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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이 재위 말년에 머리 깎고 중이 되어 얻었다는 법호. 하지만 그 역사적 진실성을 두고 논란이 많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4 진흥왕 : 37년(576)…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하다가 죽었다. 왕비 또한 그것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다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해동고승전 권 제1 : 승려 법운은 속명을 삼맥종(彡麥宗)이라 하며,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했다. 법흥왕 동생 갈문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다. 태어나 7세에 즉위하니 매우 관대하고 인자했다. 일을 공경히 다스려 신뢰를 받았으며, 착한 일을 들으면 놀란 듯이 (포상했고) 악을 제거하는데 힘썼다. 7년(546)에 흥륜사가 완성되니 사람들에게 출가해 승니가 됨을 허락했다. 8년(547)에는 대아찬 칠부(柒夫) 등에게 명해 문사(文士)를 널리 모아 국사(國史)를 편찬케 했다. 10년(549)에는 양에서 사신과 입학승 각덕(覺德)을 보내면서 부처님 사리도 함께 보내왔다. 왕은 여러 신하에게 흥륜사 앞 길까지 나아가 받들어 맞이하게 했다. 14년(553)에는 유사(有司)에 명하여 월동 동쪽에 신궁(新宮)을 짓게 하니 황룡이 그 땅에서 나타나므로 왕은 이를 의아히 여겨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黃龍)이라 이름지었다. 26년(565)에는 진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면서 불교 경론 700여 권을 보내왔다. 27년(566)에는 기원(祈園).실제(實際) 두 절이 창건되고 황용사 또한 완공되었다. 33년(572) 10월에는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외사(外寺)에 팔관재회(八關齋會)를 베풀었는데 7일만에 마쳤다. 35년(574)에는 황룡사의 장륙상을 주조하였다. 혹 전하기를 아육왕(阿育王)이 띄운 배가 황금을 싣고 사포(絲浦)로 들어왔으므로 (그것을) 가져와 주조했다고도 하는데 이 말은 자장전(慈藏傳)에 있다. 36년(575)에는 장륙에서 눈물이 나와 발꿈치까지 흘러내렸다. 37년(576)에는 처음으로 원화(原花)를 받들어 선랑(仙郞)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나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할까 근심하다 많은 사람을 무리지어 놀게하고는 그들의 행실을 보아 천거하여 쓰고자 했다. 마침내 미녀(美女) 두 사람을 가려 뽑으니 남무(南無)와 준정(俊貞)이라 하니 무리를 300명이나 모았다. 두 여자는 서로 미모를 다투다가 (준)정이 남무를 유인해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강물에 던져 죽이므로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져 버렸다. 그 뒤에는 미모의 남자(美貌之男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받들어 화랑으로 삼으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혹은 도의로 서로 탁마하고 혹은 노래와 풍류로 서로 즐기니 산수를 찾아 다니며 유람하니 먼 곳이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이를 조정에 천거했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세기(世記)》에 이르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에서 나오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나왔다"고 했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실로 3교를 포함한 것이니 모든 백성을 상대로 교화했다. 또한 들어오면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했으니 이는 노나라 사구의 뜻이고 무위의 사태에 처하고 무언의 가르침을 행하였으니 주나라 주사의 종지였으며, 모든 악한 일은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만 받들어 행하니 천축 건태자의 교화였다"고 했다. 또 당나라 영호징은 신라국기에서 이르기를 "귀인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자를 가려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해 받을어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나라 사람들이 다 받들어 섬겼다"고 했다. 이는 대개 왕의 정치를 (돕기 위한) 방편이었다. (선)랑이었던 원(화)에서 신라말에 이르기까지 무릇 200여 명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4선(仙)이 가장 어질었으니, 저 세기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 일심으로 부처님을 받들다가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법복을 입고 스스로 법운이라 이름했다. 금지해야 할 계율을 받아 지니고 세 가지 업을 청정히 하다가 마침내 세상을 마치셨다. 그가 돌아가자 나라 사람들은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예의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이해에 안함법사(安含法師)가 수나라에서 왔으니 안함전에서 말하겠다. 찬하여 말한다. 풍속은 사람과 관계됨이 크다 할 것이다. 왕이 당시 풍속을 고치고자 하면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았으니 그 패연함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 진흥이 이미 불교를 숭상해 화랑들의 놀이를 베푸시니 나라사람들이 즐거이 좇아 본받기를 마치 보물의 집으로 달려가고 봄의 누각에 오르듯 했다. 그 귀추를 요약하면 선으로 옮기고 의로 옮겨 점차 대도로 나아가게 하는데 있을 뿐이다. 저 한나라 애제는 부질없이 색만 좋아했기에 반고가 이르기를 "보드랍고 아름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을 쏠리게 함은 비단 여자만이 아니라 남색 또한 그러하다"고 했다. 이것을 평하여 (화랑의 이야기와)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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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 이름이다. 심맥부(深麥夫)라고도 한다. 

삼국사기는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즉위년 : 진흥왕(眞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이다<심맥부(深麥夫)라고도 한다> 그때 나이 일곱 살이었다. 법흥왕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로서 법흥왕 딸이며,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왕태후(王太后)가 섭정했다. (眞興王立 諱 麥宗 或作深麥夫 時年七歲 法興王弟葛文王立宗之子也 母夫人金氏 法興王之女 妃朴氏思道夫人 王幼少 王太后攝政)

삼국유사 권1 왕력 : 제24대 진흥왕은 이름이 삼맥종(彡麥宗)이니, 심●(深●)이라고도 한다. 김씨다. 아버지는 곧 법흥왕 동생 입종(立宗) 갈문왕이고, 어머니는 지소(只召)부인으로, 식도(息道夫人)이라고도 하니, 박씨 모량리 영실(英失) 각간의 딸이다.

해동고승전 권 제1 : 승려 법운은 속명을 삼맥종(彡麥宗)이라 하며,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했다.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이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은 성이 김씨요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이니,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  540)에 즉위(卽位)했다.

☞진흥왕(眞興王) ☞심맥부(深麥夫)  ☞심맥종(深麥宗) ☞진흥대왕(眞興大王) ☞진흥태왕(眞興太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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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신라인. 우륵의 제자로서 '니문(尼文)'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진흥왕이 재위 12년(551) 낭성(娘城)으로 순행(巡行)하는 길에 스승 우륵과 함께 하림궁(河臨宮)이란 곳에 불려가 가야금곡을 연주했다. 그가 지은 가야금곡으로는 3가지 곡명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인데 그 이름이 까마귀, 쥐, 메추라기 등 모두가 동물 이름이라는 사실을 주목거리다. 까마귀와 쥐 같은 동물은 삼국유사 사금갑 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동물인데, 이러한 동물들과 관련 있는 곡명이라는 점이 이채로울 뿐이다.

삼국사기 권 제4(신라본기 제4) 진흥왕 : 12년(551) 봄 정월에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꿨다. 3월에 왕이 순행(巡行)하다가 낭성(娘城)에 이르러 우륵(于勒)과 그 제자 니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따로 불렀다. 왕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케 하니,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했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嘉悉王)이 12현금(十二弦琴)을 만드니, 그것은 12달 음률을 본뜬 것이다. 이에 우륵에게 곡을 만들게 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갖고 우리에게 귀의했다. 그 악기 이름은 가야금(加耶琴)이다.

삼국사기 권 제32(잡지 제1) 악(樂) :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가 하가라도(下加羅都), 둘째는 상가라도(上加羅都), 셋째는 보기(寶伎)이다. 넷째는 달이(達已)이며 다섯째는 사물(思勿)이고 여섯째는 물혜(勿慧)이다. 일곱째는 하기물(下奇物)이고 여덟째는 사자기(師子伎)이며 아홉째는 거열(居烈)이다. 열째는 사팔혜(沙八兮)이고 열한번째는 이사(爾赦)<사(赦)자는 알 수 없다>이며 열두번째가 상기물(上奇物)이다. 니문(泥文)이 지은 세 곡은 첫째 오(烏), 둘째 서(鼠), 셋째는 순(鶉)이다.

니문(尼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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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아들이다. 동륜(銅輪)과 금륜(金輪·훗날의 진지왕) 동생이면서, 21세 풍월주를 역임하는 선품(善品)의 아버지다. 진평왕시대 무렵에 화랑에도 깊이 관여했다.

화랑세기 미생공 전 : 그때에 낭도들간에는 아직 쟁론이 있었다. 그 하나는 귀천에 거리끼지 않고 내외에서 인재를 뽑아 등용하여 국력을 강하게 하려는 자들로, 통합원류(統合元流)라 불렀다. 임종·대세·수일 등이 중심이었는데, 대개 문노파(文弩派) 중 가장 정예들이었다. 대원신통(大元神統)을 받들려고 하는 자들은 곧 미실일파(美室一派)인데 하종·구륜공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이 그 두 번째다. 

화랑세기 선품공 전 : 21세 선품공(善品公)은 구륜공(仇輪公) 아들이다.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제2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이제가기(李碑家記)》에 이렇게 말했다. 진흥대왕비(眞興大王妃) 사도(思刀)는 시호가 백융부인(白夫人)이다. 그 셋째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 작진(酌珍)이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阿慈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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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 한 장면...아버지가 제때 안 죽으면 아들이 죽을 수밖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이름대로 백수를 했다. 그의 아들로 세자는 조다助多. 아버지가 무려 왕위에만 79년간 있다 죽었을 때 조다는 죽고 없었다. 조다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문자명왕이다. 아버지가 하도 왕 노릇 오래하는 바람에 먼저 죽었으니 이름이 쪼다인가 보다. 

그보단 못하지만 조선 세종 역시 장장 32년이나 왕위에 있었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로 아버지가 재위 3년째인 1421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만 해도 아버지 세종은 모든 실권은 아버지 이방원에게 그대로 두어야 했다. 그러니 세종이 왕위에 재위한 기간과 문종이 세자로 있은 기간은 같다. 내가 놀랍기만 한 것은 이 긴 기간 문종이 내리 죽죽 세자로 있었다는 점이다. 

세자나 태자 생활은 왕보다 더 힘들다. 언제건 틈만 나면 끌어내리려는 시도가 일어나기에 어정쩡한 넘버 투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너무 똑똑하면 똑똑해서 아비를 잡아 먹을 놈이라 해서 쫓겨나고, 등신 같으면 등신같다 해서 쫓겨나고, 방탕하면 방탕하다 해서 쫓겨난다. 아주 가깝게는 그의 형 양녕이 그렇지 아니했는가? 이 천하의 망나니는 방탕하다 해서 아비한테 쫓겨났으니 말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장장 37년을 재위한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은 처음에 동륜(銅輪)을 태자로 삼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너무 왕노릇 많이 하자, 기다리기 지쳐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태자 자리는 그의 동생 금륜(金輪)에게로 가니, 이가 훗날 신하들한테 쫓겨난 진지왕이다. 

근자 화랑세기가 공개되었다. 보니, 진흥에게는 태자가 세 명이었다. 조강지처 숙명한테서 둔 아들 정숙(貞肅)을 처음에 태자를 삼았지만, 어미가 행실이 곱지 못해, 혹은 열정이 넘쳐 그랬는지 모르지만 딴 남자한테 홀딱 빠져 스스로 왕비 자리를 버리자, 애꿎은 정숙 또한 태자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다. 진흥은 후실로 들인 사도(思道)에게서 동륜과 금륜을 두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동륜이 왜 죽었는지가 없지만, 화랑세기는 뜻밖에도 동륜이 아버지 후궁이랑 밤마다 놀다가 하루는 그 후궁 건물을 지키는 사냥개 종류한테 물려죽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이로써 보건대도 아버지는 제때 죽어주거나, 혹은 일찍 자리를 내놔야 한다. 소위 말하는 세대교체다. 

조선 임금으로 가장 오랜 53년인가를 재위한 영조 역시 중간에 세자 바꿔치기를 해야했다. 하지만 이 아비는 불행하기 짝이 없어, 자기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굶어죽여야 했으니, 막상 죽인 다음 아들은 없고 덜렁 손자 하나만 남았으니, 그가 여든 몇살까지 장수한 이유는 오로지 의지 때문이었다고 나는 본다. 내가 오래 살아 저 손자놈이 성년되는 모습을 봐야 한다는 그 일념 하나로 그리 오래살았다고 본다. 

문종은 병약하다 하지만, 내 보기엔 이는 장기간의 스트레스에 따른 병약이다. 아버지 죽기만 30년을 기다렸으니, 오죽이나 돌아버렸겠는가? 이 땅의 아비들은 제때에 죽어줘야 그 자신도 봉변을 당하지 않고 아들을 죽였다는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아비가 죽자 너무 통곡해 문종이 건강을 해쳤다는 말 믿지 않는다. 왜 지금에야 돌아가셨소 하는 원망으로 건강을 망쳤다고 본다. 

일찍 죽자, 아니다 제때 죽자 아버지들아. 오래 생명만 부지해 부자관계 파탄나는 꼴 정 보기 싫으면 그 권한은 제때 자식들한테 물려주어야 한다. 하긴 이 말도 내가 아비이니 할 수 있지, 아비 아녔으면, 호로자식 후레자식 소리 듣기 딱 좋았을 성 싶다. 

각중에 산소로 아버지를 찾고 싶다. 


진흥왕 12년(551), 신라가 백제와 합세해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서 점령할 때 신라군 수뇌진 8장군 중 한 명이다. 당시 관위는 2등 각찬이었다. 나아가 화랑세기 미진부공 전에는 보이는 비대(比臺)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臺는 약자로 흔히 台를 쓰는 데다 발음 역시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거칠부 열전 : (진흥대왕) 12년 신미(진흥왕 12년: 551)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大角)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平壤)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리의 기세를 타서 죽령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취하였다.


☞비대(比臺) 

화랑세기 미진부공 전 : 미진부공(未珍夫公)은 아시공(阿時公) 아들이다. 어머니는 삼엽궁주(三葉宮主)이니 법흥대왕 딸이다. 꿈에 백학을 보고 낳았다. 공은 모습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법흥대왕이 총애했다. 비대공(比臺公) 등과 함께 궁중에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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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12년(551), 신라가 백제와 합세해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서 점령할 때 신라군 수뇌진 8장군 중 한 명이다. 당시 관위는 3등 잡찬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4 진흥왕 : 15년(553) 가을 7월에 명활성(明活城)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만 9천6백 명을 목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거칠부 열전 : (진흥대왕) 12년 신미(진흥왕 12년: 551)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大角)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平壤)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리의 기세를 타서 죽령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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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12년(551), 신라가 백제와 합세해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서 점령할 때 신라군 수뇌진 8장군 중 한 명이다. 당시 관위는 4등 파진찬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거칠부 열전 : (진흥대왕) 12년 신미(진흥왕 12년: 551)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大角)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平壤)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리의 기세를 타서 죽령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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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12년(551), 신라가 백제와 합세해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서 점령할 때 신라군 수뇌진 8장군 중 한 명이다. 당시 관위는 4등 파진찬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거칠부 열전 : (진흥대왕) 12년 신미(진흥왕 12년: 551)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大角)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平壤)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리의 기세를 타서 죽령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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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磨雲嶺新羅眞興王巡守碑. 568. 진흥왕 29) : 태창(太昌) 원년 세차(歲次) 무자(戊子) ▨▨ 21일 ▨▨ ▨흥대왕(▨興大王)이 ▨▨를 순수하여 돌에 새겨 기록한다. …수레를 타고 나가 10월2일 계해(癸亥)에 이르러 … 인하여 변계(邊堺)지역을 설유(說諭)하였다. …이 때 어가를 수행한 자로 사문(沙門) 도인(道人)은 법장(法藏)과 혜인(慧忍)이다.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黃草嶺新羅眞興王巡守碑. 568년. 진흥왕 29) : …8월21일 계미(癸未)에 진흥태왕(眞興太王)이 관경(管境)을 ▨▨하고 돌에 새겨 기록한다. …이에 무자년(戊子年) 가을 8월에 관경(管境)을 순수하고 민심을 살펴 노▨(勞▨)에 보답하고자 한다. ⋯이때 어가를 수행한 이는 다음과 같다. 사문도인(沙門道人)으로는 법장(法藏)과 혜인(慧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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