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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르느냐 묻지 마라. 

낸들 뭘 알아서 가겠는가?

언덕 있으니 오르려는 것일뿐, 

강물 나타나면 건널 것이요, 

막아서면 돌아서면 그뿐. 

올라 무엇이 보이느냐 나는 모른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허무하기 때문이라고만 해둔다. 



한시, 계절의 노래(121)


여름날 산속에서(夏日山中)


 당 이백 / 김영문 選譯評 


흰 깃 부채 게으르게

흔들거리며


푸르른 숲속에서

발가벗었네


두건 벗어 바위벽에

걸어놓고서


맨 머리로 솔바람을

쐬고 있노라.


懶搖白羽扇, 裸體靑林中. 脫巾掛石壁, 露頂灑松風.


더위 탓을 하지만 일탈과 자유를 추구하는 시선(詩仙) 이백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시어가 모두 구속을 벗어던진 신선의 경지를 보여준다. 맨 몸과 맨 머리는 속세의 의관(허례, 가식)을 벗어던진 신선의 모습이다. 누구의 눈길도 받지 않는 푸른 숲속, 솔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곳, 옆에 있는 바위 절벽에 벗은 의관을 걸어두고 맨몸에 깃털 부채를 부치고 있으면 그곳이야 말로 ‘인간을 떠난 신선 세계’에 다름 아니다. 여름날 더러 계곡을 따라 등산을 하다보면 사람들의 이목이 빈번한 곳에서 발가벗고 물놀이를 즐기는 분들이 있다. 일탈이 아니라 소위 ‘알탕’이다. 알탕 삼매경에 드신 분은 남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분이 ‘알탕’하는 분의 몸매를 아름답게 여기지는 않는다. ‘알탕’을 하든 ‘거풍’을 하든 혼자만의 선계를 즐기는 것이 진정으로 이백의 경지에 다가가는 일일 터이다. 자신의 외로움에 다가서야만 타인의 외로움에 공명할 수 있다. 이쯤 되면 피서는 단순한 더위 식히기가 아니다. 신선이 되려는 분들은 피서의 급을 높이시기 바란다. 



한시, 계절의 노래(120)


대청 앞 자미화에 이슬이 맺혀...두 수 중(凝露堂前紫薇花兩株每自五月盛開九月乃衰二首) 둘째


 송 양만리 / 김영문 選譯評


멍하니 도취할 듯

약하고도 고운 모습


이슬 무게와 바람 힘에

심하게 기울었네


백일 붉은 꽃 없다고

그 누가 말했는가


자미화는 오래오래

반 년 동안 피어 있네


似癡如醉弱還佳, 露壓風欺分外斜. 誰道花無紅百日, 紫薇長放半年花.


배롱나무의 계절이다. 한자로는 자미화(紫薇花, 紫微花), 양양화(痒痒花), 백일홍(百日紅) 등으로 불린다. ‘자미(紫薇)’는 배롱나무의 대표적인 꽃 색깔(紫)과 자잘한(微, 薇) 꽃 모양을 형용한 이름이다. ‘양양(痒痒)’은 ‘간지럽히다’는 뜻인데 배롱나무 표피를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우리말로도 ‘간지럼나무’라고 한다. 또 배롱나무는 7월에서 9월에 걸쳐 100일 이상 꽃을 피우므로 백일홍이라고도 부른다. 심지어 위의 시 제목에서 양만리는 음력 5월에서 9월까지 반년 동안이나 꽃을 피운다고 했다. 중국 당 현종(玄宗) 때는 중서성(中書省)을 자미성(紫微省)이라고 불렀다. 별자리 자미원(紫微垣)을 황제의 거처에 비견했기 때문이다. 중서성은 임금의 조서를 작성하고 명령을 반포하는 조정의 중추기관이다. 이런 연유로 궁궐 자미성(중서성) 근처에 이름이 비슷한 자미화를 심었고, 중서령(中書令)을 자미령(紫薇令), 중서랑(中書郞)을 자미랑(紫薇郞)이라고 불렀다. 중서성에서는 특히 황제의 문서를 관장했기에 이후로는 자미화가 문서나 서책을 비유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원이나 유학자의 집에 자미화를 많이 심었다. 무더위 속에서도 기품 있는 자태로 여름을 아름답게 수놓는 꽃이다.



한시, 계절의 노래(119)


능소화(凌霄花)


 명 탕진(湯珍) / 김영문 選譯評


백 척이나 높은 덩굴

나무 끝에 매달려


주황 꽃 화려하게

푸른 연기 엮고 있네


석양도 더불어

색깔 자랑 하려는 듯


붉은 노을 찬란하게

먼 하늘 곱게 물들이네


百尺高藤樹杪懸, 朱英燁燁綴靑煙. 夕陽似與矜顔色, 爛著丹霞媚遠天. 


색채감이 너무나 선명하다. 옛 시골 마을에는 저녁 무렵 푸르스름한 연기가 감돌았다. 저녁밥을 짓고 쇠죽을 끓이는 등 나무 땔감을 땠기 때문이다. 먼 하늘엔 곱디 고운 노을빛이 은은하게 물들고, 그 노을빛에 물든 것처럼 주황색 능소화가 소담한 꽃을 피웠다. 능소(凌霄)라는 말은 하늘을 타고 넘는다는 뜻이다. 이름처럼 능소화는 높다란 나무에 기대거나 담장을 기어 올라 꽃을 피우는 덩굴 식물이다. 꽃 색깔이 황금빛이기 때문에 금등화(金藤花)라고도 한다. 색깔과 모양이 요란하지 않고 격조가 있다. 흔히 꽃가루에 독성이 있다고 알려졌으나 그건 잘못된 상식이다. 다만 꽃가루 모양이 갈고리처럼 생겨서 혹시라도 눈에 들어가면 상처를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염천에 피어나는 대표적인 여름 꽃의 하나다. 누구나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봄 복사꽃, 여름 능소화, 가을 구절초 꽃을 보고 있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그리움에 젖는다. 어릴 때부터 그러했으므로 전생의 인연 탓인지는 알 수 없다.


한시, 계절의 노래(118)


붉은 태양 이글이글 불처럼 타오르자(赤日炎炎似火燒)


 『수호전(水滸傳)』 제16회에서 / 김영문 選譯評 


붉은 태양 이글이글

불처럼 타오르자


들판 논에 가득한 벼

태반은 타죽었네


농부 마음은

끓는 물처럼 부글부글


귀공자와 왕손은

부채만 흔들흔들


赤日炎炎似火燒, 野田禾稻半枯焦. 農夫心內如湯煮, 公子王孫把扇搖.


음력 6월은 여름 맨 마지막 달이다. 1년 중 가장 무더운 달이므로 더위와 관련된 다양한 별칭으로 불린다. 염천(炎天), 혹서(酷暑), 성하(盛夏), 성염(盛炎), 임열(霖熱), 화중(火中) 등이 모두 음력 6월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대부분 불꽃, 열기 등과 관련된 어휘다. 이처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농부들은 농사를 쉴 수 없다. 쌀(米)을 생산해내기 위해서는 글자 모습 그대로 농부의 손을 여든여덟(八十八) 번 거쳐야 한다는 말이 있다. 농사는 다른 어떤 일보다도 사람의 직접적인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다. 지금도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農者天下之大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을 천시하면 가혹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장차 식량 생산국이 식량을 무기화하면 식량 부족 국가는 별 수 없이 그들에게 예속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은 먹지 않고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농촌 인구가 고령화하여 우리의 농업 기반이 흔들리는 마당에 농사를 천시하는 정책이 계속되고 강화된다면 장차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식량을 구걸하는 거지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전국이 피서 인파로 덮이는 요즘도 우리 늙은 농촌의 늙은 농부들은 저 가마솥 같은 무더위 속에서 구슬 땀을 흘리고 있다.

<日本 琦玉县 鹤岛市 “脚折(Suneori) 祈雨祭”..이는 대나무와 풀로 용을 만들어 사용한다> 


요샌 용이라면 날개도 있고 아가리에선 핵분열하듯 불을 뿜는 이미지를 생각하겠지만, 이는 서양놈 드래곤dragon이라 동양, 개중에서도 동북아시아 전통시대 용은 물과 비구름을 관장하는 선신善神이요 영물靈物이다. 그리하여 가뭄이 들어 비를 불러오고자 할 때는 용을 불렀으니, 기우제에서 그가 빠지지 않는 이유다. 한데 이런 기우제에서 용을 대접하는 방식이 조금은 독특해 추리자면 열라 패기였다.


토룡土龍이 있다. 흙으로 만든 용이라는 뜻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이 존재할 수도 없으니, 토룡을 만들어서는 주로 동네애들을 시켜 그 토룡을 동네 사방으로 질질 끌고다니게 하면서 용을 열라리 패게 했다. 그러면 하늘이 용을 불쌍히 여겨 비를 내린다 했다. 이런 기우제 의식은 이미 전한시대 초기 인물 저명한 춘추공양학자인 동중서의 저작 《춘추번로春秋繁露》에 보이며, 한반도에서도 이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그 담이 실제 사람을 열라 패기도 했다. 이때 데거리를 당하는 사람이 무당이었다. 이들은 용이 그렇듯이 비를 불러오는 신력神力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하여 용에 대해 그러했듯이 뙤약볕에다가 무당을 툭진 솜옷 같은 것을 잔뜩 입힌 채 장대 같은 데다가 묶어놓는 더위 고문을 했더랬다. 그러면 하늘이 그를 불쌍히 여겨 비를 내려준다 했다. 이를 무당 뙤약볕 노출하기라 해서 폭무暴巫라 했다. 이를 요새는 曝巫로 쓰기도 하나, 曝이라는 글자는 뙤약볕에 말리는 행위를 더욱 강조하고자 해서 그것을 본래 의미하는 暴이라는 글자에다가 태양을 뜻하는 날 일(日)자를 부수로 덧붙여 만들어낸 글자다. 이런 폭무 의식 역시 같은 《춘추번로》에 자세히 보인다.


김유신이 몸뚱아리 함부로 놀려 중매쟁이를 거치지 않고 부모님 허락을 득하지도 않은 채 처녀로 애를 뱄다 해서 둘째 여동생 문희를 장작불 구이를 하려한 것이 바로 폭무의 일종이라고 나는 본다.


폭무와 토룡과 관련한 다양한 기우제 의식은 지금은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가 있는 최종성의 박사학위 논문을 토대로 한 일지사 단행본이 있으니, 그 책 제목을 까먹었으니, 혹 관심있는 이는 참조하기 바란다. 


짧은 장마가 지나고 그 기간 요상한 이름 태풍 하나가 스치듯 한반도 통과하더니, 한반도는 온통 찜통 더위로 몸살이다. 토룡이라도 만들어 열라 패거나, 무당 붙잡아다가 장대라도 묶어놔야 할 판이다. 


 

〈 HULTON ARCHIVE/GETTY IMAGES 〉 


죽을 때가 다 된 킹 리어 King LEAR, 아들 없이 딸만 셋을 둔 그가 딸들을 불러다 놓고 충성 경쟁을 즐긴다. 묻는다. 


"너희는 얼마나 아비인 나를 사랑하느냐. 날 사랑하는 딸한테 내 왕국 3분의 2를 주겠노라"


첫째와 둘째는 갖은 아양으로 아버지가 듣고 싶은 말을 한다. 막내 코딜리아 차례가 되자 킹 리어는 묻는다. 


What can you say to draw 

A third more opulent than your sisters? Speak.


이런 물음 뒤에 이어지는 대화


CORDELIA : Nothing, my lord.


LEAR : Nothing?


CORDELIA : Nothing.


LEAR : How? Nothing will come of nothing. Speak again.


CORDELIA : Unhappy that I am, I cannot heave

My heart into my mouth. I love your majesty

According to my bond, no more nor less.


LEAR : How, how, Cordelia? Mend your speech a little,

Lest you may mar your fortunes.


"없어?"

"없어요"

"없다카마 암것도 안줄끼데이?"

"천륜이 명한 아버지와 딸,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사와요"

"니 한번 더 기회준데이. 말 잘해레이. 다시 한분만 말해바레이. 니 얼매나 아부지 사랑하노?"


어째 막장 드라마 같은 분위기다. 결론은 말 안해도 짐작 가능하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싶어하는 자, 그가 바로 독재자며, 그의 결말은 언제나 비극이다.  



후직(后稷)을 시조로 삼은 주(周) 왕조 창업을 노래한 《시詩·대아大雅》 〈생민生民〉과 〈비궁閟宮〉은 주인공이 주 왕조를 개창한 시조 후직이 아니라 그 엄마 강원姜嫄이다. 이 점을 후대 모든 사가(史家)는 혼동했다. 후직을 노래한 것으로 착각, 혹은 무게 중심을 후직으로 보았으니, 이는 패착이다.


내가 늘 지적하듯이, 위대한 시조의 탄생담(이를 우리는 흔히 건국시조, 혹은 시조신화라 한다)에는 늘 같은 구도가 있어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없애 버린다.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죽여 버리고 그 자리에 하늘[天]을 늘 갖다 놓는다. 이렇게 해서 위대한 왕조를 창업한 시조는 천자(天子), 곧 하늘의 아들[天之子]라는 도식이 만들어진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예수다. 예수한테도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없어, 그 자리에다가 야훼를 갖다 놓는다. 그 야훼가 곧바로 동정녀 마리아와 감응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예수라는 구도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오늘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주 왕조 건국시조는 후직后稷이다. 그가 창업하는 과정을 앞서 말한 《시경詩經》 〈生民〉은 이렇게 노래한다.


厥初生民, 時維姜嫄. 生民如何? 克禋克祀, 以弗無子. 履帝武敏, 歆, 攸介攸止. 載震載夙, 載生載育, 時維后稷.


이는 종묘제사 따위에서 부르는 용비어천가 같은 노래다. 이 자리에서 그 운율까지 살려 내가 번역할 재간이나 시간 여유가 없으니 대략 의미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주 왕조 초창기에 우리 주나라 사람을 낳은 이 강원이시라. 우리 주나라 사람을 어떻게 해서 낳았던고? (강원께서) 야외로 나아가 불을 피워 하늘에 제사하시면서 아들을 낳아주길 기도했노라. 그때 강원께서 하느님 엄지발가락 자국을 우연히 밟으시고는 오르가즘에 이르셨다. 그 오르가즘에 취하시어 잠시 머무시면서 몸을 부르러 떨다가 이내 임신을 하시고 아들을 낳아 기르니, 이 분이 바로 우리 시조 후직이시라. 


하느님[帝]이 이 땅위을 걸으시며 남기신 발자국[武] 가운데서도 유독 강원은 그 엄지발가락[敏] 자국에 발을 디뎠다가 오르가즘[歆]을 느끼고, 이 일로 임신을 하게 된다. 내가 보건대 엄지발가락은 남자 성기에 대한 은유다. 그것을 밟고는 "歆(흠)"했다 하거니와 이 말은 오르가즘에 몸을 떨었다는 뜻이다. 


보라, 天子라는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생생한 장면을 우리는 이에서도 목도한다. 


결국 이렇게 해서 강원은 건국 시조 후직을 낳았으니 그 어머니 강원은 얼마나 추숭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하여 주 왕조에는 시조 후직을 제사하는 시조묘, 그리고 후직 이래 역대 제왕을 제사하는 종묘 외에도 그 뿌리인 건국시조의 어머니 강원을 제사하는 별도의 국가 제사시설을 건립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비궁閟宮이다. 


비궁은 동아시아 고대문화의 근간을 관통하는 거대한 비밀 중의 하나다. 고구려에도 주몽 어미 유화(柳花)를 제사하는 사당이 별도로 있었고, 백제에도 온조 어미인 소서노(召西奴) 를 제사하는 따로 있었으며, 신라에도 박혁거세 엄마를 제사하는 사당이 별도로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신궁神宮이다. 신궁의 주신이 박혁거세니 김알지니, 혹은 김씨로서는 처음 왕이 된 미추니 하는 말은 다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 신궁 주신은 바로 박혁거세 엄마다. 비궁閟宮을 후한시대 경학가 정현은 풀이하기를 바로 신궁(神宮)이라 했다.


고대 일본 천황가 뿌리를 이루는 이는 아마테라스노 오호미카미다. 천조대신(天照大神)이다. 이 천조대신은 성별로는 여성이다. 다시 말해 천황가를 있게 한 거대한 뿌리는 남자가 아니라 여성이다. 그를 제사하는 곳이 바로 이세신궁(伊勢神宮)이다. 이세신궁은 종묘와 같은 곳이라, 그 내궁 주신이 바로 아마테라스다. 고대 일본 역시 건국시조 어머니를 제사하는 공간을 신궁이라 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강원은 상제의 엄지발가락을 밟고는 임신을 했던가? 그것이 다섯 발가락 중에서도 유독 남자 성기와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 말은 강원이 상제와 교접을 하는 상태에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오르가즘에 이르러 마침내 사내 아이를 임신케 되었다는 뜻이다. 


섹스? 오르가즘?

이런 말 한다 해서 눈쌀을 찌푸려서는 안 된다. 역사는 맨눈으로 포르노를 보듯이 정면으로 대해야지, 뒷방에서 키득키득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앞선 생민 편 구절 중에서도 유독 '리제무민(履帝武敏)'에 대해서는 역대로 논란이 많다. 이에서 履가 신을 신고, 혹은 맨발로 무엇인가를 밟는다는 뜻의 동사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거니와, 문제는 목적어인 '帝武敏'을 어케 보느냐다. 이때 '帝武敏'은 "帝의 武敏"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한데 이 두 가지 모두가 문제다. '帝'를 후직을 중심으로 하는 주 왕조 건국신화 혹은 그의 선조를 중시해서, 후직을 상고시대 전설적 제왕 중 한 명인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지만, 선진시대, 특히 은상(殷商)과 주(周) 왕조 시대에 저 글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저 하늘을 주관하는 최고신인 상제(上帝)를 지칭한다. 따라서  "帝의 武敏"은 '상제의 무민(武敏)'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민(武敏)은 과연 무엇인가? 이 역시 역대로 논란이 많지만, 나는 후한시대 저명한 경전 해석가 정현(鄭玄) 설을 따른다. 정현에 의하면, "武,  跡也。敏,拇也"라 했으니, 武란 곧 자국 혹은 자취라는 뜻이니 이 경우는 발자국을 말하며, 敏은 엄지발가락[拇]이다. 근자에는 '履帝武敏'의 의미 탐구만을 천착한 전문 논문이 중국 본토에서 더러 제출되기도 한 것으로 알고, 이에 의하면 정현 설은 그가 살던 후한시대 특유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기초한 견강부회라는 주장이 많지만, 나는 그것이 정현의 견강부회건 아니건 관계없이, 저 구절을 적어도 후한시대에는 엄지발가락으로 인식했다는 사실 자체를 중시한다. 


다시 말해 아무리 늦어도 후한시대 이전에는 강원이라는 여인이 상제의 발자국 중 엄지발가락 자취를 밟고서 임신을 했다고 본 인식 체계 혹은 사고방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하필 왜 엄지발가락이었을까? 


그것이 곧 남자 성기에 대한 은유임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무릎을 치게 된다. 강원이 모종의 신이한 남자와 교접해서 낳은 아이가 바로 후직임을 상징하는 은유였던 것이다. 생민 편에서는 帝, 곧 상제라 표현한 상대 남자가 저 장면을 기술한 선진시대 혹은 진한시대 각종 문헌에서는 대인(大人)이라 하거니와, 대인이건 상제건 관계없이 후직은 위대한 남자의 혈통을 이은 위대한 천자라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한시, 계절의 노래(117)


강가에서(江上)


 송 범성대(范成大) / 김영문 選譯評 


하늘 빛 무정하게

담담하고


강물 소리 끝도 없이

흘러가네


옛 사람은 근심을 다

풀지 못해


후인에게 근심을

남겨줬네


天色無情淡, 江聲不斷流. 古人愁不盡, 留與後人愁.


무정하게 그리고 끝도 없이 흐르는 것은 강물이다. 아니 덧없는 세월과 인생이다. 아니 천추만대로 이어지는 근심이다. 나는 한 때 ‘불사재(不舍齋)’란 서재 이름을 쓴 적이 있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서 따왔다. “선생님께서 냇가에서 말씀하셨다. ‘흘러가는 것은 이와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나니!’(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이게 무슨 말인가? 처음에는 아무 의미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자(程子)가 이 구절을 그럴 듯하게 풀이했다. “쉼 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자강불식(自强不息)하라” 하지만 너무 교과서 같은 풀이라 선뜻 수긍할 수 없었다. 그후 나는 『논어』 전체를 읽고 또 공자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이 구절이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의 이상을 펼쳐보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천하를 주유하던 공자가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그래 열심히 계속 공부해야지”라고 생각했을까? 오히려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도도하게 흘러가는 불의한 세월’을 한탄하지 않았을까? 혹은 강물처럼 무상하게 흘러가는 청춘을 슬퍼했을 수도 있으리라. 물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강물에서 나름의 사상적 깨달음도 얻었을 터이다. 나는 이 모든 의미가 ‘쉬지 않는다(不舍)’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고 느꼈다. ‘불사재(不舍齋)’란 서재 이름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렇다. 인생은 무상하고 근심은 늘 이어진다. 하지만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에서도 이렇게 읊었다. “인생은 100년도 채우지 못하는데, 언제나 천 년의 근심을 품고 사네(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 



한시, 계절의 노래(116)


♣아침 일찍 길 나서서 다섯 수(早行五首) 중 둘째♣


  송 오불(吳芾) / 김영문 選譯評


이곳은 오로지

고목 숲 많아


길가 곳곳 맑은 그늘

넉넉하구나


행인은 한 여름에

불볕 느끼나


이곳 오니 맑은 바람

옷깃에 가득


此地惟多古樹林, 路傍處處足淸陰. 行人九夏熱如火, 到此淸風忽滿襟.


장마가 끝날 무렵부터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너도 나도 더위를 피해 산과 들과 바다로 나선다. 피서철 시작이다. 불볕더위를 피하기 위해서는 서늘한 그늘과 시원한 물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전국의 산, 계곡, 바닷가가 인산인해를 이룬다. 옛날 시골에서는 바람이 잘 통하는 동네 어귀 당나무 그늘에 느긋이 앉아 부채를 흔들거나 가까운 계곡이나 시내로 가서 발을 담갔다. 또 웬만한 마을에는 고목이 숲을 이룬 동쑤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의 여름 피서에 넉넉한 그늘을 제공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대개 이 동쑤를 떠올리며 향수에 젖는다. 내 고향에도 탑밭과 뒷두들이라는 두 동쑤가 있다. 소나무 고목이 숲을 이룬 곳이다. 동네 사람들은 이 동쑤의 맑고 시원한 그늘에서 더위를 식혔다. 나는 어릴 때 동네 친구들과 이 숲에서 온갖 놀이를 하며 해지는 줄 몰랐다. 놀다가 더우면 바로 옆 개울로 뛰어들어 벌거숭이로 멱을 감았다. 그렇게 오후 2~3시가 되면 모두 소를 몰고 산으로 들어갔다. 소를 먹이기 위해서다. 온 동네 소가 산비탈을 넘으며 풀을 뜯어먹었다. 소를 몰고 돌아올 때는 벌써 온 동네에 밥 짓는 연기가 푸르스름하게 감돌고 구수한 밥 냄새가 시장기를 자극했다. 이제 노인들만 남은 고향 동네의 동쑤는 잡초와 잡목으로 덮였고, 저녁이 되어도 더 이상 소를 몰고 돌아오는 아이들이 없다. 늙은 고향 한여름엔 염천(炎天) 태양만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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