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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4일 치른 2018년 서울시 지방공무원 7급 필기시험 '한국사 A형' 7번 시험문제가 저렇단다. 이걸 두고 말이 많다. 어느 유명 학원강사가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이 문제를 문제삼았으니, 만인이 보는 인터넷 강의에서 지랄 같다 하는가 하면, 좇같다 했으니, 간평하건대 저 학원강사 말 중에 단 하나도 틀린 대목 없으며, 이런 시험문제를 낸 놈이나, 이걸 감수하고도 그대로 시험문제로 출제를 강행한 놈이나 쳐죽여야 한다. 

물론 그 나름으로는 변명이 있으리라. 문제 출제자가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그의 변명을 들을 수는 없으나, 변별력을 고려해 아마 저런 말도 안되는 문제를 냈을 성 싶다. 그래 내 세대에 행정고시며 사법고시며 하는 국가고시에서 이런 문제도 나온 적이 있었다는 말을 나는 기억한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분량이 총 얼마인가를 묻는 문제가 있었단다. 그 말을 고시를 준비하는 내 친구한테 들었을 때 나는 대략은 맞추었으니, 500여 권이다. 이는 내가 고교 국사교과서에서 나온 대목을 기억하는 까닭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저런 식의 문제를 내면 안 된다. 

가뜩이나 역사는 암기과목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거니와, 저런 문제는 문제로서 자격도 없는 점은 고사하고, 역사는 덮어놓고 외워야 한다는 당위를 유감없이 증명없이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저 문제가 문제은행에서 고른 것인지, 아니면 특정 전문가가 만든 것인지 자신은 없으나, 그 어떤 경우건, 저 문제를 만든 이는 볼짝없이 대학에서 역사로 밥을 빌어먹고 산다는 교수놈이다. 

그건 그렇고 저 보기로 든 고려 후기 역사서 네 종을 보건대, 더욱 심각성을 더하는 대목은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제외한 나머지 세 종은 이미 존재조차 망실되어버린 소위 일서(逸書)라는 사실이다. 더 간단히 말한다. 나머지 세 종은 우리가 보고 싶어도 볼 수도 없다. 왜? 이미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물론 후대 기적적으로 발견될 가능성까지 없는 않다.)

보기가 제시한 저들 네 종 완성에 얽힌 기록들을 찾아봤다. 

고려사절요 권제 24 충숙왕(忠肅王) 정사 4년, 원(元) 연우(延祐) 4년(1317) 조를 보건대 "여름 4월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 민지(閔漬)가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찬술(撰述)해 올렸다. 위로는 건국 초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고종(高宗) 때까지에 이르렀는데 책이 모두 42권이었다. (민)지는 문장에 조금 재주가 있었으나 심술이 바르지 못하고 성리학(性理學)을 알지 못했다. 그가 소목(昭穆)을 논하면서 주자(朱子)의 논의를 그르다고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와 같이 소견이 편파적이었다"고 했으니, 이를 통해 본조편년강목 찬술 시점이 1317임을 확인한다. 

<제왕운기 서문 마지막(오른쪽)과 본문 첫 대목(왼쪽)>

다음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제왕운기는 무엇보다 이승휴 자신이 쓴 서문이 있어 이에서 서문 마지막에 이승휴 스스로가 "지원(至元) 24년(1287) 3월 일 두타산거사(頭陀山居士) 신 이승휴(李承休)"라고 한 점을 참조한다. 이를 통해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완성한 시점을 1287년으로 본다. 한데 이는 문제가 적지 않다. 서문을 쓴 시점이 반드시 그 책이 완성된 시점을 말하는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서문을 미리 써놓기도 하고, 훨씬 나중에 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저 시점은 제왕운기가 완성된 시점을 '추단'하는 증거 중 하나가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제왕운기가 완성된 시점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제왕운기는 완성 시점이 1287년 무렵이라는 정도만 확인한다. 

다음으로 허공[許珙]의 《고금록(古今錄)》이 문제거니와, 그 찬성시점을 이승휴가 제왕운기 서문을 쓴 시점보다 불과 3년 빠른 1284년을 제시하거니와, 나로서는 아직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지는 못했다. 이 고금록은 『고려사』 권제105, 열전18 허공[許珙] 열전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이거니와, 

허공은 정당문학 윤극민(尹克敏)13)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처가 죽은 후 자기 집에서 길렀던 처제의 딸과 재혼하고서 헌사의 탄핵을 받았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새로운 관직 제도에 따라 직함이 바뀌자 왕에게 사례했으나 허공만이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뒤에 판밀직(判密直)·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를 역임하였다.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려 하자 왕은 도지휘사(都指揮使)를 각지로 보내어 전함의 건조를 독려했다. 허공은 경상도로 가고 홍자번(洪子藩)은 전라도로 갔는데, 홍자번이 반도 못 마쳤을 때 허공은 벌써 일을 완료하고 돌아오니 홍자번이 그의 능력에 탄복하였다. 참문학사(參文學事)·수국사(修國史)로 옮겨 한강(韓康)·원부(元傅) 등과 함께 『고금록(古今錄)』을 편찬하였고 이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임명되었다. 

이것만으로는 찬술 완성 시점을 확정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 같은 고려사 권제107, 열전 20 한강(韓康) 열전에는 이에 관여했다는 직접 증언이 없으며, 나아가 같은 고려사 권제 107, 열전 20 원부(元傅) 열전에서는 원부가 "충렬왕 초에 찬성사(贊成事)·판군부(判軍簿)·수국사(修國史)로 있으면서 유경(柳璥)·김구(金坵)와 함께 『고종실록(高宗實錄)』을 편찬했다. 이때 전 추밀부사(樞密副使) 임목(任睦)의 사고(史藁)를 개봉해 보았더니 백지였으므로 수찬관(修撰官) 주열(朱悅)이 그를 탄핵해야한다고 건의했으나 원부와 유경(柳璥)은 말을 막고 사고를 공개하지 않았다. 이것은 원부가 직사관(直史館)으로 있을때 역시 사고를 바치지 않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대목만 보이고, 고금록에 관한 기술은 보이지 아니한다. 

다음으로 이제현의 사략은 틀림없이 史略을 말할 터인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저술로 이 이름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의 문집인 익재난고 중 부록에 실린 그의 연보를 보면 원 순제(元順帝) 지원(至元) 17년 정유 선생 71세 대목에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집에서 국사(國史)를 찬수(撰修)할 적에는 사관(史官) 및 삼관(三館)이 다 모였었는데, 뒤에 국사는 병화(兵火)에 잃어버렸다. 또 《금경록(金鏡錄)》을 선(選)하였다. 또 국사가 미비함을 못마땅하게 여겨 기년(紀年)ㆍ전(傳)ㆍ지(志)를 찬수하였는데, 뒤에 홍건적(紅巾賊) 난리에 유실되고 오직 태조(太祖)에서 숙종(肅宗)에 이르기까지의 기년(紀年)만이 남았다. 8월에 왕이 선생에게 명하여 종묘(宗廟)의 소목위차(昭穆位次)를 정하게 하니, 선생이 이에 대한 의(議)를 올렸다.

저 시험 문제 보기 중 하나가 말하는 사략이 이 중 어느 것을 말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저런 문제를 낸 담대함이 나로서는 참으로 기이하기만 하다. 


<숭례문 화재>


***台植案...목조문화재가 왜 화재보험'에도' 가입돼 있지 않냐고 매양 호통을 치지만, 목조문화재 화재보험은 넌쎈스다. 기사라 감정은 최대한 억제한 채 소위 말하는 객관의 시각을 가장했지만, 목조문화재가 화재가 가입돼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을 질타하는 일은 무식의 극치임을 다시금 밝혀둔다. 말한다. 목조문화재에 화재보험은 필요없다. 


<목조문화재, 화재보험 가입해야 할까?> 

국감 단골 문제…무용론도 만만치 않아


2013.10.15 11:36:24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전남 화순군 쌍봉사 대웅전은 평면 정사각형에 목탑 형식을 지닌 3층 목조 건축물이라 해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3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화재로 잿더미가 되는 바람에 1984년 4월 3일 보물에서 해제됐다. 지금 선 건물은 복원품이다.


화재를 만난 국보 1호 숭례문은 5년 3개월에 걸친 복구공사 끝에 지난 5월 준공을 알렸다. 문루 중 상당 부분이 훼손됐지만 국보 자격을 유지한 까닭은 문루 아랫부분인 육축은 멀쩡하고, 목조건축 1층은 대부분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쌍봉사 대웅전의 사례는 화재의 위험에 늘 노출된 목조문화재를 화재보험에 가입해야 하는가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반면, 숭례문의 사례는 문화재도 화재보험에 들어야 한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목조문화재에 대한 화재보험 가입 여부는 문화유산계 주변에서는 늘 논란이 된다. 특히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이 문제가 단골로 다뤄지곤 한다. 


<숭례문화재>


15일 문화체육관광부에 대한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감에서도 윤관석 민주당 의원이 이 문제를 제기했다. 윤 의원에 따르면 숭례문은 복원되고도 아직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국보 5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해인사 장경판전도 미가입 상태라고 지적했다.


문화재청이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국가지정 국보·보물 167건 중에 절반인 83건이 보험 미가입 상태다. 언뜻 국가를 대표하는 목조문화재가 왜 화재보험 가입률이 이렇게 낮은가 반문할 수 있다. 실제 이런 시각이 목조문화재를 바라보는 일반 여론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관리하는 문화재청이나 해당 지방자치단체는 과연 이 문제의 심각성을 몰라서 이런 일이 빚어질까? 막상 속내를 들여다보면 복잡하기 짝이 없다. 문화재청 주변에서는 아예 보험 무용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하면 보험을 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 의하면 보험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지만 쌍봉사 대웅전 사례에서 보듯이 목조문화재는 막상 화재를 만나면 문화재로서 가치는 상실하고 만다. 숭례문 또한 국보 자격을 유지했지만, 보험이 화재를 비롯한 위험성을 원천적으로 감쇄하는 기능이 없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화재보험을 들어야 하는가? 들어서 어떤 이득이 있는가? 등등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면서 “그렇지만 국회나 일반 여론에서는 ‘어떻게 화재보험을 들지 않을 수가 있느냐’라는 시각이 압도적이라 떠밀려서 (보험에) 가입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험 가입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그보다는 근본적인 방재 대책을 강화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효율적이라고 반론한다. 나아가 현실적인 어려움도 적지 않다.


<숭례문화재직후>


문화유산계에서는 무엇보다 보험가액 선정의 어려움과 보험회사들의 기피 경향을 든다. 예컨대 숭례문이나 화엄사 각황전이 얼마짜리가 되는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나아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보험사들은 문화재를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평가한다고 한다.


보험에 가입한 목조문화재 중 궁과 능처럼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는 곳은 흥국생명에 가입해 있다. 연간 보험료 총액은 4천만원이며 보험가액은 1천150억원 규모다. 반면 지자체가 관리하는 문화재는 한국지방재정공제회라는 곳을 통해 역시 흥국생명에 들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하다 보니 보험회사에서는 한 건 한 건 계약하지 말고 일괄로 하자고 하지만 이것도 쉽지는 않다”면서 “더불어 보험회사도 재보험에 가입해야 하는데 재보험 회사도 문화재를 기피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다가 해당 문화재가 사유재산인 때는 더 문제가 복잡해진다고 한다. 요컨대 목조문화재 화재보험 가입이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도 아닐뿐더러, 과연 보험이 얼마만 한 효용성을 지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도 존재하는 것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문화재방재훈련>

김병준 교육부총리의 사퇴를 불러온 논문 표절 시비라든가 논문 중복게재 논란은 그 진실이 무엇이건 우리 학계의 고질을 다시금 수면 위로 부상케 했다. 학계에서 말하는 표절이란 쉽게 말해 도둑질이다. 한데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을 표절이라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표절은 '인용'과 함수 관계를 이룬다. 누가 언제 발표한 어떤 글을 이용했는지를 밝혀주는 행위가 인용이다. 이런 인용 표시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사실상 표절 여부가 판가름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을 수 있다. 고의가 아닌 실수로 인용을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혹 표절 혐의가 짙다고 해도, "부주의해서 빠뜨렸다"고 변명하면 더 이상 따지기 곤란한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 반면에 우리 학계에는 '쓸데 없는 인용'이 남발되는 경향도 강하다. 굳이 인용을 하지 않아도 될 경우에도 참고문헌을 잔뜩 달아줌으로써 각주가 본문의 분량을 능가하는 논문이 부지기수로 발견된다.


이런 '쓸데없는 인용'에는 대체로 학연이 작동한다.


국내 학계 석박사 학위논문의 제1번 참고문헌이 대체로 해당 논문의 지도교수의 저서나 논문으로 채워진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나아가 눈치보기, 혹은 눈도장 찍기 차원의 인용도 많다. 학계 원로로 대접받는 선배 연구자의 인용이 특히 많은 까닭은 그들이 이룩한 선행 연구가 훌륭하기 때문이라고만 볼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표절이 또 하나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는 분야는 번역이나 역주라고 할 수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은 몇년 전부터 동서양 고전 번역사업을 발주하고 있다. 발주된 동서양 고전은 거의 예외없는 특징이 있다. 영어 혹은 일본어 번역본이 존재하지 않는 고전은 거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경우, 국내 번역본은 거의 필연적으로 영어 혹은 일본어 번역본(역주본)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렇게 했음에도 마치 자기 혼자서 고전을 번역한 것처럼 행세한다든가, 원전이 아니라 영어 혹은 일본어 번역본을 옮긴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는 명백한 표절이다.


현재 시중에 선보이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중국 역사서의 유일한 완역본이 일본어와 현대 중국어 번역본의 중역(重譯)이란 사실은 학계에서는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김병준 부총리가 휘말린 논란 중 하나인 자기표절, 혹은 자기논문 중복게재 행위는 사실 김 부총리로는 억울한 측면이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학계의 관행이 돼 있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그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논문 재탕 행위가 지탄이 되는 듯하지만, 어떤 학문분야에서는 재탕이 아니라 아예 삼탕 사탕을 거듭하기도 한다. 절대사료가 빈약할 수밖에 없는 한국고대사학계의 경우는 삼탕 사탕을 하지 않고는 학계에 살아남을 수조차 없는 실정이다.


자기논문 표절과 함께 학계가 반성해야 할 또 다른 대목은 '논문 쪼개기'. 학위 논문, 특히 박사학위 취득 논문은 논문 쪼개기의 대표적 대상이 된다.


박사학위 논문은 대체로 논문 기준으로 적어도 다섯 편 이상이 되며, 이를 쪼개서 각각의 단일 논문으로 발표하는 관행이 지금도 성행 중이다. 이렇게 되면 학위논문 한 편이 무려 5-10편 가량의 논문 발표 성과로 둔갑하게 된다.


이같은 학위논문 쪼개기는 이제는 청산해야 할 유산으로 꼽힌다. 종래의 학위논문은 논문작성자 본인이 배포하지 않는 한, 다른 연구자나 관심있는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했으며, 그에 따라 그것을 쪼개서 각종 학술지에 기고하는 관행이 당연히 통용되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학위 논문 통과와 거의 동시에 그 논문은 여러 기관이나 매체를 통해 배포되므로 학위논문은 심사 통과와 함께 이미 새로운 연구성과라는 측면에서는 생명을 다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논문 표절 시비가 사회문제화할 때마다 그 처방으로 내세우는 단골방안이 '학계의 양심 회복'과 '학계의 자율적 정화'라는 카드다. 이것이 자발적 움직이라면 그 한편에서는 심사 요건 강화와 같은 외부의 강제력을 발동하는 방식도 자주 제안된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여기에도 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학계에 양심이 없어서, 나아가 자율정화 기능이 없어서 표절 시비가 때마다 터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내세우는 심사 요건 강화와 같은 대증요법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학회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투고된 논문은 3명 가량 되는 위원에게 심사가 의뢰된다. 그 결과는 논문투고자 본인에게 통보되는데, 대체로 ▲원안 대로 게재 ▲수정 보완 후 게재 ▲탈락 등의 등급이 매겨진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심사위원이 자기와 학설이 다르다는 이유로 게재 불가 판정을 내리기 일쑤이며, 논문 투고자가 이른바 명망을 갖춘 중진급 이상 되는 대학교수는 거의 예외없이 무조건 통과되기 때문이다.


국내 학계의 공공연한 비밀 중 하나가 "연말에는 논문을 투고하지 마라"는 금언이다. 업적심사에 몰린 현직 대학교수들이 연말에 밀어내기를 하기 때문에 현직 교수들이 아닌 연구자는 연말 학회지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그만큼 협소해 진다.


논문 표절 시비와 함께 '돈타령' 또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대학교수들이 앞다투어 "인문학이 죽어간다"느니 "기초학문이 죽어간다"느니 하는 자극적인 구호를 외치면서, 그것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하는 방법은 거의 똑같다.


"정부가 지원 육성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이 곧 국민세금에서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가 학계에서는 곧잘 망각되고 있다.


사실 학진이 발주하는 동서양고전 번역사업만 해도, 왜 이런 사업에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예산지원이 없어서 번역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관련 학계 종사자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그 원인이 예산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몰아간다.


서울의 4년제 대학 인문학부 한 교수는 "물론 이공계와 같은 곳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처럼 사안에 따라 정부나 대학당국 혹은 기업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겠지만, 왜 지원이 되지 않아도 되는 연구에서조차 돈이 없어 연구를 못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라고 고백한다.


이 교수는 "결국 교육은 미래의 동량을 키우는 공공사업이라는 점을 다른 누구보다 학계 스스로 깊이 자각하면서, 왜 이런 우리를 지원해 주지 않느냐를 외치기 전에, 공공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서울=연합뉴스) 

2006. 8. 2


*** 12년 전 글인 까닭에 시대 한계도 있을 것이며, 또 당시 내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대목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나아가 지금은 생각이 달라진 대목도 있다. 


1. 기사에서 나는 "학진이 발주하는 동서양고전 번역사업"에 국민세금이 투입되는 문제를 지적했거니와, 지금도 그랬고 저때 저 기사를 쓸 때도 생각은 같아서, 이 사업 자체는 그 목적을 나는 찬동한다. 다만, 틈만 나면, 국민을 윽박질러, 국민더러 돈을 내놓아야 우리가 번역을 한다는 생각을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2. 외국번역 중역...번역은 선대 번역을 참조해야 한다. 그 자체가 표절일 수는 없다. 기사에서는 충분히 지적되지 않았지만, 번역을 참조해 놓고도 그런 사실을 고의로 숨기는 행위가 첫 번째이며, 실제는 그 외국번역을 고스란히 옮겼으면서도, 원전에서 직역했다고 사기치는 행위다. 이 둘은 용서할 수가 없다. 


3. 박사논문 쪼개기...이것이 문제가 되어 논의 끝에 이른바 학계에 몸담은 자들이 이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말았다. 쪼개기 해서 발표해도 그것이 중복게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외국 관행을 들었다. 개소리다. 외국과 우리는 전통이 다르다. 우리 학위논문은 이미 통과와 동시에 공간이라는 점에서 구미 전통과는 확연히 다르다. 중복게재 맞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정좌한 경주 대릉원이다. 전면 정중앙 뒤편에 마치 낙타 등 모양을 한 저 무덤이 한반도 무덤 중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는 황남대총이다. 마립간시대 어느 신라왕과 그 왕비를 각기 다른 봉분에다가 매장하되, 그 봉분을 남북쪽에다가 각각 이어붙여 마치 쌍둥이를 방불한다 해서 쌍분(雙墳)으로 분류한다. 고신라시대에는 흔한 봉분 만들기 패턴 중 하나다. 


요즘처럼 목련과 사쿠라가 만발하는 이맘쯤이면 이 구역에서 매양 이런 풍광이 빚어진다. 공교하게도 이 방향에서 바라보면 저 쌍분 전면 좌우에 나란한 각기 다른 봉분 사이로 목련 한 그루가 만발한다. 한데 그 모양이 아주 묘하다. 어제 경주에서 내가 포착한 이 장면에서는 무수한 사진기와 무수한 사진작가들이 병풍처럼 늘어친 까닭에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으나, 참말로 그 풍경이 에로틱해서 여성 음부, 혹은 자궁 같은 느낌을 준다. 


대릉원에서 이런 풍광은 2010년 이전에는 없었다. 저 장면을 사진으로 포착하겠다고 사람이 저리 몰리는 현상은 없었다. 그렇다고 저들 무덤이 그 이전에는 달랐던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저 목련 한 그루가 그때라고 없었던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 이전 저 목련이 지금과 같은 꽃을 피우지 아니한 것도 아니니, 2010년 이전에도 저 목련과 저 황남대총과 다른 두 봉분은 거의 매양 해마다 봄이면 저와 같은 풍광을 연출했다. 


그렇다면 하필 2010년 이후인가? 그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연이어 황남대총 특별전을 개최했다. 1970년대 황남대총 발굴성과를 재음미하기 위한 문화재 특별 기획전이었으니, 황남대총은 두 봉분을 합친 남북길이가 자그마치 120m요, 높이가 각기 23m에 달하는 그 엄청난 덩치에 어울리게 어울리리만치, 나아가 한국의 투탕카멘묘라는 별칭답게 실로 엄청한 유물을 쏟아냈다. 그것이 토해낸 압도적인 유물이 상당수, 혹은 대부분 저들 특별전을 통해 선보인 것이다. 


이 특별전을 상징하는 사진 한 장이 있다. 이 사진은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서는 메인 포토였으니, 초대형으로 뽑은 그 사진이 전시장 입구를 장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사진은 이 특별전 성과를 정리한 관련 도록 표지 디자인이기도 했다. 그 사진이 바로 이 무렵 저 지점에서 목련이 만발한 장면을 포착한 것이었다. 그것을 포착한 작가는 경주 지역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문화재 전문 오세윤이었다. 


이 사진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는지, 그 이듬해에 바로 올해 우리가 저 지점에서 보는 광경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목련이 만발하는 계절, 이른바 사진작가 혹은 사진 동호회 회원이 물밀듯이 몰려들면서, 돗때기 시장을 방불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저 장면을 포착하겠다고 종일 죽을 치는 이들이 우후죽순마냥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업적 사진 작가 혹은 사진 동호인은 물론이고, 이곳을 찾아 기념 사진을 남기고자 하는 일반인도 입소문을 타고는 급속도로 몰려들기 시작해 현장 통제가 불가능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는 해가 갈수록 도를 더해 지난해인가부터는 나름대로 자율성을 가장한 현장 통제룰이 생겼으니, 전업적 사진작가 혹은 사진 동호인은 각기 삼각대를 장착한 사진기를 안치하고, 저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자 하는 일반인은 줄을 이루어 기다리다가 그네들 순서가 되면, 대체로 남녀 한 쌍, 혹은 한 가족씩 일정한 시간씩 기념활영을 한다. 



내가 이번에 보니, 저기서 기념사진 몇 장 남기겠다고 물경 1시간을 더 기다리더라. 

  

이제 이곳은 더는 특별한 곳이 아니다. 소위 포토존이라 해서, 그것이 기념사진을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포토존일지 모르나, 전업작가들에게는 더는 특별한 곳이 되니 아니한다. 저기서 제아무리 좋은 사진을 담는다한 들, 그 사진은 언제나 오세윤 따라지 사진밖에 되지 아니한다. 배병우가 등장하면서 그의 전매특허가 된 소나무 사진이 일대 광풍이 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좋은 소나무 혹은 소나무 숲 사진을 찍는다한들, 그런 사진은 영원히 배병우 따라지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이것이 지적재산권인 까닭이다. 


이번에 나도 직접 겪은 일이지만, 저 대릉원에서 볼썽 사나운 장면이 난무한다. 우리가 확실히 해야 할 점은 저곳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저곳은 개방된 공간이요, 공공의 장소다. 그런 곳에 누구나, 언제건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들어갈 수 있고, 그런 일을 했다 해서, 그것을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실상은 딴판이라, 혹 저곳에 누군가 들어서기만 하면 비키라 소리치는가 하면, 갖은 욕지거리를 해댄다. 그네들이 세낸 곳도 아닌데, 마치 이곳은 우리만이 독점해야 하는 특권의식이 당연한 듯이 통용한다. 


물론 나름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현장질서랄까 하는 것들을 나는 깡그리 무시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현장질서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경주사적관리사무소라든가 그 감독관청인 문화재청에서 무슨 가이드라인을 정한 것도 아니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나 들어가도 되는 곳을 누구나 들어가는데, 그것이 어찌 비난을 받거나, 욕지거리를 얻어먹어도 된다는 당위가 된다는 말인가? 


욕지거리를 하기 전에, 그런 사진에 누군가가 방해가 된다고 하면, 그곳을 사진에 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런 방해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외려 양해를 부탁해야 한다. "실은 제가 사진을 좀 찍었으면 하는데, 잠깐만 참아주시면 안될까요?" 라는 식으로 정중하게 부탁을 해야 한다.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마치 이곳이 자기네 사유재산이나 되는양,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을 무단 침입자 취급을 하고는 욕지거리를 해댄다. 그러기는커녕 그런 욕지거리를 당연히 받아들인다. 


이런 현상이 일부 사진 애호가들 사이에서 더 두드러지는 듯하다. 사진이 보편화하면서, 그런 사진을 일상으로 즐기며, 배우고자 하는 그 자체를 누가 탓하겠는가? 나 역시 그런 애호가 중 한 사람으로서, 그런 흐름 자체는 많은 긍정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각종 사진 동호회가 생겨나고, 그런 애호가들이 이런저런 좋은 곳들을 찾아다닌다. 


하지만 이런 일부 동호인이 패거리가 되는 모습도 적지않게 목도한다. 저 대릉원만 해도, 그런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은 예외없이 그런 동호회 소속이다. 패거리를 믿고는, 그런 패거리 정신에 기대어 함부로 욕지거리를 해댄다. 혼자 오면 찍소리도 못하면서, 개떼처럼 몰려와서 개떼처럼 짖어댄다. 


사진보다 사진도덕을 먼저 체득해야 할 것이 아닌가? 듣자니 이런 사나운 풍광이 청송 주산지에서도 거의 매일 벌어진다고 한다. 좋은 자리랍시고 세낸 듯이 떡하니 차지하고는, 그것을 침범하기라도 하면 욕지거리를 해댄다고 한다. 주산지가 자기네 것인가? 내가 알기로 그곳은 대릉원이나 마찬가지로 공공의 자산이며, 그에 합당한 절차, 입장료를 낸 사람이면 누구나 즐길 자격이 있다. 


 

 

나는 경상도 소백산맥 어느 기슭 깡촌 출신이다. 40명이 채 되지 않는 국민학교 동창생 대부분은 중고교 졸업과 더불어 구미니 울산이니 하는 공장으로 갔고, 중학교 동창생들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촌구석에서 소 먹이고 겨울이면 산으로 나무하러, 혹 홀랭이로 토끼 잡으러 다니던 놈이 어찌하여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동네 옆집 누나 친구집에 세계문학전집 100권 비스무리한 게 꽂혀 있는 모습 발견하고는 어찌하여 그에 손대고, 마침 그때 고등학교 한문 교과서에서 동파 소식의 적벽부를 발견하고는 그에 격발해 한문이라는 걸 조금 긁적거린 인연으로 어찌하다 보니 예까지 왔다.

그 촌구석에서 어찌하다 보니, 그런대로 대학이란 데를 갔지만, 학비 마련이 쉽지 않아 송아지 팔아 대학 겨우 들어갔으니, 중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인가 우리 동네로 농활이란 걸 연세대 학생들이 있어, 그 친구 중 어떤 이가 어느날 교실에 들어와 난중에 어느 대학으로 갈거냐 하기에, 내가 그때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모르나, 난생 알지도 못하는 연세대라고 내가 거론하고, 무슨 공부를 하고 싶냐 해서 더 난생 알지도 못하는 영문학을 거론한 일이 인연이 되어, 진짜로 그 대학 영문학과에 들어갔다.

이를 졸업할 즈음, 여자 친구와 개판이 나게 되니, 소위 말하는 실연의 과정에서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요즘 기준으로 말하면 乙이 아니라 甲질하는 인생 살아보겠다 해서, 공무원은 죽어라고 싫고, 내무부 관리가 되었으면 하는 주변, 특히 부모님 기대를 뒤로 하고 그리하여 실로 우연히 택한 길이 기자다.

해 보니 그런 대로 재미가 있고, 그에서 내가 내 특장이 무엇이 있냐를 고민하다 보니, 남들에 견주어 한문이 조금 낫다 해서, 이걸로 특성화를 해보겠다고 해서 이내 문화부에 정착했다.

지금이야 내가 무슨 역사를 전공했느니, 개중에서도 고대사나 고고학을 전공했느냐 하겠지만, 이와는 애초엔 눈꼽만큼도 연이 없다. 내가 일찍이 삼국사기에 관심을 지니기는 했지만, 이는 역사 공부보다 한문 교재 차원의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두어 번 일전에 반복한 바 있거니와, 내가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기자로서의 내가 생각한 분야 출발은 근현대사, 특히 전후청산이었으며, 개중에서도 원폭피해자 문제였다. 1993년 6월에 느닷없이, 예고도 없이 부산지사에 배정받아 13개월 일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내가 사는 집 근처에 그 피해자로써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조선소를 상대로 기나긴 법적 투쟁을 벌이던 김순길씨를 알게 된 인연을 고리로 삼아, 겁없이 근대사에 뛰어들었다.

원폭피해자 문제를 고리로 삼아 예까지 이르렀으니, 그 과정에서 그 자신은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당시 참여연대 사무총장인가로 있던 박원순을 안국동 사무실로 찾아가 이런저런 자문을 구한 일도 있다.(여담이지만 이 무렵 내가 본 박원순이랑 지금의 박원순은 상당히 달라 조금은 곤혹스럽다.) 

이제 내 궤적이랄까 하는 노선을 뒤밟아 보니, 이제는 그 출발선으로 도로 한번쯤은 가봤으면 하는 미열 같은 욕구가 스멀스멀 솟아오른다. 아주 떼어버리자 한 전쟁배상 책임 문제가 작년 여름, 독일 본에서 라인강변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구토처럼 다시금 밀어나옴을 느꼈노라. (이 글은 March 25, 2016 at 7:14am에 抄했다.)  



                                       <빗금>

근대는 빗금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완충지대를 두지 않고 선으로 분할함으로써 경계를 확정하는 일,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근대의 핵심이다.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토지조사사업은 빗금에서 선으로 향하는 신호탄이다. 

왜 선을 필요로 했는가? 쟁탈 때문이다. 그 쟁탈을 막기 위해선 요기까지, 저 언덕배기까지가 내 땅이라는 빗금의 추상을 바로 딱 이 선까지가 내 땅이라는 구상으로 해체해야 했다. 돌이켜 보면 경계에 선 사람 누구에게나 소유권을 허용한 빗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쟁투가 있었고 살인이 있었던가? 

전근대 시대 이 빗금의 경계로 인한 대표적인 싸움이 있다.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다.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은 국경을 확정하고 그 징표로써 이 경계비를 세웠으니, 그 비면에 적힌 글을 보면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이다.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상의 뜻을 받들어 변계를 조사하고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분수령 상에 돌에 새겨 명기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이라는 뜻이다. 

이 비는 두고두고 논란이 되거니와, 그 문제 의식은 현재까지 이른다. 그에 적힌 '동위토문(東爲土門)', 다시 말해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말에서 토문강이 두만강인가 다른 강인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엔 정확한 토지조사 혹은 토지측량이 불가능한 까닭에 막연히 강이라는 경계선을 설정해, 이쪽은 청, 저쪽은 조선땅이라고 확정한 것이다. 

이 논란은 토문이 지금의 어느 강인가를 두고 벌어진 논란이지만, 그 강물은 홍수 등에 따라 언제건 수계와 흐름이 바뀌며, 나아가 더 자세히 들어가면, 그 강이 확정되었다 해도, 정확히 강 어디까지를 기준으로 할 것인지도 심각한 논란을 대두한다. 강 흐름 중앙을 정확히 자른 개념인가 아닌가? 아니면 양쪽 둔덕을 양쪽 경계로 하며, 강이 흐르는 구간은 완충지대인가? 이를 생업으로 살아가는 양국 신민들에게는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니다. 

이와 비슷한 빗금에 따른 영토 분할 약속이 신라와 당 사이에서도 있었다. 즉위 전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김춘추는 당 태종 이세민과 고구려 정벌 이후에 따른 영토 획정을 확약받는다. 고구려를 무너뜨리면 평양 이남은 신라 땅이라는 계약이 성립된 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신라는 당을 향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평양 이남이란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가? 그것이 있을 수가 없다. 왜? 전근대이기 때문이다. 38선처럼 평양 시내 중앙을 관통해서 그은 '선'이 아니었다. 막연히 지금 추측으로는 대동강 이남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동강이 관통하지 않는 동해안 변은 어찌되었던가? 

                                        <소위 진흥왕 시대 삼국 판도, 국경선은 빗금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지금을 기준으로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영토 분할 약속이며, 그것이 실제 실현되었다 해도 무수한 국경 분쟁을 유발했을 것이다. 이 분쟁이 유발하는 지역이 선이 완성되지 못한 빗금 지역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토지조사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획기를 이루는 사건이다. 그런 전근대 시대 무수한 빗금으로 인한 쟁투를 단 한 방에 끝냈기 때문이다. 토지조사사업이 토지 침탈을 위한 음흉의 의도? 이렇게만 저 사업 의미를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저 근대를 내가 찬양한다 헛소리는 사양한다. 내가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근대는 해방이면서 구속이요 억압이며 족쇄이기도 했다는 점을 하시何時도 잊어서는 안 된다. 산림조사사업과 인구 센서스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 

빗금을 없애고 선을 그어버린 데서 바로 frontier가 해체되고 borderline이 등장한다. 여권과 비자가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작금 논란이 되었다가 사실상 중단된 '동북아역사지도' 편찬 사업이라는 것도 내실을 보면 실은 빗금치기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왜? 전근대엔 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 대신 경계 지점에 무수한 빗금이 존재한 전근대 시대 영역 개념을 선이 지배하는 현대의 영역 지도 개념으로 치환하는 일이 어디 고충이 한둘이겠는가? 

<사진은 본 주제와 관련이 없음> 

근자 어느 고고학도가 유명을 달리한 일이 있었으니, 나 역시 친분이 다대했던 고인이라 날벼락 같은 소식에 망연자실했다. 듣자니, 고인은 본인이 재직한 대학 부설 박물관이 수행한 발굴조사와 관련한 일로 각종 조사 혹은 감사를 받으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것이 직접 원인이 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참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작금 국내 고고학 발굴사정을 보면 관련 국가기관, 그리고 발굴전문 법인이 발굴을 전담한다. 이런 시스템이 정착한지는 실은 오래지 않았으니, 10년 전만, 혹은 대략 15년 전 이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지금의 발굴 절대를 대학박물관들이 수행했다. 발굴 현장에서 대학박물관이 도태된 것은 시대 흐름이었고 소명이었다. 이것이 이리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새삼 말하지 않겠다.

90년대 중반, 전문발굴 법인으로는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현 영남문화재연구원)이 처음 출범한 이래 2000년대 접어들며 이런 기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 지금은 그 숫자가 물경 100을 헤아린다. 이리되자 기존 발굴을 독점한 대학과 대학박물관에서도 당연히 반발이 쏟아졌다. 이들은 언제나 말하기를 새로운 매장문화재 관련 법률이 대학을 원천에서 발굴현장에서 퇴출시켰다고 볼멘 소리를 했다. 지금도 그런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고 안다.

이들이 내세우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교육이다. 교육을 위한 발굴까지 원천봉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조차 역시 반대했다. 이상과 현실은 달라서, 나는 저들 대학 현장에서 말하는 교육을 위한 발굴이 제대로 시행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 점은 대학 종사자들에게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대학박물관이 그것이 교육용이건, 혹은 구제발굴 구제용이건 그 어떤 발굴에도 나서면 안되는가? 무엇보다 회계 처리 문제 때문이다. 이 회계 문제로 얼마나 많은 비리가 있었던가?

심지어 민법상 비영리법인인 작금의 전문발굴조사단조차도 이 회계 처리 문제로 거의 박멸에 가까운 감사원 감사와 검찰 수사를 받은 것이 엇그제였다. 현행 박물관 혹은 대학 시스템으로는 고고학 발굴에 따르는 회계 처리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 혹자는 요새는 그런 일을 대학본부 회계팀에서 한다고 해서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그것을 한번 맡아본 이는 회계가 얼마나 중대하며, 골치아픈 문제인 줄을 안다.

현장 교육은 다른 방식을 강구해야 한다고 나는 본다. 그 방식까지 내가 지금 제시할 수는 없다. 회계처리 문제 외에도 다른 산적한 현안들이 있으니, 그에 대해서는 추후 발언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Seoul City Wall > 

한양도성 등재 실패가 확정된 꼭 1년 전인 작년 3월 21일, 내 페이스북에 게재한 글을 전재한다. 

서울시가 야심차게 추진한 한양도성 세계유산 등재가 좌절했다. 한데 그 내용을 뜯어보면 한국이 세계유산 등재에 본격 나선 이래 그 포기 방식이 최악이다. 등재 서류를 심사하고 현지를 실사한 세계유산위 자문기구 이코모스는 한양도성에 대해 not inscribe로 결정했다. 

이는 이코모스 평가 중에서도 최악이다. 이코모스는 해당 문화유산 후보를 네 단계로 정해 세계유산위에 보고한다. 최상위는 물론 inscribe라, 그 다음이 refer, 그 아래가 defer이고 최하위가 not inscribe다. not inscribe가 무엇인가? 등재 불가 판정이다. 해도 소용없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다. 남해안 공룡화석도 defer였다고 기억한다.

이로써 기세 좋게 나가던 한국은 2년 연속 거푸 고배를 마셨다. 작년 한국의 서원도 좌절했다. 올해 한양도성이 좌절했으며 내년에 예정한 한국의 전통산사도 좌절한다. 날더러 점장인가 묻지 마라. 전통산사도 실패한다. 

이 중에서 서원과 산사는 나는 책임을 이배용에게 돌렸지만, 실은 더 큰 책임이 있는 자는 문화재청과 문화재위원회다. 이배용에 빌붙은 자들이 있다. 부화뇌동한 자들이 있다. 자리를 원한 자들이다. 직책을 원한 자들이다. 알량한 용역비 노린 자들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이배용이 국가브랜드위원장이라 해서, 그리고 이배용이 문화재청장으로 올지도 모른다 해서, 그에 빌붙어 부화뇌동한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와 보조를 같이 했으면서도, 진정 그 가치를 알리고자 한 헌신적인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자격도 없는 서원이며 산사를 밀어붙인 자들이 이배용만이 아니다. 

우리의 세계유산 정책은 이제 한계에 왔다. 혹자는 그 후보의 고갈 상태를 말하지만 이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재청과 문화재위원회가 썩었기 때문이다. 그 썩은 놈들이 또 정권을 연장하려 한다. 

<강의하는 설민석> 


말이 많은 친구는 설화를 피해갈 수 없다. 더구나 언제나 대중에 노출되는 저명 강사야 오죽하겠는가?

나는 지명도에서 저와 비교가 될 수 없지만 혹여 내가 저 정도로 유명해진다면 저보다 더한 일 겪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문제의 소지가 많은 말을 뇌까려 놓았다.


각설하고 나는 설민석을 새로운 시대의 인문학 열풍을 일으킨 현상으로써 줄곧 주시했다. 학원강사의 강의를 인문학 영역에 포함해야 하느냐는 논란은 논외로 친다. 그는 분명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유형의 강연 열풍을 일으켰다. 그는 그것을 축제로 만들 줄 알았다. 나는 지나가며 몇번 그의 강연을 봤지만 내용과 더불어 그의 액션을 봤다.


내용..이건 처참하기 짝이 없다. 그런 점에선 난 늘 사석에서 저 친구는 이제 침잠할 때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는 역사지식을 전파할뿐 사관이 없다. 장사꾼에 지나지 않는다. 저 장사를 이젠 내면화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요구다. 그는 연예인이다. 때려치고 침잠할 여유가 없다. 그러고 보면 저 친구는 저리 살아야 한다.


그는 모르긴 해도 거부일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금이 물처럼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설민석은 기업이다. 어느 중소기업보다 더 알찬 기업이다. 이런 그에게 폐업을 요구할 수는 없다. 강연으로 돈 벌어먹는 표본을 설민석은 만들었다. 저 친구는 종래의 구라쟁이 이어령이나 유홍준과는 또 다르다.


이어령은 책임지지도 않고, 책임질 필요도 없는 추상만을 나열했다. 유홍준은 책임져야 하지만, 무책임성 발언에 너무 많은 뻥을 쳤다. 그에 견주어 설민석은 오로지 강연과 그에 따르는 저술만으로도 모든 발언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의 강연에 학부모 엄마들이 열광하고, 그에 강연에 수험생들이 귀를 쫑긋이 세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아쉬운 점이 그 강연의 질이다. 이 질은 처참하기 짝이 없어 그만하련다.(March 19, 2017 페이스북 포스팅인데 지금도 유효하다 생각해 전재한다.) 

  1. 이현영 2018.04.14 09:42 신고

    '저 친구' 운운하시는 거 보니 서로 아는 사이신 것 같은데....설민석 선생님을 그저 돈 때문에 역사 지식 장사를 하는, 한낫 장사꾼으로 표현하셨네요. 그리고 유홍준 선생님도 무책임한 발언을 내뱉는 뻥쟁이로 표현하셨고. 그런데 제가 읽은 님의 말에서는 비판을 위한 비판밖에 안 보입니다. 난 저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들어, 난 저 사람들 싫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안 보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시려면 -잘 모르는 우리를 위해-어느 부분에서 쇼를 펼쳤는지 어느 부분에서 뻥을 쳤는지 왜 설 쌤의 강의가 사관 없는 공어함인지도 이야기를 하셔야 되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설 쌤은 내 한 몸 챙기느라 역사를 뒷전에 뒀던 우리들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한 번 더 생각하게 해준 분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 분입니다. 유 쌤은 우리가 몰랐던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 자랑스러움을 가르쳐준 분입니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누군가 그런 것들을 건드려 주지 않으면 정말 한 평생 모르고 지나갑니다. 설 쌤에게 사관이 있는지 유 쌤이 뻥을 쳤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분들이 있어서 우리가 모르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을 깨우치고 한 번 더 공부하고, 그로써 나만의 사관과 문화에 대한 안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이었으면 마음 속에서 씹고 넘어 가시고, 만일 뭔가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어서 공개적인 글을 올리신 거라면 단지
    '이 사람은 이러해'라는 비판에서 그칠 게 아니라 구체적인 근거에 의한 비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나가다가 눈살이 찌푸려지는 글을 보고 한 마디 하고 나갑니다.

  2. 한량 taeshik.kim 2018.04.15 00:22 신고

    글쎄요..저 사람이 하는 일을 비교적 공정하게 보려합니다. 저는 저 사람이랑 친분이 전연 없습니다. 유홍준 선생 장단점이야 굳이 말 안해도 많은 지적이 있어 뺐습니다

상식 혹은 통설, 이는 항용 열어놓아야 한다.어디를 향해? 의심을 향해

이를 나는 겸손이라 부른다. 상식 혹은 통설이 빗장을 건 상태. 이건 교시요 계시다.

전복해야 한다. 빗장은 부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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