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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안내판을 두고 문화재청 주변으로 요란한 상황이 전개한다.
이 문제 심각성을 더는 방치하기 힘들다고 판단해 나는 몇년전 '안내판 문화재의 얼굴'이라는 페북 페이지를 열기도 했다.
내가 이 문제를 제기할 때는 주로 다음 네 가지를 염두에 두었으니,

1. 무엇을 담을 것인가?(내용)
2.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디자인)
3. 어디에 세울 것인가(위치)
4. 영어판은 어찌할 것인가?(독자) 

가 그것이다.

이 문제 발단을 정부 차원에서 촉발한 문재인 대통령 지적은 실은 안내판이 탑재한 무수한 문제 중 1번에 지나지 않거니와, 실은 나머지 문제들도 심각함이 중증이다.

1에 대한 대안 중 하나는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석조물 안내판이 훌륭한 보기다. 이 안내판은 아마 이영훈 경주박관장 작품으로 알거니와 함 보라. 어찌 쓰야는지 그 전범 중 하나다.

2는 외양이다. 요새 번들번들 안내판 천지라 여름날엔 비쳐서 읽을 수도 없다, 철판구이 하려는 모양이다. 업자들 농간에 놀아난다.
혹자는 친환경 운운하면서 알록달록 나무 안내판을 쓰기도 하는데 이 또한 근시안이요 전시행정의 표본이다. 나무는 5년을 버티지 아니한다.

3은 경관과 연동한다. 안내판이 가림막 비계인곳 천지다. 사진 영상시대 그 위치는 경관을 책임지는 관건으로 대두했다. 거돈사지 가봐라. 삼층석탑 앞에 턱하니 뭐가 있는지.

4는 구마라집과 현장 법사의 싸움이다. 많은이가 번역의 정확성을 말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이는 새발의 피다. 내가 생각하는 영어 안내판은 그에 해당하는 한국어 안내판의 번역이 아니다. 독자가 다르다. 텍스트가 달라야 한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문화재청이 우당탕탕이다. 보니 오늘도 관련 보도자료를 뿌린 모양이다. 미안하나 난 당신들 안믿는다. 지금껏 하는 일들 패턴을 알기에 난 당신들 하는 일 기대 안한다.

이태리 어느 산간에 와서  야심한 새벽에 이런 글 쓰야는 내가 참담하기만 하다.

<서울 종로구 공평동 재건축 발굴현장>


시대가 변했다. 문화재도 변했다. 종래 문화재라고 하면 일방적인 타도 대상이라는 성격이 짙었다. 이런 문화재의 속성, 혹은 이미지는 지금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하며 강고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화재는 그 존재기반으로 삼는 관련 법률이 문화재보호법이며, 근자에는 그것이 더욱 분화해 매장법과 수리기술자법, 고도보존법 등으로 분화하고, 나아가 얼마 뒤면 무형유산법과 세계유산법도 제정될 것이어니와, 이들은 그 속성이 규제법이라는 점이니 이들 법률이 규제성을 포기하면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규제법이라는 무엇인가? 이에서 규제 대상은 무엇인가? 이르노니 개발로부터의 막음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재가 개발과의 대척점을 형성한다는 믿음 혹은 실감은 현실과 다르다 할 수 없다. 


이런 규제가 종래에는 걸림돌 일방으로 간주됐지만 근자에는 그런 규제에 착목해 이를 역이용하는 노골적인 흐름도 등장했으니, 다름이 아니라 개발로 혜택을 누리면서도 그런 개발과 혜택과 정반대하는 흐름이 위치하는 세력이 문화재가 탑재한 규제라는 무기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인가? 문화재를 이용해 개발 자체를 원천으로 봉쇄하려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근자에 일어났거나 일어나는 중인 사례를 보자. 


세계유산 조선왕릉 일부를 구성하는 정릉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둘째 왕비 신덕이 묻힌 곳이거니와 이곳은 사적에다가 세계유산이기도 하다. 한데 그 주변 일대에 대한 재개발 움직임이 있었다. 이 움직임이 현재까지는 좌절한 상태다. 인근에 모 사찰이 있어 정릉 원찰을 표방한 이 사찰이 이 개발을 반대한 것이다. 이유는 그럴 듯하다. 개발로부터 정릉을 보호하자는 것이었지만 내실을 보면 사찰의 이해와 관계없다고도 할 수 없다. 이 사례는 나중에 따로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개발계획이 포기된 일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그 이유도 나중에 말하고자 한다. 


<청주 호암택지개발지구 조선시대 기와가마>


강남구 세곡동 보금자리주택. SH공사가 추진하는 이 사업 뜻밖에도 인근 주민 상당수가 반대했다. 그 주된 이유는 강남 하면 떠오르는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와 썩 무관치도 않아, 그 자세한 내막은 말하지 않으련다. 한데 이들이 내세운 논리가 문화재 보호였다. 무턱대고 개발을 반대할 명분이 없으니 문화재보호를 이유로 반대했다. 


용유담. 이것도 근자 논란이 됐다. 댐에 수몰될 위기에 처한 이곳을 보호하자는 측에서는 이것이 명승이 될 만하다고 주장했다. 댐 건설을 반대하는 방탄막이로서 명승이라는 문화재 개념이 동원된 것이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이 역시 막고자 하는 측에서는 문화재를 주목해 문화재를 내세워 해군기지에 맞짱을 뜨게 하기도 했다. 이처럼 개발이라는 괴물을 막는 마지막 첨병으로 호명한 이가 바로 문화재였다. 


이런 사례들에서 나는 점점 문화재가 개발을 막는 총알받이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심히 우려한다. 총알받이 문화재. 이거 말이 그럴 듯하다. 개발이라는 괴물을 문화재가 막는다는데 어찌 대단하지 않으리오? 하지만 내실을 들여다 보면 문화재에 의한, 문화재를 위한, 문화재의 보호보존 논리는 실종하고 오로지 개발을 막는다는 무기로서의 문화재가 있는 일이 허다하다. 


나는 문화재가 언제나 개발과 대치하는 국면을 증오한다. 개발과 궤를 맞추어 가야 한다고 본다. 그것을 유엔이 표방하는 정신을 빌린다면 지속가능한 개발 혹은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다. 우리 역시 지향해 할 방향 중 하나가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나는 본다. 하지만 방탄막이 문화재를 development와 언제나 적대점으로 형성하면서, 그것이 결국 문화재에 대한 혐오를 더욱 키우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는 마약과도 같다. 마약. 당장은 약효를 보지만 장기로는 패악이다. 마약은 종국에는 철퇴를 맞는다. 문화재가 부디 뽕쟁이를 살리는 마약으로 전락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국립민속박물관>


어제 문화체육관광부 인사 중 국장급 전보를 보면 박물관 학예직 인사 이동이 있었으니, 이에 따르면 고위공무원단인 국립전주박물관 김승희 관장이 같은 고공단인 국립광주박물관장으로 가고, 문체부 산하 다른 문화기관인 국립민속박물관 천진기 관장이 국립중앙박물관 산하 고공단 자리인 국립전주박물관장으로 이동했다. 이번 학예직 고공단 인사는 송의정 국립광주박물관장이 퇴임함에 따른 후속조치라는 성격과 더불어 다른 측면도 있으니, 다름 아닌 민속박물관 인사 적체 문제가 도사린다는 점이 그것이다.


직제로 보면 국립민속박물관은 비록 그 직급이 차관급인 국립중앙박물관에 견주어 낮기는 하지만, 엄연히 같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소속기관으로, 서로에 대해서는 엄격한 독립성을 지닌다. 문체부 산하에 이런 유사 기관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에 만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있고, 나아가 국립현대미술관도 있다. 


하지만 이들 박물관˙미술관은 규모 차이에 따른 인사 적체 문제가 기관별로 그 심각성이 현격해, 국립중앙박물관은 차관급(대통령령에 따른 차관급이라 다른 정무직 청급 청장과는 위상이 다르다) 관장 산하에 학예직급으로는 학예연구실장과 경주박물관장, 광주박물관장, 전주박물관장이 고공단이라 이들끼리 호상간 수평이동이 가능하다. 다른 박물관 미술관에 견주어 중앙박물관은 그나마 고공단 인사 적체를 해소할 여지가 많다는 뜻이다. 


그에 견주어 민속박물관은 단일 조직이라, 산하에 지방박물관이 없고 고공단은 오직 관장 한 자리뿐이라 인사적체가 극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적체는 다른 무엇보다 그 관장 재임 기간이 대체로 다른 기관의 그것에 견주어서는 유난히 긴 특징을 지니는 일로 발전한다. 이번에 물러난 천진기 관장만 해도, 1962년생이라, 만 49세이던 2011년 5월에 관장에 취임해 물경 7년 1개월을 재직하다가 이번에 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천진기 관장 이동은 장기 집권에 따른 기관 피로감을 해소하자는 뜻에서 문체부가 그리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수평 이동 자체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같은 고공단이라 해도 민속박물관과 전주박물관은 격이 현격히 다르다. 내가 정확한 자료가 없어 자신은 없으나, 예산과 조직 규모가 비교가 되지 않아, 민속박물관이 수퍼마켓 혹은 백화점이라면 전주박물관은 말만 고공단 기관이지 구멍가게, 포장마차에 지나지 않는다. 더불어 기관 성격 차이도 문제로 지적된다. 


중앙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은 성격이 판이하다. 중앙박물관은 언뜻 그것이 커버하는 영역이 백화점을 방불하는 듯하나, 그 근간은 말할 것도 없이 고고학과 미술사학이 양대 산맥이거니와, 그에 곁들여 요즘은 보존과학이니 역사학이니 하는 인접 학문을 끌어들이는 형국이기는 하나,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는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민속학 영역은 그것을 전담하는 민속박물관이 따로 있는 마당에, 민속과는 눈꼽만큼도 관련이 없다고 봐도 대과가 없다. 


그럼에도 유독 산하 지방박물관 중에서는 전주박물관이 민속학과 그나마 인연이 깊은 편이었으니, 이 박물관이 애초에 민속학으로 출발해서가 아니라, 어찌하다 보니 그리된 것일 뿐이니, 이에는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이종철이라는 인물의 이력에서 기인한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2회 출신인 이종철은 이상하게도 대학 졸업 후 문화재관리국 학예사 입사와 더불어 민속학에 투신했으니, 그런 그가 나중에 연구관 진급과 더불어 국박으로 가서는 광주박물관을 거쳐 전주박물관장을 역임하게 되거니와, 이런 기관 이력에서 전주박물관은 유독 민속학과 연관이 깊은 곳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번 천진기 관장의 전주박물관장 이동에 대해서도 배기동 중앙박물관장이 그제 사석에서 하는 말을 듣자니 "전주는 양반문화와 관련이 깊어 민속학 전공자와도 어울리는 곳"이라고 하거니와, 어쨌거나 그 인사이동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억지 논리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전주박물관이 무슨 민속학과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번 인사 이동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중앙박물관에 견주어 엄연히 독립개체로서 전공 역시 다르고, 따라서 기관 성격도 판이한 민속박물관이 그 대표인 관장을 중앙박물관 산하 일개 지방박물관장으로 갔으니, 비록 직급은 같은 고공단이라 해도, 이는 민속박물관으로서는 치욕 중의 상치욕에 다름 아니다. 이번 인사는 가뜩이나 중앙박물관이 바라보는 민속박물관은 언제나 작은집이었고, 언제나 아래라는 인식을 더욱 강화하는 꼴을 빚고 말았다. 


이제 관심은 자연 후임 민속박물관장 인선에 쏠린다. 한데 이번 인사에서는 이상하게도 민속박물관장은 쏙 빼내갔으면서도 그 후임은 발령내지 아니했다. 내가 알기로 민속박물관장은 공모직이었다. 옛날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천진기 관장이 2011년 임명될 당시 그렇게 공모직으로 개방됐다. 그런 까닭에 나는 당연히 이번에도 그런 공모 방식을 통해 민속박물관 내부, 혹은 외부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를 실시할 줄로 알았다. 한데 알아 보니, 공모가 아니란다. 공모였다가 일방적 임명직으로 도로아미타불 시켰다고 한다. 대체 언제, 무슨 일로 이리 옛날로 돌아갔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한데 이번 인사에서 일단 공석으로 비워둔 민속박물관장 자리에 중앙박물관 출신자를 앉힌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중앙박물관 혹은 그 상급기관인 문체부로서는 중박 고공단 한 자리를 민속박물관에 내어주었으니, 그 반대급부로써 당연히 중박 출신자가 그 자리로 가야 한다고 주장 혹은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들리는 말로는 민속박물관장에 고공단 진급이 예정된 현재의 중앙박물관 본부 부장급 인사 두 명이 후보자로 내정되었다 한다. 이들은 고공단 시험에는 합격하고, 그에 맞은 직급 배당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연구관 경력으로 보면, 이들은 현재의 민속박물관 과장들과 민박 출신으로 다른 기관에 나가 있는 다른 과장급들에 견주어 한참이나 후배다. 민속박물관에는 학예직 과장이 세 명인가 네 명이 있고, 문화재청 산하 몇 곳에 민박 출신 과장이 포진한다. 나아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같은 데도 민박 출신자들이 나가 있다. 


이처럼 다른 유사 기관들에 견주어 유독 민박은 내부 출신자들을 곳곳에 내보냈다. 보내고 싶어서 보냈겠는가? 내부 인사 적체가 극심해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공단이라야 꼴랑 관장 한 자리 뿐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런 고참 과장들이 민박 자체와 외부에 제법 있다. 그런 판국에 이들을 모조리 제끼고 전연 성격도 다르고 전공도 다른 고고학 혹은 미술사 전공자들을 민박관장에 내려 꽃아야 하는가? 이리 되면 민속학 전공자들의 자존심은 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정리하건대 민속관장이 중박 산하 지방박물관장으로 갔다 해서,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중박 출신자를 민속박물관장으로 내려꽂아서는 안 된다. 이건 치욕이며 능멸이다. 민속박물관도 인사 숨통을 트야 한다. 관장 자리 하나가 비어야 그 숨통이 트인다는 역설을 문체부나 중앙박물관도 인식해야 한다.


문체부 산하에는 앞서 말한 대로 유사 박물관 미술관이 더러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사 교류 차원을 제외하고 중앙박물관 출신이 미술관을 간 적이 없고, 그 반대도 없으며, 나아가 신생급에 속하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는 그 관장 자리를 중앙박물관 출신이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그 역사가 일천하기 짝이 없는 역사박물관에 대해 이럴진댄, 그 역사가 환갑 진갑을 이미 다 지난 민속박물관을 중앙박물관이 어찌 접수한단 말인가? 


나는 민속박물관이라 해서 반드시 민속학 전공자이거나, 혹은 민속박물관 내부 혹은 그 출신 외부인이 되어야 한다고는 주장하고픈 생각이 가을 터럭만큼도 없다. 민속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도, 예컨대 행정가 출신이나 정치인이라 해서 민속박물관을 운영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도 없을 뿐더러, 그래야 한다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민속박물관을 이끌 관련 내·외부 인사가 널려있는 마당에, 더구나 중앙박물관 인사 적체 해소 차원 혹은 그 반대 급부 인사교유라는 차원에서 민속박물관 사람을 받았으니, 민속박물관도 한 자리를 내어놓아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중앙박물관 출신 민박 관장이 임명될 수는 없는 법이다. 민박 사람이 당연히 민박관장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작은 기관을 지킨 사람들에 대한 자존심을 지켜주는 한 조치다. 나아가 이 참에 민박을 중박 산하기관처럼 여기는 인식 자체도 박멸해야 한다. 


나아가 이것이 인사교유 차원인가? 중박이 한 자리 내어주었으니 민박도 하나 줘야 한다? 웃기는 소리다. 중박에 난 고공단 자리 하나는 광주박물관장이라는 고공단 자리가 정년 퇴직으로 비어서 생긴 자리다. 나아가 내년에는 경주박물관장도 퇴임한다. 고공단 자리 하나가 더 비게 되어 있다. 중박이나 문체부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중박과 민박은 반딧불과 번개불만큼 다르다. 

처참하게 부러진 수령 500년 느티나무


어제다. 경기 수원발 연합뉴스 기사로 〈"살려야만 한다"…수원 500년 느티나무 구하기 대작전〉 제하 김인유 기자 기사가 나왔으니, 이번 장맛비에 처참히 붕괴한 느티나무 노거수(老巨樹)가 쓰러진 모습을 담은 큼지막한 사진을 곁들여 이렇게 쓰러진 나무를 살리고자 당국이 안간힘을 쓴다는 내용이었다. 보도에 의하면 지난달 26일 오후 3시쯤 수원시 영통구 느티나무 사거리 부근 단오어린이공원에 있는 수령 500년 된 느티나무가 부러졌다고 한다. 다시 보도를 훑어가면, 이 느티나무는 1790년 조선 정조대왕이 '수원화성'을 축성할 때 그 나뭇가지는 그것을 축성하는데 쓴 서까래를 공급했는가 하면, 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칠 때면 구렁이 울음소리를 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고 한다. 


높이 33.4m, 둘레 4.8m에 달한다는 이 나무 주변에서 매년 영통 주민들은 영통청명단오제를 연다고 한다. 1982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된 데 이어 2017년 5월에는 대한민국 보호수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니, 그런 나무가 이번 장맛비에 세 갈래로 둥치가 쪼개지면서 일거에 쓰러졌으니 그 안타까움이야 오죽하겠는가? 이번 장맛비에 느티나무가 세 갈래로 쪼개지듯 부러지면서 수원시민들의 안타까움이 커지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kka8VrCfU&feature=youtu.be


나무가 쓰러지자 수원시는 이를 살리기 위한 긴급 처방에 나섰다고 한다. 이에 28일에는 나무병원 원장 4명과 녹지담당 공무원들이 모여 긴급대책회의를 한 데 이어 7월 2일에는 영통구청에서 시민대표와 전문가가 모여 여러가지 복원대책을 확정해 최적의 복원방법을 정하기로 했단다. 조사 결과 느티나무는 다행히 뿌리는 산 것으로 확인되고, 그 옆에는 새싹(맹아)이 올라오고 있고 기존 느티나무에서 떨어진 씨에서 나온 묘목(실생묘)도 발견됐다고 한다. 이에 수원시에서는 새싹을 활용하거나 묘목으로 후계목을 육성하는 방안을 강구한단다. 부러진 이 나무를 배양해 복원하고자 경기도산림환경연구소에서 느티나무 시료를 채취해 가기도 했단다.  


쓰러진 처참한 몰골을 사진으로만 봤지만, 나는 과연 이런 노력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르겠다. 수원시가 구상하는 되살리는 방법이란 결국 그 종자를 받아 후손을 이어가겠다는 것인데, 이 나무 역시 그렇게 언제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수천만 년 생명을 이어왔을 것이며, 더구나 그 생명이 물경 500년을 달한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후손을 이미 두었을 것이다. 


영통 주민들이 아는 그 느티나무는 생명이 끝났다. 적어도 내가 보는 한은 그렇다. 그 날아가는 생명력 한 자락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나, 저 느티나무는 이승에서 생명을 다했다. 여기까지다. 500년 수령(樹齡)이 추정치라 해도, 적어도 수백 년에 달할 그 질긴 생명은 이에서 끝났다. 장렬한 전사라고 보며, 영웅적 죽음이라 나는 본다. 


문화재라는 관점에서 저 보호수는 비록 그리 지정되지는 않았으나 천연기념물에 해당한다. 간단히 말해 저 나무는 문화재이기도 하다. 그것이 비록 문화재라가 아니라 해도, 문화재 역시 그러하듯, 저런 노거수 역시 놓아줄 줄 알아야 한다고 본다. 저 노거수처럼 문화재 역시 죽을 자유가 있어야 한다. 아니, 그런 자유를 주어야 한다. 죽을 때가 되어 죽음을 택했는데도, 죽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에 근거한 부질없는 생명 연장은 각종 무리와 탈법을 낳는 법이다. 동물행동학자 데이비드 구달은 104세에 달한 시점에서 더는 삶을 지속할 의미와 기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하자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하고는 베토벤 운명 교향곡을 들으면서 영원한 잠을 선택했다.  


마침 오늘 태풍이 한반도를 엄습한다고 각종 기상 예보가 따른다. 가뜩이나 장맛비 여파에 태풍까지 겹치면, 저런 노거수는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간다. 그렇게 해서 더러 국가지정문화재 중 하나인 천연기념물 중 노거수는 적지 않은 희생을 내곤 했다. 근자에는 이에 더해 훨씬 발생 빈도가 높아진 데다 그 강도 역시 커진 지진에 따른 피해도 적지 않다.  


저번 경주를 엄습한 지진 여파에 문화재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봤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이런 일을 빌미로 교각살우를 범하고자 하는 시도가 또 준동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두렵기만 하다. 왜 또 준동이라 하는가? 


박근혜 정부 출범과 더불어 그 초대 문화재청장에 임명된 변영섭 시대 문화재 분야에 그런 일이 있었다. 그의 재임 시절에 그가 주도한 문화재 반란이 있었다. 그가 주동이 되어 썩은 문화재판을 끌어 엎겠다고 하는 소위 청풍운동이 있었다. 그 일환으로 안전진단이라는 미명 아래 전국에 산재하는 문화재에 대한 일제 구조진단이 있었다. 그 결과 D등급이 어쩌니저쩌니 하는 딱지가 개별 문화재별로 모두 붙었으니, 그에 따른 여파는 지금도 온 문화재 현장에서 썩은 냄새를 풀풀 풍기며, 가는 문화재 현장마다 비계 덩어리 천지라, 문화재 보수를 빙자한 문화재 훼손 행위가 범람한다. 탑이면 탑 모두가 해체 보수 중이며, 목조문화재면 모든 목조문화재가 해체를 하지 못해 환장한 것처럼 너도나도 덤벼들어 지붕을 뜯어내고 벽체를 갈비살 발리듯이 발려낸다. 


내가 항용 말하지만 문화재는 제발 그대로 놔둬야 한다. 썩어문드러지면 썩어문드러지는 대로, 무너질 것 같으면 무너지는 대로 제발 놔둬야 한다고 말한다. 구조공학이라는 이름으로 첨성대가 어느 방향으로 몇도 기울어졌네, 의성 탑리 오층석탑이 이젠 손을 안대면 안 되네 하는 굿판 이제는 집어쳐야 한다. 


첨성대는 북쪽으로 기운 것이 맞다. 원래 이러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을 듯하니, 지금 기준으로 보면 손을 대야 하는 듯이 보이는 것도 맞다. 하지만 이는 쇠뿔 바로잡겠다고 소를 죽이는 꼴이랑 진배가 없다. 늘 말하듯이 첨성대가 그리 기울어진 까닭은 살아남고자 하는 무수한 발버둥의 결과이며, 지금의 모습이 가장 안정적이라고 스스로 판단한 까닭이다.  무너지면 무너지도록 놔둬야 한다. 


저번 지진에 또 불국사 다보탑 난간석도 타격을 본 모양이다. 왜 타격을 보았겠는가? 미안하지만 나는 그 가장 큰 원인으로 그 직전 수리보수 공사를 든다. 근자에 손을 댄 까닭에 난간석이 견디지 못했다고 본다. 수백년간 안정화stabilization를 거쳐 자신에게 가장 맞는 상태로 자리 잡은 그 모습을 우리가 해체 보수라는 이름으로 깨뜨리고 말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물론 그 반대편에서는 그때 손을 보았기망정이지 그게 없었더라면 더 큰 피해를 봤을 거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잘 안다. 


정이품송도 죽을 자유를 이제는 허해야 한다. 언제까지 주사기 꽂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이품송을 보낼 준비를 이제는 해야 한다. 


문화재도 죽을 자유를 주자. 

노거수도 쓰러질 자유를 주자. 


비바람에 쓰러진 500년 된 느티나무


오프라인 사전은 이제 곳곳에서 신음 소릴 내며 퇴조 일로다. 이젠 더는 설 곳이 없다. 내도 팔리지 않을 뿐더러, 팔려도 아무도 보지 않는다. 


신문..요새는 기자들도 보지 않는다. 신문 발행부수? 아득히 먼 선캄브리아 후기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신문은 퇴조를 거듭해 지금은 마지막 숨을 헐떡인다.


그렇다면 사전이 퇴조했는가? 

분명 오프라인 사전은 눈에 띠게 퇴조했다. 

그렇다면 신문이 퇴조했는가?

분명 조중동이 대표하는 신문이 가판대에서 정신없이 사라져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전이 결코 퇴조했다 할 수는 없다. 그러니는커녕 단군조선 이래 이토록 사전 수요가 많은 시대가 있을성 싶을만치 그 수요는 급격히 늘어나, 일상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너도나도 사전을 찾는다. 그 매체가 바뀌었을 뿐 사전 수요는 폭증 일로다. 오프라인 사전이 사라졌을 뿐, 그것을 대체한 새로운 시대 새로운 형태의 사전은 범람을 방불한다. 

뿐이랴? 사전은 종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시로 개정증보가 이뤄진다. 위키피디아며 바이두가 대표하는 온라인 사전은 성업 중이다. 그 성업을 가능케 하는 동인은 첫째 그 막대한 수요이며, 둘째 그 개정증보의 전광석화 같은 속도전에 있다고 나는 본다.  


따라서 사전이 사라지고 있다거나, 사전이 사라졌다는 말은 오프라인 사전에만 해당할 뿐이며, 그 수요는 폭증 일로임을 구분해야 한다. 



신문이 퇴조했는가?

마찬가지로 그것이 취급하는 신문과 방송이 뉴스 시장에서 급격히 힘을 잃었을뿐이며, 뉴스 수요는 마찬가지로 폭증했다. 

뉴스가 이토록 각광받는 시대는 단군조선 이래 없었다. 신문 시대엔 언감생심 독자 축에도 들지 못한 초중등생이 이젠 누구나, 그것도 수시로 뉴스를 찾는 시대를 우리는 산다. 

최순실 모르는 초등생 없다. 뉴스가 신문과 방송에서 해방하니 뉴스가 극성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문이 퇴조한 일을 뉴스 시장의 퇴조로 등치等置할 수는 없다. 


사전과 사전 수요, 신문과 뉴스 수요는 다르다.


때는 바야흐로 사전 전성시대, 뉴스 범람시대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 볼멘 소리 중 다른 하나인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책을 읽지 않는가? 오프라인, 혹은 범위를 더 확장해 그것을 대체한 매체 중 하나인 전자출판물 수요가 줄어든 일을 독서시장 쇠퇴로 등지할 수는 없다. 


책을 읽지 않을 뿐, 절대적인 독서량은 폭증했다. 오프라인 출판시대 독서시장과 비교하면, 단 하루도 글을 읽지 않는 시대가 없다. 

비슷하게, 이제는 모두가 작가인 시대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원고지에 글을 쓰고, 노트북으로 뭔가 심금을 울리는 글을 자판으로 두들긴다는 시대는 지나갔다. 


댓글 하나가, 무심한 좋아요 하나가 글을 창작하는 일인 시대다. 

 

지난 3월 24일 치른 2018년 서울시 지방공무원 7급 필기시험 '한국사 A형' 7번 시험문제가 저렇단다. 이걸 두고 말이 많다. 어느 유명 학원강사가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이 문제를 문제삼았으니, 만인이 보는 인터넷 강의에서 지랄 같다 하는가 하면, 좇같다 했으니, 간평하건대 저 학원강사 말 중에 단 하나도 틀린 대목 없으며, 이런 시험문제를 낸 놈이나, 이걸 감수하고도 그대로 시험문제로 출제를 강행한 놈이나 쳐죽여야 한다. 

물론 그 나름으로는 변명이 있으리라. 문제 출제자가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그의 변명을 들을 수는 없으나, 변별력을 고려해 아마 저런 말도 안되는 문제를 냈을 성 싶다. 그래 내 세대에 행정고시며 사법고시며 하는 국가고시에서 이런 문제도 나온 적이 있었다는 말을 나는 기억한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분량이 총 얼마인가를 묻는 문제가 있었단다. 그 말을 고시를 준비하는 내 친구한테 들었을 때 나는 대략은 맞추었으니, 500여 권이다. 이는 내가 고교 국사교과서에서 나온 대목을 기억하는 까닭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저런 식의 문제를 내면 안 된다. 

가뜩이나 역사는 암기과목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거니와, 저런 문제는 문제로서 자격도 없는 점은 고사하고, 역사는 덮어놓고 외워야 한다는 당위를 유감없이 증명없이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저 문제가 문제은행에서 고른 것인지, 아니면 특정 전문가가 만든 것인지 자신은 없으나, 그 어떤 경우건, 저 문제를 만든 이는 볼짝없이 대학에서 역사로 밥을 빌어먹고 산다는 교수놈이다. 

그건 그렇고 저 보기로 든 고려 후기 역사서 네 종을 보건대, 더욱 심각성을 더하는 대목은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제외한 나머지 세 종은 이미 존재조차 망실되어버린 소위 일서(逸書)라는 사실이다. 더 간단히 말한다. 나머지 세 종은 우리가 보고 싶어도 볼 수도 없다. 왜? 이미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물론 후대 기적적으로 발견될 가능성까지 없는 않다.)

보기가 제시한 저들 네 종 완성에 얽힌 기록들을 찾아봤다. 

고려사절요 권제 24 충숙왕(忠肅王) 정사 4년, 원(元) 연우(延祐) 4년(1317) 조를 보건대 "여름 4월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 민지(閔漬)가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찬술(撰述)해 올렸다. 위로는 건국 초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고종(高宗) 때까지에 이르렀는데 책이 모두 42권이었다. (민)지는 문장에 조금 재주가 있었으나 심술이 바르지 못하고 성리학(性理學)을 알지 못했다. 그가 소목(昭穆)을 논하면서 주자(朱子)의 논의를 그르다고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와 같이 소견이 편파적이었다"고 했으니, 이를 통해 본조편년강목 찬술 시점이 1317임을 확인한다. 

<제왕운기 서문 마지막(오른쪽)과 본문 첫 대목(왼쪽)>

다음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제왕운기는 무엇보다 이승휴 자신이 쓴 서문이 있어 이에서 서문 마지막에 이승휴 스스로가 "지원(至元) 24년(1287) 3월 일 두타산거사(頭陀山居士) 신 이승휴(李承休)"라고 한 점을 참조한다. 이를 통해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완성한 시점을 1287년으로 본다. 한데 이는 문제가 적지 않다. 서문을 쓴 시점이 반드시 그 책이 완성된 시점을 말하는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서문을 미리 써놓기도 하고, 훨씬 나중에 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저 시점은 제왕운기가 완성된 시점을 '추단'하는 증거 중 하나가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제왕운기가 완성된 시점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제왕운기는 완성 시점이 1287년 무렵이라는 정도만 확인한다. 

다음으로 허공[許珙]의 《고금록(古今錄)》이 문제거니와, 그 찬성시점을 이승휴가 제왕운기 서문을 쓴 시점보다 불과 3년 빠른 1284년을 제시하거니와, 나로서는 아직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지는 못했다. 이 고금록은 『고려사』 권제105, 열전18 허공[許珙] 열전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이거니와, 

허공은 정당문학 윤극민(尹克敏)13)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처가 죽은 후 자기 집에서 길렀던 처제의 딸과 재혼하고서 헌사의 탄핵을 받았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새로운 관직 제도에 따라 직함이 바뀌자 왕에게 사례했으나 허공만이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뒤에 판밀직(判密直)·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를 역임하였다.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려 하자 왕은 도지휘사(都指揮使)를 각지로 보내어 전함의 건조를 독려했다. 허공은 경상도로 가고 홍자번(洪子藩)은 전라도로 갔는데, 홍자번이 반도 못 마쳤을 때 허공은 벌써 일을 완료하고 돌아오니 홍자번이 그의 능력에 탄복하였다. 참문학사(參文學事)·수국사(修國史)로 옮겨 한강(韓康)·원부(元傅) 등과 함께 『고금록(古今錄)』을 편찬하였고 이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임명되었다. 

이것만으로는 찬술 완성 시점을 확정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 같은 고려사 권제107, 열전 20 한강(韓康) 열전에는 이에 관여했다는 직접 증언이 없으며, 나아가 같은 고려사 권제 107, 열전 20 원부(元傅) 열전에서는 원부가 "충렬왕 초에 찬성사(贊成事)·판군부(判軍簿)·수국사(修國史)로 있으면서 유경(柳璥)·김구(金坵)와 함께 『고종실록(高宗實錄)』을 편찬했다. 이때 전 추밀부사(樞密副使) 임목(任睦)의 사고(史藁)를 개봉해 보았더니 백지였으므로 수찬관(修撰官) 주열(朱悅)이 그를 탄핵해야한다고 건의했으나 원부와 유경(柳璥)은 말을 막고 사고를 공개하지 않았다. 이것은 원부가 직사관(直史館)으로 있을때 역시 사고를 바치지 않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대목만 보이고, 고금록에 관한 기술은 보이지 아니한다. 

다음으로 이제현의 사략은 틀림없이 史略을 말할 터인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저술로 이 이름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의 문집인 익재난고 중 부록에 실린 그의 연보를 보면 원 순제(元順帝) 지원(至元) 17년 정유 선생 71세 대목에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집에서 국사(國史)를 찬수(撰修)할 적에는 사관(史官) 및 삼관(三館)이 다 모였었는데, 뒤에 국사는 병화(兵火)에 잃어버렸다. 또 《금경록(金鏡錄)》을 선(選)하였다. 또 국사가 미비함을 못마땅하게 여겨 기년(紀年)ㆍ전(傳)ㆍ지(志)를 찬수하였는데, 뒤에 홍건적(紅巾賊) 난리에 유실되고 오직 태조(太祖)에서 숙종(肅宗)에 이르기까지의 기년(紀年)만이 남았다. 8월에 왕이 선생에게 명하여 종묘(宗廟)의 소목위차(昭穆位次)를 정하게 하니, 선생이 이에 대한 의(議)를 올렸다.

저 시험 문제 보기 중 하나가 말하는 사략이 이 중 어느 것을 말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저런 문제를 낸 담대함이 나로서는 참으로 기이하기만 하다. 


<숭례문 화재>


***台植案...목조문화재가 왜 화재보험'에도' 가입돼 있지 않냐고 매양 호통을 치지만, 목조문화재 화재보험은 넌쎈스다. 기사라 감정은 최대한 억제한 채 소위 말하는 객관의 시각을 가장했지만, 목조문화재가 화재가 가입돼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을 질타하는 일은 무식의 극치임을 다시금 밝혀둔다. 말한다. 목조문화재에 화재보험은 필요없다. 


<목조문화재, 화재보험 가입해야 할까?> 

국감 단골 문제…무용론도 만만치 않아


2013.10.15 11:36:24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전남 화순군 쌍봉사 대웅전은 평면 정사각형에 목탑 형식을 지닌 3층 목조 건축물이라 해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3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화재로 잿더미가 되는 바람에 1984년 4월 3일 보물에서 해제됐다. 지금 선 건물은 복원품이다.


화재를 만난 국보 1호 숭례문은 5년 3개월에 걸친 복구공사 끝에 지난 5월 준공을 알렸다. 문루 중 상당 부분이 훼손됐지만 국보 자격을 유지한 까닭은 문루 아랫부분인 육축은 멀쩡하고, 목조건축 1층은 대부분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쌍봉사 대웅전의 사례는 화재의 위험에 늘 노출된 목조문화재를 화재보험에 가입해야 하는가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반면, 숭례문의 사례는 문화재도 화재보험에 들어야 한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목조문화재에 대한 화재보험 가입 여부는 문화유산계 주변에서는 늘 논란이 된다. 특히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이 문제가 단골로 다뤄지곤 한다. 


<숭례문화재>


15일 문화체육관광부에 대한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감에서도 윤관석 민주당 의원이 이 문제를 제기했다. 윤 의원에 따르면 숭례문은 복원되고도 아직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국보 5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해인사 장경판전도 미가입 상태라고 지적했다.


문화재청이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국가지정 국보·보물 167건 중에 절반인 83건이 보험 미가입 상태다. 언뜻 국가를 대표하는 목조문화재가 왜 화재보험 가입률이 이렇게 낮은가 반문할 수 있다. 실제 이런 시각이 목조문화재를 바라보는 일반 여론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관리하는 문화재청이나 해당 지방자치단체는 과연 이 문제의 심각성을 몰라서 이런 일이 빚어질까? 막상 속내를 들여다보면 복잡하기 짝이 없다. 문화재청 주변에서는 아예 보험 무용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하면 보험을 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 의하면 보험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지만 쌍봉사 대웅전 사례에서 보듯이 목조문화재는 막상 화재를 만나면 문화재로서 가치는 상실하고 만다. 숭례문 또한 국보 자격을 유지했지만, 보험이 화재를 비롯한 위험성을 원천적으로 감쇄하는 기능이 없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화재보험을 들어야 하는가? 들어서 어떤 이득이 있는가? 등등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면서 “그렇지만 국회나 일반 여론에서는 ‘어떻게 화재보험을 들지 않을 수가 있느냐’라는 시각이 압도적이라 떠밀려서 (보험에) 가입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험 가입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그보다는 근본적인 방재 대책을 강화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효율적이라고 반론한다. 나아가 현실적인 어려움도 적지 않다.


<숭례문화재직후>


문화유산계에서는 무엇보다 보험가액 선정의 어려움과 보험회사들의 기피 경향을 든다. 예컨대 숭례문이나 화엄사 각황전이 얼마짜리가 되는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나아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보험사들은 문화재를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평가한다고 한다.


보험에 가입한 목조문화재 중 궁과 능처럼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는 곳은 흥국생명에 가입해 있다. 연간 보험료 총액은 4천만원이며 보험가액은 1천150억원 규모다. 반면 지자체가 관리하는 문화재는 한국지방재정공제회라는 곳을 통해 역시 흥국생명에 들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하다 보니 보험회사에서는 한 건 한 건 계약하지 말고 일괄로 하자고 하지만 이것도 쉽지는 않다”면서 “더불어 보험회사도 재보험에 가입해야 하는데 재보험 회사도 문화재를 기피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다가 해당 문화재가 사유재산인 때는 더 문제가 복잡해진다고 한다. 요컨대 목조문화재 화재보험 가입이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도 아닐뿐더러, 과연 보험이 얼마만 한 효용성을 지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도 존재하는 것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문화재방재훈련>

김병준 교육부총리의 사퇴를 불러온 논문 표절 시비라든가 논문 중복게재 논란은 그 진실이 무엇이건 우리 학계의 고질을 다시금 수면 위로 부상케 했다. 학계에서 말하는 표절이란 쉽게 말해 도둑질이다. 한데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을 표절이라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표절은 '인용'과 함수 관계를 이룬다. 누가 언제 발표한 어떤 글을 이용했는지를 밝혀주는 행위가 인용이다. 이런 인용 표시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사실상 표절 여부가 판가름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을 수 있다. 고의가 아닌 실수로 인용을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혹 표절 혐의가 짙다고 해도, "부주의해서 빠뜨렸다"고 변명하면 더 이상 따지기 곤란한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 반면에 우리 학계에는 '쓸데 없는 인용'이 남발되는 경향도 강하다. 굳이 인용을 하지 않아도 될 경우에도 참고문헌을 잔뜩 달아줌으로써 각주가 본문의 분량을 능가하는 논문이 부지기수로 발견된다.


이런 '쓸데없는 인용'에는 대체로 학연이 작동한다.


국내 학계 석박사 학위논문의 제1번 참고문헌이 대체로 해당 논문의 지도교수의 저서나 논문으로 채워진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나아가 눈치보기, 혹은 눈도장 찍기 차원의 인용도 많다. 학계 원로로 대접받는 선배 연구자의 인용이 특히 많은 까닭은 그들이 이룩한 선행 연구가 훌륭하기 때문이라고만 볼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표절이 또 하나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는 분야는 번역이나 역주라고 할 수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은 몇년 전부터 동서양 고전 번역사업을 발주하고 있다. 발주된 동서양 고전은 거의 예외없는 특징이 있다. 영어 혹은 일본어 번역본이 존재하지 않는 고전은 거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경우, 국내 번역본은 거의 필연적으로 영어 혹은 일본어 번역본(역주본)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렇게 했음에도 마치 자기 혼자서 고전을 번역한 것처럼 행세한다든가, 원전이 아니라 영어 혹은 일본어 번역본을 옮긴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는 명백한 표절이다.


현재 시중에 선보이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중국 역사서의 유일한 완역본이 일본어와 현대 중국어 번역본의 중역(重譯)이란 사실은 학계에서는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김병준 부총리가 휘말린 논란 중 하나인 자기표절, 혹은 자기논문 중복게재 행위는 사실 김 부총리로는 억울한 측면이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학계의 관행이 돼 있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그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논문 재탕 행위가 지탄이 되는 듯하지만, 어떤 학문분야에서는 재탕이 아니라 아예 삼탕 사탕을 거듭하기도 한다. 절대사료가 빈약할 수밖에 없는 한국고대사학계의 경우는 삼탕 사탕을 하지 않고는 학계에 살아남을 수조차 없는 실정이다.


자기논문 표절과 함께 학계가 반성해야 할 또 다른 대목은 '논문 쪼개기'. 학위 논문, 특히 박사학위 취득 논문은 논문 쪼개기의 대표적 대상이 된다.


박사학위 논문은 대체로 논문 기준으로 적어도 다섯 편 이상이 되며, 이를 쪼개서 각각의 단일 논문으로 발표하는 관행이 지금도 성행 중이다. 이렇게 되면 학위논문 한 편이 무려 5-10편 가량의 논문 발표 성과로 둔갑하게 된다.


이같은 학위논문 쪼개기는 이제는 청산해야 할 유산으로 꼽힌다. 종래의 학위논문은 논문작성자 본인이 배포하지 않는 한, 다른 연구자나 관심있는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했으며, 그에 따라 그것을 쪼개서 각종 학술지에 기고하는 관행이 당연히 통용되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학위 논문 통과와 거의 동시에 그 논문은 여러 기관이나 매체를 통해 배포되므로 학위논문은 심사 통과와 함께 이미 새로운 연구성과라는 측면에서는 생명을 다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논문 표절 시비가 사회문제화할 때마다 그 처방으로 내세우는 단골방안이 '학계의 양심 회복'과 '학계의 자율적 정화'라는 카드다. 이것이 자발적 움직이라면 그 한편에서는 심사 요건 강화와 같은 외부의 강제력을 발동하는 방식도 자주 제안된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여기에도 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학계에 양심이 없어서, 나아가 자율정화 기능이 없어서 표절 시비가 때마다 터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내세우는 심사 요건 강화와 같은 대증요법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학회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투고된 논문은 3명 가량 되는 위원에게 심사가 의뢰된다. 그 결과는 논문투고자 본인에게 통보되는데, 대체로 ▲원안 대로 게재 ▲수정 보완 후 게재 ▲탈락 등의 등급이 매겨진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심사위원이 자기와 학설이 다르다는 이유로 게재 불가 판정을 내리기 일쑤이며, 논문 투고자가 이른바 명망을 갖춘 중진급 이상 되는 대학교수는 거의 예외없이 무조건 통과되기 때문이다.


국내 학계의 공공연한 비밀 중 하나가 "연말에는 논문을 투고하지 마라"는 금언이다. 업적심사에 몰린 현직 대학교수들이 연말에 밀어내기를 하기 때문에 현직 교수들이 아닌 연구자는 연말 학회지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그만큼 협소해 진다.


논문 표절 시비와 함께 '돈타령' 또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대학교수들이 앞다투어 "인문학이 죽어간다"느니 "기초학문이 죽어간다"느니 하는 자극적인 구호를 외치면서, 그것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하는 방법은 거의 똑같다.


"정부가 지원 육성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이 곧 국민세금에서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가 학계에서는 곧잘 망각되고 있다.


사실 학진이 발주하는 동서양고전 번역사업만 해도, 왜 이런 사업에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예산지원이 없어서 번역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관련 학계 종사자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그 원인이 예산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몰아간다.


서울의 4년제 대학 인문학부 한 교수는 "물론 이공계와 같은 곳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처럼 사안에 따라 정부나 대학당국 혹은 기업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겠지만, 왜 지원이 되지 않아도 되는 연구에서조차 돈이 없어 연구를 못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라고 고백한다.


이 교수는 "결국 교육은 미래의 동량을 키우는 공공사업이라는 점을 다른 누구보다 학계 스스로 깊이 자각하면서, 왜 이런 우리를 지원해 주지 않느냐를 외치기 전에, 공공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서울=연합뉴스) 

2006. 8. 2


*** 12년 전 글인 까닭에 시대 한계도 있을 것이며, 또 당시 내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대목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나아가 지금은 생각이 달라진 대목도 있다. 


1. 기사에서 나는 "학진이 발주하는 동서양고전 번역사업"에 국민세금이 투입되는 문제를 지적했거니와, 지금도 그랬고 저때 저 기사를 쓸 때도 생각은 같아서, 이 사업 자체는 그 목적을 나는 찬동한다. 다만, 틈만 나면, 국민을 윽박질러, 국민더러 돈을 내놓아야 우리가 번역을 한다는 생각을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2. 외국번역 중역...번역은 선대 번역을 참조해야 한다. 그 자체가 표절일 수는 없다. 기사에서는 충분히 지적되지 않았지만, 번역을 참조해 놓고도 그런 사실을 고의로 숨기는 행위가 첫 번째이며, 실제는 그 외국번역을 고스란히 옮겼으면서도, 원전에서 직역했다고 사기치는 행위다. 이 둘은 용서할 수가 없다. 


3. 박사논문 쪼개기...이것이 문제가 되어 논의 끝에 이른바 학계에 몸담은 자들이 이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말았다. 쪼개기 해서 발표해도 그것이 중복게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외국 관행을 들었다. 개소리다. 외국과 우리는 전통이 다르다. 우리 학위논문은 이미 통과와 동시에 공간이라는 점에서 구미 전통과는 확연히 다르다. 중복게재 맞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정좌한 경주 대릉원이다. 전면 정중앙 뒤편에 마치 낙타 등 모양을 한 저 무덤이 한반도 무덤 중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는 황남대총이다. 마립간시대 어느 신라왕과 그 왕비를 각기 다른 봉분에다가 매장하되, 그 봉분을 남북쪽에다가 각각 이어붙여 마치 쌍둥이를 방불한다 해서 쌍분(雙墳)으로 분류한다. 고신라시대에는 흔한 봉분 만들기 패턴 중 하나다. 


요즘처럼 목련과 사쿠라가 만발하는 이맘쯤이면 이 구역에서 매양 이런 풍광이 빚어진다. 공교하게도 이 방향에서 바라보면 저 쌍분 전면 좌우에 나란한 각기 다른 봉분 사이로 목련 한 그루가 만발한다. 한데 그 모양이 아주 묘하다. 어제 경주에서 내가 포착한 이 장면에서는 무수한 사진기와 무수한 사진작가들이 병풍처럼 늘어친 까닭에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으나, 참말로 그 풍경이 에로틱해서 여성 음부, 혹은 자궁 같은 느낌을 준다. 


대릉원에서 이런 풍광은 2010년 이전에는 없었다. 저 장면을 사진으로 포착하겠다고 사람이 저리 몰리는 현상은 없었다. 그렇다고 저들 무덤이 그 이전에는 달랐던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저 목련 한 그루가 그때라고 없었던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 이전 저 목련이 지금과 같은 꽃을 피우지 아니한 것도 아니니, 2010년 이전에도 저 목련과 저 황남대총과 다른 두 봉분은 거의 매양 해마다 봄이면 저와 같은 풍광을 연출했다. 


그렇다면 하필 2010년 이후인가? 그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연이어 황남대총 특별전을 개최했다. 1970년대 황남대총 발굴성과를 재음미하기 위한 문화재 특별 기획전이었으니, 황남대총은 두 봉분을 합친 남북길이가 자그마치 120m요, 높이가 각기 23m에 달하는 그 엄청난 덩치에 어울리게 어울리리만치, 나아가 한국의 투탕카멘묘라는 별칭답게 실로 엄청한 유물을 쏟아냈다. 그것이 토해낸 압도적인 유물이 상당수, 혹은 대부분 저들 특별전을 통해 선보인 것이다. 


이 특별전을 상징하는 사진 한 장이 있다. 이 사진은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서는 메인 포토였으니, 초대형으로 뽑은 그 사진이 전시장 입구를 장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사진은 이 특별전 성과를 정리한 관련 도록 표지 디자인이기도 했다. 그 사진이 바로 이 무렵 저 지점에서 목련이 만발한 장면을 포착한 것이었다. 그것을 포착한 작가는 경주 지역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문화재 전문 오세윤이었다. 


이 사진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는지, 그 이듬해에 바로 올해 우리가 저 지점에서 보는 광경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목련이 만발하는 계절, 이른바 사진작가 혹은 사진 동호회 회원이 물밀듯이 몰려들면서, 돗때기 시장을 방불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저 장면을 포착하겠다고 종일 죽을 치는 이들이 우후죽순마냥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업적 사진 작가 혹은 사진 동호인은 물론이고, 이곳을 찾아 기념 사진을 남기고자 하는 일반인도 입소문을 타고는 급속도로 몰려들기 시작해 현장 통제가 불가능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는 해가 갈수록 도를 더해 지난해인가부터는 나름대로 자율성을 가장한 현장 통제룰이 생겼으니, 전업적 사진작가 혹은 사진 동호인은 각기 삼각대를 장착한 사진기를 안치하고, 저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자 하는 일반인은 줄을 이루어 기다리다가 그네들 순서가 되면, 대체로 남녀 한 쌍, 혹은 한 가족씩 일정한 시간씩 기념활영을 한다. 



내가 이번에 보니, 저기서 기념사진 몇 장 남기겠다고 물경 1시간을 더 기다리더라. 

  

이제 이곳은 더는 특별한 곳이 아니다. 소위 포토존이라 해서, 그것이 기념사진을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포토존일지 모르나, 전업작가들에게는 더는 특별한 곳이 되니 아니한다. 저기서 제아무리 좋은 사진을 담는다한 들, 그 사진은 언제나 오세윤 따라지 사진밖에 되지 아니한다. 배병우가 등장하면서 그의 전매특허가 된 소나무 사진이 일대 광풍이 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좋은 소나무 혹은 소나무 숲 사진을 찍는다한들, 그런 사진은 영원히 배병우 따라지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이것이 지적재산권인 까닭이다. 


이번에 나도 직접 겪은 일이지만, 저 대릉원에서 볼썽 사나운 장면이 난무한다. 우리가 확실히 해야 할 점은 저곳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저곳은 개방된 공간이요, 공공의 장소다. 그런 곳에 누구나, 언제건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들어갈 수 있고, 그런 일을 했다 해서, 그것을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실상은 딴판이라, 혹 저곳에 누군가 들어서기만 하면 비키라 소리치는가 하면, 갖은 욕지거리를 해댄다. 그네들이 세낸 곳도 아닌데, 마치 이곳은 우리만이 독점해야 하는 특권의식이 당연한 듯이 통용한다. 


물론 나름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현장질서랄까 하는 것들을 나는 깡그리 무시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현장질서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경주사적관리사무소라든가 그 감독관청인 문화재청에서 무슨 가이드라인을 정한 것도 아니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나 들어가도 되는 곳을 누구나 들어가는데, 그것이 어찌 비난을 받거나, 욕지거리를 얻어먹어도 된다는 당위가 된다는 말인가? 


욕지거리를 하기 전에, 그런 사진에 누군가가 방해가 된다고 하면, 그곳을 사진에 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런 방해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외려 양해를 부탁해야 한다. "실은 제가 사진을 좀 찍었으면 하는데, 잠깐만 참아주시면 안될까요?" 라는 식으로 정중하게 부탁을 해야 한다.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마치 이곳이 자기네 사유재산이나 되는양,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을 무단 침입자 취급을 하고는 욕지거리를 해댄다. 그러기는커녕 그런 욕지거리를 당연히 받아들인다. 


이런 현상이 일부 사진 애호가들 사이에서 더 두드러지는 듯하다. 사진이 보편화하면서, 그런 사진을 일상으로 즐기며, 배우고자 하는 그 자체를 누가 탓하겠는가? 나 역시 그런 애호가 중 한 사람으로서, 그런 흐름 자체는 많은 긍정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각종 사진 동호회가 생겨나고, 그런 애호가들이 이런저런 좋은 곳들을 찾아다닌다. 


하지만 이런 일부 동호인이 패거리가 되는 모습도 적지않게 목도한다. 저 대릉원만 해도, 그런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은 예외없이 그런 동호회 소속이다. 패거리를 믿고는, 그런 패거리 정신에 기대어 함부로 욕지거리를 해댄다. 혼자 오면 찍소리도 못하면서, 개떼처럼 몰려와서 개떼처럼 짖어댄다. 


사진보다 사진도덕을 먼저 체득해야 할 것이 아닌가? 듣자니 이런 사나운 풍광이 청송 주산지에서도 거의 매일 벌어진다고 한다. 좋은 자리랍시고 세낸 듯이 떡하니 차지하고는, 그것을 침범하기라도 하면 욕지거리를 해댄다고 한다. 주산지가 자기네 것인가? 내가 알기로 그곳은 대릉원이나 마찬가지로 공공의 자산이며, 그에 합당한 절차, 입장료를 낸 사람이면 누구나 즐길 자격이 있다. 


 

 

나는 경상도 소백산맥 어느 기슭 깡촌 출신이다. 40명이 채 되지 않는 국민학교 동창생 대부분은 중고교 졸업과 더불어 구미니 울산이니 하는 공장으로 갔고, 중학교 동창생들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촌구석에서 소 먹이고 겨울이면 산으로 나무하러, 혹 홀랭이로 토끼 잡으러 다니던 놈이 어찌하여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동네 옆집 누나 친구집에 세계문학전집 100권 비스무리한 게 꽂혀 있는 모습 발견하고는 어찌하여 그에 손대고, 마침 그때 고등학교 한문 교과서에서 동파 소식의 적벽부를 발견하고는 그에 격발해 한문이라는 걸 조금 긁적거린 인연으로 어찌하다 보니 예까지 왔다.

그 촌구석에서 어찌하다 보니, 그런대로 대학이란 데를 갔지만, 학비 마련이 쉽지 않아 송아지 팔아 대학 겨우 들어갔으니, 중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인가 우리 동네로 농활이란 걸 연세대 학생들이 있어, 그 친구 중 어떤 이가 어느날 교실에 들어와 난중에 어느 대학으로 갈거냐 하기에, 내가 그때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모르나, 난생 알지도 못하는 연세대라고 내가 거론하고, 무슨 공부를 하고 싶냐 해서 더 난생 알지도 못하는 영문학을 거론한 일이 인연이 되어, 진짜로 그 대학 영문학과에 들어갔다.

이를 졸업할 즈음, 여자 친구와 개판이 나게 되니, 소위 말하는 실연의 과정에서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요즘 기준으로 말하면 乙이 아니라 甲질하는 인생 살아보겠다 해서, 공무원은 죽어라고 싫고, 내무부 관리가 되었으면 하는 주변, 특히 부모님 기대를 뒤로 하고 그리하여 실로 우연히 택한 길이 기자다.

해 보니 그런 대로 재미가 있고, 그에서 내가 내 특장이 무엇이 있냐를 고민하다 보니, 남들에 견주어 한문이 조금 낫다 해서, 이걸로 특성화를 해보겠다고 해서 이내 문화부에 정착했다.

지금이야 내가 무슨 역사를 전공했느니, 개중에서도 고대사나 고고학을 전공했느냐 하겠지만, 이와는 애초엔 눈꼽만큼도 연이 없다. 내가 일찍이 삼국사기에 관심을 지니기는 했지만, 이는 역사 공부보다 한문 교재 차원의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두어 번 일전에 반복한 바 있거니와, 내가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기자로서의 내가 생각한 분야 출발은 근현대사, 특히 전후청산이었으며, 개중에서도 원폭피해자 문제였다. 1993년 6월에 느닷없이, 예고도 없이 부산지사에 배정받아 13개월 일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내가 사는 집 근처에 그 피해자로써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조선소를 상대로 기나긴 법적 투쟁을 벌이던 김순길씨를 알게 된 인연을 고리로 삼아, 겁없이 근대사에 뛰어들었다.

원폭피해자 문제를 고리로 삼아 예까지 이르렀으니, 그 과정에서 그 자신은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당시 참여연대 사무총장인가로 있던 박원순을 안국동 사무실로 찾아가 이런저런 자문을 구한 일도 있다.(여담이지만 이 무렵 내가 본 박원순이랑 지금의 박원순은 상당히 달라 조금은 곤혹스럽다.) 

이제 내 궤적이랄까 하는 노선을 뒤밟아 보니, 이제는 그 출발선으로 도로 한번쯤은 가봤으면 하는 미열 같은 욕구가 스멀스멀 솟아오른다. 아주 떼어버리자 한 전쟁배상 책임 문제가 작년 여름, 독일 본에서 라인강변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구토처럼 다시금 밀어나옴을 느꼈노라. (이 글은 March 25, 2016 at 7:14am에 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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