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수(隋) 제국 마지막 황제인 황태주(皇泰主)는 글자 그대로는 ‘황태皇泰’라는 연호를 쓴 왕조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수 제국 마지막 황제지만, 실은 허울에 지나지 않은 꼭두각시였다. 본명은 양동(楊侗), 죽은 뒤에 얻은 이름인 시호諡號는 공황제(恭皇帝)였으니, 황제 시호에 ‘恭’자가 들어간 글자 치고 끝이 좋은 이가 없다. 604년, 수 제국을 개창한 문제(文帝)의 증손이면서, 2대 황제 양제(煬帝)의 손자로 태어나 619년 7월에 사망했다. 그가 재위한 기간은 618년 6월 22일 이래 이듬해 5월 23일이니, 11개월 남짓하다. 재위 기간 황태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아버지는 원덕태자(元德太子) 양소(楊昭)이니 그의 둘째 아들이다. 어미는 소유량제(小劉良娣)다.



사약 마시는 단종. 연합DB



양동은 월왕越王에 책봉되어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에 있었다. 그러다가 618년 4월 11일, 양제煬帝가 우문화급(宇文化及)한테 시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런 소식이 동도에 전해진 뒤인 같은 해 5월 24일 무진일에 이 일대 실력자 왕세충(王世充)이 원문도(元文都), 노초(盧楚) 등과 더불어 황제로 옹립하니, 이에서 그를 황태주皇泰主라 일컫는다.


황제 취임과 더불어 왕세충을 이부상서吏部尚書로 삼고 정국공鄭國公에 봉했다. 세충과 더불어 진국공陳國公 단달段達, 내사령內史令 원문도元文都, 내사시랑內史侍郎 곽문의郭文懿, 황문시랑黃門侍郎 조장문趙長文, 내사령內史令 노초(盧楚), 병부상서兵部尚書 황보무일(皇甫無逸)이 새로운 황제를 보필하며 국정을 장악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칠귀七貴’라 불렀다.


하지만 왕세충이 전횡하자 공신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원문도가 세충을 암살하려다가 그 계획이 단달段達에게 누설되고 이를 통해 세충에게 역습을 받아 패몰했다. 원문도는 죽음 직전 황태주에게 말하기를 “신은 오늘 아침에 죽습니다만 폐하는 저녁에 그리 될 것입니다”고 하니 황태주 역시 흐느껴 울었다.


그런 그가 황태(皇泰) 2년 4월 초 계묘일에 마침내 왕세충에게 밀려 폐위되고 함량전(含涼殿)으로 유폐됐다. 그 이틀 뒤 왕세충은 “대정황제大鄭皇帝”라 자칭하고는 “개명開明”이라 연호를 확정하고는 황제에 취임했다. 그러고는 황태주 양동을 격하해 노국공(潞國公)으로 삼으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양동은 부처에게 의지할 뿐이었다.


5월에 이르러 배인기(裴仁基)와 배행엄(裴行儼) 부자가 왕세충을 시해하려다가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죽임을 당하자, 그 화근이 양동에게 있다고 판단한 왕세충에게 마침내 죽임을 당한다.


그해 6월, 왕세충은 조카 왕인(王仁)과 가복家僕 양백년(梁百年)을 황태주 처소에 보내 짐독으로 죽음을 내렸다. 이 자리에서 황태주는 왕세충이 나중에 황제 자리를 돌려준다는 약속을 했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죽음을 피하려 했으니 그 모습이 자못 비장하게 남아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황태주는 짐독을 마셨지만, 죽지 않자 목졸림을 당해 생을 마쳤다. 죽음에 이르러 황태주는 향을 사르고 예불하면서 “부디 제왕의 존귀한 가문에서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이때가 겨우 16세였다. 



화랑세기 7세 풍월주 설원공전 한 대목은 그와 그의 베아트리체 미실의 '이상한'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설원)공은 건원(建元) 14년(549)에 나서 건복(建福) 23년(606) 7월에 卒했다. 그때 미실궁주가 이상한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공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셨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 병을 대신하였다. 미실이 일어나 슬퍼하며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를 지내며, ‘나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고 하니 그때 나이 58세였다.


당시 58세는 장수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런대로 천수天壽를 누렸다 할 만하다. 그럼에도 이 대목이 허심하지 아니하게 보이는 까닭은 혹 돌림병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사기도 하는 까닭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한 장면. 설원랑(왼쪽)과 미실(오른쪽)이다.



이 대목은 말할 것도 없이 주공(周公)의 고사를 본딴 언급이다. 군사 쿠데타를 통해 걸(桀)을 축출하고 하(夏) 왕조를 붕괴하면서 은상(隱商) 왕조 천하를 만든 문왕(文王)한테 주공은 둘째아들이라, 아비가 죽자 제위는 장자 무왕(武王)에게 갔다. 무왕이 죽자, 보위는 어린 아들 성왕(成王)한테 갔으니, 그의 재위 초반기 한동안은 숙부인 주공이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자 주공을 시기하는 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 움직임이 집요했던 듯하니, 이런 움직임을 문왕의 다른 아들들, 그러니깐 무왕과 주공의 동생들이 주도했다. 음모론의 요체는 주공이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제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주공은 섭정 자리를 내어놓게 되는데, 그러고는 찬탈 음모에 대한 특수부 조사까지 받기에 이른다. 이 와중에 금등지서(金縢之書)가 공개되기에 이른다. 무왕이 죽을 병에 걸렸을 적에, 하늘에 대고 빌기를 "형은 못 났고, 나는 잘 잤으니, 잘난 나를 대신 데리고 가라"는 골자였다. 이리해서 결국 그 병을 주공이 대신 앓고, 무왕이 살아났다는 것인데, 이 금등지서가 공개됨으로써 주공의 충성심은 충분히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설원공이 미실을 간병하다, 그 역시 그 병에 걸렸다는 것으로 보아, 혹 돌림병이 아닌가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  


아울러 저 인용문에서는 설원이 죽자, 미실이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를 지냈다 하거니와, 신라시대 매장 양식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흥미롭다. 이 무렵이면, 신라에서는 저 우람한 경주분지 적석목곽분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석실분으로 갈 무렵이라, 무덤 양식이야 어찌 변해가건,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이른바 부장품 중 상당품은 조의품이라는 내 주장을 기억한다면, 참고가 되리라 본다. 





  1. M. Cassandra 2018.12.06 16:06 신고

    드라마 선덕여왕이 생각나네요 ㅎㅎ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2. 국선화랑 2018.12.06 20:08 신고

    미실궁주의 나이가 58세란 말이 아니고, 설원의 나이가 58세(549~606)란 뜻입니다.

Veni, vidi, vic. 


영어로는 줄리어스 시저, 그의 시대 실제로 이탈리아 반도 본토인들이 사용한 고전 라틴어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했다는 이 유명한 말을 내가 새삼 끌어댄 까닭은 그것이 태동한 역사적 맥락이나, 그것이 현재의 실생활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지를 논급하는 것과는 하등 관련이 없고, 외국어 습득과 관련한 두어 마디를 보태고자 함이다. 기원전 47년, 젤라 전투(the Battle of Zela)에서 폰투스 왕 파르나케스(Pharnaces II of Pontus)를 순식간에 제압하고는 의기양양하게 카이사르가 떠들었다는 저 말이 영어로는 흔히 I came, I saw, I conquered 라고 번역하거니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하는 한국어 새김은 이에서 말미암는다. 


지금은 거의 사어死語가 되어 버리다시피 한 라틴어를 그에서 직접 유래한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 스페인어, 혹은 포르투갈어를 모국국어로 쓰지 않는 데다, 더구나 나처럼 이미 반백이 지난 사람이 혹 그것을 배우고자 한다면, 그 목적이야 여러 가지겠지만, 나로서는 우선 말보다는 글이 우선이라 하고 싶다. 간단히 말해 죽어버린 라틴어를 어디에다 써먹겠다고 내가 그 말, 발음에 얽매이겠는가? 나 같은 사람한테 더욱 중대성이 점증하는 곳은 실은 말보다는 글이다. 다시 말해, 그 궁극적인 목적이야 달성할 날이 있겠냐마는 유럽 성당 머리맡이라든가, 유적지에 나뒹구는 돌판에 판 글자가 무슨 뜻인지 대강이나마 알 수 있었음은 좋겠다는 그런 소박한 바람에서 라틴어를 손이나마 대보고자 하는 것이다. 



바티칸 베드로성당..라틴어로 지껴놓았다. 저기 보이는 V는 대부분 u로 바꿔 읽으면 된다.



내 세대 많은 이가 그렇듯이, 나 역시 제2 외국어로는 영어 세례를 받고 자랐다. 그렇다고 이 영어나마 제대로 하는가 하면, 그러하지를 못해 애간장을 늘 태우거니와, 그럼에도 이미 생득적, 혹은 본능적으로 다른 언어를 체득 습득할 수 있는 나이를 훌 지나버린 한국어권 라틴어 강습자들은 라틴어를 한국어가 아니라 실은 영어로 접근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싶다. 라틴어를 한국어 구조로 접근하는 것보다 그것을 영어 구조로 접목하면, 라틴어에 접근하는 길이 훨씬 빨라진다. 라틴어가 영어와는 뿌리를 같이하는 데다, 무엇보다 영어에 침투한 단어 절반가량이 라틴어에서 유래한 까닭이다. 이는 한자를 알면, 한국어 습득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견주어 훨씬 빠르거나 그 이해폭이 훨씬 넓은 현상에 견줄 만하다. 


라틴어는 한국어에 견주어, 나아가 영어에 견주어서도, 각 명사는 남성 중성 여성의 세 가지 성이 다 있고, 그에 따라 극심한 변화를 보이며, 동사 형용사 역시 그 문법적 환경에 따라 무수하게 모습을 달리하는 악명 높은 언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졌을 것이어니와, 이런 악조건에서도 Veni, vidi, vici가 우리한테 조금 친숙한 까닭은 이와 계통을 틀림없이 같이 하는 영어 단어가 지금도 일상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이 현재의 영어 일상어를 통해 우리는 저 라틴어 낱말들을 접근하게 되며, 이를 통해 라틴어에의 생소함을 적어도 한 꺼풀은 벗겨낼 수 있다. 


먼저 Veni를 볼짝시면, 이 단어가 영어에도 곳곳에서 살아있으니, convene이라는 동사와 그 명사형 convention이 그것이라, 접두어 con 혹은 com이 together 혹은 along with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거니와, 그 어근인 vene가 바로 저 라틴어와 계통을 같이한다. 같이 와서 모이니 그게 회합하다가 되고, 그런 모임 자체를 회합이라 하는 이유다. 이를 통해 Veni라는 저 라틴어에 대한 생소함을 말살한다. 


로마 카티톨리노박물관 소장 대리석 조각. 그 머리맡에 domitianvs caesar avgvstvs라 적었다. 이를 우리한테 익숙한 철자로 로마나이즈하면 domitianus caesar augustus가 된다. 로마황제다.



다음 vidi이니, 이건 볼짝없이 video니 vision이니 visible 등등과 계통을 같이 하거니와,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 분모가 to see임은 삼척동자도 안다. 


다음 vici이니, 이것이 바로 victory의 직접 조상이 됨은 그 철자로 더욱 명백하다. 


이런 식으로 보면 라틴어가 결코 저 하늘 저 우주 안드로메다에 위치하는 통제불능 접근불가능 언어는 결코 아니다. 그 조차 제대로 할 수는 없으나, 영어 세례를 받은 사람들한테 라틴어는 결코 생소하지 않다. 더구나 vocabulary 33000을 끼고 살았음에랴? 그 영단어 해설집은 실은 라틴어 단어 학습 교본이다. 우리는 이미 이 단어집을 통해 라틴어를 배운 셈이다. 


다음 발음이 문제이거니와, 그렇다면 Veni, vidi, vici를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어떻게 발음했을까? 그에 꼭 100% 접근한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이를 '웨니 위디 위키' 정도로 말했다. 유럽 교회 대문 꼭대기에는 꼭 알아먹지 못할 라틴어 경구를 한줄 걸쳐 놓는 모습 흔히 보거니와, 그 라틴어 조금만 살피면 그에 보이는 v 중에 자음 사이에 오는 경우는 예외없이 그 발음이 u에 해당함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예컨대 BVD라 썼으면, 그 발음은 '부드'다. 


귤이 회수라는 강을 건너 북상하면 탱자로 변하기 마련이다. 라틴어 v가 지중해를 탈출해 유럽 대륙을 건너 저 머나먼 브리튼 섬에 안착하면서 victory의 v로 변하고 말았다. 같은 알파벳을 두고 달리 발음하게 된 것이다. 애초 k로 발음한 c 역시 지중해를 탈출하자, 어떤 때는 can처럼 본래 발음을 간직하기도 했지만, 같은 Caesar가 브리튼으로 가서 씨저가 되고 말았다. 


표기가 말을 구속한 단적인 사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절대 다수 한국인한테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라틴어가 영어를 징검다리로 삼으면, 그리 생소하지만은 않다. 물론 이걸 믿고 만만하게 라틴어 제국에 함부로 쳐들어갔다가 떼죽음 당하는 사람이 절대다수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뭐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무슨 거창한 라틴어 전문가 같으나, 


난 라틴어를 모른다! 

 

 



 


  

  1. 아파트담보 2018.12.04 04:20 신고

    왔다가 비디오만 보고 간다는 말일지도.

남북한 씨름이 26일 아프리카 모리셔스(Mauritius) 수도 포트 루이스(Port Louis)에서 개막한 제13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 위원회(무형유산위원회·the Intergovernmental Committee for the Safeguarding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에서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the Representative List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에 등재(inscription)됐다. 등재 목록 이름은 조금은 요상해 'Traditional Korean Wrestling, Ssirum/Ssireum'이거니와, 굳이 이를 옮기면 '전통의 한국 레슬링, 씨름'이 된다. 





씨름이면 씨름이지, Ssirum은 뭐고 또 Ssireum은 무슨 뼉다귀인가? 이는 어쩔 수 없는 타협의 소산이거니와, 앞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씨름(전통 레슬링)'(Ssireum, traditional wrestling in the Republic of Korea)이라는 타이틀로, 반면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씨름(한국식 레슬링)'(Ssirum<Korean wrestling>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라는 영문 명칭으로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신청서를 제출했으며, 이것이 둘다 등재 권고 판정을 받은 데서 비롯한다. 


유네스코로서는 같은 성격의 같은 민속놀이를 두 국가체가 각기 다른 이름으로 등재신청서를 보내왔으니, 이래서는 좀 곤란하겠다 싶어, 아니면, 이 참에 국가간 화해라는 유네스코 정신도 마음껏 선전도 해 볼 불순한 정치적 목적으로 내세워 그래 그렇다면 너네 각기 하지 말고 둘이 합쳐서 한꺼번에 한 건으로 만들어서 인류무형유산 하자 해서, 저리된 어정쩡한 타협의 산물인 것이다. 씨름을 정의하는 수식어로는 'Traditional Korean Wrestling'이라는 데는 남북한이 쉽게 합의했다. 하지만, 그 요체인 씨름에 대해서는 두 정치체가 합의를 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난관에 봉착한 유엔 산하 유네스코는 그럼 가운데 슬러시를 치고 두 가지 표기를 병기하자 해서 저리하는 것으로 합의를 본 것이다. 


한편으로는 절묘한 듯하지만, 저 표기를 대하는 제3 국가들은 틀림없이 의아해 할 터이니, Ssirum과 Ssireum이 별개 스포츠인양 인식한다 해서 하등 이상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왜 저리 다른 표기가 등장했는가? 


이는 씨름에 대한 로마자표기법 혹은 영어표기법에 따른 차이에서 말미암음이니, 로마자로는 '름'의 'ㅡ'에 대응할 마뜩한 표기 수단이 없어, 이를 북한에서는 'u'라 하는데 견주어, 남한은 'eu'라고 하는 데서 비롯한다. 


이런 표기 차이에서 주목할 점은 북한의 표기 'Ssirum'은 로마자표기법이 아니라 실은 영어 표기법이거나 그에 대단히 가깝다는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저것을 영어 표기법으로 간주해 발음한다면 "씨뤔" "씨뢈" 정도가 된다. 그에 견주어 남한 표기 ssireum은 영어 표기가 아니라 실은 로마자표기법이다. 이를 영어 표기로 본다면 저 표기는 내가 100% 자신은 없으나 "씨리엄" 정도로 발음할 것이다. 



이 양반 갈수록 개콘이 되어가네



사람들이 곧장 로마자표기법과 영어 표기법을 혼동하거니와, 이런 차이를 모르는 사람 중에, 다시 말해 그것이 무슨 영문 표기인 줄 알고는 각종 잘난 척 하는 얄팍한 지식은 다 동원해 그 불합리성을 공격해 대기 여념이 없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하니, 그 용맹무쌍함에 혀를 두르고 만다. 다만, 뒤늦게 그런 사실을 알고는 조금은 머쓱해진 이런 사람 중에는 그럼에도 그 오류를 인정할 생각은커녕 여전히 핏대를 높이면서 이르기를 "세상 어떤 놈이 저걸 영어 표기로 받아들이지 로마자표기법으로 아냐"고 삿대질하기도 하거니와, 실제 내가 이런 대책 없는 자를 꽤 많이 봤다. 이는 주로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으로 먹고 사는 자들한테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는 지들이 배운 바, 혹은 지들이 아는 바가 오직 진리로 여기는 독선과 아집의 소산이다. 지들이 먹고 배운 것이 영어밖에 없으니 이 따위 망발을 일삼거니와, 한국 드라마 중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대장금'이 있거니와, 그 이름 '장금(이)'가 해외에 알려지기로는 'janggomi' 정도로 표기되었거니와, 그것이 한창 해외에서도 히트할 무렵 내가 이란을 가 보니, 이 페르시아 친구들이 한국 여자들만 보면 '양고미' '양고미'라 불러대서, 알고 보니 이것이 바로 '장금이'였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가? 페르시아인들에게 모음 앞에 오는 j는 'ㅈ'이 아니라 '반모음'이거니와, 그런 까닭에 이는 '장'이 아니라 '양'이었던 것이다. 


미국 가서 미국놈 물만 먹는 사람들한테는 미국이 최고요, 그네들 표기가 곧 세계 표기인 줄 착각하나,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깍지다. 이 지구상에는 영어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로마표기법은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 장금이라는 양고미라 발음한다 해서 그들이 무식한 것은 아니다. 그네들 전통에 따라 그리 발음할 뿐이며, 그것이 하등 그들의 무식을 증명하는 보증수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덧붙여 표기법과 관련해 하나 더 지적할 점은 쌍시옷 'ㅆ'이거니와,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넘들은 'ㅅ'과 'ㅆ'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는 오직 's'만 있을 뿐이니, 하지만 그것을 구별해야 하는 우리는 편의상 'ㅆ'에 대해서는 굳이 'ss'라고 할 뿐이거니와, 's' 하나만 써도 충분할 것을 이리 한 이유는 그것을 아는 외국인은 그리 구별하라는 의사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저 두 표기 중에서도 항용 어떤 것을 먼저 앞세우느냐는 자존심 문제와 관련하거니와, 이번 건은 남한이 양보한 느낌이 짙으니, 북한 표기를 앞세운 까닭이다. 이 점이 외신에는 미묘하게 보였는지, 예컨대 영국 일간 The Guardian은 이 소식을 Unesco accepts historic joint Korean bid to recognise traditional wrestling라는 제하 소식으로 전하면서 이르기를 


The official name was listed as “Traditional Korean Wrestling (Ssirum/Ssireum)”, with the North Korean transcription appearing first.


라고 한 대목을 들 수 있다. 


또 하나 덧붙이건대, 이 사건을 유네스코가 대서특필함을 주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공동등재는 문재인 대통령이 유네스코에 요청하고, 그것을 유네스코가 호응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빚은 결과다. 그러니 유네스코로서도 결코 손해 볼 게임이 아니거니와, 그러기는커녕 그들 자신이 이 사건을 어찌 자리매김하는지는 그들이 전하는 다음 뉴스를 보라. 


Traditional Korean wrestling listed as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following unprecedented merged application from both Koreas


유네스코가 이 일을 얼마나 자기네 존재감을 각인하는 데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이 공동등재에 그 사무총장Director-General 오드리 아줄레Audrey Azoulay가 중재한 모습을 연출했다는 점에서 다시금 확인한다. 미국의 탈퇴로 코너에 몰린 유네스코로서는 이런 일을 반전을 기회로 삼아야 함은 물론이다. 


이번 공동등재에 대한 보답으로써, 혹 한국정부는 그 분담금을 더 부담할지도 모르겠다.  

  1. 아파트담보 2018.11.27 08:53 신고

    ssireum = 씨어리엄
    ssirum = 씨럼
    - 파파고 번역기

  2. 한량 taeshik.kim 2018.11.27 11:28 신고

    ㅋㅋ

  3. 고로 2018.11.28 11:19 신고

    그래서 이명박대통령때 어륀쥐 교육 제대로 시키자고 한건데 ♪♫♬욕먹고 끝났죠 ㅋㅋ

  4. 충청도 2018.12.11 20:42 신고

    어륀쥐-어른쥐-늘근뒤-뒤박이는 이명박의 지금을 예견한 예언이었습니다. 쥐가 좀더 총명했으면...그때 경고를 알아챘어야 하는데...

오늘 경복궁을 횡단해 건추문 쪽으로 나가다 보니, 저 은행나무 이파리가 단 한 개도 남아있지 않음을 봤다. 이 은행나무는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번 가을은 다른 데 은행나무에 정신이 팔려 전연 이곳 단풍은 눈길 한 번 주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다. 

서울에 서리가 내리기 전에 이미 은행은 단풍이 되어 지상으로 꼬꾸라졌다. 상엽霜葉, 즉, 서리맞은 단풍이라는 말은 무색하니, 여태까지 죽 그랬다. 



그 인근 주택가를 지나다 보니 단풍나무 단풍이 한창이다. 조만간 지리라. 서리가 오기 전에 지리라. 이때까지 죽 그랬다. 서리 맞아 생긴 단풍은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모든 단풍은 서리가 오기 한창 전에 이미 단풍 되어 낙엽落葉로 사라져 갔으니깐 말이다. 



그러고 보니 화려한 단풍을 묘사하는 절창 중의 절창, 다시 말해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 서리맞은 단풍 2월 봄꽃보다 붉다는 말은 도대체가 어불성설임을 안다. 물론 채 떨어지지 않은 단풍이 가끔 서리를 맞기도 하나, 그렇게 서리맞은 단풍이 서리 때문에 단풍이 든 것도 아니요, 이미 단풍인 상태에서 서리를 맞은 것이니, 분명 저 표현은 문제가 있다. 

저 말을 <산행(山行)'이라는 시에서 내뱉은 당말 시인 두목(杜牧)은 이걸 몰랐을까? 그가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았을 것이요, 막상 저 말이 일대 유행했을 적에는 두목을 가리켜 서리 맞은 단풍이 말이 되느냐 하는 핀잔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뭐, 문학 혹은 문학적 감수성이 과학 혹은 엄격한 절기와는 다르다면 할 말이 없다만, 그럼에도 존재할 가능성이 제로인 서리맞은 단풍이라는 상상의 산물이 가을 단풍의 실제를 더욱 화려찬란하게 포장했으니, 참말로 기구한 운명일 수밖에 없다.  

단풍이야 서리를 맞아 들건, 그 전에 들어 떨어지건 무슨 상관이랴? 

붉기만 하다면, 그리하여 그 붉음이 내 단심丹心과 합심한다면야 그 비롯함이 서리건 아니건 무에 중요하겠는가? 피장파장 똥끼나밑끼나일 뿐....

서리맞은 단풍이야 그렇고, 서리맞은 배추이파리는 내가 무지막지하게 봤다. 

포대화상(布帒和尙)에 관한 단편 하나를 이 블로그에서 나는 '포대화상의 시대'라는 제하 글로써 간략히 초한 적 있거니와, 그에서 나는 한반도 포대화상과 관련한 증언으로 가장 빠른 글 중 하나로 이규보를 언급했으니, 당시엔 나는 이 글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으나, 오늘 이 자리에서는 그것을 직접 보기로 한다. 그 글은 이규보(李奎報·1169∼1241)의 방대한 문집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권 제19 찬(贊) 중 하나로 실렸으니, '포대화상찬(布袋和尙贊)'이라는 글이 그것이다. 포대화상찬이란 포대화상을 상찬, 혹은 칭송한 글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포대화상의 생태적 특징과 그것이 지닌 특성 혹은 장점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한다. 





옮김은 한국고전번역원 제공본을 기본으로 삼아 보면 다음과 같다. 일부 대목에서는 문맥이 자연스럽지 않는 느낌이 있다.  


갈무리한 바 무엇인지

눈 감고 앉았으니 

생각 혹은 상상하는지 

주머니 차서 무거우니 

챙긴 건 어찌 그리 많은지 

시방세계 온갖 미생물까지  

갈무리하고 챙긴 것으로 베풀어 구하니 

생각이 바야흐로 이에 이르러 

눈 감고 상상하며 생각하는가 


布袋和尙贊

腹大而膰。所蓄維何。交睫而坐。思耶想耶。囊盈而重。所貯何多。方將囊括。十方蠢蠢蚩蚩。以所蓄所貯。施之度之。念方至此。閉目想思者乎。


그 펑퍼짐한 생김새가 자비 베풂을 내세우는 특장은 현대 불교계에 통용하는 그 포대화상과 완연 일치함을 본다.  

광주광역 광산 월봉서원 뒤편 고봉 기대승 부부묘



어우담(於于談)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그의 야담 필기류 집성집인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한 증언 중 하나다. 


문장을 하는 선비는 간혹 누가 그 문장의 문제점을 말하면 기뻐하면서 듣기를 즐겨하여 물이 흐르듯 그것을 고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발끈 화를 내면서 스스로 그 문제점을 알면서도 일부러 고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고봉 기대승은 문장으로 자부해서 다른 사람에게 굽히지 않았다. 지제교로서 왕명을 받들어 지어 올리는 시문에서 승정원 승지가 그 문제점을 표시하여 지적하면 그것을 가져온 아랫사람에게 화를 내며 꾸짖고는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다.


文章之士, 或言其文之疵病, 則有喜而樂聞, 改之如流者, 或咈然而怒, 自知其病而不改者. 奇高峰大升, 自負其文章, 不肯下人. 以知製敎, 進應敎之文, 政院承旨, 付標指其疵, 怒叱下吏, 不改一字. (柳夢寅, 「於于野談」; 洪萬宗 著, 허권수∙윤호진 교정, 原文 詩話叢林 卷秋, 까치, 1993, 167쪽)


고봉 기대승은 그 생몰년(1527~1572)으로 고려할 때, 어우담이 이를 직접 본 증언일 가능성은 없다. 그렇지만, 고봉을 직접 겪은 관료들은 많았을 것이로되, 그들에게서 채록한 전언일 것이라 나름 신빙성이 높다 봐야겠다. 나아가 동시대 다른 증언을 봐도 고봉은 건방짐과 자부심이 하늘로 치솟았다. 하긴 그런 담대함이 당대의 석유碩儒 퇴계 이황과 한판 붙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를 향한 직접 비난도 당연히 많았으니, 율곡 이이 같은 이는 고봉을 아주 하찮게 보는 직접 글을 남기기도 했다. 


본문에서 말하는 지제고란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연설담당 비서관 비슷하고, 응교란 간단히 말해 연설문 혹은 명령문이다. 


이 유습이 어떤 글쟁이한테는 현대에도 강고하거니와, 내가 아는 어떤 인문학도 중에는 본인이 쓴 글이라면 조사 하나 손 못대게 하는 이가 있다. 이를 꼬장꼬장함을 말해주는 증좌라 해서 존경의 念을 바치는 일이 더러 있더라만, 글쎄, 내가 보니 그가 쓴 글을 글이 아니요 강바닥에서 막 긁어낸 자갈돌 같더라. 



임진강변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들이 나한테 자주 묻곤 하는 말이, 저기가 북한인가라는 물음이다. 내 대답은 간단하다. "남한 땅인지 북한땅인지 구별하는 방법은 실로 간단하다. 나무 한 그루 없으면 북한 땅이다." 

이런 사정은 압록강변, 두만강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야 두 강이 중국 혹은 러시아와 북한 국경인 까닭에, 어느 곳이 북한 땅인지 견줄 필요조차 없지만, 역시 이곳에서 봐도 북녘 땅 산에는 나무 한 그루 온전히 자라는 데가 없다. 남북화해 국면에 따라 남북 협력 방안이 다양하게 논의되는 형국이거니와, 개중에서도 가장 절박한 곳이 철도와 산림이라 해서, 이 분야에 집중하는 까닭이 그 완비 정비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성 인근 헐벗은 산


북한의 저 앙상한 산림 사정이 우리 역시 시계추를 거꾸로 돌려 40년 전만 가도 마찬가지다. 온산이 민둥산 붉은산이라, 비가 조금만 와도 사태가 걸핏하면 났고, 그에서 강물에 씻긴 흙이 쌓이는 바람에 평야지대에서는 하상河上이 높아쳐 또 걸핏하면 강물이 범람했다. 한강변 서울만 해도 80년대 전두환 정권에 의한 치수 성공 이전까지 언제나 홍수가 범람한 곳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산림 사정은 언제 어떻게 비롯하는가? 내가 각종 자료를 검토하건대 17~18세기 교체 무렵에 한반도는 급격한 산림 파괴가 일어났다. 서력기원 절대 연대로 환산하면 1700년대가 시작할 무렵, 한반도는 전체가 민둥산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결정적인 근거 중 하나로 내가 늘 애용하면서 끌어다대는 대목이 다음이다. 

옛날에 나의 선친께서 계미년(1703) 연간에 강릉부사로 부임하셨는데 당시 내 나이 14세였다. 부모님의 행차를 따라가느라 운교역에서 강릉부 서쪽 대관령에 이르렀다. 평지나 높은 고개 따질 것 없이 수많은 나무 사이로 길이 나 있고, 올려다봐도 하늘의 해를 보지 못한 채 무려 나홀 동안이나 길을 갔었다. 그러나 수십 년 전부터 산과 들이 모두 개간되어 농경지가 되었고, 촌락이 서로 이어져서 산에는 한 치 크기의 나무도 안 남아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다른 고을 또한 같은 실정임을 알 수 있다. 태평성대라 백성들의 수가 점차 불어나는 만큼 산천도 조금씩 피해를 입는 정황이 엿보인다. 옛날 인삼이 나던 곳은 모두 대관령 서쪽 깊은 산골짜기였으나 산은 벌거벗고 들판은 불에 타는 바람에 인삼의 소출이 점차 드물어졌다.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흙이 한강으로 유입되어 한강의 수위가 점차 얕아지고 있다.(안대회·임영길 외 옮김 《완역정본 택리지》, 휴머니스트, 2018, 81쪽) 택리지 팔도론 강원도편에 보이는 말이다. 

1690년에 태어나 1756년에 죽은 이중환의 《택리지擇理志》 중 조선 팔도별 인문지리 총람인 '팔도론八道論' 중 '강원도' 편에 보이는 말이다. 이중환이 《택리지擇理志》 를 완성한 때가 1752년 무렵임을 고려할 때, 그리고 그가 14살 때는 산림이 울창했다는 증언을 보탤 적에, 전국적인 산림파괴가 1710~40년대 무렵 급겹하게 진행된 일임을 추찰한다. 이 무렵이 역사학계 일부에서는 소빙하기였네 하는 주장을 하는 시기인 것으로 알거니와, 이 역시 고려할 사안이기는 할 것이로대, 그 원인으로 이중환은 급격한 인구 증가를 꼽았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 


철원 지역 북한의 헐벗은 산


저 무렵이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이미 그에서 백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기간 장기간 평화가 지속하거니와, 비록 정치권에서는 붕당 정치에 따른 부침이 극심하기는 했지만, 특히 근 반세기간 계속한 숙종시대는 외란이 없는 시기였다. 이 숙종 연간에 인구가 급격히 불어난 것이다. 좁은 땅에 급격한 인구 증가는 재앙을 초래했다. 먹고 살려니 산림을 개간하는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가 온돌 보급을 이야기하나, 내 보기엔 소빙기니 온돌이니 하는 요인은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인구 폭발기였다. 

나아가 이 짧은 글에는 그것이 초래한 재앙을 생생히 증언한다. 다른 무엇보다 하상 상승에 따른 범람이 중대하다. 이 하상 범람은 후대에는 충적대지 발달로 귀결한다. 







 




  1. 아파트담보 2018.10.24 21:18 신고

    인구증가로 본 18세기 로맨틱 조선~

조선후기 영·정조 시대에 이른바 북학파(北學派) 일원으로 중국에 다섯 차례나 다녀왔으며, 그 오야붕 연암 박지원을 추종한 이른바 ‘연암그룹’ 일원이기도 한 이희경(李喜經·1745~1805 이후)이란 사람이 남긴 잡글 모음 필기류인 《설수외사(雪岫外史)》란 책에 나오는 일화다. 




(한양도성) 서문(西門) 밖에 서른이 넘도록 개가(改嫁)하지 않은 과부가 있었으니, 그 이웃에는 아내 없는 홀아비가 살고 있었다. 사내가 결혼하자 아무리 꼬드겨도 여자는 듣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마을에서 그녀를 정조가 있다고 해서 정려문을 세워주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이 치면서 세찬 비가 내리더니 여자 집에 벼락이 쳤다. 이웃 사람들이 깜짝 놀라 가서 보니 집은 전과 같이 온전했지만 남녀가 부둥켜안은 채 쓰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정녀로 소문난 그 여자와 이웃집 홀아비가 한창 잠자리를 하다가 번개가 갑자기 방에 내리치자 남녀가 모두 겁에 질려 기겁한 것이다. 이웃집 사람이 오줌에 약을 타서 먹이자 한참만에야 깨어났다. (진재교 外 옮김, 《설수외사(雪岫外史)》,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1.2, 19쪽) 



이 일화가 주는 교훈은 간단하다. 이르노니, 천둥벼락 치는 날엔 몰래 여자를 만나지 마라. 아님, 피뢰침 시설 잘 완비한 호텔이나 모텔에서 만나든가... 


아울러 위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요즘 한문학계를 중심으로 한창 논의가 활발한 이른바 ‘열녀의 탄생’이라는 그 허망한 보기를 알 수 있거니와, 그에 더불어 벼락 맞고 기절한 사람에게 쓴 약이 '오줌'이라는 사실도 확인하는 부수입을 얻는다. 오줌은 응급처치약이기도 했다.  


덧붙이건대, 편의상 두 사람 행동을 '바람'이라 했지만, 그것은 지극한 인간의 정리 그 발로였으며,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다만, 이 일화를 수록한 까닭은 소문에는 열녀라는 평판이 자자한 여인에 대한 조롱이다. 

또 하나, 저 일화 소재 혹은 배경이 천둥 번개라, 이에 얽힌 경험이 있다. 천둥 번개...난 이걸 찍는 방법을 모른다. 한 번도 그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언제런가? 터키로 가족 여행을 간 적 있다. 그때 안탈랴인지 어디에 숙소를 잡았는데 밤인지 새벽에 천둥번개가 쳤다. 저 멀리 하늘을 보니 번쩍번쩍이라, 저거 한 번 찍어볼끼라고 카메라 매고 해변으로 나갔다. 경험이 없으니, 이래저래 버벅였다고 기억한다.  TV 모드로 갖다놓고, 연사 촬영 모드로 변환은 하고 기다린 듯한데, 니미럴....번개가 언제 칠 줄 모르니, 방법이 없었다. 다시 그런 기횔 만나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내가 번개 맞아 죽거나, 번개가 나한테 잡아먹히거나. 


  1. 아파트담보 2018.10.22 20:23 신고

    ㅎㅎㅎㅎㅎ

연암 박지원...조선후기 영정조 시대 재야 문단의 영수지만, 실은 노론 적통에 재산 졸라리 많은 부자요 권력자였다. 뭐, 과거로 출사하는 길을 포기하고, 그러면서도 안의현감인지는 잘해 잡수시면서, 박제가 놀러 오니 안의현에서 관리하는 기생 중에서도 가장 앳된 애를 골라다 수청 들게 해 주는가 했으니, 이런 식으로 수하엔 말 잘 들을 수밖에 없는 또릿한 똘마니들 몇몇 거느리고 재야를 호령했거니와, 박제가 말고도 유득공도 있었다. 나이도 젤로 많고, 그 자신은 적통이지만, 똘마니들은 다 서출이라, 대장 노릇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럼에도 저이를 높이쳐야 하는 까닭은 그 속내가 무엇이었건, 그래도 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인간 대접했다는 점이다. 뭐 이런 동호회 그룹을 요새는 백탑 근처에서 많이 놀았다 해서 백탑파 그룹이라 하는 모양이다. 





한데 이런 연암으로서도 자존심 왕창 상하는 일이 있었으니, 그 똘마니 시다들이 모조리 중국 가서 선진문물 맛보고 온 데다 그걸 기초로 《북학의》니 하는 책 먼저 내서 왕창 성공을 거두었는데, 정작 오야붕인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니, 그래서 할 수 없이 본인도 나중에 연행길 나서는 육촌형님인지 쫄라서 쫄래쫄래 종사관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따라나선다. 


부담이 컸다. 엄청난 부담이었다. 왜인가? 이미 먼저 다녀온 박제가 유득공은 물론이요, 그 선배들이 기라성 같은 연행록을 냈기 때문이다. 늦게 갔으니, 그들을 모조리 뛰어넘어야 했다. 


그의 《열하일기》는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고충이 토로한 기행문이다. 이 《열하일기》를 대할 적에 나는 그의 이런 부담감을 고려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데 이런 그에게 천만다행인 점은 《열하일기》로 전대를 모조리 갈아 엎었고, 후대에도 그것을 뛰어넘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열하일기》는 글자 그대로 선풍이었다. 대성공이었다. 다만, 이 때문에 그에 구사한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다 해서 정조한테 쿠사리 쫑크 먹고 협박까지 받는 처지에 내몰렸지만, 그는 알았다. 정조가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이거나 유배에 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조는 성질이 더럽고 욱하면서 걸핏하면 화를 내곤 했지만, 그는 역시 호학의 군주요, 그런 까닭에 재목들은 잘 알아보았으니, 그러면서도 내가 저런 연암 같은 놈 유배 보내거나 죽여 역사의 오점을 남길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연암은 참말로 시대를 잘 만났다. 

연암처럼 공식 사절단 일원이 아니면서, 문물 맛보러 가는 사람들한테는 하나의 강박이 있었으니, 중국에서 문명으로 이름 떨치는 한 놈쯤은 사귀어야 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동아시아 세계의 간판급 주자라는 점을 각인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대개 그때까지 자신이 지은 시문 중에서도 짱꼴라들한테 내놓아서 부끄럽지 않은 것을 골라 여러 장 베껴가야 했다. 이걸 내밀며 나 이런 사람이요라고 소개하고, 그런 공작이 성공하면 "아! 동방에 이런 군자도 있었네"라는 소리 듣기 십상이니, 이런 방식으로 연암보다 후대에 대성공을 획책한 자가 추사 김정희다. 


그렇다면 연암은 무엇을 가져갔는가? 자기 자랑할 글을 한 편 골랐으니, 이것이 바로 아래 내가 2006년 기사에서 소개한 누이 제문이다. 이 제문은 그야말로 명문 중의 명문인데, 하필 연암이 이 글을 골라 베껴 간 까닭이 바로 이 정도 글이면 중국 식자층에서 뻑 갈 것이라 확신한 까닭이다.  


북역본 열하일기. 헌책방에 나온 것을 내가 쌔벼왔다.



<산문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2006.04.05 15:36:30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강가에 말을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銘旌)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그만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문득 강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이 시집가는 날 쪽진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당시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수채화 같이 명징(明澄)하면서도 레퀴엠만큼 장중하다. 먼저 세상을 등진  손윗누이를 실은 상여가 배에 실려 사라져 가는 모습을 이렇게 읊고는 다시 노래한다.


"떠나는 이 정녕코 다시 오마 기약하지만/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  적시거늘/이 외배 지금 가면 언제 돌아오리/보내는 자 쓸쓸히 강가에서 돌아가네."


다시 돌아온다 약속하지만, 그 떠남이 죽음이며, 그가 떠나는 길이 상여이고 보면 어찌 떠난 자가 돌아오겠는가? 


300자에도 모자라는 이 짧은 만가(輓歌)에서도 왜 연암(燕巖)인지가 드러난다.


연암을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희병 교수는 이렇게 묻는다.


"이런 글을 명문이라 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글을 명문이라 할 것인가?"


하지만 이 글을 강평한 그의 문하생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1741-1793)도 만만치는 않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 안에 수미산(須彌山)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겠다."


37세가 된 영조 37년(1773) 무렵, 박지원(朴趾源)은 이덕무 등과 함께 통행금지가 내려진 밤 12시가 넘어 운종가(雲從街)로 나아가 종각(鍾閣) 아래서 달빛을 받으며 거닐다가 수표교(水標橋)에 이르러 다리를 죽 뻗어 걸치고는 야경을 감상했다.


"개구리 소리는 완악한 백성들이 아둔한 고을 원한테 몰려가 와글와글 소(訴)를 제기하는 듯하고, 매미소리는 엄하게 공부시키는 글방에서 정한 날짜에  글을  외는 시험을 보는 것만 같고, 닭의 소리는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여기는 한 강개한 선배의 목소리만 같았다."


절친하게 지내던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1730-72)가 죽었다. 당파로는 소북(小北)이며 남인(南人) 계열 이가환(李家煥)의 처남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持平) 정언(正言)과 같은 간관직에 있었으니 친구만큼이나 적도 많았다.


이에 그의 죽음을 두고 연암은 이런 제문(祭文)을 지었다.


"석치에게 원한이 있던 자들은 평소 석치더러 병들어 죽어버려라고 저주를 퍼붓곤 했거늘 이제 석치가 죽었으니 그 원한을 갚은 셈이다. 죽음보다 더한 벌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는 한편) 세상에는 참으로 삶을 한낱 꿈으로 여기며  이  세상을 노니는 사람도 있거늘 그런 사람이 석치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껄껄 웃으며 '진(眞)으로 돌아갔구먼'이라 말할 텐데, 하도 크게 웃어 입안에 머금은 밥알은 벌처럼 날고 갓끈은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지고 말테지."


사람이 죽는 일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해 부인의 죽음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장자(莊子)의 우화를 빌려 연암은 석치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연암을 읽는다'(돌베개)는 박지원을 영문학의 셰익스피어나  독문학의  괴테에 비견하는 한국문학의 대문호로 간주하는 박희병 교수가 그의 산문 20편 가량을 골라 우리가 왜 연암을 다시금 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말로만 "연암! 연암!"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를 외면하는 현재의 우리에 대한 저돌이기도 하다. 연암의 문학이 이토록 천의무봉(天衣無縫)한데, 어찌하여 당신들은 이걸 모르느냐는 박 교수의 분통이 느껴진다. 464쪽. 1만5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1. 연건동거사 2018.10.21 19:57 신고

    이런 심리는 2018년 오늘날도 한반도에 사는 식자층에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한국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지도.

  2. 2018.10.22 14:32

    비밀댓글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