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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7세 풍월주 설원공전 한 대목은 그와 그의 베아트리체 미실의 '이상한'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설원)공은 건원(建元) 14년(549)에 나서 건복(建福) 23년(606) 7월에 卒했다. 그때 미실궁주가 이상한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공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셨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 병을 대신하였다. 미실이 일어나 슬퍼하며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를 지내며, ‘나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고 하니 그때 나이 58세였다.


당시 58세는 장수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런대로 천수天壽를 누렸다 할 만하다. 그럼에도 이 대목이 허심하지 아니하게 보이는 까닭은 혹 돌림병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사기도 하는 까닭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한 장면. 설원랑(왼쪽)과 미실(오른쪽)이다.



이 대목은 말할 것도 없이 주공(周公)의 고사를 본딴 언급이다. 군사 쿠데타를 통해 걸(桀)을 축출하고 하(夏) 왕조를 붕괴하면서 은상(隱商) 왕조 천하를 만든 문왕(文王)한테 주공은 둘째아들이라, 아비가 죽자 제위는 장자 무왕(武王)에게 갔다. 무왕이 죽자, 보위는 어린 아들 성왕(成王)한테 갔으니, 그의 재위 초반기 한동안은 숙부인 주공이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자 주공을 시기하는 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 움직임이 집요했던 듯하니, 이런 움직임을 문왕의 다른 아들들, 그러니깐 무왕과 주공의 동생들이 주도했다. 음모론의 요체는 주공이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제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주공은 섭정 자리를 내어놓게 되는데, 그러고는 찬탈 음모에 대한 특수부 조사까지 받기에 이른다. 이 와중에 금등지서(金縢之書)가 공개되기에 이른다. 무왕이 죽을 병에 걸렸을 적에, 하늘에 대고 빌기를 "형은 못 났고, 나는 잘 잤으니, 잘난 나를 대신 데리고 가라"는 골자였다. 이리해서 결국 그 병을 주공이 대신 앓고, 무왕이 살아났다는 것인데, 이 금등지서가 공개됨으로써 주공의 충성심은 충분히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설원공이 미실을 간병하다, 그 역시 그 병에 걸렸다는 것으로 보아, 혹 돌림병이 아닌가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  


아울러 저 인용문에서는 설원이 죽자, 미실이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를 지냈다 하거니와, 신라시대 매장 양식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흥미롭다. 이 무렵이면, 신라에서는 저 우람한 경주분지 적석목곽분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석실분으로 갈 무렵이라, 무덤 양식이야 어찌 변해가건,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이른바 부장품 중 상당품은 조의품이라는 내 주장을 기억한다면, 참고가 되리라 본다. 





  1. M. Cassandra 2018.12.06 16:06 신고

    드라마 선덕여왕이 생각나네요 ㅎㅎ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2. 국선화랑 2018.12.06 20:08 신고

    미실궁주의 나이가 58세란 말이 아니고, 설원의 나이가 58세(549~606)란 뜻입니다.

이 고타소(古陀炤)는 앞서 여러 번 다루었고,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이나 사건은 이곳 내 블로그에서 '고타소' 혹은 그의 남편 '품석'으로 검색하면 되거니와, 혹 그것들이 모두 필요하신 분들은 참고바란다. 고타소란 이름은 내 조사가 철저한지 아닌지는 자신이 없거니와, 일단 내 추산대로라면 《삼국사기》 권 제41 열전 제1 김유신上에 보이거니와,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은 다음과 같다.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격파했을 때, 춘추공(春秋公)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스럽게 여겨 고구려에 청병함으로써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하자 왕이 허락했다. 


이것이 삼국시대 말기, 삼국 관계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대량주, 곧 지금의 합천 전투를 말함이거니와, 이 전투를 고비로 삼아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은 국운을 건 일전들을 치루거니와, 조금 과장하면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 그 불씨는 대야성에서 출발한다. 나아가 더 세부로 들어가면, 이 전투에서 신라가 패하고 고타소가 죽임을 당한 일이 그 거대한 출발점을 삼는다. 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 전재한 글에서 내가 전론(傳論)한 바 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로 한다. 


이런 고타소가 비록 고타소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맥락은 이 한 곳에 지나지 않으나, 이 당시 비극의 행적은 《삼국사기》 등지의 다른 곳에서도 산발적으로 보이니, 이런 여타 행적들과 버무림으로써 우리는 이 고타소의 족보를 둘러싼 비밀 하나를 풀게 된다. 아무튼 저 인용문을 통해 우리는 김춘추한테는 642년 당시 품석이라는 대야성주(이는 다른 대목에 보인다)한테 출가한 이미 출가한 고타소라는 딸이 있었음을 안다. 


이 고타소는 아비만 드러날 뿐, 어머니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이에서 관건은 고타소 어미가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 소생인가 아닌가로 모아진다. 현재 우리의 첫번째 관심은 고타소 어미가 문희냐 아니냐다. 이를 판별하기 위해 김춘추 출생년과 김법민(훗날 문무왕), 그리고 김법민 바로 아래 남동생 김인문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고타소가 문희 소생인가 아닌가는 거의 90% 이상 단안할 수 있다. 


첫째 김춘추 생년이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 는 침묵하나,  《삼국유사》는 달라 이곳 기이(紀異)편 제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전에 의해 그것이 밝혀진다. 이곳에 이르기를 김춘추는 "영휘 5년 갑인(654)에 즉위해 8년을 다스리다가 용삭 원년 신유(661)에 붕崩하시매 수壽 59세였다"고 하니, 말할 것도 없이 이때 나이는 소위 한국식이라 서양식 관념으로는 만 58세라는 뜻이다. 따라서 661년에서 58을 빼면 603이니, 이것이 바로 김춘추가 태어난 해다. 595년 생인 김유신과 비교하면 8살 어리다. 


따라서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딸 고타소가 죽었을 때, 김춘추는 만 39세, 신라식으로는 마흔살이었음을 안다. 이 무렵에 대개 스무살 안팎이면 거의 다 장가를 갔을 것이므로, 이때 김춘추가 사위를 봤다 해서 하등 이상한 점은 없다. 


한데 관건은 김법민과 김인문이다. 이 두 형제가 문희 소생임은 너무나 분명해 그에 대해 더는 물을 것이 없다. 이 중 형 김법민은 626년 생이요, 동생 김인문은 629년 생이다. 두 형제간에는 3년 차이가 난다. 김법민은 아들딸 통털어서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첫번째임은 하늘이 두쪽 나도 변함이 없다. 그것은 김유신이 기획한 저 유명한 축국쇼, 다시 말해, 김유신이 일부러 김춘추를 끌어들여 축구시합을 하다가 부러 옷고름을 찢어발겨 그것을 기워준다는 구실로 미혼인 누이동생 문희와의 소개팅을 주선해, 그에서 쿵딱쿵딱 해서 문희가 처녀 몸으로 밴 애가 바로 김법민인 까닭이다. 따라서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는 626년 태어난 김법민 이전에 태어난 자식은 있을 수가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면 그가 태어난 시점은 626년 생인 김법민보다 때려 죽어도 늦어야 한다. 얼마나 늦어야 하는가? 년년생이 전통시대에 드물지는 않았으므로 년년생이라 해도 고타소는 627년생이다. 한데 그렇게 봐도 영 석연찮은 대목이 있다. 다름 아닌 김인문 때문이다. 김인문은 김법민보다 3살 적은 629년 생이다. 626년과 629년 사이에 다른 자식이 없으란 법은 없으나, 문희가 무슨 애 낳는 벤딩머신이란 말인가? 상식으로 봐도 얼토당토 않다. 결론은 하나다.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고 하면, 626년생인 김법민, 629년생인 김인문보다 동생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고타소는 때려죽여도 630년 이후에 태어나야 한다. 


 그래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고 하고, 모든 가능성 고려해서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자! 630년 이전에는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넉넉잡아 630년 생이라고 해도, 고타소는 642년 대야성 전투 당시 나이가 고작 만으로 12살, 신라 나이로 13살밖에 되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치자. 저 나이에 얼마든 지아비는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넉넉잡아 13살이라고 하고, 그 나이에 김품석과 결혼해 남편 따라 대야성으로 갔다가, 불행하게 백제군에 성이 함몰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치자!  


같은 《삼국사기》 권제 47, 열전 제7이 저록著錄한 죽죽竹竹 전 다음 기술은 대체 무슨 개뼉다귄가? 


殺妻子而自刎 


죽죽은 이 대야성 전투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신라 군인이다. 품석의 부하들이 배반하여 백제군과 밀통하고 항복하려는 움직임에 분연히 반대하고 일어나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신라를 배신한 품석 부하들이 성문을 열고 백제군으로 투항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백제는 배신했다. 항복하러 나온 신라군을 복병을 시켜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저 인용문은 그 장면을 보고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성주 김품석이 취한 행동을 말한다.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품석은) 먼저 자기 마누라(고타소)와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어랏? 김품석과 고타소 사이에 아들이 있었네? 말이 안 되잖아?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면 아무리 많아 봐야 13살인데, 13살짜리가 아들을 낳았다고? 물론 이조차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과 그렇다는 건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다. 


결론은 오직 이 하나 뿐이다. 


김춘추에게는 문희 이전에 다른 부인이 있었다!!!!  


이 명확함이 오직 《화랑세기》에서만 드러난다.  《화랑세기》 논쟁? 끝났다. 뭐 그냥 단순히 문희 이전에 김춘추한테 부인이 있었다? 그건 누구나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그 맥락이 어찌 드러나는지 눈이 있으면 똑똑히 보고 말해라.  


  


 



여러 번 이곳저곳에서 말했듯이, 나한테 《직설 무령왕릉》은 해직이 준 선물이었다. 나는 2015년 11월28일, 연합뉴스에서 해직되었거니와, 졸저는 이듬해 4월 30일자로 찍혀 도서출판 메디치미디어에서 나왔다. 해직을 축복으로 여긴 나는 이때다 싶어, 기간 미룬 일이나 이참에 마침표를 찍자 해서, 나아가 뭐 이래저래 소일거리 삼아 옛날 원고를 뒤척이며, 이 참에 그 옛날에 사산死産한 무령왕릉 원고 정리에 들어가기로 했으니, 그리하여 마침내 저 졸저가 나왔다. 남들 생각보다 일이 훨씬 빨리 진행된 까닭은 실은 그 원고가 2001년에 이미 완성을 본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15년이 흘러버렸으니,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거니와, 무엇보다 그 사이에 무령왕릉을 둘러싼 무수한 변동이 있었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원고를 완성해 놓고도 내가 저 책 출간을 미룬 이유는 권오영 선생 때문이었다. 한때 역기를 했다는 그 권오영 말이다.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인 권오영은 어찌된 셈인지, 국사학으로는 벌어먹기 힘들다 판단했음인지, 이곳저곳 발굴장을 기웃거리게 되고, 그리하여 어쩌다가 최몽룡 눈에 띄어 1987년인가에는 최몽룡과 공동 저자 형식으로 하남위례성에 관한 글 한 편을 탈초하게 되고, 그것을 아마 내 기억에는 《향토서울》인지 《국사관논총》인지 어디에 발표하기에 이르렀거니와, 아무튼 이런 전력을 발판으로 나중에 동아대 전임으로 임용되어서도 고고학 주변을 얼쩡거렸으니, 그러다가 또 어찌하여 나중에 한신대로 자리를 옮겼으니, 바로 이곳에서 운명과도 같은 풍납토성을 조우하게 된 것이었다. 


1996년, 풍납토성 발굴 연합조사단이라는 요상한 협의체에 이름을 올린 한신대박물관은 풍납토성 조사에 한 다리 걸치게 되고, 1999년인가에는 저 유명한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을 낙찰받게 되거니와, 이 과정에서 또 더 유명한 발굴현장 파괴사건을 겪기도 했으니, 이를 통해 그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는 필설로 형언키 어렵다. 경당지구 발굴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그때 나는 이 일을 기록으로 더 확실히 남겨야겠다 해서, 도서출판 김영사와 계약하고는 그것을 일필휘지로 정리해 내려갔으니, 그것이 바로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였다. 


한데 그 진실성 여부는 확언하지는 못했지만, 그 무렵 어딘가에서 권오영 선생이 풍납토성 건으로 모 출판사와 계약을 했다는 말이 들렸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진실성 여부를 나는 확인하지는 못했다. 이걸 본인한테 직접 묻자니, 영 모양새가 이상해서,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어쩌면 내가 김을 빼버린 셈이 되는구나 하는 막연한 미안함이 꽤 심했다. 물론 아니라면, 괜한 걱정이었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 무렵, 나는 동시에 무령왕릉 집필에 들어갔다. 한쪽에는 풍납토성, 다른 쪽에는 무령왕릉을 두고 동시 집필에 몰입했던 것이거니와, 하필 무령왕릉이었는가 하면, 2001년이 바로 무령왕릉 발굴 40주년이었고, 이를 즈음해 나는 연합뉴스를 통해 무령왕릉 특집을 15회 분량인가에 걸쳐 장기연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풍납토성이 급하다 해서 그것을 먼저 낸 것인데, 그 무렵 또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권오영 선생이 무령왕릉 출판건으로 무슨 출판사와 계약을 한 상태로, 원고를 준비 중이라는 것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 자신은 없으나, 이 말을 나는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한창 풍납토성 발굴에 종사하던 신희권한테 들었다. 


이러다간 또 내가 선수를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혹은 미안함이 다대했다. 권오영은 아마 기억하지 못할 듯한데, 이 건은 내가 본인한테 직접 확인해야 했다. 아마 풍납토성 현장인지 아니면 학술대회장 같은 데선지 자신은 없으나, 아무튼 그를 직접 만나 무령왕릉 책 출간 계획이 있는가를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듣고는 저도 준비 중인데, 그러면 저는 선생이 책을 내고 나면 내지요 라고 했다. 이런 말에 권오영은 요점을 추리면 그럴 필요 있겠는가? 같이 나오면 더 좋지 않겠느냐 뭐 이런 식이었다. 


무령왕릉 출간 계획을 직접 확인했으니, 나는 미루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건 예의가 아닌 듯해서, 권오영 책이 나오기를 기다려, 그 이후에 낼 작정이었다. 이것이 2001년 혹은 2002년에 있었던 일이다. 


한데 니미랄, 곧 나온다 곧 나온다던 권오영 책은 하세월이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그의 책은 물경 2005년 6월에 이르러 《고대 동아시아 문명 교류사의 빛 무령왕릉》이라는 제목으로 도서출판 돌베개에서 나오고야 말았다. 잠시만 기다렸다가 내겠다는 내 원고 역시 그만큼 뒤로 미뤄지고 말았으며, 무엇보다 이 기간, 나는 무령왕릉에 대한 열정을 그만 상실하고 말았다. 


2001년 완성한 무령왕릉 원고에는 서문까지 있었으니, 그때 써둔 그 한 구절이 이렇다. 


이 책은 나로서는 올들어 두 번째 단행본이 된다. 지난 2월에는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를 통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500년 왕성인 하남위례성임을 조명했다. 고고학 발굴기를 겸한 거기에서 나는 무령왕릉 발굴기 집필을 나 자신과 독자들께 다짐했다. 그 약속을 지금 실천에 옮긴 것이다. 한데 아주 묘하게도 애초에 그리 목적한 것은 아닌데 결과는 백제 2부작이 되고 말았다. 전편이 풍납토성을 고리로 한성도읍기 백제 493년을 훑어보았다면 이번에는 무령왕릉을 통해 웅진도읍기 백제 63년을 조명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 2부작은 고고학 발굴 성과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사비도읍기까지 합쳐 아예 고고학 발굴을 통한 백제 3부작을 완성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다. 틀림없이 그리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3부작은 이전 단행본보다는 더 많은 시간과 공부와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


2001년 10월10일 저녁 8시13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서


그런 책이 해직이라는 축복을 맞아 마침내 세상 구경을 했으니, 묘하도다 묘하도다. 운명이로다 운명이다. 


  1. yisabu 2018.09.29 15:17 신고

    백제 3부작 마지막 작품 주제가 궁금하면 권오영 선생님께 여쭈어 봐야겠군요.

  2. 한량 taeshik.kim 2018.09.29 15:18 신고

    나왔어요

  3. 한량 taeshik.kim 2018.09.29 15:18 신고

    능산리 발굴기로

  4. 차포 2018.09.29 21:02 신고

    풍납토성. 이북이 안나왔네요. 무녕왕령은 이북 살려고 카트에 넣어 놨습니다. 혹시 풍납토성이 이북으로 나올까요? 아니면 절판이라 귀국해서 중고로 구매 해야 해서요.

운현궁의 모란


농촌 출신인 나에게 종묘(種苗)라는 말은 익숙하다. 곡물 종자라는 뜻이다. 이 種苗가 좋아야 곡물 소출이 좋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종자(種子) 혹은 種苗가 좋다 해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더불어 우리는 사람을 지칭해서도 種子를 운운한다. 사람도 종자를 받기도 한다. 고려 무신 정권 때 노비 반란을 주도한 만덕이 했다는 그 유명한 말, 하지만 실제는 秦 말기 농민반란을 주도한 진승과 오광이 했다는 말, 즉, “王侯將相, 寧有種乎?”에서 種이 갖는 sexual connotation은 매우 짙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저명한 문인 유몽인(柳夢寅)의 《어유야담(於于野談)》이 채록한 일화다. 정덕년이라는 사람 집에 시골에서 서생 하나가 과거 시험을 치러 올라와 머물고 있었는데 야밤에 어떤 종가를 지나고 있을 때 일이다. 장사 네댓 명이 불쑥 몰려나오더니 이 서생을 때려 엎고는 마련해온 커다란 자루에 담아 묶어 둘러메고는 이 골목 저 골목 누빈 끝에 담 안으로 던져놓더니 자루를 풀고 정중히 방안으로 모시는데 비단 이부자리가 깔린 신방이었다. 조금 있으니 성장한 여인이 들어와 동침을 청하고 파루(罷漏)의 북소리가 나자 여인은 사라지고 장정 네댓이 다시 나타나 자루에 담아 묶고 골목길을 누비더니 납치해간 종가에 풀어놓은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서생 대신 소금장수나 무시로 장수, 땜통장수 등 뜨내기를 은밀히 들여 동침시키고 입마갯돈을 단단히 주어 은밀하게 씨를 받았다. 


모란씨


이것이 바로 씨받이의 상대 개념인 씨내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의 딸로써 아버지가 아들을 두지 못한 까닭에 여자로서 즉위했다는 선덕여왕 덕만이 씨내리를 통해 아들을 낳으려 했다는 명확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씨내리가 《화랑세기》에는 보이니, 13세 龍春 傳에 이르기를 善德에게 보위를 이을 아들을 얻고자 해서 처음에는 龍春에게 씨를 받고자 했다가 실패하자 삼서지제(三壻之制)를 들어 흠반(欽飯)과 을제(乙祭) 또한 함께 선덕을 ‘시중’들게 했다고 한다. 이 三壻之制의 결론을 말하면 실패로 끝났다. 이들 남자 세 명을 잠자리에 들이고도 아들을 얻지 못하자, 결국 왕위는 眞德에게 돌아간다. 


이에서 말하는 三壻之制는 전후 문맥으로 미뤄 볼 때, 후사인 아들을 얻을 때까지 남자를 세 명 들여 씨를 받는 제도를 말한다. 드라마 얘기가 나온 김에 《선덕여왕》에는 을제가 보이거니와, 20대 앳된 선덕여왕에 대비되어 70대 원로 배우 신구가 扮해 출연하는 바람에 ‘원작’의 묘미를 살리는 데는 아랑곳이 없는 듯하다. 


백모란


선덕이 남자 세 명을 들이고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기존 문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했지만, 내가 이미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김영사, 2002)에서 지적했듯이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천양의 차이가 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에는 선덕여왕의 앞날을 내다보는 혜지를 말해주는 증거 중 하나의 예화로 기록된 이른바 모란씨 서되 얘기가 그 편린이라고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란씨 서되 얘기는 익히 알려졌거니와, 요약하자면 선덕은 당 태종 이세민이 모란 그림과 함께 보내준 모란씨 서되를 보고는 그 모란이 꽃을 피워도 향기가 없을 것임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거니와, 그 근거로써 이세민이 보낸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랑세기》를 내가 ‘괴물’로 치부하는 또 다른 까닭은 바로 이 사례에 단적으로 해당한다. 방금 말한 三壻之制를 담은 《화랑세기》라는 텍스트가 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 모란씨 서되 이야기를 선덕의 총명함을 말해주는 증좌로써만 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화랑세기》가 출현한 지금에서는 이 모란씨서되 얘기가 실은 선덕이 아들을 낳기 위해 남자 세 명을 들였으나 아들 낳기에 실패한 史話의 복선이라는 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화랑세기》가 갖는 폭발성은 바로 이에서 비롯된다. 이런 내용을 어찌 조작해 낼 수 있다는 건지 필자로서는 궁금하기 짝이 없다.  



도와즈가타리 한국어 완역본



<13세기 가마쿠라시대 일본 궁정 어느 후궁의 고백>

2014-08-26 16:59

고후가쿠사인 니조의 자전적 이야기 《도와즈가타리》 완역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성장해서는 아버지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이렇게 자식을 잃었으니 슬픔을 하소연할 데도 없다.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연인과 헤어지는 아침에는 그의 여운을 그리워하며 잠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기다리는 저녁에는 밤이 깊어감을 알리는 종소리에 울음소리를 죽이고, 기다리고 기다려 만난 다음에는 또 세상에 소문이 나는 것은 아닌가 괴로워한다."


13세기 가마쿠라시대 유력 가문에서 태어나 네 살 이후 궁정에서 자라기 시작해 14세 때는 천황 자리에서 물러난 상황(上皇) 고후가쿠사인(後深草院)의 후궁이 되어 아들을 낳은 여인 니조(二條·1258~1306년 이후 사망). 16살에 황자를 낳았지만 황자는 이듬해 요절하고 만다.


아들을 잃고 난 심정을 니조는 나중에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기구한 일생을 정리한 자전적 이야기인 '도와즈가타리'에서 저렇게 읊었다.


하지만 조심할 대목이 있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도 눈물 흘리며 사무치게 그리워한 연인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유키노아케보노라는 애인이 따로 있었다. 상황의 아이를 출산한 직후 니조는 이 애인의 아이를 임신해 그 해에 몰래 출산하기까지 했다.


상황의 후궁이면서 다른 애인과 남몰래 만나려니, 더구나 아들까지 잃은 마당에 만감이 교차했을 법하다. 이때 심정을 니조는 이렇게 토로한다.


"집에 있을 때에는 상황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곁에서 모실 때에는 나 아닌 다른 여성과 잠자리를 보내는 밤을 한탄하고 내게서 멀어져 가는 것을 괴로워한다. 세상의 도리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며 하룻밤 사이에 생겨난다는 8억4천인가 하는 고뇌도 오로지 내게만 집중된 듯한 생각이 드니 그저 은애(恩愛)에 고뇌하는 이 세상을 벗어나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


당연히 상황에게는 정비를 비롯한 무수한 여인이 있었다. 다른 애인이 있지만 상황에게서도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다른 여인들을 자꾸만 잠자리로 불러들인다. 심지어 상황이 다른 여인과 잠자리할 때 그 곁을 지키기도 했으니 그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그럭저럭 궁중 생활을 보내던 니조에게 또 하나의 사건이 생긴다. 18살에 아리아케노쓰키라는 또 다른 애인이 생긴 것이다. 상황과는 어릴 적 친구인 승려였다. 이 승려와 만남과 절교를 되풀이하던 무렵, 니조는 고노에 오이도노라는 또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인다.


그러다가 아리아케노쓰키와 관계를 회복해 24살에는 그의 아이를 출산한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 이 승려는 세상을 떠났다. 뱃속에 또 다른 아이를 남겨 놓은 채 말이다.


법적으로는 엄연히 상황의 후궁인 니조. 상황은 천황 자리를 동생 가메야마인(龜山院)에게 물려주었다. 가메야마인 또한 천황 자리에서 물러나 형과 함께 나란히 상황이 되었다.


한데 가메야마인 또한 니조를 잠자리로 불러들인다. 지금의 도덕관념으로는 도저히 용납하기 힘들지만, 천황 자리에서 물러난 상황 형제가 한 여인을 가운데 두고 잠자리를 하는 진풍경도 도와즈가타리에는 벌어진다.


그러다가 26세에 궁정에서 추방당한 니조는 32세가 되자 동쪽으로 참배길에 오른다. 절과 신사를 찾아다니며 불법에 의지하며 부처를 공양한다. 이 과정에서 이세신궁도 참배한다.


"죄를 참회하기 위해 법화경을 소리내서 읽"는가 하면, "대집경 60권 가운데 남은 40권 중 20권을 서사(필사)하여 마쓰야마 신사에 봉납"했으며, 큰 상황이 병환이 깊어졌다는 소식이 들리자 "다케우치 신사에서 천 배를 올리며 이번에는 다른 변고가 없도록 기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끝내 상황이 죽자, 그의 장례행렬에 참가해 화장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덧없이 피어오르는 연기에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세상에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승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는 아버지가 죽은 지 33주기가 되는 해에는 천황이 편찬을 명령한 와카(和歌) 모음집에 아버지의 작품이 탈락되자 "선조 도모히라(具平) 친왕에서부터 아버지까지 8대를 이어온 와카의 전통이 덧없이 끊어지려고 하는가 생각하니 슬프"기 그지없는 심정을 노출하기도 한다.


중세시대 일본 궁정을 무대로 하는 여인의 일대기인 《도와즈가타리》가 한국연구재단이 지원하는 학술번역총서 동양편에 포함돼 최근 완역돼 나왔다. 목포대 일어일문학과 김선화 교수가 옮겼다. 제목 '도와즈가타리'는 '다른 사람이 묻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한다.


학고방, 308쪽, 2만2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간평 ) 지금 읽어보니, 상황으로 물러난 천황 형제가 밤을 함께 지새면서 이 후궁을 들여 '공유'한 일도 본문에서 있었다고 기억하거니와, 이건 좀 심하다 내가 생각해서인지 뺀 듯하다. 이걸 보면, 현대 우리의 도덕과 성관념으로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역사를 재단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인다. 지금의 우리 눈으로는 콩가루 집안 난삽한 성풍속이라 할 만한 이런 얼개가 실은 1989년 이래 두 가지가 필사본 형태로 공개된 《화랑세기》에도 여전하거니와, 천수백년전 신라시대 성풍속을 지금의 우리 눈으로 재단하고는 그것이 '파천황(破天荒)'이라느니, 질투는 인간의 본성이라느니 하는 말고 그런 내용이 드러나는 《화랑세기》는 가짜일수밖에 없다는 품평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지를 유별나게 증명한다. 저 자신이 틀린 줄은 모르고, 그 옛날이 틀렸다고 삿대질이다. 


도와즈가타리는 《とはずがたり》다. 이에 대해서는 이 항목 위키피디아 일본어 설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誰に問われるでもなく自分の人生を語るという自伝形式で、後深草院に仕えた女房二条の14歳(1271年)から49歳(1306年)ごろまでの境遇、後深草院や恋人との関係、宮中行事、尼となってから出かけた旅の記録などが綴られている。二条の告白として書かれているが、ある程度の物語的虚構性も含まれると見る研究者もいる。5巻5冊。1313年ごろまでに成立した模様である。


この日記は、宮内庁書陵部所蔵の桂宮家蔵書に含まれていた桂宮本(後代―江戸時代前期の写本)5冊のみ現存する。1940年(昭和15年)山岸徳平により紹介されるまでは、その存在を知る者も少なかった。天下の孤本といわれる。書陵部(当時は図書寮)で『とはずがたり』を見出した山岸は、『蜻蛉日記』にも対等すると直感したという。山岸により「國語と國文學」9月号で「とはずがたり覚書」として紹介された。一般への公開は1950年(昭和25年)の桂宮本叢書第15巻が初である[1]。なお、鎌倉時代後期にさかのぼるとみられる古写本一種類の断簡が数点知られるが、本文は書陵部本と差異が大きい。


主な登場人物

「二条」:久我雅忠の娘。「あかこ」と呼ばれる。童名とする説と、吾が子(あがこ)とする説がある。

「後深草院」:二条の主人。

「雪の曙」:西園寺実兼と見られる。

「有明の月」:阿闍梨。後深草院の弟性助入道親王と見られるが、開田准后法助という説もある[2]。

「亀山院」:後深草院の弟。

「近衛大殿」:鷹司兼平と見られる。


あらすじ

第1巻:二条は2歳の時に母を亡くし、4歳からは後深草院のもとで育てられ、14歳にして他に想い人「雪の曙」がいるにもかかわらず、後深草院の寵を受ける。院の子を懐妊、程なく父が死去する。皇子を産む。後ろ楯を亡くしたまま、女房として院に仕え続けるが、雪の曙との関係も続く。雪の曙の女児を産むが、他所へやる。ほぼ同じ頃、皇子が夭逝。

第2巻:粥杖騒動と贖い。「有明の月」に迫られて契る。女楽で祖父の兵部卿・四条隆親と衝突。「近衛大殿」と心ならずも契る。

第3巻:有明の月の男児を産むが、他所へやる。有明の月死去。同じく彼の胤である2人目の男児を産むが、今回は自らも世話をする。御所を退出。

第4巻:尼となったのちの日々。熱田神宮から、鎌倉、善光寺、浅草へ。八幡宮で後深草法皇に再会。伊勢へ。

第5巻:厳島へ、後深草法皇死去。跋文。

『源氏物語』の影響

若紫:後深草院は自身の乳母であり、かつ想いを寄せる「新枕」の女・大納言典侍(だいなごんのすけ)の娘である二条を引き取るが、これは『源氏物語』の若紫を連想させる。

女楽:若菜・下巻にある女楽を模して行うことになったが、紫の上に東の御方、女三宮に祖父・隆親の娘があてられ、二条は一番身分の低い明石の御方として琵琶を弾くこととなる。しかし、女楽での席次を巡って祖父の兵部卿・隆親と衝突。その場を出奔してしまい、騒動になる。

『増鏡』との関係

『増鏡』(南北朝時代成立)には、『とはずがたり』の文章が数段にわたって用いられている。また、『とはずがたり』発見以前には後深草天皇の女性関係に関する記録が乏しく、『増鏡』における同天皇の女性関係の記述を創作、あるいは弟の亀山天皇のものとの誤認説を唱える学者もいたが、この書の発見以後『増鏡』の記述に根拠があることが確認された。


翻訳

アメリカ合衆国の日本文学研究者であるカレン・ブレーゼルはコロンビア大学の学位論文として『とはずがたり』を英語に翻訳し、1973年に『The Confessions of Lady Nijo』の題で一般向けに出版した。この翻訳は好評を得て1974年の全米図書賞を受賞した[3]。同じ1973年にライナー・クレンピーンによる学術的なドイツ語訳も出版された[4]。


1981年にはブルガリアで(ツベタナ・クリステワ訳)出版され[5]、3万5000部[6]以上を売り上げるベストセラーとなった。


主な版本

『とはずがたり』 福田秀一校注、新潮日本古典集成、新潮社、1978年、新装版2017年

『とはずがたり』 次田香澄全訳注、講談社学術文庫(上下)、1987年

『とはずがたり 校注古典叢書』 次田香澄校注、明治書院、1981年、新装版2003年

『とはずがたり 校注』 松村雄二編、新典社校注叢書、新典社、1990年  

『とはずがたり、たまきはる』 三角洋一校注、岩波書店「新日本古典文学大系」、1994年

『建礼門院右京大夫集、とはずがたり』 久保田淳校注・訳、小学館「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1999年

関連作品

伝記・作品論

松本寧至『中世宮廷女性の日記 「とはずがたり」の世界』 中公新書、1986年

新版 『女西行 とはずがたりの世界』 勉誠出版〈勉誠新書〉、2001年

富岡多恵子『とはずがたり』 講談社 「古典の旅」 1990年/講談社文庫「古典を歩く」、1998年

西沢正史、藤田一尊 『後深草院二条 「とはずがたり」の作者』 「日本の作家100人 人と文学」 勉誠出版、2005年

三角洋一『とはずがたり 古典講読』 岩波書店〈岩波セミナーブックス〉、1992年、新装版2014年

日下力『中世尼僧愛の果てに-『とはずがたり』の世界』角川学芸出版〈角川選書〉、2012年

小説

瀬戸内晴美 『中世炎上』 新潮文庫 1989年、「全集8」新潮社

瀬戸内晴美 『とわずがたり 現代語訳』 新潮文庫、1988年

杉本苑子 『新とはずがたり』 講談社、1990年。講談社文庫、1993年 

森真沙子 『化粧坂』角川書店、2001年

奥山景布子 『恋衣 とはずがたり』 中央公論新社、2009年/中公文庫、2017年

映画

実相寺昭雄監督 『あさき夢みし』 中世プロ、日本アート・シアター・ギルド、1974年 

漫画

宮千恵 『後深草院二条 現世の愛欲あわれ永遠へと願う夢の浮き橋』 世界文化社「ロマンコミックス 人物日本の女性史16」

いがらしゆみこ 『とはずがたり』「マンガ日本の古典13」 新版・中公文庫、2000年

海野つなみ 『後宮』 講談社コミックスキス 全5巻

美桜せりな 『とはずがたり』 小学館フラワーコミックス 全3巻

戯曲

キャリル・チャーチル(英語版) 『トップ・ガールズ(英語版)』 1982年初演

脚注

^ なお、最も古い訳注本は、冨倉徳次郎『とはずがたり』 (「筑摩叢書」、筑摩書房 1966年、新版1985年)である。絶版。

^ 岩波文庫版『問はず語り』の、玉井幸助校訂・解説では浄助法親王。

^ “Women who've Won the National Book Award”. National Book Foundation. 2015年8月24日閲覧。

^ Rainer Krempien (1973). Towazugatari. Übersetzung und Bearbeitung eines neu aufgefundenen literarischen Werkes der Kamakura-Zeit. Freiburg: Schwarz.

^ 有鄰 No.448 P4 伝えたい日本古典文学の魅力 Archived 2006年5月2日, at the Wayback Machine.有隣堂、2005年

^ 『日本古典への招待―古典を楽しむ九つの方法』筑摩書房、1996年、田中貴子 ISBN 4480056904“アーカイブされたコピー”. 2006年10月6日時点のオリジナル[リンク切れ]よりアーカイブ。2008年3月7日閲覧。


"이는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니, 20세기에 활발히 출간되고 있는 우리나라 각 교사校史라든가 지방지를 보면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항목이 '우리 학교(혹은 고장)를 빛낸 인물들'이라는 곳인데, 이것만 보면 우리는 마치 그 학교, 그 고장 출신자 전체가 모두 독립투사이며 의병장이며 뛰어난 학자인 줄 착각하게 되는 착시현상에 견줄 수 있다. 하지만 특정 집단 전체와 그 집단을 구성하는 구성원 하나하나가 그 학교, 그 고장을 빛냋 인물이 될 수는 결코 없다. 개중에는 일제에 빌붙어 나라와 동포를 팔아먹은 놈이 있는가 하면 협잡꾼도 있을 것이고 천하의 난봉꾼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설혹 김대문(金大問)이 현좌충신(賢佐忠臣) 양장용졸(良將勇卒)은 모두 화랑도 출신이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화랑세기》가 그런 인물들로만 득실댈 것이며 나아가 화랑도 전체가 이런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하면 커다란 착각이다. 어떤 집단이나 어떤 인물이 어떤 기준으로 부각되려면 그렇지 않은 인물들이 그 반대편에 항상 존재해야만 한다. 이완용이 없으면 신채호도 없다. 화랑도 모두가 정말로 현좌충신이고 양장용졸이었다면 김대문은 그런 인물들로만 채운 《화랑세기》라는 열전을 쓸 까닭이 없다. 모두가 현좌이고 충신이고 양장이며 용졸인데 뭣하러 현좌충신 양장용졸로 득실대는 《화랑세기》를 쓴단 말인가?"


김태식,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김영사, 2001) 중 프롤로그 '순국무사 화랑을 해체하며' 중 한 대목이다. 



이에서 보이는 "화랑도 모두가 정말로 현좌충신이고 양장용졸이었다면 김대문은 그런 인물들로만 채운 《화랑세기》라는 열전을 쓸 까닭이 없다"는 구절이 애초엔 "화랑도 모두가 정말로 현좌충신이고 양장용졸이었다면 김대문은 그런 인물들로만 채운 《화랑세기》라는 열전을 미쳤다고 쓴단 말인가"였다.  


내가 이 얘기를 왜 굳이 하는가? 《삼국사기》에는 신라시대를 살다간 김대문이라는 사람이 그의 단행본 중 하나인 《화랑세기》에서 했다는 말 중에서도 굳이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賢佐忠臣]가 이(화랑)에서 우뚝 빼어났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良將勇卒]이 이(화랑)에서 생겨났다"는 말을 인용했다고 했거니와, 《화랑세기》가 이미 일실(逸失)한 마당에, 이 구절을 접한 근현대 역사학도들이 너도나도 가릴 것 없이, 이런 말을 남긴 《화랑세기》는 화랑 출신 중에서도 그러한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 그리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만을 골라 열전으로 세운 충신 전기일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라진 《화랑세기》가 홀연히 출현한 지금에도 이런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이영표의 그것을 능가하는 완연한 헛다리 짚기에 지나지 않는다. 첫째, 저런 말을 김대문이 남겼다는 《화랑세기》는 '花郞世記'라,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화랑을 역임한 사람들의 순차적인 전기'라는 뜻이거니와, 그 제목만으로도 벌써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처럼 초대 이래 마지막까지 특정한 직위, 예컨대 왕 혹은 제후들의 순차적인 전기라는 의미이니, 아무렇게나 화랑 출신자들이라 해서 나열한 전기가 아닌 것이다. 세기(世記)라는 말은 본기(本記) 혹은 세가(世家)라는 말과 같다. 이 평범한 용어조차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연 눈치채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화랑세기》를 곡해한 제1의 원흉이다. 


둘째, 세기는 본기 혹은 세가인 까닭에 그러한 직책을 차례로 역임한 사람들은 여러 군상이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다. 신라본기를 보면 초대 혁거세 이래 마지막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56명에 달하는 왕이 있었으니, 개중에는 성군聖君도 있고 현군賢君도 있지만, 패악무도한 임금도 있고, 어려서 즉위해 아무 것도 못하고는 죽어간 애송이 왕도 있는 것이다.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 순차로 등장하는 왕들 역시 그러했다. 


자연 화랑들의 본기이자 세가인 '화랑세기' 역시 초대 화랑 이래 마지막 화랑에 이르기까지 이런 다양한 군상의 화랑들 열전이어야 한다. 이건 지금 홀연히 다시 출현한 《화랑세기》와는 전연 관계가 없다. 지극히 상식 수준의 추단만으로도 《화랑세기》에 등장할 화랑들은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함에도 삼척동자도 간취하는 이런 특성을 정작 역사로 업을 삼는다는 자들(우리는 그들은 역사학자라 한다)만이 유독 그것을 몰라, 현좌충신 양장용졸 운운하는 구절이 《화랑세기》를 인용한  《삼국사기》에 보인다 해서, 이 말을 확대 왜곡하고는 《화랑세기》에는 현좌이면서 충신이고, 양장이면서 용졸인 신라 화랑이 그득할 것이라는 믿음은 단 한 순간도, 지금 이 순간에도 놓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화랑세기》를 망친 두 번째 원흉이다. 


셋째 원흉은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를 구별하지 못한 죄다. 기전체인 《삼국사기》를 구성하는 여러 편 중에서도 인물 전기인 열전이 정리한 인물 중에는 신라 화랑 출신이거나, 그렇게 추정되는 인물이 제법 있으니, 그런 사람들은 하나 같이 현좌이며 충신이고, 양장이고 용졸이니, 김유신이 그러하고, 그의 조카 김반굴과 반굴의 아들 김령윤이 그러하며, 사다함이 그러하다. 실제 이들을 보면 용맹한 전사戰士들이다. 하지만 《삼국사기》가 정리한 신라 화랑들이 이런 인물 일색이라 해서, 《화랑세기》가 정리했을 신라 화랑들 역시 이런 인물들로 점철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다. 한데 그 위험천만한 생각들이 근현대 역사학 지난 100년을 정답처럼 군림하고 말았다. 


'현좌충신 양장용졸'은 김대문이 생각한 바람직한 화랑상(像)일 뿐이며, 실제 모든 신라 화랑이 저러했던 것은 단연코 아니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김대문 자신이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저 말이 김부식으로 넘어오면서는 일대 변신을 꾀해, 김부식이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할 사람들을 추리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같은 현좌충신 양장용졸이라 해서, 그 맥락은 전연 달랐던 것이다. 


말한다. 


김대문이 말한 현좌충신 양장용졸과 김부식이 그것을 굳이 끄집어 낸 맥락은 전연 다르다. 이 다름을 인지하지 못한 데서 신라 화랑을 둘러싼 거대한 곡해가 빚어졌던 것이다. 김대문의 이데올로기와 김부식의 이데올로기, 이걸 구별할 줄 모르는 것은 똥과 된장을 구분치 못하는 일과 같다. 




아래 원고는 2010년 11월 6일 가브리엘관 109호에서 한국고대사탐구학회가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제로 개최한 그해 추계학술대회에 '욕망의 변주곡, 《화랑세기》'라는 제목을 발표한 글이며, 그해 이 학회 기관지인 《한국고대사탐구》 제6집에는 '‘世紀의 발견’, 『花郞世紀』'라는 제목으로 투고됐다. 이번에 순차로 연재하는 글은 개중에서도 학회 발표문을 토대로 하되, 오타를 바로잡거나 한자어를 한글병용으로 하는 수준에서 손봤음을 밝힌다. 



1. ‘괴물怪物’의 출현 


 역사는 두 개의 축을 갖는다. 둘 중 하나만 무너져도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소설’이 된다. 그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축으로 인간과 자연이 얽어내는 파노라마다. 시간 혹은 공간을 무시한 역사 구축은 이미 역사의 영역을 탈출해 신화, 혹은 판타지의 영역이 된다. 이런 점에서 작금 인기리에 방영한 MBC 사극 《선덕여왕》은 이 두 개의 축을 모두 붕괴한 토대에서 구축한 ‘소설’이요 판타지다. 


 우선 드라마는 공간을 무시한다. 예컨대 드라마 초창기에 진평왕의 쌍둥이 딸 중 동생으로 설정한 선덕은 아마도 지금의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쯤으로 생각되는 사막을 여행하면서 여기에서 온갖 간난을 겪는 것으로 설정한 점이 그것이다. 나아가 《선덕여왕》은 시간을 무시한다. 이 드라마를 엮어가는 주된 축 중 한 명인 김유신은 595년생임이 각종 기록에서 명백하며, 나아가 나중에 또 다른 축으로 등장한 김춘추는 604년생이지만, 이런 ‘시간’은 오직 9살 차이인 김유신과 김춘추 두 명의 관계에 대해서만 설득력을 지닐 뿐, 그 외 우수마발牛溲馬勃은 모조리 시간 무시다. 선덕에게 시종 맞서 권력욕의 화신처럼 그리는 미실美室은 드라마에서 10대 때 김유신이나 20대 때 김유신이나 똑같은 모습이다. 더불어 미실의 가장 주된 참모 역할을 한다고 묘사한 설원랑은 이 드라마의 원전 격인 《화랑세기》에 의하면 549년에 태어나 건복建福 23년, 즉, 606년 7월에는 향년 58세로 죽어 이미 퇴장해야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계속 생존했다. 문노라는 인물 또한 같은 《화랑세기》에는 설원랑과 같은 해에 저승길로 가거니와, 이 무렵 김유신은 12살에 지나지 않지만, 드라마는 이런 김유신이 청년이 되어서야 문노를 독화살에 맞아 죽은 것으로 처리해 퇴출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선덕여왕》은 사극이라면 으레 숙명과도 같은 논란, 즉, 드라마가 역사를 왜곡했느니 아니했느니 하는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이 나로서는 기이하기만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대하사극을 표방한 드라마는 언제나 이런 논란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일까? 


  이 드라마는 이 괴물의 출현 없이는 태동을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드라마 《선덕여왕》이 《화랑세기》라는 이 괴물을 충실히 재현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선덕여왕》은 시간 무시, 공간 무시라는 기법을 통해 《화랑세기》를 파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드라마는 《화랑세기》를 벗어날 수는 없다. 언제나 《화랑세기》로 돌아온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선덕여왕》에 《화랑세기》는 족쇄다. 


 이 괴물은 여타 괴물이 그렇듯이, 그리고 봉준호가 탄생시킨 ‘한강 괴물’이 그랬듯이, 1989년에 홀연히 등장했다. 왜 홀연이라 하는가? 이름만 전해지다가, 혹은 그 편린 중 한두 조각만이 희미하게 전해지다가 갑자기 그 전모에 가까운 모습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홀연은 필연적으로 혼란을 낳는다. 


 일서(逸書)의 출현. 이런 사건은 늘 대하드라마가 역사 왜곡 논란이 휘말리듯이 ‘괴물’ 《화랑세기》 또한 텍스트 그 자체가 이미 출현과 더불어 거센 진위 논쟁에 휘말렸다. 이 논쟁은 그것이 출현한지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의 기미는 없다. 《화랑세기》라는 말은 삼국사기 권 제46 열전 제6에 보인다. 이에 이르기를 “김대문金大問은 본래 신라 귀문貴門의 자제로서 성덕왕聖德王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다. 그가 쓴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했다. 이에 의한다면 《화랑세기》 외에도 여타 김대문의 저술은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 인종 시대 무렵(1134)에도 남아있었던 듯하다. 


 더불어 《삼국사기》권제4 신라본기 4 진흥왕 37년(576) 조에서는 신라에 화랑 제도가 창설된 연원을 기술하는 와중에 金大問이 《花郞世記》에서 했다는 말로써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라고 하고, 같은 인용 구절이 같은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7 김흠운 열전에도 보인다. 


 이 외에도 김대문을 인용한 구절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더러 보이거니와,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남해차차웅 조에 이르기를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에 올랐다.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金大問이 말했다. (차차웅은) 방언(方言)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니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일컬어 자충이라 했다”고 하며 이와 흡사한 언급이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남해왕南解王 조에도 같은 김대문을 인용한 구절이 있다. 


 또 《삼국사기》 권 1 신라본기 제1 유리니사금 條에서는 유리니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음을 언급하면서, 김대문의 말을 인용해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 많은 이가 왕위를 이을지어다’고 했다. 그 뒤에 김씨 성 또한 일어나 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고 하고,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눌지마립간 조에서는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 다음에 金大問의 말이라면서 “마립麻立은 방언에서 말뚝을 일컫는 말이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거니와 위계位階에 따라 설치됐다. 왕의 말뚝이 주(主)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에 배열되었기 때문에 이 때문에 (왕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했다. 


 김대문에서의 인용은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조에서 이 왕 15년(528)에 불교가 공인된 사실을 전하면서, 이를 마련한 그 유명한 사건, 즉, 이차돈의 순교를 전하거나와 《삼국사기》는 이것이 “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에 의거한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김대문 혹은 《화랑세기》의 흔적이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아직도 남아있다”는 김대문의 저술은 《화랑세기》를 포함해 모조리 멸종됐다. 이렇게 멸종됐다는 그의 저술 중 홀연히 《화랑세기》가 출현했다는 데 이것이 어찌 ‘사건’이 되지 않겠으며 ‘괴물’이지 않겠는가? 



<화랑세기> 


《화랑세기》가 공개되었을 무렵, 저들 용어가 다시금 세간, 엄밀히는 고대사학계에 오르내렸다. 이들 용어는 《화랑세기》 곳곳에 등장하는 까닭이다. 이들은 실은 고려사를 무대로 하는 곳에 빈출한다. 《삼국사기》에는 단 한 번도 보이지 않고, 《삼국유사》에는 딱 두 군데만 등장하는 것으로 안다. 나아가 《해동고승전》에도 한군데 보이거니와, 그 등장 맥락이 《삼국유사》의 그것과 같다고 기억한다. 


그런 까닭에 《화랑세기》 출현 이전에는 이것이 고려시대 봉작인데, 시대를 거꾸러 거슬러 올라가 신라시대에 붙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제법 많았다. 그런 의심이 이런 용어로 넘쳐나는 《화랑세기》가 출현하면서, 텍스트 자체가 위작이라는 의심으로 번지기도 했다. 내 기억에 이들이 대표하는 용어 문제로 가장 많은 심혈을 기울여 《화랑세기》 가짜론을 설파한 이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석·박사를 하고 지금은 부산외국어대 교수로 재직 중인 권덕영이다. 


하지만 권덕영은 틀렸다. 《화랑세기》 가짜론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그 논거가 다 틀렸다는 뜻이다. 저들 봉작은 신라시대에 엄연히 존재했다. 그것도 이미 상고기 이래 있었다.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는데서, 《삼국유사》에 아주 드물게 출현한다 해서, 그런 용어 혹은 개념이 삼국시대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 혹은 확신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근자에는 지금 신라사학회장으로 신라사 전공인 박남수가 《화랑세기》에 근대 일본 스포츠 용어가 보인다는 점을 《화랑세기》 가짜론의 근거로 제시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거 아주 허무한 소리다. 그 텍스트에 예컨대 박남수는 '검도劍道'라는 용어인가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삼은 것으로 보이거니와, 이는 이종욱 《화랑세기》 교감본과 그 번역본을 보고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화랑세기》 원문을 보면 이런 용어 자체가 없다.


<상장돈장>


본론으로 돌아가 궁주宮主 원주院主 전주殿主 따위는 적어도 고려시대 개념을 보면, 후비后妃 봉작들이다. 임금의 여인들인 정비와 후궁들은 궁궐 안에 각기 거처가 있기 마련이다. 이건 고려시대만이 아니라, 신라시대에도 그랬고,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한데 이런 건물채도 주인따라 등급이 있기 마련이다. 고려시대를 통괄하면 대체로 정궁正宮 주인은 궁주라 했고, 그 아래 등급이 떨어지는 후궁들이 사는 곳을 원주니, 전주 따위로 구별해서 불렀다.


《화랑세기》에는 후비만이 아니라 왕자들에 대해서도 각종 봉작이 있고, 그에 따른 다른 운용 시스템이 보인다. 예컨대 임금의 후궁이 낳은 아들, 곧 조선시대 개념으로 보면 정비 소생인 대군大君에 견주어 그냥 군君으로 일컬은 서자들은 전군殿君이라 했다. 한데 《화랑세기》를 보면 이들 후비와 왕자들의 운용 원리를 보면, 조작 불가능이다. 죽었다 깨나봐라 너희가 만들 수 있는지. 뭐, 그러니깐 박창화 천재론이 나오긴 하더라. 그는 천재라서 못하는 일이 없다고 말이다.


내가 《화랑세기》를 정리할 적에, 이런 후비 봉작제도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어, 고려시대 관련 연구성과를 검출하니, 형편없었다. 관련 연구는 태부족이었고, 그나마 있는 것들도 암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궁주만 해도, 시대를 통괄해서 정궁에 내리는 봉작 같지만, 이것도 넘나듦이 있어 소위 몽골간섭기에는 일대 변화를 불러온다. 원주 역시 그랬다. 기존 궁주 원주 따위를 초월하는 원나라 공주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남당 박창화>


한데 이런 변화 양상이 고려사학계에서는 전연 정리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변화양상은 고려사 후비열전을 봐도 보이지 않는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통독해야만 보인다. 그것도 미친 듯이, 그리고 세심히 봐야 그 실체와 그 변화양상이 희미하게 보인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편찬자들이 우리의 구미에 맞게 기록을 정리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흘려버린 저층을 파고 들어야 한다. 그렇게 정리 추출한 것 중 일부를 나는 이곳저곳 논문 형태로 정리하기도 했으니, 그 선하先河를 이룬 것이 아마 2002년 혹은 2003년인가 하는데, 국립민속박물관 잡지 《민속학》에다 싸지른 사금갑 설화 분석 논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궁주에 대한 연구성과 몇편이 제출된 것으로 안다. 그런 저들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단언커니와 모조리 《화랑세기》  영향이다. 아무도 《화랑세기》를 봤다는 말은 안하지만, 아무도 《화랑세기》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하지만, 설혹 그들 자신이 《화랑세기》를 의식하지 않았고, 그것을 보지 않았다고 해도, 궁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난 이유는 《화랑세기》 없이는 설명하지 못한다.


한때는 저런 양태가 몹시도 비도덕이라 생각했지만, 뭐 이제는 그런갑다 한다. 언제나 말하듯이 《화랑세기》는 그것이 진서건 위서건 관계없이 이제는 피할 수 없는 핵우산이다. 

생몰년 미상. 신라인.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에 임명되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화랑 집단 우두머리인 풍월주를 배출했다.  아버지 오기는 27세 풍월주이며, 할아버지 예원은 20세, 증조부 보리는 12세, 고조부 이화랑은 4세, 5대조 위화랑은 초대 풍월주였다.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김대문 열전 : 김대문(金大問)은 본래 신라의 귀문(貴門)의 자제로서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다. 그가 쓴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


삼국사기 권제1(신라본기 제1) 남해차차웅 :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에 올랐다.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말했다. (차차웅은) 방언(方言)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니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일컬어 자충이라 했다>


해동고승전 권 제1 법운(法雲) 전 : (진흥왕) 37년(576)에는 처음으로 원화(原花)를 받들어 선랑(仙郞)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나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할까 근심하다 많은 사람을 무리지어 놀게하고는 그들의 행실을 보아 천거하여 쓰고자 했다. 마침내 미녀(美女) 두 사람을 가려 뽑으니 남무(南無)와 준정(俊貞)이라 하니 무리를 300명이나 모았다. 두 여자는 서로 미모를 다투다가 (준)정이 남무를 유인해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강물에 던져 죽이므로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져 버렸다. 그 뒤에는 미모의 남자(美貌之男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받들어 화랑으로 삼으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혹은 도의로 서로 탁마하고 혹은 노래와 풍류로 서로 즐기니 산수를 찾아 다니며 유람하니 먼 곳이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이를 조정에 천거했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세기(世記)에 이르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에서 나오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나왔다”고 했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실로 3교를 포함한 것이니 모든 백성을 상대로 교화했다. 또한 들어오면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했으니 이는 노나라 사구의 뜻이고 무위의 사태에 처하고 무언의 가르침을 행하였으니 주나라 주사의 종지였으며, 모든 악한 일은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만 받들어 행하니 천축 건태자의 교화였다”고 했다. 또 당나라 영호징은 신라국기에서 이르기를 “귀인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자를 가려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해 받을어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나라 사람들이 다 받들어 섬겼다”고 했다. 이는 대개 왕의 정치를 (돕기 위한) 방편이었다. (선)랑이었던 원(화)에서 신라말에 이르기까지 무릇 200여 명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4선(仙)이 가장 어질었으니, 저 세기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1 제2대 남해왕(南解王) : 김대문(金大問)이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 한다”면서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를 김대문(金大問)이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位)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이 주(主)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삼국사기 권제1(신라본기 제1) 유리니사금 :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김대문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 많은 이가 왕위를 잇거라'라고 했다. 그 뒤에 김씨 성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삼국사기 권제3(신라본기 제3) 눌지마립간 :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김대문(金大問)이 말했다. “마립(麻立)은 방언에서 말뚝을 일컫는 말이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거니와 위계(位階)에 따라 설치됐다. 왕의 말뚝이 주(主)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에 배열되었기 때문에 이 때문에 (왕의) 명칭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 15년(528)에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했다. 일찍이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으로 왔는데, 그 고을 사람 모례(毛禮)가 자기 집 안에 굴을 파 방을 만들어 있게 했다. 그 때 양에서 사신을 보내와 의복과 향을 보내주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다 쓸 지를 모르므로 사람을 보내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물었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대면서 말했다.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나니, 신성(神聖)에게 정성을 도달케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째가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이며 셋째가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사르면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왕녀가 병이 심했으므로 왕은 묵호자에게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했더니, 왕녀가 병이 곧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며 음식과 선물을 많이 주었다. 묵호자가 나와 모례를 찾아보고 얻은 물건들을 그에게 주면서 “나는 지금 갈 곳이 있어 작별하고자 합니다” 라고 말했으니 잠시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중드는 이 세 사람과 함께 모례 집에 또 왔다.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으니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 병(病)도 없이 죽었다. 시중들던 세 사람이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하니 믿고 받드는 자가 가끔 생겼다. 이 때 와서 왕 또한 불교를 일으키고자 했으나 뭇 신하가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불평을 많이 하므로 왕이 어쩔줄 몰라 했다. 왕의 가까운 신하 이차돈(異次頓)<처도(處道)라고도 한다>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하찮은 신(臣)을 목베어 뭇 사람의 논의를 진정케 하십시오”.  왕이 말했다. “본래 도(道)를 일으키고자 하는데 죄없는 사람을 죽임은 잘못이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를 불러 의견을 물으니 모두 말했다. “지금 중들을 보니 깍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었고, 말하는 논리가 기이하고 괴상해 일상적인 도(道)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 이를 그대로 놓아두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차돈 혼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불교가 심오하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뭇 사람의 말이 견고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는데, 유독 너만 다른 말을 하니 양 쪽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 드디어 이차돈을 관리에게 넘겨 목을 베게 하니, 이차돈이 죽음에 임해 말했다. 나는 불법(佛法)을 위해 형(刑)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만약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내 죽음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구치니 그 색이 우유빛처럼 희었다. 뭇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를 헐뜯지 않았다.<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에 의거한 것이지만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흥왕 :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일찍이 임금과 신하들이 인물을 알아볼 방법이 없어 걱정하다가, 무리들이 함께 모여 놀게 하고 그 행동을 살펴본 다음에 발탁해 쓰고자 하여 마침내 미녀 두 사람 즉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을 뽑고 무리 300여 명을 모았다.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이 사형에 처해지자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다시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게 되어, 착한 사람을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김흠운 열전 : 논(論)한다. 신라 사람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음을 염려해 무리끼리 모여 함께 놀게 하고는 그 행동을 지켜본 다음에 뽑아 쓰고자 해서 마침내 미모의 남자를 뽑아 분장을 시켜 화랑이라 이름하고 받들게 하니 무리가 구름떼처럼 모였다. 서로 도의로써 갈고 닦았고, 혹은 노래로써 서로 즐기고, 산수를 유람하며 즐기어 멀리라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해 사람됨의 그릇됨과 바름을 알아 선택해 조정에 천거했다. 대문(大問)이 말하기를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겨났다』 한 것은 이를 말함이다. 삼대(三代) 화랑이 무려 200여 명이었는데 훌륭한 이름과 아름다운 일은 모두 전기와 같다. 흠운 같은 자는 또한 낭도로서 능히 왕사(王事)에 목숨을 바쳤으니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은 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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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母本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

실을 의미하는 糸(실 사)가 그 글자 의미를 한정하는 부수로 들어가 있는 데서 엿보듯이 '紀'라는 말은 본래 그물 주둥이를  오므려 조는 '벼리'를 의미한다. 이 벼리를 꽉 조으면, 전체를 갈무리한다. 

이 글자는 아울러 記와 같은 발음, 같은 뜻으로 기록하는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기색은(史記》에서 '本紀(본기)'라는 말을 설명하기를 "紀者, 記也. 本其事而記之", 다시 말해, 이 경우 紀는 기록한다는 뜻이다. 그 사실에 바탕을 두고 그것을 기록하는 까닭에 본기라 부른다고 한 것이 그 증거다. 소위 말하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에서 재위한 왕 순서를 따라 일어난 주요한 일들을 요약한 부분을 본기라고 한 까닭은 그것이 기전체 전체 역사서에서 벼리, 곧 가장 중요한 축이기 때문이다. 

이런 紀를 응용한 말 중에 '세기世紀'가 있다. 이 경우 이 말은 '世記'와 같다. 그렇다면 世紀 혹은 世記는 무슨 뜻인가? 순차별 전기라는 뜻이다. 순차는 무엇인가? 시간을 축으로 삼아 먼저와 나중을 구별하되, 먼저 해당 직책에 있던 사람 혹은 사건은 앞세우고 뒤따르는 사람 혹은 사건은 나중에 쓰는 방식으로 정리한 기록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세가世家'라는 말이 있다. 기전체 역사에서 이는 왕대별 주요 사건 일지다. 중국과 같은 천자국에서는 천자의 순차별 사건 일지를 본기(本紀)라 하고, 제후국별 사건 일지는 세가(世家)라 해서 구별하지만, 피장파장 똥끼나밑기나 같은 말이다. 

삼국사기는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 왕대별 사건일지를 본기라 했지만, 조선초기 고려사를 정리할 적에는 천자한테나 쓰는 본기라는 말을 쓰는 일은 참람하다 해서, 왕건 이래 마지막 공양왕에 이르는 사건 일지는 세가라 했다. 

《화랑세기(花郎世記)》가 있다. 《삼국사기》 김대문 열전에 그가 지은 책 중 하나로 등장한다. 한데 그것을 베꼈다고 간주되는 남당 박창화 필사본에는 그 제목이 《화랑세기(花郎世紀)》다. 둘 사이 표기 차이를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도 없지는 않은 듯하나, 피장파장 같은 말이다. 

<화랑세기 필사자 남당 박창화>

이 《화랑세기(花郎世記)》가 명칭으로 보아 화랑들의 열전일 것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그 재출현 이전에 그것이 화랑의 '순차별 전기'일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고 단언해도 좋다. 제목만 봐도 《화랑세기》는 화랑들의 단순한 열전이 아니라 화랑을 순차로 역임한 자들의 전기다. 실제로 드러난 《화랑세기》도 풍월주라고도 한 우두머리 대표 화랑 생애를 순차적으로 전기다. 이는 초대 위화랑 이래 진공에 이르는 역대 풍월주 32명 전기다. 

《화랑세기(花郎世記)》 진위 문제를 논할 적에 하필 '世紀'인가는 이만큼 중요한 잣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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