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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타소(古陀炤)는 앞서 여러 번 다루었고,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이나 사건은 이곳 내 블로그에서 '고타소' 혹은 그의 남편 '품석'으로 검색하면 되거니와, 혹 그것들이 모두 필요하신 분들은 참고바란다. 고타소란 이름은 내 조사가 철저한지 아닌지는 자신이 없거니와, 일단 내 추산대로라면 《삼국사기》 권 제41 열전 제1 김유신上에 보이거니와,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은 다음과 같다.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격파했을 때, 춘추공(春秋公)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스럽게 여겨 고구려에 청병함으로써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하자 왕이 허락했다. 


이것이 삼국시대 말기, 삼국 관계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대량주, 곧 지금의 합천 전투를 말함이거니와, 이 전투를 고비로 삼아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은 국운을 건 일전들을 치루거니와, 조금 과장하면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 그 불씨는 대야성에서 출발한다. 나아가 더 세부로 들어가면, 이 전투에서 신라가 패하고 고타소가 죽임을 당한 일이 그 거대한 출발점을 삼는다. 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 전재한 글에서 내가 전론(傳論)한 바 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로 한다. 


이런 고타소가 비록 고타소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맥락은 이 한 곳에 지나지 않으나, 이 당시 비극의 행적은 《삼국사기》 등지의 다른 곳에서도 산발적으로 보이니, 이런 여타 행적들과 버무림으로써 우리는 이 고타소의 족보를 둘러싼 비밀 하나를 풀게 된다. 아무튼 저 인용문을 통해 우리는 김춘추한테는 642년 당시 품석이라는 대야성주(이는 다른 대목에 보인다)한테 출가한 이미 출가한 고타소라는 딸이 있었음을 안다. 


이 고타소는 아비만 드러날 뿐, 어머니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이에서 관건은 고타소 어미가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 소생인가 아닌가로 모아진다. 현재 우리의 첫번째 관심은 고타소 어미가 문희냐 아니냐다. 이를 판별하기 위해 김춘추 출생년과 김법민(훗날 문무왕), 그리고 김법민 바로 아래 남동생 김인문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고타소가 문희 소생인가 아닌가는 거의 90% 이상 단안할 수 있다. 


첫째 김춘추 생년이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 는 침묵하나,  《삼국유사》는 달라 이곳 기이(紀異)편 제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전에 의해 그것이 밝혀진다. 이곳에 이르기를 김춘추는 "영휘 5년 갑인(654)에 즉위해 8년을 다스리다가 용삭 원년 신유(661)에 붕崩하시매 수壽 59세였다"고 하니, 말할 것도 없이 이때 나이는 소위 한국식이라 서양식 관념으로는 만 58세라는 뜻이다. 따라서 661년에서 58을 빼면 603이니, 이것이 바로 김춘추가 태어난 해다. 595년 생인 김유신과 비교하면 8살 어리다. 


따라서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딸 고타소가 죽었을 때, 김춘추는 만 39세, 신라식으로는 마흔살이었음을 안다. 이 무렵에 대개 스무살 안팎이면 거의 다 장가를 갔을 것이므로, 이때 김춘추가 사위를 봤다 해서 하등 이상한 점은 없다. 


한데 관건은 김법민과 김인문이다. 이 두 형제가 문희 소생임은 너무나 분명해 그에 대해 더는 물을 것이 없다. 이 중 형 김법민은 626년 생이요, 동생 김인문은 629년 생이다. 두 형제간에는 3년 차이가 난다. 김법민은 아들딸 통털어서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첫번째임은 하늘이 두쪽 나도 변함이 없다. 그것은 김유신이 기획한 저 유명한 축국쇼, 다시 말해, 김유신이 일부러 김춘추를 끌어들여 축구시합을 하다가 부러 옷고름을 찢어발겨 그것을 기워준다는 구실로 미혼인 누이동생 문희와의 소개팅을 주선해, 그에서 쿵딱쿵딱 해서 문희가 처녀 몸으로 밴 애가 바로 김법민인 까닭이다. 따라서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는 626년 태어난 김법민 이전에 태어난 자식은 있을 수가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면 그가 태어난 시점은 626년 생인 김법민보다 때려 죽어도 늦어야 한다. 얼마나 늦어야 하는가? 년년생이 전통시대에 드물지는 않았으므로 년년생이라 해도 고타소는 627년생이다. 한데 그렇게 봐도 영 석연찮은 대목이 있다. 다름 아닌 김인문 때문이다. 김인문은 김법민보다 3살 적은 629년 생이다. 626년과 629년 사이에 다른 자식이 없으란 법은 없으나, 문희가 무슨 애 낳는 벤딩머신이란 말인가? 상식으로 봐도 얼토당토 않다. 결론은 하나다.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고 하면, 626년생인 김법민, 629년생인 김인문보다 동생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고타소는 때려죽여도 630년 이후에 태어나야 한다. 


 그래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고 하고, 모든 가능성 고려해서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자! 630년 이전에는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넉넉잡아 630년 생이라고 해도, 고타소는 642년 대야성 전투 당시 나이가 고작 만으로 12살, 신라 나이로 13살밖에 되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치자. 저 나이에 얼마든 지아비는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넉넉잡아 13살이라고 하고, 그 나이에 김품석과 결혼해 남편 따라 대야성으로 갔다가, 불행하게 백제군에 성이 함몰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치자!  


같은 《삼국사기》 권제 47, 열전 제7이 저록著錄한 죽죽竹竹 전 다음 기술은 대체 무슨 개뼉다귄가? 


殺妻子而自刎 


죽죽은 이 대야성 전투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신라 군인이다. 품석의 부하들이 배반하여 백제군과 밀통하고 항복하려는 움직임에 분연히 반대하고 일어나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신라를 배신한 품석 부하들이 성문을 열고 백제군으로 투항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백제는 배신했다. 항복하러 나온 신라군을 복병을 시켜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저 인용문은 그 장면을 보고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성주 김품석이 취한 행동을 말한다.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품석은) 먼저 자기 마누라(고타소)와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어랏? 김품석과 고타소 사이에 아들이 있었네? 말이 안 되잖아?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면 아무리 많아 봐야 13살인데, 13살짜리가 아들을 낳았다고? 물론 이조차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과 그렇다는 건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다. 


결론은 오직 이 하나 뿐이다. 


김춘추에게는 문희 이전에 다른 부인이 있었다!!!!  


이 명확함이 오직 《화랑세기》에서만 드러난다.  《화랑세기》 논쟁? 끝났다. 뭐 그냥 단순히 문희 이전에 김춘추한테 부인이 있었다? 그건 누구나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그 맥락이 어찌 드러나는지 눈이 있으면 똑똑히 보고 말해라.  


  


 

<영화 황산벌 한 장면> 


영화 황산벌 이 한 장면(유투브 링크...1분20초 부분 이후)이야말로 나는 김유신의 진면목을 제대로 드러낸 명대사로 본다.  



신라 최초 여왕이라 해서 즉위 과정에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빚었을 김덕만(金德曼)도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순간에 도달했으니,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는 이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직전이었다. 이미 즉위할 무렵 제법 나이가 들었을 그가 마침내 쓰러진 것이다. 재위 16년(647) 새해가 개막하면서 몸져 눕자, 차기 왕위계승권자를 중심으로 권력 재편에 들어갔다. 신라 조정은 선덕과 같은 전철, 곧 또 한 명의 여주(女主)를 피하고자, 선덕에게서 후사를 생산하고자 안간힘을 썼으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아, 이젠 성골로는 남녀를 통털어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사촌동생 김승만(金勝曼)을 후계자로 정한 상태였으니, 이제 대권은 승만에게로 옮겨갈 예정이었다. 


한데 분란이 생겼다. 이제나저제나 국상 치를 일에 뒤숭숭한 신라 조정에 칼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여자 임금은 용납하지 못하겠다면서 지난 15년을 숨죽여 기다린 자들이 마침내 마각을 드러내고는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일을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 말년 조에서는 "봄 정월, 비담과 염종(廉宗) 등이 '여주(女主)로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기치를 내세우며 반역을 꾀하여 병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했다. 8일에 임금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낭산(狼山)에다 장사지냈다(春正月 毗曇廉宗等 謂女主不能善理 因謀叛擧兵 不克 八月 王薨 諡曰善德 葬于狼山)"고 하고, 선덕의 죽음과 더불어 그 관앞에서 즉위했을 진덕왕본기 원년 조에다가 "정월 17일에 비담을 목 베어 죽였는데, 그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고 했을 뿐이다. 실로 간단히 언급했지만, 세상 모든 기전체 본기는 저와 같아 5.16군사쿠데타나 12.12사태 역시 그에 맞추어 쓴다면, '장군 박정희가 모반을 꾀해 정권을 전복했다'거나 '장군 전두환이 하극상을 일으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 구금했다"고 했으리라. 


<반란군 진원지 명활성>


그럼에도 우리는 이 허심, 혹은 지극히 불친절한 듯한 이 기술에서 이 군사쿠데타가 미친 여파가 자못 어떠했을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그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자가 물경 30명이라는 사실이다. 쿠데타는 모두에게 기회였을 것이나, 비담과 염종 편에 붙은 자들에게 유일한 비극은 그들이 졌다는 사실이다. 이겼더라면? 역사가 바뀌어 그들이 권력 정점에 섰을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이 사건이 미친 적지 않은 파장에 대한 논급을 삼국사기는 다른 곳으로 미루었으니, 그 군사 쿠데타를 진압한 최고사령관이 김유신이요, 더구나 그런 김유신은 김부식이 생각하기에 인간 이상의 롤 모델이라 해서, 삼국사기 전체 50권 중 3권을, 그것도 10권에 지나지 않는 열전 중 초반부 3권을 몽땅 그와 그의 후손 얘기로 채운 김유신 열전을 배열하는 파격을 선보인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 어떤 왕조차도 이런 대접을 받은 이가 없다. 재위 기간 일통삼한을 이룩했다 해서 그 위대한 군주라는 문무왕 김법민만 해도 고작 본기가 상·하 두 권이요, 태종무열왕은 다른 왕들과 뭉뚱거려 꼴랑 한 권인데다, 백제 의자왕과 고구려 보장왕은 나름 파격이 있어 본기 두 권씩을 배치했지만, 이는 700년 거목들이 각기 쓰러지는 시대에 마침 재위한 왕들이었던 까닭이었지, 그가 특별히 의자와 보장을 높게 친 이유는 아니었다. 


595년 생인 김유신은 쿠데타 발발 당시 이젠 53살, 노장 반열에 접어들었으며, 그가 차차기 대권 후보자로 점찍은 김춘추는 44살이었다. 이 무렵 김유신 직책은 확인이 쉽지 않다. 본기와 열전을 보면 선덕왕은 재위 11년(642), 대야성 전투 대패라는 충격파와 그에 따른 백제의 서쪽 변경을 통한 백제 침탈에 대비하고자, 김유신을 수도 서부 지역 방어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압량주 도독으로 삼는다. 그는 단순한 지방관이 아니라 군사권까지 틀어쥔 도독이었다. 그러다가 2년 뒤인 동왕 13년(644) 가을 9월에는 대장군이 되어 백제 정벌에 나서 일곱 성을 탈취하는 대전과를 올린다. 대장군은 중국과는 달리 상설직이 아니라 신라사를 보건대 임시직이지만, 이로써 보건대 이미 김유신이 중앙무대로 복귀했음을 본다. 이 전쟁은 볼짝없이 대야성 전투에 대한 응징이었다. 이를 허심히 보아넘길 수 없는 까닭은 이미 전쟁을 김유신 일파가 좌지우지하게 되었다는 신호탄인 까닭이다. 629년 낭비성 전투 영웅으로 떠오른 김유신은 출세가도를 달려 이젠 선덕왕 시대가 중기를 넘어 말년으로 치달으면서, 군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기 시작했으니, 역사는 그를 기다린 것이었다. 


<명활성>  


하지만, 대야성 전투는 신라와 백제로서는 사활을 건 전쟁의 시대를 예고했으니, 그에 대한 저 응징에 백제 역시 가만 있을 리 없어, 그에 대한 보복으로 변경을 치고 들어왔으니, 선덕왕본기 14년(645) 조에서는 이해 봄 정월에 "유신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아직 왕을 뵙지도 못했을 때 백제의 대군이 다시 변경을 노략질하니, 임금이 (다시) 유신에게 명하여 막게 하므로 (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정벌하러 가서 그들을 격파하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 전쟁 출전과 승리, 그리고 귀환이 대략 2개월 정도 소요되었던 듯하거니와, 신라 왕경에서는 대대적인 전승 환영식 개최를 준비했지만, 귀환한 김유신을 기다린 것은 화려한 환대가 아니라, 또 다른 백제 침략 급보를 알리는 봉수 파발이었다. 다만, 이때는 선덕을 뵙고 전공을 보고하기는 했으니, 같은 해 3월 조 선덕왕본기에서는 "유신이 돌아와 왕에게 아뢰고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을 때, 백제가 또다시 침공했다는 급한 보고가 있었다. 임금은 일이 급하다고 여겨 유신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존망이 그대 한 몸에 달렸으니 노고를 꺼리지 말고 가서 그들을 도모해 주시오' 하니, 유신이 또다시 집에도 들르지도 못하고 밤낮으로 병사를 훈련하고는 서쪽으로 행군하는 길에 자기 집 문앞을 지나게 되어 온 집안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갔다"고 했으니, 이런 일이 실제 있었는지, 혹은 김유신 미화 과정에서 생겨난 우화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김유신으로는 집에서 편안한 잠 하루 자 본 적 없는 전장의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전과들이 이미 그 당대에 김유신 신화를 구축하는 밑거름이었으니, 김유신으로서도 결코 손해볼 것 없는 게임이었다. 


백제와 사투를 벌이는 이 해 겨울 11월, 선덕은 이찬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삼는다. 상대등은 아무리 내가 잘봐주려 해도 꿔다논 보릿자루에 지나지 않아 문재인 정부 아래 이낙연 국무총리나 국회의장 정세균 정도에 지나지 않는 명예직이라, 대체로 나이가 70 안팎 뇐네 중신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설치한 관직이다. 그 자리에서 이렇다 할 사고 치지 말고, 편안히 국가 원로 대접받고, 높은 연봉이나 꼬박꼬박 챙겨가시오라 해서 마련한 명예직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상대등이 그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거니와, 다름 아니라, 태종무열왕 시대에 상대등이 된 김유신은 결코 이럴 수가 없어, 이후 계속 권력의 정점에 섰다. 김유신이 함유한 여러 역사적 의의 가운데 허울뿐인 상대등을 실질로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명활성>


비담은 그 계보라든가 다른 행적을 엿볼 자료가 없어, 그가 쿠데타를 감행한 진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 자신이 직접 왕이 되고자 했는지, 혹은 그 자신이 옹립하고자 하는 왕위계승권자가 따로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와 결탁한 다른 이로 염종(廉宗)이 있는데, 이 염종 역시 그렇다. 대체로 이런 쿠데타는 두 번째 주모자로 등장하는 이가 실질적인 기획자인 일이 많으니, 나는 아마 이 쿠데타 역시 염종이 비담을 앞세워 일으킨 정변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따라서 이 본질을 들여다 보는 핵심 키워드가 염종이라 보지만, 그걸 추적할 만한 단서가 현재로선 남아있지 않으니, 환장할 뿐이다. 


아무튼 이렇게 상대등이 된 비담이 선덕이 드러눕고 다시는 회생할 기미가 없자, 마침내 반란의 기치를 내거니, 이를 김유신 열전 上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16년 정미(647)는 선덕왕 말년이고 진덕왕 원년이다. 대신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자 임금(女主)으로는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 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위하려 했다. 왕은 스스로 왕궁 안에서 방어했다. 비담 등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했으며,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에 머무르고 있었다. 공격과 방어가 10일이 지나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 무렵 저 유명한 별똥 사건이 일어나니, 이것이 월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만다. 같은 김유신 열전 증언이다.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니 비담 등이 사병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다’ 하니, 이는 틀림없이 여주(女主)가 패할 징조이다." 병졸들이 지르는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대왕이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에 유신이 왕을 뵙고 아뢰었다. “길함과 불길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주(紂)왕은 붉은 새가 나타났어도 망하였고, 노나라는 기린을 얻었어도 쇠하였으며, [은나라] 고종은 장끼가 울었어도 중흥을 이루었고, 정공(鄭公)은 두 마리 용이 싸웠으나 창성했습니다. 그러므로 덕이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별이 떨어진 변괴는 족히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이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다음 연에 실려 띄워 하늘로 올라가듯이 하고는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길가는 사람에게 “어제 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반란군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 흰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자연의 이치[天道]에서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에서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큰 혼란이 옵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한 듯하고 도리어 왕의 성 안에 별이 떨어지는 변괴를 보이니 이는 제가 의심하고 깨달을 수 없는 바입니다. 생각컨대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함에 따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서 부끄러움을 짓지 말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는 여러 장수와 병졸을 독려하여 힘껏 치게 하니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목베고 구족(族)을 죽였다. 


<명활성>


김유신은 이 점이 아직 제대로 부각하지 않으나, 병가(兵家)의 대가였으며, 천문(天文) 역시 일가를 이룩한 전문가였다. 유신을 단순한 무장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그는 책을 팽개치고 무술만 익힌 사람이 아니었으니, 전두환의 결기에다가 박정희의 머리를 얹힌 인물이다. 그의 어린시절, 혹은 젊은시절은 입산수도만이 전부였던 듯하나, 천관녀 설화가 증언하듯이,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글을 읽었고, 누구보다 그렇게 습득한 탁상의 지식을 현실에 적용할 줄 알았던 사람이다. 


이 증언에서 유의할 점은 김유신이 아뢴 왕이 선덕이 아니라 진덕이라는 사실이다. 이 무렵 선덕은 이미 사망했거나, 살아있다 해도 보고를 받을 형편이 아니었으니, 신주(新主)였다. 김유신은 비담의 난 때 그 진압 총사령관이었다. 총사령관으로서 그 진압을 이끌었으니, 이제 신라 사회에서 그 어떤 누구도 김유신을 능가하는 권력을 쥔 사람이 없었다. 낭비성 전투 이래 20년 만에, 마침내 김유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덧붙이건대 이 사건이 화랑세기에도 편린을 드러내니, 24세 천광공(天光公) 전 다음 대목이 주목을 끌거니와, 


그때 국사(國事)가 점차 어려워졌다. 공과 여러 낭두(郞頭)가 낭도(郎徒)를 거느리고 친히 활 쏘고 말달리기를 익혔는데, 모인 자들 중에서 뽑아서 병부에서 보충하였다. 공이 5년간 풍월주 지위에 있는 사이에 낭정(郎政)은 무사(武事)로 많이 돌아갔다. 선덕제(善德帝)가 병이 몹시 위독해지자,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모반했다. 유신공(庾信公)이 신주(新主·진덕)를 받들어 전쟁을 독려했다. 그때 서울[京師]의 군대가 적어 공이 낭도를 모두 동원해 먼저 그 진으로 돌격하니 비담이 패하여 달아나고 난이 평정되었다. 공은 그 공으로 발탁되어 호성장군(護城將軍)이 되었다. (이에) 풍월주 지위를 부제(副弟)인 춘장(春長)한테 전해 주고 오로지 왕사(王事)에 힘써 변방에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며[出將入相] 많은 공적이 있었기에 증흥 28장(二十八將)의 한 사람이 되었다. 가히 공경할 만하지 않은가? 


난세를 영웅을 부르는 법이다. 이 난세가 김유신에게는 권력의 정점이라는 자리를 앉혔으며, 천광 역시 낭도들을 동원해 공을 세움으로써 출세가도의 발판을 마련했으니 말이다. 


다음 연재에서는 진덕왕 시대 김유신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만나러 우리는 남산 오지암이라는 곳으로 행차하고자 한다.  


<명활성>


 

  1. 연건동거사 2018.04.15 10:14 신고

    저 삼국시대의 잘 짜여진 석성을 보노라면 저 시대의 백성동원 능력에 대해 경악합니다. 적어도 저 시대는 왕국내의 사람들 모두를 정확히 파악하는 행정수준에 도달한 적이 있었다고 짐작해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시대에도 도달하지 못한 수준이라고 할수 있는데.. 한반도 남부 일대에 저시대에 고구려 신라 성들 보면 대단한 수준이라는 생각을 해요.

  2. 한량 taeshik.kim 2018.04.15 10:55 신고

    얼마나 후달렸겠어요

  3. 한량 taeshik.kim 2018.04.15 10:56 신고

    군대가는거보다 노동력 징발이 더 두렵지요

  4. 한량 taeshik.kim 2018.04.15 10:56 신고

    왜? 밥을 안주자나요

  5. 연건동거사 2018.04.15 14:40 신고

    성 하나만 봐도 정말 저 시대는 이전과 다른 시대에요.. 고려시대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하지만 저렇게 단단히 못쌓았을거에요. 성의 짜임새를 보면 임란 이후의 일본성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을 정도입니다.

  6. 연건동거사 2018.04.15 14:41 신고

    저 시대가 얼마나 긴장에 찬 시대였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7. 연건동거사 2018.04.18 22:23 신고

    한 사람 열전을 권을 나누어 쓰는 경우는 제 기억으로 중국에서도 거의 못본것 같은데요. 김샘께선 보신적 있으세요.

  8. 연건동거사 2018.04.18 22:24 신고

    제왕의 본기를 권을 나누는 경우는 많이 본것 같습니다. 상지상, 상지중, 이런식으로.. 하지만 신하의 경우는... 제 기억에 권이 바뀌는 경우 거의 못본것 같은데요. 과문한 탓인지?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각간까지 역임한 무력(武力)이고, 어머니는 진흥왕 딸 아양(阿陽)공주다. 벼슬은 신라 17관위 중 제3인 소판(蘇判)에 이르렀다. 김소연(金逍衍) 혹은 김서운(金庶云)이라고도 했다. 진평왕 51년(629) 8월에 벌어진 낭비성 전투에 장군으로 출진해 고구려군을 대파했다. 숙흘종 딸인 만명과 야합해 장자인 김유신을 낳았으며, 이후 정식 혼인을 부모에게서 인정받아 차자 흠순,  보희-문희-정희 세 딸을 낳았다. 두 아들은 모두 현달했으며, 세 딸 중 문희는 김춘추와 혼인해 나중에 김춘추가 즉위하자 문명(文明) 황후에 봉해졌고, 그 아들 법민이 즉위하자 문명태후가 됐다.  


삼국유사 권2 기이 2 김유신(金庾信) : 호력(虎力) 이간(伊干) 아들인 서현(舒玄) 각간(角干) 김(金)씨의 맏아들이 유신(庾信)이고 그 아우가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이니 어릴 적 이름은 아해(阿海)이며 누이동생은 문희(文姬)이니 어릴 때 이름은 아지(阿之)다....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楸南)이 신라 서현공(舒玄公) 부인의 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여러 신하에게 물었더니 모두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 과연 맞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에서는 나를 보내 그대를 유인케 한 것입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평왕 :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룡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했다. 고구려인이 성을 나와 진을 벌려 치니 군세가 매우 성해 우리군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 싸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유신이 말했다. "제가 듣건대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가죽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끌어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 했습니다.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빼들고는 적진을 향해 곧바로 나아가 세 번 들어가고 세 번 나옴에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 목을 베고 혹은 깃발을 뽑았다. 뭇 군사가 승세에 따라 북을 치며 진격해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이니, 이에 그 성이 항복했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의 딸이고, 왕비 문명부인(文明夫人)은 각찬(角) 서현의 딸이다. 


삼국사기 권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 문무왕(文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딸이고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삼국사기 권 제41(열전 제1) 김유신 上 : 아버지 서현(舒玄)은 벼슬이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 유신의 비를 살펴보니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金逍衍)이다.』하였으니, 서현은 혹은 고친 이름인지, 혹은 소연은 자(字)인지, 모르겠다. 의심이 되므로 둘 다 적어 둔다. 일찍이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에 들어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거치지 않고 결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萬弩郡)[현재의 충북 진천] 태수(太守)가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그제서야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고 미워해서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갑자기 벼락이 문간을 때리자 지키던 사람이 놀라 정신이 없었다. 만명은 창문으로 빠져나가 드디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서현이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만명도 신축일(辛丑日) 밤에 한 어린아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곧바로 임신하여 20개월만에 유신을 낳았다. 때는 진평왕 건복(建福) 12년,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595)였다. [아버지가] 그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 부인에게 말하였다.“내가 경진일 밤에 길몽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경진으로 이름을 지어야 하겠다. 그러나 예기(禮記)에 「날이나 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지금 경(庚)자는 유(庾)자와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고 진(辰)은 신(信)과 소리가 서로 비슷하며, 더구나 옛날 어진 사람에 유신(庾信)이라고 이름 지은 이가 있으니 그렇게 이름 짓지 아니하랴?” 드디어 이름을 유신(庾信)이라 하였다.<만노군은 지금[고려]의 진주(鎭州)[현재의 충북 진천]이다. 처음 유신의 태(胎)를 고산(高山)에 묻었으므로 지금[고려]까지 태령산(胎靈山)이라 한다.>  


삼국사기 권 제41(열전 제1) 김유신 上 : 건복 46년 기축(진평왕 51년: 629) 가을 8월에 왕이 이찬(伊飡) 임말리(任末里), 파진찬(波珍飡)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蘇判) 대인(大因)·서현(舒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맞아 치니, 우리편이 불리하여 죽은 자가 많고, 뭇 사람들의 마음이 꺾이어 다시 싸울 마음이 없었다. 유신이 그때 중당 당주(中幢幢主)였었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우리 군사가 패하였습니다. 제가 평생 충효스럽게 살겠다고 기약하였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건대 ‘옷깃을 들면 가죽옷[]이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 하니,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빼어 들어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에 들락날락하면서 장군의 머리를 베어 들고 돌아왔다. 우리 군사들이 보고, 이기는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고 1천 명을 사로잡으니,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김소연(金逍衍)김서운(金庶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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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 생몰년 미상.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의 서손(庶孫)인데 술법에 밝았다. 젊어서 이찬으로 당에 들어가 숙위하면서 음양술을 배웠고 둔갑술도 터득했다. 대력(大曆) 연간에 신라로 귀국해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고 양주(良州)·강주(康州)·한주(漢州) 태수(太守)를 역임하고 집사시랑(執事侍郞)을 거쳐 패강진(浿江鎭) 두상(頭上)이 되었다. 혜공왕 15년(779)에는 일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下: 윤중의 서손(庶孫) 암(巖)은 본성이 총민하고 술법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젊어서 이찬이 되어 당에 들어가 숙위하였을 때, 틈을 타서 스승에게 찾아가서 음양가(陰陽家)의 술법(術法)을 배웠는데, 하나를 들으면 세 가지를 미루어 알았다. 스스로 둔갑입성지법(遁甲立成之法)을 지어 그 스승에게 드리니, 스승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밝음이 여기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며, 그 후로는 감히 제자로 대우하지 아니하였다. 대력(大曆) 연간에 귀국하여,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고, 양주(良州)·강주(康州)·한주(漢州) 세 지방[州]의 태수(太守)를 역임하고 다시 집사 시랑(執事侍郞)과 패강진(浿江鎭) 두상(頭上)이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보살펴 사랑하며, 농사짓는 세 계절의 여가에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치니 모두들 유용하게 여겼다. 일찍이 누리가 생겨 서쪽으로부터 패강진 경계로 들어오는데 우글우글 들판을 덮으니, 백성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암이 산마루에 올라가 분향하고 하늘에 기도하니 갑자기 풍우가 크게 일어 누리가 다 죽어 버렸다. 대력(大曆) 14년 기미(혜공왕 15년: 779)에 [암(巖)이] 왕명을 받고 일본국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 국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억류하려 하였으나, 마침 당의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일본에] 와서 서로 만나보고 매우 즐거워하니, 왜인들은 암이 중국에도 알려진 것을 알고 감히 억류하지 못하자 이에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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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과 태종무열왕 셋째딸인 지소(지조)부인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관위는 해간(파진찬)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 : 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대왕 셋째 딸이다. 아들 다섯을 낳으니 맏이 이찬 삼광(三光)이요, 다음은 소판 원술(元述)이요, 다음은 해간(海干) 원정(元貞)이요, 다음은 대아찬 장이(長耳)이며, 다음은 대아찬 원망(元望)이다. 딸은 넷이다. 또 서자(庶子)로 아찬 군승(軍勝)이 있는데, 그 어머니 성씨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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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덕왕 원년, 무산성과 감물성, 그리고 동잠성 세 성 공략에 나선 백제군에 맞선 김유신 휘하에 배속되어 아들 거진, 가노 합진과 함께 장렬히 싸우다 전사했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진덕왕 : 원년(647)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의 세 성을 에워쌌으므로, 왕이 유신을 보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고전(苦戰)하여 기운이 다 빠졌는데, 유신의 부하 비녕자(丕寧子)와 그의 아들 거진(擧眞)이 적진에 들어가 급히 공격하다가 죽으니, 무리들이 모두 분발하여 쳐서 3천여 명을 목베었다.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비녕자 : 비녕자(丕寧子)는 출신 지역과 성씨를 알 수 없다. 진덕왕 원년 정미(647) 백제가 많은 군사로 무산성(茂山城).감물성(甘勿城).동잠성(桐岑城) 등지를 공격해 오자 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백제 군사가 매우 날쌔어 고전하고 이기지 못하여 사기가 떨어지고 힘이 지쳤다. 유신은 비녕자가 힘써 싸우고 적진 깊이 들어갈 뜻이 있음을 알고 불러 말하기를 “날씨가 추워진 후에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낙엽짐을 알 수 있는데 금일의 일이 급하다. 자네가 아니면 누가 능히 용기를 내고 기이함을 보여 뭇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겠는가?” 하고는 더불어 술잔을 나누면서 뜻의 간절함을 보이니 비령자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지금 수 많은 사람 중에 일을 오직 저에게 맡기시니 자기를 알아준다고 할 수 있으니 진실로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습니다”고 했다. 나가면서 종 합절(合節)에게 말했다.“나는 오늘 위로는 국가를 위하여, 아래로는 나를 알아주는 분을 위하여 죽을 것이다. 내 아들 거진(擧眞)은 비록 나이는 어리나 굳센 의지가 있으니 반드시 [나와] 함께 죽으려 할 것이니 만약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죽으면 집사람은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잘 수습하여 돌아가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라!” 말을 마치고 곧장 말을 채찍질하여 창을 비껴들고 적진에 돌진하여 몇 사람을 쳐 죽이고 죽었다. 거진이 이를 바라보고 떠나려 하니 합절이 말했다.“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기를 ‘합절로 하여금 낭군과 함께 집에 돌아가 부인을 편안하게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자식이 아버지 명을 거역하고 어머님을 버리는 것이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말고삐를 잡고서 놓지 않았다. 거진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 구차히 살면 어찌 효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곧 칼로 합절의 팔을 쳐 끊고 적중으로 달려가 죽었다. 합절(合節)이 말하기를 “내 하늘이 무너졌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는 또한 싸우다가 죽었다. 군사들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보고는 감격하여 다투어 나가니 향하는 곳마다 적의 칼날을 꺾고 진을 함락하여 적병을 대패시켜 3천여 명을 목베었다. 유신이 세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고 곡을 매우 슬퍼했다. 대왕이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예를 갖추어 반지산(反知山)에 세 사람을 합장하고 처자 9족에게 은혜로운 상을 풍부하게 내려주었다. 

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 : (선덕왕 16년<647>)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현재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 감물성(甘勿城)[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동잠성(桐岑城)[현재의 경북 구미시] 등 세 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왕이 유신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합 1만 명을 이끌고 막게 하였으나 고전하여 기세가 꺾이자 유신이 비녕자(丕寧子)에게 “오늘의 사세가 급박하다! 자네가 아니면 누가 뭇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비녕자가 절을 하고는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적진에 나아갔다. 아들 거진(擧眞) 및 집종[家奴] 합절(合節)이 그를 따라서 창, 칼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죽으니 군사들이 이를 바라다보고는 감동되고 격분되어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크게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3천여 명을 목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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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 궤장, 경기도박물관, 1668년>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武王) 上에는 이 왕 재위 4년(664) 봄 정월에 "김유신이 늙었음을 이유로 정년퇴직하겠다고 했지만, 윤허하지 아니하고 궤장을 하사했다(春正月 金庾信請老 不允 賜几杖)"고 한다. 


궤장이란 등받이 의자인 안석(案席)과 지팡이라, 늙은 신하에게 내리는 최고의 하사품이다. 이를 하사받으면 그런 신하는 예외없이 대궐에 들어서면서 내리지 않아도 되고, 그 문을 들어설 때는 허리를 굽히지 아니해도 된다. 물론 이런 영광이 있으려면, 그에 걸맞는 공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궤장은 곧 은퇴의 의미이기도 했으니, 세대교체를 위해 이제 그만 골방 늙은이로 물러나 있으라는 완곡한 뜻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왕조시대에 정년퇴직은 70세였다. 이는 이미 《예기(禮記)》에서 규정한 것으로, 이것이 엄격히 지켜진 때도 있고, 그렇지 아니한 때도 있어, 운용은 순전히 그 시대 관습을 따랐다. 고려시대를 보면, 대체로 이 규정이 엄격해 아무리 권력이 막강한 신하라 해도, 나이 70이 되어도 물러나지 않는다 해서, 지탄을 받기도 하고, 물러나라는 구호에 직면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는 이게 급격히 무너졌다. 황희 맹사성은 직업이 정승이라, 쭈구렁방탱이가 될 때까지 주구장창 영의정 좌의정을 해 먹었으며, 송시열 같은 이는 팔순 넘도록 해먹었다. 


<이경석 궤장, 경기도박물관, 1668년> 


신라시대에는 이 70세 정년퇴직 규정이 어떠했는지, 그 면모를 엿볼 자료가 거의 없지만, 그것을 추정할 만한 것들이 제법 있으니, 중기 이래 하대에 이르기까지 중시라는 실제의 수상 역할을 하는 관료가 늙음을 이유로 물러났다거나, 물려나려 했다는 기록이 더러 보이는 것으로 보아, 70세 퇴직이라는 관습법이 강력히 작동했음을 엿본다. 


내가 이 70세 정년 퇴직 문제는 별도로 이 블로그에서 다룬 적이 있거니와, 그 연장선으로 저 김유신 정년퇴직 쇼는 관심을 끌거니와, 익히 알려졌듯이 김유신은 595년생이다. 김유신이 사표를 제출하고, 이제 연금이나 타먹겠다고 공식 표명한 시점을 잘 봐라. 654년 정월이다. 아마도 김유신은 정월 초하루에 열린 임금 주재 조회에서 "전 이제 물러날라요. 물러나게 해 주이소. 마 이젠 힘들어 죽겠소. 이제 젊은 아들 좀 시키소. 인문(仁問)이도 있고, 에, 좀 그렇기는 합니다마이, 내 동생 흠순이도 있고, 이젠 쟈들 좀 시키소"라고 말했을 것이다. 


70세 정년퇴직이 정확히 언제인가? 70세가 되는 그날인가? 아니면 70세가 끝나는 그해 연말인가? 아니면 70세가 된 그해 정월인가? 


김유신을 보면, 70세가 된 그해 정월이었다. 단 그때는 만(滿)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므로, 양놈들 기준으로 한다면 만 69세 되는 해, 혹은 만 68세 어느 시점, 그해 정월을 기해서 퇴직했음을 안다. 


정년퇴직과 관련한 궤장 중에 사진 두 장으로 소개한 조선시대 중기 유물이 대표적이니, 경기도박물관에 기탁된 이 궤장은 1668년 현종이 영중추부사 이경석한테 하사한 것이다. 이를 보면 의자는 접이식이며, 지팡이는 4점 중 한 점이라, 그 모양을 보면 알겠지만, 살포라 해서 실은 그 실제 모델은 삽이다. 삽질할 때 쓰는 그 농기구 삽 말이다. 


삽중에서도 이런 살포는 실은 논에 물대기 할 때 사용한다. 물꼬를 튼다는 말이 있거니와, 이 물꼬란 논에 물을 대는 통로를 열어 물길을 낸다는 뜻이다. 이것이 어찌하여 상징물로 변해서 원로대신한테 내리는 하사품으로 변질했으니, 그 전통을 보면 이미 중국에서는 한대漢代 도용陶俑에 적지 않게 살포를 앞세운 모습들을 본다. 


한반도를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적지 않은 살포가 주로 무덤에서 출토한다. 5세기 무렵 한성백제시대 지금의 공주 일대에 웅거한 지방세력 공동묘지임이 확실한 공주 수촌리 무덤에서는 엄청시리 큰 살포가 나왔으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한성백제 중앙정부에서 왕이 내린 하사품이다. 


이 살포가 지닌 상징성에 대해 국내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재직하다가 국민대 국사학과에 자리가 나자 잽싸게 토낀 김재홍이 쓴 전론이 있다고 기억한다. 살포에 대해서는 내가 아마 전론專論을 쓸 날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정년퇴직이 반려된 김유신은 이로부터 10년 뒤인 673년, 79세로 沒하기까지 지금의 경주시내를 저런 것으로다가 삽질하고 다녔다. 그나저나 뇐네들이 들고다니기엔 너무 무거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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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681년. 일통삼한 전쟁기에 맹활약한 신라 장군이다. 김서현과 만명부인 소생이며, 김유신에게는 동부동모 동생이면서, 태종무열왕비가 된 문명(문희)의 오빠다. 풍월주 출신이다. '欽春(흠춘)'이라고도 쓴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7년(660) ...여름 5월..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義慈)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食]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혹은 순(純)으로도 썼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7년(660) ...여름 5월..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義慈)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食]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혹은 순(純)으로도 썼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에 유신 등이 황산(黃山) 벌판으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계백(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들은 힘이 다빠지게 되었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였다.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忠)과 효(孝)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 반굴이 “삼가 분부를 알아듣겠습니다.” 하고는 곧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또는 관창(官昌)이라고도 하였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 아들은 나이 겨우 열 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三軍)의 모범이 되리라!” 관장이 “예!” 하고는 갑옷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쏜살같이 적진에 달려들어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힌 바가 되어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고는 그의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랴!” [그리고는]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 관장이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적진 속에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가서 날쌔게 싸웠는데,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였다.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삼군(三軍)이 이를 보고 분에 복받쳐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치고 고함지르며 진격하니,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계백은 죽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삼국사기 권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 2년(662) ...8월에 백제의 남은 적(賊)들이 내사지성(內斯只城)에 모여 나쁜 짓을 행하므로 흠순(欽純) 등 19명의 장군을 보내 토벌하여 깨뜨렸다. 대당 총관 진주(眞珠)와 남천주 총관 진흠(眞欽)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삼아 한가로이 지내며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그들을 목베고 아울러 그 일족을 멸하였다. 사찬 여동(如冬)이 어머니를 때리자 하늘에서 천둥치고 비가 내렸으며 벼락이 쳐서 죽였는데, 그 몸에 수악당(須堂)<악()자는 뜻을 알 수 없다.> 세 글자가 씌여 있었다.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3년(663) ...2월에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거열성(居列城)을 쳐서 빼앗고, 700여 명을 목베었다. 또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덕안성(德安城)을 공격하여 1,070명을 목베었다. 8년(668) ...6월...21일에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각간 김인문·흠순·천존·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개원·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이찬 진순(陳純)과 죽지를 경정(京停) 총관으로,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이찬 인태(仁泰)를 비열도 총관으로,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都儒), 아찬 용장(龍長)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잡찬 숭신(崇信),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福世)를 비열주 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순장(純長)을 하서주 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의복(宜福)과 아찬 천광(天光)을 서당 총관으로, 아찬 일원과 흥원(興元)을 계금당 총관으로 삼았다. 9년(669) ...여름 5월에...급찬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에 보내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 또 각간 흠순과 파진찬 양도를 당나라에 보내 사죄했다. 10년(670) 봄 정월에 [당나라] 고종이 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良圖)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이는]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였으므로 황제가 책망하고 노하여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 권제7(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 : 11년(671) ...가을 7월에 대왕이 답서에서 말했다. "...함형(咸亨) 원년(670) ..7월에 이르러 당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金欽純) 등이 땅의 경계를 그린 것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지도를 펴서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다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하(黃河)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았고 태산(泰山)이 아직 숫돌같이 되지 않았는데, 3∼4년 사이에 한 번 주었다 한 번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모두 본래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말하기를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상황을 보니 따로 한 나라를 세우고 있으니 백년 후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게 먹혀 없어지고 것이다. 신라는 이미 중국의 한 주(州)이니 두 나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바라건대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길이 뒷 근심이 없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진덕왕(眞德王) :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왕위에 오르자 친히 태평가(太平歌)를 지어 비단을 짜서 그 가사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서 당(唐)나라에 바치게 했다(다른 책에는 춘추공<春秋公>을 사신으로 보내 군사를 청하게 했더니 당 태종이 기뻐하여 소정방<蘇定方>을 보냈다고 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현경<現慶> 이전에 춘추공은 이미 왕위에 오른데다 현경<懸磬> 경신<庚申>은 태종이 아니라 고종<高宗> 때이다.  정방<定方>이 온 것은 현경 경신년이니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보냈다는 것은 청병<請兵>한 때의 일이 아니고 진덕왕 때 일이라야 옳다.  대개 이때는 김흠순<金欽純>을 석방해 달라고 청할 때 일일 것이다). 당 황제(皇帝)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김령윤 열전 : 김령윤(金令胤)은 사량(沙梁) 사람으로 급찬(級)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각간 흠춘(欽春)<흠순(欽純)이라고도 한다>은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어짐이 깊고 신뢰가 두터워 뭇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장년이 되어 문무대왕이 그를 올려 총재(冢宰)로 삼았다. 윗 사람을 충으로 섬기고 백성에게는 관대하여 나라 사람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 했다. 태종대왕 7년 경신(660)에 당 고종이 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해 백제를 치게 하자 흠춘은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을 이끌고 나갔다. 가을 7월 황산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을 만나 싸움이 불리해지자 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말하기를 “신하로서는 충성이 제일 중요하고 자식으로서는 효가 제일 중요하다.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가 모두 이루어진다”고 했다. 반굴이 “예.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적진에 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령윤은 대대로 고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므로 명예와 절개를 자부했다.


삼국유사 권2 기이 2 김유신(金庾信) : 호력(虎力) 이간(伊干) 아들인 서현(舒玄) 각간(角干) 김(金)씨의 맏아들이 유신(庾信)이고 그 아우가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이니 어릴 적 이름은 아해(阿海)이며 누이동생은 문희(文姬)이니 어릴 때 이름은 아지(阿之)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紀異) 2 문호왕(文虎王) 법민(法敏) : 총장(總章) 무진(戊辰.668)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상원上元 원년元年 갑술甲戌(674) 2월에 유인궤劉仁軌로 계림도鷄林道 총관摠管을 삼아서 신라를 치게 했다.  우리 나라 <고기古記>에는 "당唐나라가 육로장군陸路將軍 공공孔恭과 수로장군水路將軍 유상有相을 보내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문仁問과 흠순欽純 등의 일만 말하고 유신庾信은 없으니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김흠춘(金欽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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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681년. 일통삼한 전쟁기에 맹활약한 신라 장군이다. 김서현과 만명부인 소생이며, 김유신에게는 동부동모 동생이면서, 태종무열왕비가 된 문명(문희)의 오빠다. 풍월주 출신이다. '欽純(흠순)'이라고도 쓴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7년(660)...여름 5월..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았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했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義慈)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했다.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다가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했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순(純)이라고도 한다> 등에게 명해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토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김령윤 열전 : 김령윤(金令胤)은 사량(沙梁) 사람으로 급찬(級)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각간 흠춘(欽春)<흠순(欽純)이라고도 한다>은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어짐이 깊고 신뢰가 두터워 뭇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장년이 되어 문무대왕이 그를 올려 총재(冢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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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덕여왕 시대 고위 관료로 상대등까지 올랐다가 왕위 찬탈을 노린 반란을 꾀하다 김유신에게 주살됐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선덕왕 : 14년(645)...겨울 11월에 이찬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16년(647) 봄 정월에 비담과 렴종(廉宗) 등이 말하기를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해서 반역을 꾀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진덕왕 : 원년(647) 정월 17일에 비담(毗曇)을 목 베어 죽였는데, 그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 


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 : 16년 정미(647)는 선덕왕 말년이고 진덕왕 원년이다. 대신 비담(毗曇)과 렴종(廉宗)이 여자 임금(女主)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하려 하니 왕은 스스로 왕궁 안에서 방어하였다. 비담 등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고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에 머물고 있었다. 공격과 방어가 10일이 지나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한밤 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니 비담 등은 사병들에게 말하였다.“내가 듣건대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다.’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여왕[女主]이 패할 징조이다.”병졸들이 지르는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대왕이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유신이 왕을 뵙고 말하였다. “길함과 불길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주(紂)왕은 붉은 새가 나타났어도 망하였고, 노나라는 기린을 얻었어도 쇠하였으며, [은나라] 고종은 장끼가 울었어도 중흥을 이루었고, 정공(鄭公)은 두 마리 용이 싸웠으나 창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덕이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별이 떨어진 변괴는 족히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이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다음 연에 실려 띄워 하늘로 올라가듯이 하고는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길가는 사람에게 “어제 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반란군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 흰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자연의 이치[天道]에서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에서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큰 혼란이 옵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한 듯하고 도리어 왕의 성 안에 별이 떨어지는 변괴를 보이니 이는 제가 의심하고 깨달을 수 없는 바입니다. 생각컨대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함에 따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서 부끄러움을 짓지 말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는 여러 장수와 병졸을 독려하여 힘껏 치게 하니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목베고 9족(族)을 죽였다. 


화랑세기 24세 천광공(天光公) 전 : 그때 국사(國事)가 점차 어려워졌다. 공과 여러 낭두(郞頭)가 낭도(郎徒)를 거느리고 친히 활 쏘고 말달리기를 익혔는데, 모인 자들 중에서 뽑아서 병부에서 보충하였다. 공이 5년간 풍월주 지위에 있는 사이에 낭정(郎政)은 무사(武事)로 많이 돌아갔다. 선덕제(善德帝)가 병이 몹시 위독해지자, 비담(毗曇)과 렴종(廉宗)이 모반했다. 유신공(庾信公)이 신주(新主·진덕)를 받들어 전쟁을 독려했다. 그때 서울[京師]의 군대가 적어 공이 낭도를 모두 동원해 먼저 그 진으로 돌격하니 비담이 패하여 달아나고 난이 평정되었다. 공은 그 공으로 발탁되어 호성장군(護城將軍)이 되었다. (이에) 풍월주 지위를 부제(副弟)인 춘장(春長)한테 전해 주고 오로지 왕사(王事)에 힘써 변방에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며[出將入相] 많은 공적이 있었기에 증흥 28장(二十八將)의 한 사람이 되었다. 가히 공경할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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