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장성 백암사 쌍계루에 붙이는 노래[長城白嵒寺雙溪寄題] 

[高麗] 정몽주(鄭夢周·1337~1392) / 기호철 譯評 





지금 시를 지어 달라는 백암산의 중을 만나니

붓을 잡고 시구 읊조리며 재주 없어 부끄럽소

청수가 누각 세워 비로소 훌륭한 이름이 났고

목옹이 기문을 지었으니 값어치 더욱 더하네

노을빛 저 멀리 어렴풋이 저무는 산이 붉었고

달빛이 왔다갔다 흔들리는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래도록 인간 세상에서 근심으로 애타는 고뇌

언제나 옷자락 걷고서 그대와 함께 올라갈까


求詩今見白巖僧, 把筆沉吟愧未能。淸叟起樓名始重, 牧翁作記價還增。烟光縹緲暮山紫, 月影徘徊秋水澄。久向人間煩熱惱, 拂衣何日共君登。


이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6 장성현(長城縣) 불우(佛宇) 정토사(淨土寺)에 실려 있으며 《포은집(圃隱集)》 권2에 〈장성백암사쌍계기제(長城白嵒寺雙溪寄題)〉라는 제목으로도 실려 있다. 3행의 청수는 경술년(1370, 공민왕19) 여름에 큰물이 져 무너진 백암산 정토사의 쌍계루를 중건한 삼중대광(三重大匡) 복리군(福利君) 운암(雲巖) 징공(澄公) 청수(淸叟)를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6 장성현(長城縣)불우(佛宇) 정토사(淨土寺)에 수록된 이색의 기문에는 ‘운암(雲巖)’으로 되어 있고, 《목은집(牧隱集)》 권3과 《동문선(東文選)》 제74권에 수록된 〈장성현 백암사 쌍계루기(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에는 ‘운암(雲菴)으로 되어 있다. 청수는 운암의 호로 이름은 징이었다. 나잔자(懶殘子)를 자칭하였다. 천태종(天台宗) 판사(判事)를 지내고 복리군(福利君)을 받았는데, 시중(侍中)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아우였다. 6행의 목옹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을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6 장성현(長城縣) 불우(佛宇) 정토사(淨土寺)에 그의 기문이 수록되어 있고, 《목은집(牧隱集)》권3과 《동문선(東文選)》 제74권에도 〈장성현 백암사 쌍계루기(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고창군 의뢰로 무장읍성을 연차 발굴 중인 호남문화재연구원이 올해 조사에서 비격진천뢰를 수습했다는 소식은 대략 한달 전쯤 접했으니, 당시엔 한두 점이었다. 그 무렵에는 좋은 것 찾았다. 언론 한 번 타겠다는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비격진천뢰는 그 이름이 유명한 까닭에 더러 실물이 있을 법했지만, 고작 6점밖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익히 보도된 대로, 2점만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을 뿐, 그나마 파편 형태였던 까닭이다. 





그러다가 사정이 일변한 것은 대략 보름전쯤이었다. 비격진천뢰가 무더기로 쏟아진 것이다. 그것이 단편으로 몇 점 수습된 인근 수혈 유구에서 무더기로 쏟아진 것이다. 그 사진을 보고는 첨엔 공룡알인 줄 알았다. 이젠 사정이 일변했다. 나는 현장을 비록 떠났지만 그래도 기자다. 기왕 좋은 발굴성과 그에 걸맞는 대접이 있어야 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을 만나 말했다. "누님, 고창 다녀와야겠소. 가서 후횐 안할 거요. 관련 자료 등등은 내가 준비시킬 테니, 청장 되셨는데 현장 가서 폼 좀 잡으시고, 현장 격려도 하시고, 무엇보다 지금 문화재청과 지자체간 사이가 썩 좋지는 않은데, 이번 기회에 그런 관계도 개선할 기회이니 꼭 다녀와야겠소." 


이 과정에서 곡절이 좀 있었다. 문화재청 발굴제도과에도 보고되지 않은 정보를 청장이 던지면서, 고창에서 이런 것이 나왔으니 내려가겠다 했으니, 뭐 기분이야 좋을 리가 있겠는가? 내가 발굴제도과에는 조금 미안하면서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말 못할 곡절도 없지는 않다. 그건 훗날 기회가 되면 말하기로 하고, 아무튼 이렇게 해서 우당탕당 한 바탕 난리를 피우고는 결국 어제 현장 공개가 있었고, 그 자리에 문화재청장이 참석했다. 정재숙 청장으로서는 사실상 첫 발굴 현장 방문이었다. 




그 사이 이렇게 노출한 비격진천뢰를 두고 막판까지 확인 작업을 거쳤으니, 조사단에서는 내부 CT 촬영인가를 통해 그 가능성을 한층 높인 한편, 그와 관련한 방대한 자료 수집에 들어갔으니, 이 고된 작업을 수행한 이가 실은 기호철 선생이었다. 기 선생은 비격진천뢰에 관련한 자료들을 쏵 조사해서 그것을 정리했다. 기호철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성정과 그 방대한 조사 능력을 익히 안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 이 포탄이 비격진천뢰임을 확신하는 단계에 이르른 것이다. 


오늘은 훗날 기억을 되살리는 고리를 삼고자 이 얘기만 간단히 해 둔다.  


첨부사진 두 장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여 둔다. 이 사진은 호남문화재연구원이 촬영한 것인데, 현장 공개 당일, 연구원에서 배포한 사진이 도저히 현장감이 나지 않아 내가 쪽샘지구 발굴현장 오세윤 작가 사진을 보내주면서, 이런 식으로 인간미 나는 사진으로 대체하라 해서 당일 급하게 조사단이 찍은 것이다. 고로 이 사진 저작권 절반은 김태식한테 귀속한다!!!!!! 








 

 

그림 1점이 우리 돈 1천억원을 호가하는 시대다. 그것도 생존작가 그림이 말이다. 영국 출신 현대 미술가 데이비드 호크니(81) 회화 '어느 예술가의 초상(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이 생존작가 작품 중에는 세계 최고가액에 팔렸다. 수영장을 배경으로 두 남자를 그린 이 작품은 15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9천30만 달러(1천19억원·수수료 포함)에 팔린 것이다. 



David Hockney’s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



종전 생존 작가 최고액은 201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5천840만 달러(658억6천만 원)에 팔린 미국 작가 제프 쿤스의 조형 작품 '풍선 개(Balloon Dog)'였다. 


이번에 기록을 갈아치운 1972년 작 '예술가의 초상'은 경매 출품 당시에 이미 화제였거니와, 크리스티 예상 응찰가는 8천만 달러(902억2천만원)였다. '예술가의 초상'에는 수영복을 입은 채 물속에서 평영을 하는 남자와 빨간 재킷 차림으로 수영장 밖에 서서 그를 지켜보는 남자가 등장한다. 


[AFP=연합뉴스]



호크니는 그의 작업실 바닥에서 발견한 두 개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하나는 1966년 할리우드에서 수영하는 사람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소년이 땅에 있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사진이었다. 그림 속 서 있는 남성은 동성애자인 호크니의 11살 연하 애인 피터 슐레진저를 모델로 삼았다고 추정된다. 


이상은 외국 관련 뉴스를 전담하는 연합뉴스 국제부가 방금 송고한 '英작가 호크니 그림 1천19억원에 낙찰…생존작가 최고가' 제하 기사를 추린 것이다. 


이 소식을 우리 문화부에서는 미술 담당 정아란 기자가 The New York Times에서 접하고 국제부에 관련 소식을 처리해 달라고 주문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 소식을 'David Hockney Painting Sells for $90 Million, Smashing Record for a Living Artist'라는 제하 기사로 다뤘거니와, 더 자세한 소식이 궁금한 사람들은 이 기사를 비롯한 관련 외신에 기대기 바란다. 


이번에 기록적인 경매가를 쓴 저 그림은 제목은 말할 것도 없어 제임스 조이스 동명 소설 제목에서 딴 것인 바, 그에서 어떤 모티브를 호크니가 취했는지는 내가 아는 바 없다. 





가을날 넋두리[秋日作]

[朝鮮] 정철(鄭徹) 


김천 대덕산 일몰



산비에 밤새 대숲이 울고 

가을벌레 침상에 다가서네 

흐르는 세월 어찌 멈추리오   

자라는 흰머리 막지 못하네 


山雨夜鳴竹, 草蟲秋近床. 流年那可駐, 白髮不禁長. 



눈[雪]


[朝鮮] 김병연(金炳淵·김삿갓) 




천황이 붕하셨나 인황이 붕하셨나?

이산 저산 온산 나무마다 소복차림

내일 만약 햇빛 들어 문상을 한다면 

집집이 처마에선 눈물 뚝뚝 흐를 터

  

天皇崩乎人皇崩, 萬樹千山皆被服. 明日若使陽來弔, 家家簷前淚滴滴. 


김삿갓답다. 폭설에 천하가 잠기고 눈발 나무마다 쌓인 모습을 보고는 초상을 발상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수북하니 눈 쌓인 나무를 소복차림한 상주에 견준다. 하지만 내일이면 녹을 눈. 볕이 들자 눈이 녹고, 지붕 처마에선 눈 녹은 물이 뚝뚝 떨어진다. 상주가 흘리는 눈물인지, 조문객이 흘리는 눈물인지는 알 수 없다. 알아서 무엇하랴? 눈물임이 중요한 것을.  



서울 몽촌토성을 연차발굴 중인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가 2018년 그 발굴조사 성과를 정리한 약보고서 원문이다. 


몽촌토성 발굴조사 학술자문회의 자료집('18년 조사결과 저).pdf


이에 대한 요약 정리는 아래 기사를 클릭하라 


몽촌토성서 회전교차로·포장도로·대형 집수지 발견

전국 읍성 중 아름답기로 고창 모양성 만한 곳 없고 그 객사 건물로 가장 잘 남은 곳 중 하나가 같은 고창군 무장읍성이라.


이 무장읍성을 고창군이 연차로 발굴정비를 기획하곤 발굴은 호남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한 바,  올해 조사에선 공룡알 같은 철포탄 11점이 쏟아지는 개가를 고했으니, 비격진천뢰가 그것이다.


오늘 그 발굴성과를 대국민한테 공개하는 바, 이번 발굴을 통해 비격진천뢰에 대한 조망이 본격화하길 기대해 본다.


오늘 오후 수송동 우리공장에서는 올해 제6회 수림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연합뉴스와 수림문화재단이 공동 제정 시행하는 상이니만치 이 자리엔 우리 공장 조성부 사장과 수림문화재단 유진룡 이사장이 참석해 김의경 작가를 시상했다. 심사위원장인 소설가 윤후명 선생도 자리를 함께했다.


단짝을 잃은 유 장관은 시종 웃음을 잃지 않으려 했지만 줄곧 얼굴이 어둡다. 뭐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기분 더럽다"는 한마디에 모든 것이 녹아있다. 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 장관은 친구가 잠든 삼성병원으로 냅다 도로 갔다.


수상작가 김의경이다. 나도 기분 한번 내봤다. 수림재단 감사 최규학 전 문체부 기조실장도 재단 관계자로 참석했다. 형 역시 어제의 비보로 기분이 말이 아니다. 

김작가는 《콜센터》로 수림문학상을 거머쥐었다. 작가 자신이 콜센터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 만연한 갑질을 폭로했다. 이 점 높이 평가받았다. 부디 베스트셀러를 기대해본다.  

[수림문학상] '짠하고 아린' 이 시대 청춘의 초상 '콜센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확실히 산문에 일가를 이루었지, 그의 문명文名에 견주어 시는 몇 편 남기지도 않았으며, 실제 시 쓰는 일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시에 뛰어들었어도 일가를 이루었으리라 보니, 그런 낌새를 짙게 풍기는 작품이 그의 사후 그가 남긴 시문을 모아 집성한 앤솔로지 《연암집燕巖集》 권 제4가 소수所收한 다음 시라, 글로써 그림을 그린다 하는데 그에 제격인 보기요, 그런 점에서는 유종원보다 못할 것도 없다.  



막걸리 마시는 노무현



농촌 풍경[田家] 


老翁守雀坐南陂  늙은이 참새 쫓느나 남쪽 논두렁 앉았건만

粟拖狗尾黃雀垂  개꼬리처름 드리운 조엔 노란 참새 매달렸네

長男中男皆出田  큰아들 작은아들 모두 들로 나가는 바람에 

田家盡日晝掩扉  농가는 하루가 다 가도록 사립문 닫혔네 

鳶蹴鷄兒攫不得  솔개가 병아리 채가려다 잡아채지 못하니

群鷄亂啼匏花籬  뭇 닭이 박꽃 핀 울밑에서 놀란 퍼득이네 

少婦戴棬疑渡溪  젊은아낙 함지박 이곤 머뭇머뭇 시내 건너는데

赤子黃犬相追隨  어린애 누렁이 쫄래쫄래 따르네 


이는 농촌사회 일상을 전하는 실록이기도 하거니와, 계절은 조가 익어가는 한여름 혹은 늦여름일 듯하니, 늙은 농부가 조 밭을 지킨답시며, 그 주된 적인 참새떼 쫓는 모습이 선연하다. 이를 인형으로 대신한 것이 바로 허수아비라, 참새가 바보가 아닌 이상, 허수아비에 속을 리 있겠는가? 요새 농촌을 가 보면 조를 보호한다며, 스타킹 같은 시스루seethru 망태기를 덮어씐 모습을 심심찮게 보거니와, 그 선대 유습을 본다. 한데 익어가는 조, 그래서 고갤 수그린 그 모습을 '개꼬리[狗尾]'라 했으니, 그 발상 기묘하기만 하다.    


하지만 곰방대 담배 물고 한 대 빨지도 모를 이 늙은이 아마도 눈과 귀가 간 듯, 그에 아랑곳없이 참새가 대롱대롱 매달려 조를 열심이 쫀다. 그 참새를 연암은 '황작黃雀'이라 했거니와, 이 대목에서 언뜻 황조가黃鳥歌 어른거리기도 한다. 


아마도 이 늙은이가 가장일 법한 농가는 한창 농사철, 혹은 추수철이라서인지 집안엔 사람 하나 없다. 특히 아들들은 그들이 노동력의 원천이라, 대가족이었던듯, 모두가 들로 들로 일하러 나가는 바람에 하루종일 집안은 사립문 닫힌 상태다. 이는 지금의 농촌 농번기에도 흔한 현상이라, 이 틈을 노리고 요새는 도둑님들이 유유히 달라들어 민속공예품을 몽땅 훔쳐가는 바람에 똥장군 하나 남아있지 않다. 


그런 한적한 농가에 솔개가 내리친다. 닭은 내다 키운 듯한데, 내리쳐 병아리 훔쳐가려한 고공 공습 실패하자, 박꽃 한창인 담벼락 밑에서 먹이 쪼던 뭇닭이 푸더덕거리며 난리가 났다. 


이 집안 아들들은 장가를 간 듯, 그 며느리인 듯한 젊은 아낙은 아마도 새참을 내가는 모양이라, 새참 머리 지고 시내를 건너는데, 아마 돌다리가 있었던 듯, 혹은 맨말로 건너는데, 그 묘사가 실로 압권이라, 행여나 미끄러질 새라, 행여나 새참 쏟을새라, 조심조심 하는 모습 선연하다. 그 뒤를 어린아이와 똥개 한 마리가 쫄래쫄래 따르니, 잘 만든 영화 한 컷 보는 듯하다. 




  1. 아파트분양 2018.11.14 09:12 신고

    黃雀는 검은머리방울새로 나오는데요.

오늘 긴한 개인 일정이 있어, 그것도 모른 채 덜커덩 해버린 다른 약속을 취소하며 6시가 넘자마자 그 자리를 가려 일어서려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울린다. 이름이 뜨는데 유진룡 장관이다. 순간 느낌이 좋지 않다. 

유 장관은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어차피 수림재단이랑 우리 공장이 함께 제정 시행하는 수림문학상 올해 시상식이 내일 수송동 우리 공장에서 있을 예정이라, 내일 만나야 한다. 그 자리를 빌려 유 장관 인터뷰를 할 작정이었다. 그런 그가 이 시간에 전화를 먼저 했으니 뭔가 긴급한 사안이라는 그런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말인즉 이성원 차장이 별세했단다. 하필 이럴 때 그 예감이 이런 식으로 적중할 게 뭐란 말인가? 


숭례문 화재 직후 국회에 출석한 이성원..오른쪽이 유홍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요새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은 들리긴 했지만, 그래서 전화도 받지 않는다 해서 나까지 형을 괴롭힐 일은 없다 해서, 또 따로 연락을 한 일이 없기도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어달 전쯤 어느 밤이다. 문화재청을 퇴임한 김상구 과장한테서 전화가 다급한 전화가 왔다. "이 차장님이 통 연락이 안 되는데 아프다는 말이 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하기에 "글쎄, 금시초문이요" 했더니, 김 과장이 버럭 화를 내면서 "사람이 왜 이래? 형님 형님하면서 그렇게 따르더니, 대체 차장님 근황도 모른단 말이오?" 하는 게 아닌가? 나 역시 어안이 벙벙해 무슨 일인가 수소문에 들어갔으니, 형이 매양 어울리는 문체부 멤버 중에 최규학 전 기조실장이 있어 전화를 넣으니 받지 않아, 할 수 없이 형과 단짝인 유 장관한테 전화를 넣었더랬다. 나중에 유 장관이 콜백을 해서 하는 말이 "요새 몸이 안 좋다. 그래서 연락도 통 끊고 지낸다. 지금은 그냥 조용히 놔두는 방법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랬다. 나까지 괜히 심란케 할까봐, 부러 연락도 하지 않았다. 당시 사정을 보면, 내가 전화했더라도 아마 받지 않았을 성은 싶다. 그래도 이리되고 보니 맘이 아프다. 목소리라도 들어둘 걸....

이성원 (李成元). 1956년 9월 28일생인 그는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행정고시 23회(24회가 맞다는데 일단 우리 공장 인명사전을 따라 23회라 해 둔다)에 합격해 공직에 발을 디딘 문화부 정통 관료였다. 내가 형과 본격 연을 쌓기 시작한 시점은 형이 2001년,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추진기획단장을 맡으면서였다. 새용산 국립박물관 개관 준비를 했으니 말이다. 2003년에는 문화관광부 문화정책국장이었다. 그의 관료 인생은 2006년 문화재청 차장에 임명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내가 알기로 그 자신은 문화재청 차출을 내켜하지 않았다. 비록 1급 차장으로 승진이기는 했지만, 그는 계속 문화부로 남고 싶어했다. 그런 점에서 문화재청 차장 전출을 그 자신은 밀려난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 내가 직접 물은 적도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건 머하러 물어쌓노"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곤 했다. 

만 50세에 오른 1급 문화재청 차장. 관료로서는 더는 오를 데가 없는 이 1급을 그가 왜 그리 내켜하지 않았는지는 나이가 조금은 설명이 될 듯하다. 1급은 언제건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만 50세 1급은 곧 퇴직 준비이기도 했으니, 그 심정을 누가 이해하겠는가? 

화려한 듯한 그의 공직 생활은 결국 차장 생활 2년 만에 끝이 났으니, 다름 아닌 숭례문 방화사건이 그 직접 도화선이었다. 2008년 2월 9일 발생한 숭례문 방화사건은 그의 관직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돌이켜 보면 그가 책임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는 결국 옷을 벗었다. 자발로 벗고 말았다. 


숭례문 화재 직후 국회에 출석한 이성원. 2008. 2. 11


그가 옷을 벗기 직전, 당시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각종 호사를 누린 채 유유히 사라져갔다. 이미 청장 생활만 3년 반인가를 하면서 물릴 대로 물린 그는 이 사건이 그 짐을 훌훌 털어버리는 구실이 되기도 했으니, 때마침 방화사건이 터진 그때, 대한항공 후원을 받아 부부가 유럽 여행인가 떠난 상태라 해서 동아일보에서 얻어텨져 청장직을 내려놓았다. 

유홍준이 떠난 자리를 이성원이 외롭게 지켰다. 그것이 대략 마무리될 무렵, 그는 미련없이 옷을 벗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그 책임을 질 사람이 그 자신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공직을 떠났다. 만 52세. 그렇게 떠난 그는 긴 야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에게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아까운 인재임을 적어도 문화계 주변에서는 누구나 알았기에 이런저런 자리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두를 그는 물리쳤다. 

그러던 그가 다시금 공직 사회 주변에 나타난 것은 2012년이었다.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국외소재문화재단을 출범했으니, 이를 실질로 이끌 사무총장으로 일찌감치 그를 낙점하고는 섭외에 나섰던 것인데, 이 지랄 같은 양반이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설득에 겨우 넘어가 마침내 그 초대 사무총장이 된 것이다. 당시 사무실이 우리 공장 인근 이마빌딩이었다. 이곳에서 2004년까지 일한 그에겐 나름 좋은 일 하나가 있었으니, 그와는 단짝인 유진룡이 박근혜 정부 초대 문화부 장관이 되었다는 그것이다. 

유 장관은 재단을 물러난 그에게 한국관광공사 비상임이사 자리를 주었으니, 비상임이라 부담은 없었으나, 이성원 자신의 말을 빌리건대 용돈벌이는 되는 그 이사를 2014년 이후 2016년까지 지낸 것이다. 

그는 똥고집 대마왕이묘, 자존심 대마왕이었다. 그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고, 자존심은 더럽게 셌다. 그리고 성질이 더럽게 급했다. 내가 알기로 그는 공직자로서의 자세를 시종일관 유지했다. 그렇다고 적절한 타협을 몰랐는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아 나름대로 정무감각도 있었다. 막 나가는 유홍준을 그나마 제어한 것도 이성원이었다. 유홍준이 청장 재직 시절, 각종 논란이 휘말렸을 때도, 그를 끝까지 보호할 줄도 알았다. 이것이 비호 혹은 덮어두기일 수도 있거니와, 대표적인 건이 유홍준 부여 별장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지금도 뇌관을 잠복하고 있거니와, 그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훗날 기회를 보고자 한다. 

그는 자리 욕심이 없었다. 차장 퇴임 이후 그에게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문화재청장 하마평이 오를 때마다 그는 늘 1순위였다. 그렇지만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마다했다. 변영섭이 반구대로 왔다가 반구대와 함께 불과 7개월만에 침몰했을 때, 그 후임 1순위는 이성원이었다. 망가진 문화재청을 그나마 바로세울 적임자라 해서 그는 1순위로 청와대에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한사코 거부하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내가 강남 그의 자택을 야밤에 쳐들어가 밤을 새워가며 설득한 일도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 그 초대 문화재청장을 찾았을 때도 이성원은 1순위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적임자가 아니라며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토록 아끼는 후배 문화재청 차장 A를 한사코 밀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김종진 청장이 1년 만에 물러나자 다시 그는 1순위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거부했다. 다만 이때 이미 병마가 깊은 때라, 이전과는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그것이 단순한 회피인 줄 알았지만, 이렇게 갈 줄은 미쳐 몰랐다. 

형은 나한테는 사표였다. 때론 말이 험하기는 했지만, 뭔지 모르게 그가 주는 강렬한 포스가 있었다. 그는 흐트러짐 없는 공직자였다. 낭만을 알았으되, 난잡과는 거리가 먼 그런 사람이었다.  

몸이 망가져가는 그런 순간에도 아끼는 후배가 공직을 떠난 뒤 환갑을 맞았다면서,  그 후배를 인터뷰하는 형식을 빌려 갖은 고역 끝에 회고록을 집필해 낸 그런 사람이었다. 이것이 불과 두어달 전이었다. 이런 책이 나왔다고 하면서, 그 책을 좀 읽어보라며 던져준 사람, 이런 사람이 문화재청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성원이다. 

아!

그런 사람이 갔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