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다. 자기 이름을 내걸고 자기 책을 낸 사람이 자기 원고를 보지 않았음이니, 이는 우롱이요 사기다. 헛되게 쌓은 이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신호탄이다. 뭐, 그걸 보호하겠답시며, 저자보다 위대한 출판사는 말도 되지 않는 변명을 일삼는다. 그 변명, 기록으로 남기고자 그대로 인용하고 그대로 써 줬다. 왜? 그래야 어처구니 없는 우롱이 후세에 전하는 까닭이다.  


도서출판 창비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 '산사편'을 냈다가 부랴부랴 회수하는 소동을 겪었으니, 지금도 멀쩡히 활동하는 미술사학자 강우방(77)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을 죽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지난 28일, 이런 소문을 접한 나는 우선 강우방 선생한테 직접 전화를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어느 유명한 사람이 선생님을 고인을 만들었다는데요?" 했더니, 유홍준 얘기를 꺼낸다. 빙빙 돌려 얘기하는데, 종합하니 그랬다고 한다. 


강 선생은 얼마전 《주간동아》에다가 유홍준이 올해 4월 출간한 단행본 《추사 김정희》를 맹비난한 글을 투고했거니와, 요점을 추리자면 이 책이 추사 작품이 아닌 글씨와 그림을 대거 추사 작품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이어니와, 저 책이 표지에 쓴 ‘山崇海深’라는 글자부터가 당장 위작이라는 것이었다. 소문에는 이 기고문이 《산사편》에서 당신을 죽은 사람으로 치부한 유홍준에 대한 복수성 반격이라는 말도 있었다. 출판 선후를 따지면 이는 아닌 듯하다. 


전화통화 내내 강 선생 역시 이 부문이 몹시도 신경에 쓰이는 듯, 시종 껄껄 웃으면서도 당신의 《주간동아》 기고문이 그런 반격성이라는 말을 절대로 꺼내지 아니했다. 그는 유홍준의 여러 글이 지닌 문제점들을 성토한다. 그런 성토, 나로서는 결코 생경하지는 않아, 여러 번 듣곤 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내가 강 선생 지적 전부 혹은 상당 부분을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유홍준을 포함한 미술계 전반을 향한 강 선생 말씀들을 나는 참고만 하는 편이다. 유홍준을 향한 비판에서 강 선생 역시 자유롭지 못할 데가 있다. 



그의 이야기인즉슨, 유홍준이 자기 책에서 당신을 죽은 것으로 처리한 것이 사실이라 하며, 나아가 문제가 된 구절이 등장하는 문경 봉암사를 두고 당신이 한 말이라고 유홍준의 책이 인용한 말 역시 전연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얼마 전 창비에서 어떤 직원이라는 사람이 전화가 와서는 유홍준 책 얘기를 하는 거야. 나를 죽은 사람으로 표현했다고 하면서, 이건 유홍준 실수가 아니라 편집진 실수라고 하더라고. 죄송하다고. 그 친구는 자기 글도 자기가 안 써나봐? 자기 이름으로 나가는 책을 교정도 안 봤다는 거지. 그러면서 책은 회수했고, 그 부분을 수정하겠다는 거야.  멀쩡한 나를 죽었다 했으니 나 오래살 거 같아."


사실인 듯해서 학술 문화재를 담당하는 박상현 기자를 통해 더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라 부탁했다. 박 기자가 바로 연락이 왔다. 소문이 맞다 했다. 창비로 바로 확인이 들어간 모양인데, 책은 회수해서 수정 작업을 하는 중이라 했다. 그러면서 관련 기사를 바로 올리겠다고 했다. 구질구질한 것 필요없다고 판단해 그런 소식만을 간단히 담았으니, 그것이 아래 기사다. 


 선생을 고인이라 적은 '문화유강우방산답사기'


이 기사에서 드러나듯 창비는 "편집자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 수록된 문경 봉암사 부분을 일부 수정하는 과정에서 '돌아가신 강우방 선생'이라고 적었다"고 하며 "저자인 유홍준 교수와는 관계없이 편집자가 한 실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책이 서점에 깔린 날 실수를 알아채고 강우방 선생께 연락해 사과했다"며 "잘못된 표현이 들어간 책은 수천 부 정도 팔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머지 분량은 모두 회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창비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했다. "유 교수는 서문만 새로 썼고, 본문은 편집자가 기존 글을 교정했다"는 것이다. 


이게 뭔가? 장난치는가? 


더 자세한 내막을 경향신문 논설위원인 조운찬 기자가 폭로했다. 조 기자는 한국 언론계를 대표하는 학술전문기자요, 그 자신 한문학자요, 한문학도이며, 《삼국유사》 원문도 교정했다. 그는 경향신문 칼럼 코너인 [여적]을 빌린 '유홍준의 두번째 ‘굴욕’'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산사순례>는 유 교수가 새롭게 쓴 저서는 아니다. 출판사가 우리 산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밀리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이하 <답사기>) 시리즈에서 산사 답사기만을 뽑은 것이다. 1993년 간행된 <답사기> 1권의 ‘문경 봉암사’편에는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강우방 선생’이라고 되어 있다. 기존 콘텐츠를 재편집하는 과정에서 나온 실수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서 유 교수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유 교수는 <산사순례>의 서문 ‘산사의 미학’을 새로 썼고, 표지에도 ‘유홍준 지음’이라고 내걸었다. 유 교수는 저자로서 이번 사건에 대해 책임 있게 해명해야 한다. 출판사 창비는 유명 인사의 명성에 기대어 기존 콘텐츠를 재탕, 삼탕하는 셀럽 마케팅을 재고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번 책은 출판사 창비나 그 저자로 기록된 유홍준의 우롱 행각이다. 이번 여름,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 승원' 7곳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자, 그에 부화뇌동해서 이걸로 장사해 보자는 얄팍한 상술이다. 그리하여 기존 답사기 관련 글들을 그대로 가져와서는 그걸 산사편이라 해서 짜깁기했으니, 이것이 우롱 아니고 무엇이리오? 자기 이름으로 나가는 자기 책을 교정도 보지 않고 서문만 쓴 유홍준은 또 뭔가? 


이번 사건은 유홍준 기존 책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의문 부호, 특히 그 신뢰성에 심대한 의문 부호를 낳는다. 유홍준이 일으킨 바람이야 내가 부정하고픈 생각이 없으나, 그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어간다. 이젠 유홍준의 시대가 아니다. 그의 퇴장이 아름답길 기대해 본다. 

  1. 차포 2018.09.01 08:45 신고

    저도 이양반 일본편 빼고 답사기 시리즈 다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1-3편. 그리고 북한 답사기 빼고는 안보고 있습니다. 안보게 됩니다.

영화 JSA 포스터


지금은 폐쇄된 우리 공장 연합뉴스 내 블로그에 2005년 08월 01일 21시 32분 26초에 같은 제목으로 게재한 잡글인데, 당시 글 오타와 문맥상 문제가 있는 조사 정도 바로잡는 수준에서 전재한다. 당시 글을 전재하는 까닭은 그래야만 당시 내가 이 글을 올린 사정과 부합하는 대목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1987년, 18년 전 얘기다. 당시 시위현장에서 단연 유행하던 구호는 


1. 호헌철폐 2. 독재타도


이 두 가지였다. 이 외에 또 하나 익숙한 것이 


양키 고우 호움!


이었다. 대학가 사회에서 이 양키에 대해서는 묘한 구석이 있다. 그 묘한 구석에서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 묘한 구석이 군대(MILITARY SERVICE)로 옮겨갈 요량이면 특히 그랬다. 미국에 대한 끝 모를 증오. 그러면서도 그 그늘을 찾아 헤메는 한 부류가 있었으니 나 같은 놈이 거기에 해당한다. 


나는 카투사KATUSA로 복무했다. 이 카투사 이니셜에 대한 의문을 표하는 이가 더러 있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면 Korean Augmentation Troops to the United States Army이다. 한국군은 한국군이되 증강군이니, 무엇에 대한 증강이냐? 미군에 대한 증강군이니, 카투사 그 묘한 지위가 이 명칭에서도 드러날 지니,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덤이 바로 카투사라, 명색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러한 측면이 다분히 있다. 


이 미군에 대한 증강군에서 예외가 되는 카투사 족속이 JSA 근무병이다. 이 말은 영화로도 유명해졌거니와 '공동경비구역'이라 하니 Joint Security Area가 그 약자이니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근무병을 말한다. 일전에 영화 《JSA》에서는 이병헌이 주연했으나, 요즘은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당시 내가 카투사로 복무하던 그 시절만 해도, 이병헌 실제 키가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커 봐야 175센티 남짓할 듯한데 이렇게 짜리몽땅한 JSA는 상상도 불허한다.


그래서 이 JSA와 관련한 나의 추억 한 토막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를 위해 당시 카투사 선발제도를 일별할 필요가 있느니, 지금은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내가 카투사가 되던 그 시절 선발 방식은 두 가지가 있어,   


1. 시험이요

2. 논산 연무대 차출이니,


1. 시험이란 말할 것도 없이 카투사가 되겠노라 병무청에 자발적 지원서를 내어 정해진 날짜에 시험을 보아 그 결과 여하에 따라 뽑히는 것이니, 해병대는 그런 비교 자체를 기분 나빠할 지 모르나, 적어도 자원이라는 점에서는 해병대나 카투사나 진배가 없다. 


2. 논산연무대 차출이란 시험 선발 외의 방식으로 논산에 입소한 자들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가려 뽑은 자들이니, 참말로 묘한 것은 당시 미국에 대한 그 강렬한 대학 사회의 증오와는 상관없이 이 시험병과 차출부대원 사이에도 묘한 차별이 존재했으니, 말할 것도 없이 이 경우 차별이란 시험병들의 차출병들에 대한 이유없는 우월의식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말하건대 우린 시험으로 된 자들이고, 니네들은 줄 잘 서서 카투사된 자들이니 너희와 우리는 구별된다, 뭐 이런 우월의식을 말한다.


당시 이 시험병과 차출병은 전체 카투사 병 중 거의 정확히 반반 정도 비율을 차지했다. 나는 시험병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 자신은 없으나 필기시험으로 사실상 당락이 결정되었는데, 시험과목은 1. 영어 2. 국사는 확실하고 3. 국어가 들어갔는지 아닌지는 가물가물하다.


시험이라면 이골이 난 나는 가뿐히 합격이 되었으니 1987년 중반 무렵에 합격이 되고 나서, 입영통지서를 받아보니 1987년 11월 20일에 논산 연무대로 입소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카투사 동기는 내 기억으로는 4개 소대였고, 한 소대당 40명에서 거의 빠짐이 없었으니 4 x 40=160명가량이었던 듯하다.


당시 자대 배치까지 훈련 방식은 1. 논산훈련소에서 한 달 땅개 훈련 2. 별도의 논산 훈련소 다른 연대에서의 1달 추가 훈련. 3. 카투사 훈련소에서의 다시 한달간 별도 훈련, 이렇게 총 석달이었다. 나는 이 중 논산훈련소 30연대에 입대했으니, 이 한달간 다른 일반병과 똑같은 훈련을 했다. 그 훈련을 마친 다음 카투사를 위한 추가 한달간 별도 훈련은 예외없이 27연대로 고정되었다.  


입대일이 11월 20일이었으니 열라 추운 시절을 논산훈련소에서 두 달을 보냈다. 그 추위란 지금 생각해도 지긋지긋하다. 전방 군대생활한 사람들은 웃을 지라도 나는 상관 안 한다. 


이 27연대에는 카투사를 포함해 의경과 전경의 3가지 부류가 함께 훈련을 받았으니, 복무 기간은 아마도 달랐을 것이다. 나 같은 카투사병은 엄연히 소속은 한국 육군이니, 당시 30개월을 채워야 했다. 나는 1학년 때 성남 연무대 잠깐 입소하고 교련을 이수한 데다 2학년 때는 전방 입소에 더하여 역시 교련까지 충실히 받았으니 3개월 병역 단축 혜택을 보아 27개월을 근무하면 되었다. 애니웨이 나 같은 육군이 30개월이었던 데 반해 의경과 전경은 아마도 서너달 복무기간이 더 길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27연대 이 세 부류 족속에 대해서는 무슨 분류 체계가 있었는데, 카투사는 대가리는 좋으나 몸은 제일로 굼뜨고, 전경은 대가리는 안 좋으나 몸은 제일 빠르고, 의경은 대가리도 나쁘고 몸도 느리고다는 뭐 이런 식의 분류 코드가 횡행하고 있었다. 이 27연대를 합쳐 총 두 달간 논산 훈련을 끝낸 다음 카투사 예정병들은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 있는 KRTC라는 카투사 교육대로 간다. 여기서 교관은 1. 카투사 2. 미군의 두 그룹으로 분류되는데, 이 미군 교관은 영화 같은 데서 보는 것이랑 폼새가 기본적으로 똑 같다고 보면 된다. 


당시 기억이 생생한 한국 카투사 교관이 한 명 있는데 그 이름은 아마도 김상수였을 것이다. 나이는 나 하고 같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계급은 상병이라 그 출신이 묘한 데가 있었다. JSA 출신이기 때문이다. 듣자니 JSA에 차출되어 그곳에서 근무하다가 평택 신병교육대 교관으로 있었다.


이 친구 참으로 묘한 구석이 있는데 아침 구보 때면 늘상 양놈 막사 앞에다가 훈령병들을 세워놓고 한국 군가를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양놈 막사를 향하여 힘찬 구령 조정 3회 실시 뭐 이런 식으로 미군을 향한 끊임없는 증오심을 표출하곤 했다. 


이 평택교육대 KRTC에서 공포의 순간이 두 번 있다. 물론 그 두 번째야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어느 곳 어느 부대에 배치되는가 하는 자대 발표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나 당시에는 당연 제1 선호 지역은 당연 빠따로 용산이었다. 캠프 코이너 말이다. 맨날 시내로 싸질러 나올 수 있었으니 그 선호도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 첫 번째 공포가 바로 JSA 근무병 차출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평택 훈련소 생활 막바지 무렵에 그 과정이 있는데 선발은 JSA 친구들이 직접 나와서 대상자를 뽑아갔다.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첫째, 키 180센티 이상일 것, 둘째, 안경을 쓰지 않을 것.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충족시켜야만 했다. 왜 이런 조건을 내세웠는가? 북한에 비해, 나아가 묘한 경쟁상대인 미군에 비해서도 꿀리지 말아야 한다는 저 절체절명한 민족주의 정신이 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물론 그 자리서 자원할 수 있다. 세상에 꼭 그런 친구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 동기 중에서도 소위 의협심이랄까 모험심이랄까 그런 정신이 유난히 강한 듯 한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가 공동경비구역 지원을 자원하고 나섰다. K大 다니다 온 친구다.  이 친구는 얼굴이 참으로 미끈하게 잘 생겼다. 또 안경도 쓰지 않았다. 한데 딱 하나가 문제였다. 키가 177센티였다. 180이상이어야 하는 조건에서 불과 3센티 모자랐다. 누구 자원할 사람이라고 JSA 친구들이 외쳤을 때, 그리하여 이 친구가 앞으로 자원하여 나아갔을 때, 


"너 키 얼마야?" 


라는 물음에 


"예 177입니다"


는 답변이 나오자마자 JSA 친구가 그랬다. 


"피라미 좃 만한 게 까불고 있어. 들어가 쒜끼야!" 


그리하여 이 친구는 되고싶은 JSA 근무병이 되지 못했다. 키와 안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이 두 조건은 이 자원병에게는 되지 못한 장벽이었으나 JSA가 되고 싶지 않은(그쪽 근무는 지옥이라고 이미 훈련병들 사이에서 통했다) 친구들에게는 되고 싶지 않은 조건을 만들어내는 기제로 작동했으니, 180센티 이상이 되는 친구들이 키를 잘라낼 수는 없는 법이고, 그리하여 JSA가 되지 않을 다음 조건, 즉, 안경을 쓰는 것으로 가장하는 방식이 있었으니,


하지만 이에서도 문제가 있었으니, 이런 정보를 미리 주위에서 듣고 온 놈들은 이미 논산에서부터 이런 사태에 미연에 대처하기 위해 멀쩡한 눈을 마이너스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고 안다. 하지만 순진한 친구들은 그것도 몰랐으니, 그리하여 내일 JSA 선발이 있다고 예고된 그날을 앞둔 전날, 그 대상자가 될 법한 친구들은 부랴부랴 안경잽이인양 가장하고 나섰으니, 하지만, JSA 그 친구들이라고 바보일쏘냐? 


그리하여, 키 180 이상 되고 안경 쓰지 않은 친구들은 전날 밤 안경쓴 친구의 안경을 빌려 꾹 눌러쓰고 잠을 자야만 했다. 왜? 그래야만 콧잔등 위에 안경 자국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콧잔등 위 안경자국이 짙을 수록 이 친구는 평소에도 안경을 쓴다는 보장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처럼 그때 JSA는 우리에게 공포였다. 물론 나야 키가 180에 훨씬 미치지 못했으니 그 걱정이야 덜었으나 키 180이상으로 안경을 쓰지 않은 친구들은 내 기억으로는 대체로 JSA로 끌려갔다. 그렇지만 누가 봐도 저 친구는 JSA 조건을 만족한다 했지만 의외로 탈락한 친구도 있었으니, 그때야 오죽 이른바 '백' 문화가 작동할 때인가? 이런 친구들은 사돈에 팔촌까지 각종 연줄을 동원해 힘 있는 사람들을 빌려 잘도 위기를 타개했던 것이다. 


한데 이 JSA는 묘한 구석이 있다. 분명 개중 대부분은 비자발적으로 그곳에 개끌려 가듯이, 도살장 끌려가듯이 했으나 그곳 생활 얼마 뒤면, 그 출신이 카투사라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지워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서 카투사는 그림자도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한국군이라는 깊은 각인만이 아로새겨질 뿐이다. 


물론 개중 어떤 이는 나처럼 기냥 편안히 군대생활하면서 미군들과 노닥거리면서 영어도 배우는 이런 생활이 부럽기는 했을 터이지만, 그들은 절대로 카투사라는 기억을 말살해 버린다. 그렇게 투철하게 그들은 누구보다 처절한 한국군이 되어갔다. 그 과정만큼 미국에 대한 증오 역시 커져만 갔으니, 매일 새벽 구보 때면 언제나 미군 막사를 향해 한국 군가를 불러대게 한 그 KRTC 교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얼마전 JSA 병사 몇 명이 익사했다 한다. 그 소식에 갑자기 그 옛날 생각이 났다. 



신경주역


지금은 폐쇄한 과거 우리 공장 연합뉴스 내 블로그에 2008년 07월 25일 08시 42분 30초에 게재한 글이다. 당시 언론문화 한 켠을 그런대로 증언한다고 생각해 전재한다. 



내가 이동하는 거리, 그 장단(長短)을 판별하는 기준은 세 시간이다. 이보다 길면 長이요, 짧으면 短이다. 이 세 시간이란 거리는 내 고향 김천과 지금 내가 사는 서울을 가는 거리다. 가끔 새마을호를 이용하긴 했으나, 대체로 이용한 통일호가 걸리는 시간이 세 시간이요, 자동차로 이동할 때도 한남대교와 김천 톨게이트 간 걸리는 시간도 대체로 세 시간이었다. 세 시간이 너무 길다 했더니, 당시에는 김천 보다 더 아래 사는 대구나 부산 쪽 친구들이 뭐가 기냐고 따지곤 했던 기억이 있다.


어제 전남 나주를 다녀왔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 주변 발굴성과를 취재하기 위함이다. 설명회는 10시 30분 현지에서 예정된 까닭에, 또 나주역에 정차하는 KTX는 몇 대 되지 않는 까닭에, 당일에 시간을 댈 수 있는 KTX는 용산에서 오전 7시 20분에 출발하는 선택 외에는 없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용산에서 나주역까지 2시간 45분 내지 50분이 걸렸다. 그에서 일을 마치고 다시 서울행 KTX에 오른 시간은 오후 5시 40분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2시간 40분 정도만에 용산에 다시 섰다. 현지에 갔다가 내가 아주 친한 분이 모친상을 당했으며, 빈소가 광주에 있다 해서 마침 발굴현장을 견학하러 온 광주박물관 사람들의 자리를 빌려 빈소에 들렀다가 광주역에서 귀환길에 오른 것이다.


나 같은 기자들이 특히 많이 경험하는 일이지만, 출장의 추억이 사라졌다. 1박이란 개념이 사라진지 오래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론 적어도 KTX가 생기기 전까지 영남이나 호남지역 출장은 1박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요즘 1박을 넘기는 지방 출장은 없다. 나 개인적으로 보건대 1박을 넘긴 지방 출장은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았다. 요즘은 전부 당일치기 출장이다. 오전에 갔다가 저녁에 귀환하는 시스템이 정착했다. 




이 나부랭이를 쓰는 지금도 나는 여독이 풀리지 않는다. 나이의 먹어감 때문인지, 좀체 피로가 쉬 풀리지 않는다. 어제 하루 중 여섯 시간을 기차에서 보냈으니, 몸이 버텨내지를 못한다. 어제 서울엔 물 폭탄이 있었다고 하나, 그 시각 나주는 푹푹 쪘다. 바다에 가깝다 하지만, 그래서 바람이 꽤나 불었지만, 저 누른 황토에서 반사하는 폭염은 사람을 죽인다. 


KTX가 초래한 풍경으로 요즘은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는 출장이라고 부산조차 당일치기 출장으로 정착했다는 사실이다. 대구는 말할 것도 없다. 동대구까지는 KTX 전용 레일이 구비된 까닭에 이쪽은 더욱 가관이다. 1시간 45분밖에 걸리지 않으니, 그야말로 후딱 갔다 후딱 돌아오는 출장으로 정착했다. 오죽하면 대구 아낙네들이 아침에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 학교 보낸 다음에 대학로로 행차해 공연보고 쇼핑하고 내려간 대도 남편 퇴근 전이요, 아이들 귀교 전이라 하겠는가?


당일치기건 1박 이상이건 출장은 피곤하다. 젊은 혈기에 한 때 그것이 사람을 알고 땅을 아는 지름길이라 생각해 정신없이 쏘다니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지금 아는 사람 태반이 이때 만난 사람들이니, 나에게 출장은 많은 유산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젠 모두가 피곤하다. 여관방에 하루를 잔다는 것도 이젠 성가시기만 하다.

  

KTX는 한편에선 축복이요, 한편에선 저주다. 



공무원 때려잡는 감사원


이거 많이 다르다. 하지만 다름을 넘어 때로는 경멸 혹은 무시로 치닫기도 하거니와, 이는 대체로 기자를 바라보는 공무원들한테서 자주 나타난다. 그래서 흔히 공무원이 하는 말이 "기자들은 사람 볼 줄 모른다"는 것이다. 

언젠가 문화재청 퇴직·퇴물 공무원 두어 사람과 나를 포함해 이 업계 시니어급 기자 몇 명이 저녁 자리를 한 적이 있다. 한 퇴직 공무원이 이런 말을 했다. "기자들이 어떤 공무원을 가리켜 저 사람 괜찮다. 참 열심히 한다 그런 말 하지만, 우리 정부미들은 그런 말에 아무 말 안 하는 때가 있다. 그건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보는 공무원이랑, 우리가 내부에서 보는 공무원은 많이 다르다"고 했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가? 나는 두 가지 상반하는 시각 중 어느 하나가 옳고 그르다는 방식으로 접근하고픈 생각은 없다. 매일 같이 일하는 사람으로서 그 공무원이 상대적으로 다른 공무원을 정확히 판단할 위치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시각이 언제나 옳은 것만은 아닌 까닭이다. 

나아가 이런 측면에서 기자들의 인적 접촉 역시 특수한 사정에 처하는 일이 대부분이라 사람을 보는 시각이 지극히 편협할 수밖에 없는 숙명이 있다. 아무리 사석이라 해도, 기자와 공무원의 만남은 언제나 기자 시각에서 보면, 공무원은 취재원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는 공무원 역시 마찬가지라, 제아무리 사적으로 친하다 해도, 기자는 기자여서, 언제나 경계하기 마련이며, 그런 경계는 언제나 기자로 하여금, 그 공무원을 좋게 보게 하는 밑거름이 되곤 한다. 예컨대 저 공무원은 언제나 예의가 바르다는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제아무리 조직에서 개판을 치는 공무원이라 해도, 기자한테까지 그리하는 공무원은 거의 없다. 간혹 이 본령을 뛰어넘는 공무원이 있긴 하지만, 그런 공무원으로 말로가 좋은 사례 거의 보지 못했다. 아랫사람 함부로 대하듯이 기자를 그리 대했다가는 해당 공무원은 모가지 열개라도 남아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내가 접촉한 공무원 중에 나한테 안 좋게 인상을 남긴 이는 거의 없다. 그래서 나를 아주 잘 아는 어떤 공무원은 "김 부장은 사람을 너무 볼 줄 모른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 인정한다. 어디 공무원 뿐이겠는가? 공무원이 아닌 사람이라 해도, 나는 언제나 그들에게는 기자라는 범주를 벗어나기 힘드니, 그런 사람들은 대개 나한테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며, 그 때문에, 내가 더욱 사람을 볼 줄 모른다는 말을 듣는 동인이 될 것이다. 

서울정부청사

또 하나 기자와 공무원의 만남에서 고려할 대목은 기자가 주로 대하는 공무원이 어느 정도 직급이 된다는 사실이다. 중앙부처를 기준으로 한다면, 과장급 이상 중고위직과 주로 접촉한다. 노회한 이들은 기자들을 이용할 줄 알며, 실제 이용하기도 한다. 닳고닳은 사람들이라, 기자들을 어찌 요리해야 할 줄도 비교적 잘 안다. 이런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지니 이런 기자와 이런 공무원 사이에는 일종의 인적 커넥션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도 이 짓 오래하다 보니 적어도 내 분야에서만큼은 적어도 존경할 만한 공무원들은 있다. 그들은 공무원으로서 흠결 하나 찾기 힘들다. 정말로 부지런하고, 업무 능력 뛰어나고, 구린 구석도 안 보이는 공무원이 더러 있다. 내가 말한 퇴직 퇴물 공무원도 그런 공무원으로 대체로 평가되는 걸 보면, 내 평가가 썩 틀린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한데 기자가 공무원을 보는 눈이 없 듯이, 이들 역시 그 조직 다른 공무원을 보는 눈이 없기는 피장파장 똥끼나 밑끼나더라. 이들이 아끼는 후배 혹은 부하 공무원들을 보면, 내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이가 다수 포진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한사코 그들이 정직한 공무원이요, 능력있는 공무원이며, 사심 없이 일하는 공무원이라고 감싸곤 한다. 돌이켜 보면 이들 역시 인의 장막과 네트워크에 휘말려, 지극히 사적인 맥락에서 부하 혹은 후배 공무원을 평가하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공무원들은 누가 가장 정확하게 보는가? 내 보기엔 하위직 공무원들이다. 그네들만큼 정확하게 사람을 평가하는 이는 없다. 기자나 고위직 공무원이나 사람 보는 눈이 없기는 피장파장이다. 기자라서 특별히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비난할 일이 못 된다는 뜻이다. 


'이런저런' 카테고리의 다른 글

JSA의 추억  (0) 2018.08.27
KTX가 앗아간 출장의 추억  (0) 2018.08.27
기자와 공무원  (0) 2018.08.26
여명黎明 & 비상飛上  (0) 2018.08.04
용인 내동마을에서 로터스 플라워 감상하며  (0) 2018.08.04
휴가는 아무리 길어도...  (0) 2018.08.01


오늘 새벽 차를 몰아 용인 내동마을로 날았다. 65킬로미터를 달려 도착한 내동마을 연꽃마을엔 해가 뜨지 않은 미명이었다. 

이윽고 동산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데, 석양만큼이나 불그레했다. 

시간이 조금 흘러, 해는 동산 위를 날 듯이 걸텄다. 

어떤 새인지 내가 알 수가 없으나, 온통 깃털이 흰 세 마리가 삼각편대를 이뤄 고공비행을 시작한다. 

역광을 진 새는 순간 까마귀로 변신한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해는 또 다시 떠올랐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 




서울 사람들한테 연꽃 구경이라면 시흥 관곡지나 양평 세미원이 언뜻 떠오르겠지만, 그보다 조금 먼 곳에 아직은 덜 알려진 연꽃 테마단지로 용인 처인구 원삼면 내동마을이란 곳이 있으니, 견주건데 이곳은 화장 잔뜩 하고 강남 미장원에서 한껏 머리치장한 저들에 견주어 그런 인위의 냄새가 훨씬 덜한 곳이라, 그런 번다함과 치장을 싫어하거나 물린 사람들한테 추천하고픈 곳이다.


내동마을엔 각종 대포와 은폐 엄폐용 복장으로 중무장한 언필칭 사진작가 혹은 그 지망생, 혹은 그 동호회 멤버들도 없고, 사람이 적거나 매우 한산한 곳이라 이들을 상대하는 노점상도 없거니와 이들을 겨냥한 전업 상가도 아직 발달하지 아니했다.

장식과 치장을 아직은 모르기에 우리가 일본의 잘 다듬은 정원이나 유럽의 공원과는 왕청나게 달라 한산과 고요와 침잠을 선호한다면 이 연꽃이 지기 전에 한번쯤 오라 손짓하고 싶다.


한적한 농촌마을 들판 드넓은 논에다가 홍련 백련을 잔뜩 뿌려놓았고 듬성듬성 원두막을 만들어 놓은데 지나지 않는다.


새벽, 차를 몰아 경부와 영동고속도로 타고 65키로를 달려 이르니, 해가 막 뜨기 시작했으나, 동쪽 저 만데이 너머로 고개 들이민 해는 구름에 가려 내가 보고픈 그 모습은 아주 잠깐 연출하곤 사라져 버렸다.


이곳 주민이면서 논 주인인 듯한 노인네 한분이 나타나 물꼬를 손본다. 물꼬를 텄는지 그 물꼬 타고 흐르는 물소리 각중에 요란스럽다.


거머리 사냥에 나섰을 물오리 일가족이 내가 나타나자 연잎 사이로 괙괙 소리내며 요란스레 모습을 감춘다. 정자 앉아 담배 한대 빠노라니 갖은 상념 등줄기 땀방울 따라 흘러 돋아난다.

[중국어 한 마디]


假期再长也短,工作再短也长。


휴가는 아무리 길어도 짧고, 근무는 아무리 짧아도 길다. 


*** 중문학도 홍승직 선생 페이스북에 오른 글을 쌔비왔다. 

같은 사람인데도 기자가 보는 사람과 그 조직에서 보는 사람이 달라 곤혹스러울 때가 무척이나 많다. 비단 기자뿐이겠는가? 기자를 대하는 그쪽에서는 늘 기자를 기자로 대하기 마련이며, 그래서 무척이나 말 한 마디를 조심해야 하며, 반드시 해야 말도 한껏 정제해서 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소위 취재원으로 만나는 사람한테 기자가 안 좋은 인상을 지니기는 쉽지가 않다. 내가 기자인 줄 알고 나를 만나는 사람은 언제나 나한테는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보이기 십상이다. 

오늘 우리 곁을 떠난 박호원 선생도 나한테 그리 박힌 인상인지 못내 저어함이 있기는 하지만, 이래저래 그가 생평 직장처럼 삼아 보낸 국립민속박물관 사람들한테도 수소문한 결과와 내가 생전에 그이한테 받은 인상은 무척이나 합치하는 면이 많아 적이 안심이 된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시종 내성적이었다. 말수가 거의 없는 편이었고, 내가 민속박물관 담당 기자인 까닭에 부러 그러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수줍음을 유난히 많이 탄다는 인상을 시종일관 주었다. 숫기 없는 남자? 뭐 그런 느낌이 많은 형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잘 웃었다. 수줍음을 장착한 채 그 큰 눈망울을 뜨고 웃는 모습은 뭐랄까? 걸핏하면 거짓말을 일삼고는 눈치를 보는 어린아해들 같았다. 내가 아는 그는 이렇게 시종일관 선했다. 그런 까닭에 취재원으로서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재미는 없었으니깐 말이다. 

정확한 시점을 당장 확인이 곤란하나, 1988년 학예연구사로 몸을 담기 시작한 국립민속박물관을 그는 2011년 어느 무렵 훌쩍 떠났다. 그 떠나는 과정을 나도 어느 정도 들어 알거니와, 지금은 공개하기 힘든 저간의 사정이 있어 혹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때 말하기로 하고, 아무튼 그렇게 떠난 민속박물관을 뒤로하고 그는 민속 전문 출판사로 명망 있는 민속원에 둥지를 튼 것으로 안다. 

당시 민속원은 선대 회장 업적을 계승한 홍종화 사장 시대가 막 개막한 상태였으니, 이런 민속원과 의기투합해 이 출판사로 부정기로 출근하면서 민속학 관련 출판을 기획했으니, 이것이 바로 그가 편집주간이라는 타이틀로 선보이기 시작한 '아르케북스 시리즈'다. 오늘 현재 총서 105종을 헤아리는 아르케북스는 민속학은 물론 역사학, 인류학 등 다양한 학문 연구 성과를 소개하는 총서로 그 참신성과 디자인 등에서 학계의 호평을 산다. 이 시리즈는 박호원 선생이 없었으면 있을 수 없는 기획이다. 이 시리즈를 볼 때면 언제나 그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퇴직 이후 나는 아마 한 번도 그를 만나지는 못했다고 기억한다. 혹 모르겠다. 이런저런 자리에 한 두번 스쳤을지는. 그렇게 민박을 훌쩍 떠난 그가 7년 만에 들고온 소식이 타계였다. 그것도 본인이 타계했다는 청천벽력이었다. 

정치인 노회찬이 실로 어처구니 없는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 데 이어 소설가 최인훈 선생까지 타계한 소식이 전해진 어제, 민속학계 지인이 "박호원 선생도 쓰러져서 뇌사 상태"라는 말을 전했다. 그렇게 쓰러진 선생이 이틀만인 오늘 낮에 갔다. 영원히 갔다. 아르케북스 총서를 남기고는 표표히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듣자니 그는 지난 22일 오후 4시 조금 넘어 집안에서 쓰러졌다고 한다. 그날이 집안 제삿날이었는데, 제사 준비를 하는 와중에 집안 욕실에서 샤워를 하다가 그만 쓰러져 불과 20분만에 병원에 후송되었지만, 이미 뇌사 판정을 받고는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한다. 선생은 생전에 이미 장기기증을 약속했다고 한다. 부질없는 연명치료는 거부한 셈이다. 이런 고인 의견을 반영해 산소 마스크를 떼어냈다고 한다. 그가 산화함으로써 남긴 장기들은 아마도 다른 생명을 살리는 데 쓰일 것이다. 수줍음 많은 그야말로 의인이지 않을까? 

그는 일찍이 형을 불의의 교통사고로 잃었다. 형이 30대였을 때라고 한다. 형이 죽자 그 형수와 조카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는 민속박물관 사내 커플이다. 이종철 관장 시절 그 비서와 연애를 해서 가정을 꾸렸다. 먼저 박물관을 떠난 부인은 나중에 남편이 박물관을 명예퇴직한다 하자, 군말없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의 간단한 생애를 다음 부고 기사로 정리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마을신앙 연구한 민속학자 박호원 박사 별세

바로 앞선 글, 그러니깐 20년전 내가 만난 초등학교 선생님 이야기는 내가 그 내력을 똑똑히 기억하는 20년 전 내 기사지만, 그 반대편엔 전연 그렇지 아니한 기사가 많아,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비슷한 시기 내 기사 역시 그런 축에 든다. 기자들한테 행정기관이 배포한 무미건조한 보도자료가 주로 그런 축에 많이 들 수밖에 없으니, 본인이 본인 노력을 들여 취재하고 가공해서 만든 기사에 아무래도 정이 가기 마련이고, 그런 기사가 오래도록 그 기자 뇌리에 남을 수밖에 없다. 

문화재청이 오랜 노력 끝에 산하에 문화재 전문 인력 양성을 표방하는 한국전통문화학교라는 4년제 대학 설립 허가를 득하고, 그 문을 열어 1999년 말 첫번째 신입생을 모집하니, 이들이 2000학년도 제1회 입학생이 된다. 전통학교라 하니, 무슨 고등학교 같다 해서 나중에는 마침내 이 역시 오랜 투쟁 끝에 한국전통문화대학교로 이름을 바꾼 이 대학은 출범 당시에는 전통조경학과와 문화재관리학과 두 개 학과만 개설했으며, 입학 정원은 각각 20명이었다. 

당시 신입생 모집 결과를 문화재청은 보도자료를 배포했으니, 이를 토대로 나는 아래와 같은 영혼이 없는 기사를 작성해 내보냈다.  

전통문화학교 합격자 발표

입력 1999.11.03. 14:11 수정 1999.11.03. 14:11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문화재 관련 특수대학교육기관으로 내년 3월 충남 부여에서 개교하는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문화학교(학교장 김병모) 2000학년도 입학시험 합격자가 3일 발표됐다.

전통조경학과(정원 20명)와 문화재관리학과(정원 20명) 등 2개 학과만 우선 문을 여는 2000학년도 합격자 40명 중 전체수석은 문화재관리학과를 지원한 서울 덕성여고 박영록(18)양이 차지했다.

수능시험 성적에 상관없이 1천1백여명이 지원해 28대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한 이번 입시의 가장 큰 특징은 전국적으로 고른 지원과 연세대와 고려대 합격 수준의 상위권 학생이 대거 지원한 것을 들 수 있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합격자 시도별 분포는 서울(27.5%) 거주자가 가장 많아 충청 출신이 많을 것이라는 예상을 깼으며 충남(20%), 전북(15%),경기(10%) 등의 순이었다.

그러나 이들 합격자들이 다른 대학에도 지원할 수 있음에 따라 과연 이들 1차 합격자 중 몇명이 전통문화학교를 택할지 주목되고 있다.

taeshik@yonhapnews.co.kr

내가 이 기사를, 더구나 19년이 지난 그 내용까지 기억할 리가 있겠는가? 

하는 일이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나는 문화재 업계 인사들이랑 온라인 혹은 오프라인으로 연결된 사람이 많다. 개중에서도 박물관이나 문화재청 사람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생각보다는 내가 이 업계에서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조폭과도 같은 지위를 점하는 까닭에 나는 잘 모르나, 나를 아는 문화재 업계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직접 대면할 일은 거의 없고, 그런 까닭에 내가 그에 대해 자세히 알 턱이 없는 그런 문화재 업계 사람 중에 올들어 한 친구가 페이스북에서 눈에 들어왔다. 두어 번 스치듯 인사 정도한 문화재청 직원 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느닷없이 그리스로 가서는 어학 연수하네, 교육받고 있네 하면서 하는 친구였다. 보니, 아마도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그리스를 골라서 연수를 간 모양인데, 잔머리 잘 굴렸다는 인상은 받았다. 영어권은 경쟁자로 미어터질 텐데, 그리스는 누가 가고자 하겠는가? 와! 잔머리 대마왕이다. 하는 그런 인상 말이다. 

한데 이 친구 포스팅을 보니, 조금은 요란스런 구석이 있었다. 연수를 빙자해 인근 유럽 다른 지역을 요란스럽게 싸돌아 댕기며 이런 저런 글과 더불어 사진을 올리는데, 보니, 영 사진이 꽝이었다. 뭐 사진 기본 구도도 안 맞을 뿐더러, 그나마 그런 축에 드는 사진도 절대다수가 아래로 위로만 찍어대니 굴곡이 심해 이만저만 못볼 꼴이 아니었다. 명색이 문화재를 업으로 삼는다는 친구가 우째 문화재 사진을 이리도 못 찍는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니 사진 그 따우로 찍을래?" 그러면서 사진 찍은 아주 기본 사항 몇 가지만 알려줬다. 이런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는지 어땠는지는 모르나, 그 직후 가르침을 실천했다면서 올리는 사진을 보니 훨씬 볼 만은 했으니, 그런대로 쿠사리 찐밥을 준 일이 썩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가 그가 이랬다. "부장님은 기억 못하실지 몰라도(당연히 못하지),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라면서 느닷없이 고랫적 시절 내 기사를 링크해 보내는 것이었다. 보니 저 기사였다. 저 기사 중간에 "2000학년도 합격자 40명 중 전체수석은 문화재관리학과를 지원한 서울 덕성여고 박영록(18)양이 차지했다"는 구절이 있거니와, "저 기사에서 기자님이 말한 박영록이가 접니다" 하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전통학교 1회 입학생 중에 유일하게 졸업과 동시에 문화재청 학예연구사로 입사해 지금은 학예연구관으로 진급한 한나래 군이 있으니, "그렇담 너가 나래 동기냐?" 했더니 그렇단다. 뭐 그렇다고 내가 20년 전 기사에서 저를 언급했다 해서 나한테 특별히 고마운 게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에게 20년전 18살 새파랄 때, 그를 기사로써 언급한 기자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기억에서 까마득히 지웠으나, 그렇게 지워 버린 과거의 내 기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새삼스럽다 할 것이다. 뭐 그래서 기자는 기사를 잘 쓰야 한다는 진부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일도 있다는 일화 소개 정도로 보아주기 바란다. 


딱 20년 전인 1998년, 그때 나는 지금과 여전히 같은 연합뉴스라는 곳을 직장으로 삼기는 했어도, 일하는 부서는 지금과 같은 문화부가 아니라 사회부라는 데였다. 소속이 다르다 함은 하는 일이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해 나는 소위 경찰기자라는 것을 하다가 그해 중반쯤 담당이 바뀌어 서울시교위와 기상청을 맡게 되었으니, 이 시절이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해직시절에 비견할 만한 황금기였다. 왜인가? 사회부에서도 시교위와 기상청은 업무 부담은 거의 없고, 거의 모든 보도는 소위 풀(공유)이 원칙이라, 다른 기자를 물먹이는 일도 없었고, 내가 물을 먹을 위험성도 없었다. 게다가 대성학원이니 종로학원이니 중앙교육이니 하는 입시학원도 나와바리에 둔 까닭에, 이들이 가끔씩 기자실로 와서는 실로 적절히 때거리로 마련해주는가 하면, 돌아가면서 기자실 밥도 사던 때니깐 말이다. 

뿐인가? 서울시내 일선 고교 교장들이 가끔씩 개고기 대접을 하기도 했으니, 그때 좋다는 개고기집은 다 다녀봤다 해도 좋다. 딱 하나 불행은 그런 꿈과도 같은 생활이 딱 6개월만 주어졌다는 점이다. 뱃가죽 기름기 꽉 낀 그 시절은 그 해 연말, 12월 1일자로 인사 이동과 더불어 문화부로 와서 문화재와 학술을 담당하게 되면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곧이어 어쩌다가 느닷없이 문화체육관광부라는 출입처까지 뒤집어 썼으니, 지금 광화문 앞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쓰는 그 건물을 문화부가 쓸 때였다. 여담이나 그때가 김대중 정부 시절이라, 신낙균 문화부 장관 시절이었고, 대변인은 나중에 문화부 차관을 거쳐 국회의원까지 역임한 김장실 선생이었다. 

그 좋다는 짧디짧은 시교위 담당 6개월간 내가 유일하게 쓴 단독기사가 있었으니(이것도 실은 전통위반이었다. 시교위 모든 기사는 풀이 원칙이었으므로, 이를 나는 어긴 셈이다.) 아래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본문이 궁금하시면 아래 제목을 클릭하시면 된다.  

<화제>49년간 교단에 선 서울삼광초등 李玉禮교사

당시까지만 해도 초중등 교사는 65세 정년 퇴직이라, 이를 코앞에 둔 한 초등학교 여교사가 무려 49년째 교사생활을 한다는 것이었으니, 서울 용산구 후암동 삼광초등학교 5학년 3반 담임 이옥례(李玉禮) 교사(64)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 자세한 내력은 기사 본문에 충분히 언급되었으므로, 略하기로 하거니와, 이 분은 실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여전히 같은 용산구 남영동 처가에 빌붙어 살게 해주시는 마누라의 어머니, 곧, 나에게는 장모님 건물에 세든 한 음식점 부부 따님의 담임선생이였다. 이 따님과 어쩌다 이런저런 노가리를 풀다가, "우리 담임 선생님이 우리나라에게 가장 오래 선생님 생활을 하신 분이래요" 하는 말을 듣고는 취재에 들어가 보니 막상 저리되었던 것이다. 

이게 아마 순전히 우리네 언론 취재 전통이기도 한 듯한데, 이런 인터뷰성 인물 탐구에서 빠질 수 없는 대목이 가족사 내력이다. 저 기사 말미에는 "許星萬씨(66)와 결혼해 자녀 둘을 둔 그에게 許京萬 전남지사, 만화가 허영만씨, 허병만씨 순천대 총장은 시동생들이다"는 언급이 있거니와, 더 자세히 쓰지는 않았지만, 녹록치 않은 내력의 여인임을 엿볼 수 있다. 

보다시피 이 기사는 내가 그 취재 내력을 똑똑히 기억한다. 하도 많은 인상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후 이옥례 선생 근황은 전연 알지 못했다. 지금 고2인 아들놈 역시 삼광초등학교를 다니기도 했지만, 이 분은 이미 퇴임한 뒤였다. 그럼에도 이 분은 아주 가끔씩 주기발작적으로 그 시절을 생각케 하는 취재원 중 한 사람이다. 그 후속의 삶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그 옛날 이런 사람이 있었고, 그런 그를 내가 취재해 기사화하기도 했다는 그런 막연한 기억 환기 차원에서 떠오르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제다. 나랑 페이스북으로 연결된지는 아마 적어도 몇 년 이상은 되었을 법하고, 그 기간 내 포스팅 같은 데 아주 자주 좋아요를 누른다거나 아주 가끔 댓글을 다는 한 여성이 있어, 개중 어떤 댓글을 보니, 내가 사는 남영동이랑 10분 거리에 산다고 했다. 직접 대면한 일은 없었는데, 시종 단아하다는 느낌을 주는 여성이었다. 같은 동네 주민이라는 반가움 때문이랄까,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메시지를 통해 그에게 말을 걸었더니, 이내 반응이 있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나 보니 뿔싸, 그가 바로 저 이옥례 선생이 언급한 두 따님 중 한 분이라 한다. 한데 그 관계가 "법적인 따님"이라는 것이었으니, 이는 프라이버시 문제라 더는 자세한 말을 할 수 없거니와, 아무튼 그 반가움 혹은 의외성에 새삼 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리기도 했다. 

듣자니, 이옥례 선생도 그렇고 이 분의 남편이자, 저 페친의 아버님 역시 2014년에 나란히 타계하셨다 한다. 

한데 내가 더 의아한 점이 있었다. 이 페친은 도대체 어찌 내가 20년 전 그 기사의 작성자임을 알고 있었을까? 그는 내가 문제의 기사 작성자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 모바일 정보창고 2018.07.24 09:10 신고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무덥지만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 되세요~ ^^

  2. yisabu 2018.09.10 16:59 신고

    어머니에 관한 기사 작성자를 자식이 왜 모르겠어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