삼는다. 누가? 이 땅의 역사학도들이 말이다. 


*** 이상은 작년 오늘, 그러니깐 2017년 10월 9일 내 페이스북에 '도전과 응전, 孝를 조작하는 불교'라는 제목으로 긁적인 글을 조금 손을 본 것이다. 


이 고타소(古陀炤)는 앞서 여러 번 다루었고,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이나 사건은 이곳 내 블로그에서 '고타소' 혹은 그의 남편 '품석'으로 검색하면 되거니와, 혹 그것들이 모두 필요하신 분들은 참고바란다. 고타소란 이름은 내 조사가 철저한지 아닌지는 자신이 없거니와, 일단 내 추산대로라면 《삼국사기》 권 제41 열전 제1 김유신上에 보이거니와,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은 다음과 같다.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격파했을 때, 춘추공(春秋公)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스럽게 여겨 고구려에 청병함으로써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하자 왕이 허락했다. 


이것이 삼국시대 말기, 삼국 관계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대량주, 곧 지금의 합천 전투를 말함이거니와, 이 전투를 고비로 삼아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은 국운을 건 일전들을 치루거니와, 조금 과장하면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 그 불씨는 대야성에서 출발한다. 나아가 더 세부로 들어가면, 이 전투에서 신라가 패하고 고타소가 죽임을 당한 일이 그 거대한 출발점을 삼는다. 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 전재한 글에서 내가 전론(傳論)한 바 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로 한다. 


이런 고타소가 비록 고타소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맥락은 이 한 곳에 지나지 않으나, 이 당시 비극의 행적은 《삼국사기》 등지의 다른 곳에서도 산발적으로 보이니, 이런 여타 행적들과 버무림으로써 우리는 이 고타소의 족보를 둘러싼 비밀 하나를 풀게 된다. 아무튼 저 인용문을 통해 우리는 김춘추한테는 642년 당시 품석이라는 대야성주(이는 다른 대목에 보인다)한테 출가한 이미 출가한 고타소라는 딸이 있었음을 안다. 


이 고타소는 아비만 드러날 뿐, 어머니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이에서 관건은 고타소 어미가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 소생인가 아닌가로 모아진다. 현재 우리의 첫번째 관심은 고타소 어미가 문희냐 아니냐다. 이를 판별하기 위해 김춘추 출생년과 김법민(훗날 문무왕), 그리고 김법민 바로 아래 남동생 김인문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고타소가 문희 소생인가 아닌가는 거의 90% 이상 단안할 수 있다. 


첫째 김춘추 생년이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 는 침묵하나,  《삼국유사》는 달라 이곳 기이(紀異)편 제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전에 의해 그것이 밝혀진다. 이곳에 이르기를 김춘추는 "영휘 5년 갑인(654)에 즉위해 8년을 다스리다가 용삭 원년 신유(661)에 붕崩하시매 수壽 59세였다"고 하니, 말할 것도 없이 이때 나이는 소위 한국식이라 서양식 관념으로는 만 58세라는 뜻이다. 따라서 661년에서 58을 빼면 603이니, 이것이 바로 김춘추가 태어난 해다. 595년 생인 김유신과 비교하면 8살 어리다. 


따라서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딸 고타소가 죽었을 때, 김춘추는 만 39세, 신라식으로는 마흔살이었음을 안다. 이 무렵에 대개 스무살 안팎이면 거의 다 장가를 갔을 것이므로, 이때 김춘추가 사위를 봤다 해서 하등 이상한 점은 없다. 


한데 관건은 김법민과 김인문이다. 이 두 형제가 문희 소생임은 너무나 분명해 그에 대해 더는 물을 것이 없다. 이 중 형 김법민은 626년 생이요, 동생 김인문은 629년 생이다. 두 형제간에는 3년 차이가 난다. 김법민은 아들딸 통털어서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첫번째임은 하늘이 두쪽 나도 변함이 없다. 그것은 김유신이 기획한 저 유명한 축국쇼, 다시 말해, 김유신이 일부러 김춘추를 끌어들여 축구시합을 하다가 부러 옷고름을 찢어발겨 그것을 기워준다는 구실로 미혼인 누이동생 문희와의 소개팅을 주선해, 그에서 쿵딱쿵딱 해서 문희가 처녀 몸으로 밴 애가 바로 김법민인 까닭이다. 따라서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는 626년 태어난 김법민 이전에 태어난 자식은 있을 수가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면 그가 태어난 시점은 626년 생인 김법민보다 때려 죽어도 늦어야 한다. 얼마나 늦어야 하는가? 년년생이 전통시대에 드물지는 않았으므로 년년생이라 해도 고타소는 627년생이다. 한데 그렇게 봐도 영 석연찮은 대목이 있다. 다름 아닌 김인문 때문이다. 김인문은 김법민보다 3살 적은 629년 생이다. 626년과 629년 사이에 다른 자식이 없으란 법은 없으나, 문희가 무슨 애 낳는 벤딩머신이란 말인가? 상식으로 봐도 얼토당토 않다. 결론은 하나다.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고 하면, 626년생인 김법민, 629년생인 김인문보다 동생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고타소는 때려죽여도 630년 이후에 태어나야 한다. 


 그래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고 하고, 모든 가능성 고려해서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자! 630년 이전에는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넉넉잡아 630년 생이라고 해도, 고타소는 642년 대야성 전투 당시 나이가 고작 만으로 12살, 신라 나이로 13살밖에 되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치자. 저 나이에 얼마든 지아비는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넉넉잡아 13살이라고 하고, 그 나이에 김품석과 결혼해 남편 따라 대야성으로 갔다가, 불행하게 백제군에 성이 함몰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치자!  


같은 《삼국사기》 권제 47, 열전 제7이 저록著錄한 죽죽竹竹 전 다음 기술은 대체 무슨 개뼉다귄가? 


殺妻子而自刎 


죽죽은 이 대야성 전투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신라 군인이다. 품석의 부하들이 배반하여 백제군과 밀통하고 항복하려는 움직임에 분연히 반대하고 일어나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신라를 배신한 품석 부하들이 성문을 열고 백제군으로 투항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백제는 배신했다. 항복하러 나온 신라군을 복병을 시켜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저 인용문은 그 장면을 보고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성주 김품석이 취한 행동을 말한다.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품석은) 먼저 자기 마누라(고타소)와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어랏? 김품석과 고타소 사이에 아들이 있었네? 말이 안 되잖아?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면 아무리 많아 봐야 13살인데, 13살짜리가 아들을 낳았다고? 물론 이조차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과 그렇다는 건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다. 


결론은 오직 이 하나 뿐이다. 


김춘추에게는 문희 이전에 다른 부인이 있었다!!!!  


이 명확함이 오직 《화랑세기》에서만 드러난다.  《화랑세기》 논쟁? 끝났다. 뭐 그냥 단순히 문희 이전에 김춘추한테 부인이 있었다? 그건 누구나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그 맥락이 어찌 드러나는지 눈이 있으면 똑똑히 보고 말해라.  


  


 


이 사진에 대한 김용래 기자 설명문은 다음과 같다. 


"호찌민, 한국인들의 저항 그대로 따라"…100년 전 프랑스 경찰 문건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1920년 전후로 프랑스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당시 베트남의 독립지사 호찌민(전 베트남 국가주석)이 밀접하게 교류한 내용이 프랑스 정부 자료로 최초로 확인됐다.

    재불 독립운동사학자 이장규 씨는 프랑스 국립해외영토자료관(ANOM·엑상프로방스 소재)을 뒤져 1919~20년 프랑스 파리의 정보경찰관이 작성한 동향보고 문건을 발견해 연합뉴스에 공개했다. 

    사진의 문서는 프랑스의 정보경찰관 '장'이 작성한 것으로 "응우옌 아이 꾸옥(호찌민의 당시 이름)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고 적었다.

    또 "호찌민이 하려는 것에 대비하려면 미국에서 한국인들이 펴낸 간행물들을 살펴봐야 한다. 파리의 한국인들도 책자를 내려는 것 같다"고 기술했다. 2018.9.30 [파리 7대 박사과정 이장규씨 제공/프랑스국립해외영토자료관(ANOM) 소장자료]  

    yonglae@yna.co.kr

(끝)


1921년의 호치민(출처 위키피디아 '호치민')



한국시간 오늘(2018.9.30) 오늘 새벽 4시발 우리 공장 김용래 파리특파원이 작성한 '호찌민 감시 佛 경찰문건 대거발굴…한국 임시정부 활약상 생생'이라는 제하 기사가 엠바고 해제되어 풀렸으니, 메인 타이틀 아래 다음과 같은 부제가 네 줄이나 달렸거니와, 이는 그만큼 작성기자와 데스크가 이 자료 발굴을 의미 깊게 본다는 뜻이다. 


해방운동 막 시작한 호찌민,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인사들과 교류…사료로 첫 확인
호찌민, 김규식·황기환 등 임정 인사들 도움 받으며 베트남 독립의지 다져
佛 정보경찰 "호찌민 계획에 미리 대비하려면 한국인들 펴낸 간행물 살펴봐야"
재불 연구자 이장규씨, 佛 국립 해외영토자료관 샅샅이 뒤져 찾아내


이 기사 핵심은 다음 그 앞 줄 몇 대목이 응축한다.  


1920년 전후로 한국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당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찌민(1890~1969)이 파리에서 약소국의 설움과 독립에의 열망을 나눈 내용이 프랑스 정부자료로 처음 확인됐다.

호찌민이 젊은 시절 파리에 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감화돼 이들과 밀접히 교류하고, 독립투쟁의 의지를 다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희귀자료다.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파리의 경찰관은 이런 내용을 상세히 기록했고 이 문건들은 프랑스 자료관을 뒤지던 재불 한국사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했다.


1946년의 호치민


호치민이 한국독립운동가 진영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는 역사가 오래지 않는다. 탤런트 오지명과 한자 발음이 흡사한 호지명의 이에 얽힌 이야기는 내가 문화부 기자 초창기 시절에 다룬 기억이 있어, 내부 검색 통신망을 통해 '호치민+김태식'이라는 복합 키워드를 두들기니, 대략 10건 정도가 뜨는데, 개중 나로서는 데뷔작이라 한 만한 기사로 1998년 12월에 송고한 다음이 있어, 새삼 추억을 소환하고자 한다.   


<호치민과 초기 한국 공산주의자들>

1998.12.17 17:20:00 


(서울=연합) 金台植기자 = 베트남을 공식방문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지난 16일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묘소를 참배하고 헌화했다.

본명이 응엥 싱 콘인 호치민은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활동에 투신해 결국 베트남 독립을 이끌어 냈다. 이 때문에 베트남 국민들에게 호치민은 한국인들이 갖지  못한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통치에 신음하던 1890년대 초반에 태어나 민족의식에 눈을 떴으며 독립쟁취를 위해 공산주자의 길을 걸었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위력이 여전한 한국의 대통령까지 참배한 이런 공산주의  혁명가 호치민이 초기 한국 공산주의자들과는 교류를 가졌는지, 그랬다면 누구하고 어디서,어떤 활동을 함께 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바는 전혀 없다.

멀리서 사상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호치민과  한국 초기 공산주의자들이 직접 만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최근 1920년대말 모스크바에서 찍은 케케묵은 사진 한장이 공개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계간 역사대중잡지인 《역사비평》 지난해 여름호는 그동안 언론노출을 극히 꺼렸던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을 인터뷰한 글과 함께 문제의 사진을 게제했다.

여자 8명을 포함해 모두 19명의 젊은이가 3줄로 늘어선 채 포즈를 취한 이 사진에는 놀랍게도 호치민이 고려공산당 총아들인 박헌영,김단야,주세죽 등과 함께 등장하고 있다.

사진 설명문에 따르면 호치민과 박헌영 등은 각국 공산당 연합체였던  코민테른이 `동아시아 혁명가들을 육성하기 위해'에 모스크바에 설립했던 동방노력자 공산대학(국제레닌대학의 잘못인 듯)에 유학왔던 1929년 어느날 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 사진 한장은 호치민이 적어도 박헌영,김단야를 비롯한 우리나라 초기 공산주의자들과 일정한 교류와 교분을 가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사실을 증명하듯 호치민과 박헌영,김단야,주세죽 등은 이 사진이 촬영된 1929년 모두 모스크바에 체류하고 있었다.

이들 두나라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조국이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으며 그들 자신 또한 경찰의 검거열풍을 피해 모스크바에서 망명을 하고 있다는  데서 쉽게 동질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똑같이 공산주의 혁명의 길을 걸었던 이들 두나라 젊은이들은 죽고난 뒤 그들 조국에서 극단적인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한쪽은 그 나라의 국부이기 때문에 외국국가 원수의 참배를 받지만 다른 한쪽은 남북한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사진있음)

(끝)


저 무렵, 한국근대사 전공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가 당시 박사를 취득하고 교수가 되기 전, 조선공산당 트로이카 연구에 매진하던 시절이라, 저와 같은 기사 작성에 그의 도움을 많이 받은 기억 생생하다. 기사가 언급한 사진을 임 교수는 2004년인지 그 어간에 출간한 박헌영 단행본에서도 써 먹었다고 기억하거니와, 다음 사진이 그것이다. 



이 사진에 연합뉴스가 붙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임경석 교수가 집필한 `박헌영 일대기'에 수록된 관련 사진. 국제레닌학교 재학시설 각국 혁명가들과 함께 한 박헌영(앞줄 오른쪽 세번째).주세죽(가운데줄 오른쪽 세번째), 김단야(앞줄 왼쪽 두번째), 호치민(뒷줄 오른쪽 끝)이 보인다.//문화부 기사참조/문화/        2004.4 .1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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