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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저런 곳에 문득문득 생각한 바를 글로써 싸지르는 스타일이라, 어찌하다가 페이스북에서 '상군서'로 검색어를 넣으니, 회원제로 운영하는 그 그룹 중 하나인 '문헌과문물(文獻與文物)' 2012년 2월 6일자에 올린 다음과 같은 내 포스팅이 걸린다.  

 

위조 방지 禁令과 울진 봉평신라비


상군서(商君書)권 제5 정분(定分)에 이르기를 


有敢剟定法令,損益一字以上,罪死不赦。


감히 법령을 삭제하거나 한 글자 이상을 빼거나 보태는 일이 있으면 사형에 처하고 사면하지 말아야 한다


고 하고, 같은 편에서


及入禁室視禁法令,及剟禁一字以上,罪皆死不赦。


(만약 법령집을 보관하는) 금실에 들어가 금지된 명령을 살펴보거나 한 글자 이상을 더하거나 빼거나 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고 사명하지 말아야 한다


고 했다. 


이 정신이 가장 투철한 텍스트가 바로 봉평비다.


내가 늘상 지적하듯이 우리 고대사 사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중국사 일본사 모든 문헌이 한국사 사료임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한다.



이에서 말하는 봉평비란 울진 봉평 신라비를 1988년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지금은 그 인근에 세운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에 전시 중인 상고시대 신라 비석을 말한다. 높이 204cm 변성화강암을 울뚱불퉁하니 대강 사면으로 만들되 앞면만 밀어서 글자를 새겼으니, 이에서는 10행 398글자가 확인되거니와, 이는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건립한 것이거니와, 학계 통설에 의하면 비문 핵심요지는 


모즉지 매금왕(법흥왕)을 비롯한 14명의 6부귀족들이 회의를 열어서 어떤 죄를 지은 '거벌모라(居伐牟羅) 남미지촌' 주민들을 처벌하고, 지방 몇몇 지배자들을 곤장 60대와 100대씩 때릴 것을 판결한 것이다. 


고 하거니와, 이는 오독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비석 마지막에는 "字三百九十八"이라는 문구가 보이거니와, 이중에서도 字라는 글자를 어처구니없이 子로 오독해서는 파천황을 방불하는 주장이 버젓이 행해졌으니, 이 글자는 첫째 글자 모양으로 봐도 그렇고, 둘째 문맥으로 봐도 字임이 너무나 명백하다. 


다시 말해, 398이라는 숫자는 이 비석에 새긴 총글자 '숫자'가 398자라는 뜻이다. 


문자를 제대로 판독하지 못했으니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다. 


이 '글자수 398'이라는 문구가 왜 튀어나왔는지를 아무도 해명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 비석은 발견 당시에도 잠깐 398이라는 숫자가 비석에 적힌 글자 수를 의미한다는 말이 있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장님 코끼리 코 우연히 만지듯, 그런 말이 잠깐 나왔다가는 쑥 들어가고 말았다. 


"字三百九十八"을 포함해서 이 비석에 적힌 총 글자수를 398이라고 밝힌 이유를 푸는 열쇠가 바로 상군서인 것이다. 저 상군서를 모르면, 저 답을 풀 수가 없다. 


하지만 신라사 전공자 중에 상군서를 읽은 이가 없다. 상군서가 무슨 똥개 이름인 줄 안다. 저 상군서 말대로 법률 조문은 한 글자만 바뀌어도 전체 맥락이 바뀌어 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그리하여 위조 방지를 천명했으니, 398이라는 숫자를 밝힌 첫째도, 둘째도 이유는 바로 법률 조문 위조방지였다. 


이건 법령집이니, 이걸 바꾸는 놈은 가만 안 두겠다는 뜻이다. 



이로써 우리는 저 봉평비가 특정한 사건에 대한 판결문이라는 학계 압도적인 해설 역시 잘못임을 알 수 있다. 저 봉평비는 법률 포고문이다. 개별 사건에 대한 판결문일 수가 없다. 












《추강집(秋江集)》을 읽다가 추강(追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병오년(1486) 섣달그믐을 공주(公州) 국선암(國仙庵)이라는 절 암자에서 보낸 시를 목도하곤 각종 검색기로 국선암을 돌리는데 어딘지 걸리지 않는다. 《승람(勝覽)》에도 안 보인다. 그 위치로 보아 마곡사(麻谷寺) 암자일 가능성이 큰데, 관련 지리지나 마곡사 사적기를 더 찾아봐야겠다.


추강이 차현(車峴), 곧 지금의 차령산맥을 넘으면서 쓴 시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있다. 추강 당시 조선 전기에는 있었던 국선암이 후대 언제인지 완전히 소실됐을 가능성도 있고, 나중에 이름을 바꿨을 가능성도 있다. 


國仙庵은 명칭으로 보아 산중 암자이며, 仙이라는 글자로 보아서는 구중심처에 있었던 듯하다. 아래 《추강집》에 수록된 일련의 시는 국선암을 공간 배경으로 삼는 듯하다.


秋江集 秋江先生文集卷之三 詩 五言絶句○六言絶句○七言絶句

丙午除日。公州國仙庵守歲。


병오년(1486·성종17) 섣달그믐 공주(公州) 국선암(國仙庵)에서 밤을 새우다


공산 섣달 그믐날 밤 한기 생기는데 

비구들 범패 소리 물리도록 듣노라

公山除日夜生寒 

倦聽比丘梵唄聲


따라온 어른 아이 모두 잠에 빠져들고 

나 홀로 선승 따라 밝은 새벽 지키노라

從我冠童皆睡着 

獨隨禪衲守天明


정미년(1487) 정월 초하루

금강 서쪽서 맞는 객지의 정월 초하루 

천리 밖 사람이 편지 한 장 가져왔네

客中元日錦江西 

千里人來一紙書


마음 씻고 부처 참배도 하기 전에 

폐와 간이 고갈하니 사마상여 신세네

未及洗心參佛祖 

肺肝枯渴馬相如


춘첩자(春帖字) 2수.

모든 일이 마음 아프게 눈앞에 펼쳐지니 

새벽까지 차가운 서재에서 잠 못 이루네

萬事傷心在目前 

寒齋徹曉祗無眠


옷 걱정 밥 걱정에 걱정이 끝이 없거늘 

다시금 병오년 새로 만나게 되었네

虞衣虞食虞無已 

更與相逢丙午年


오두막에서 봄을 맞은 머리 기른 승려 

추위 위세 아직 남아 몸이 덜덜 떨리네

圭竇逢春有髮僧 

寒威不滅冷稜稜


아이 불러 일과로 묵은 책 외게 하노라니 

나도 몰래 백발이 귀밑머리에 더해지네

呼兒日課塵編誦 

不覺霜華鬢上增


이들 시 중에서도 섣닫 그믐에 수세하면서 절에서 범패를 공연하는 이유는 이날 밤을 새야 흰눈썹이 생기지 않는다는 도교의 소위 경신 신앙에서 유래한 흔적이거니와, 추강은 선승과 더불어 밤을 샌 것으로 나온다. 이를 역자 정출헌은 이때 종친 어른들과 종들이 등장하는 점을 근거로 추강의 친척 장송 의례의 일환으로 추정하기도 했는데, 잘못 짚은 듯하다. 

<Monument of King Muryeong> 

King Muryeong's 'Big Tomb', or the Graveyard of his Clan?

Kim, Tae-shik

The discovery and excavation of King Muryeong's tomb in 1971 has been great help to solve many questions or mysteries concerning the history of Baekje, but at the same time it has brought on many problems. In that respect its discovery was not only a great blessing, especially to historians, but it also remains to a huge agony to them. One of the unsolved problems in relation to the tomb is 'Big Tomb'(大墓). The two epitaphs excavated in the tomb say the dead bodies of King Muryeong and his wife were shifted to the 'Big Tomb, and buried in it eventually. Almost all of the historians interested in it maintain that the 'Big Tomb' indicate the present King Muryeong's tomb, which is located in the Songsan-ri tomb area, Gongju, the capital of Baekje during the reign of the king(reigning from 501 to 523 A.D.) Nobody has raised any question on that.

But much to their regret, the 'Big Tomb'(大墓) is far away from such an understanding. The expression of the 'Big Tomb', literally meaning 'Big Tomb, makes appearances sometimes in the chinese textual documents of the same age with the period of King Muryeong, or near to it, and more importantly, in the majority of such cases '大墓' does not mean 'Big Tomb', it means the area of tombs or the whole graveyard belonging to a certain clan or family. In brief, the 'Big Tomb' is not a tomb, but a grave area. Therefore the 'Big Tomb' is a collection of many tombs. That means the 'Big Tomb' is a collective noun.

So we can now conclude that the dead bodies of King Muryeong and his wife were shifted to the graveyard of their clan. It can be also great help to the social systems that sustained the dynasty of Baeckje. Its royal familly and high-class clans were operating their family graveyard respectively.

<Songsanri Tumuli>

<소위 母本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

실을 의미하는 糸(실 사)가 그 글자 의미를 한정하는 부수로 들어가 있는 데서 엿보듯이 '紀'라는 말은 본래 그물 주둥이를  오므려 조는 '벼리'를 의미한다. 이 벼리를 꽉 조으면, 전체를 갈무리한다. 

이 글자는 아울러 記와 같은 발음, 같은 뜻으로 기록하는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기색은(史記》에서 '本紀(본기)'라는 말을 설명하기를 "紀者, 記也. 本其事而記之", 다시 말해, 이 경우 紀는 기록한다는 뜻이다. 그 사실에 바탕을 두고 그것을 기록하는 까닭에 본기라 부른다고 한 것이 그 증거다. 소위 말하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에서 재위한 왕 순서를 따라 일어난 주요한 일들을 요약한 부분을 본기라고 한 까닭은 그것이 기전체 전체 역사서에서 벼리, 곧 가장 중요한 축이기 때문이다. 

이런 紀를 응용한 말 중에 '세기世紀'가 있다. 이 경우 이 말은 '世記'와 같다. 그렇다면 世紀 혹은 世記는 무슨 뜻인가? 순차별 전기라는 뜻이다. 순차는 무엇인가? 시간을 축으로 삼아 먼저와 나중을 구별하되, 먼저 해당 직책에 있던 사람 혹은 사건은 앞세우고 뒤따르는 사람 혹은 사건은 나중에 쓰는 방식으로 정리한 기록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세가世家'라는 말이 있다. 기전체 역사에서 이는 왕대별 주요 사건 일지다. 중국과 같은 천자국에서는 천자의 순차별 사건 일지를 본기(本紀)라 하고, 제후국별 사건 일지는 세가(世家)라 해서 구별하지만, 피장파장 똥끼나밑기나 같은 말이다. 

삼국사기는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 왕대별 사건일지를 본기라 했지만, 조선초기 고려사를 정리할 적에는 천자한테나 쓰는 본기라는 말을 쓰는 일은 참람하다 해서, 왕건 이래 마지막 공양왕에 이르는 사건 일지는 세가라 했다. 

《화랑세기(花郎世記)》가 있다. 《삼국사기》 김대문 열전에 그가 지은 책 중 하나로 등장한다. 한데 그것을 베꼈다고 간주되는 남당 박창화 필사본에는 그 제목이 《화랑세기(花郎世紀)》다. 둘 사이 표기 차이를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도 없지는 않은 듯하나, 피장파장 같은 말이다. 

<화랑세기 필사자 남당 박창화>

이 《화랑세기(花郎世記)》가 명칭으로 보아 화랑들의 열전일 것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그 재출현 이전에 그것이 화랑의 '순차별 전기'일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고 단언해도 좋다. 제목만 봐도 《화랑세기》는 화랑들의 단순한 열전이 아니라 화랑을 순차로 역임한 자들의 전기다. 실제로 드러난 《화랑세기》도 풍월주라고도 한 우두머리 대표 화랑 생애를 순차적으로 전기다. 이는 초대 위화랑 이래 진공에 이르는 역대 풍월주 32명 전기다. 

《화랑세기(花郎世記)》 진위 문제를 논할 적에 하필 '世紀'인가는 이만큼 중요한 잣대가 된다. 


책 전체에 대한 영어번역은 아래 참조


http://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Perseus%3Atext%3A1999.02.0026


http://mcadams.posc.mu.edu/txt/ah/Livy/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는 고대 로마 역사가다. 라틴 이름이 Titus Livius이며, 영어로는 Livy로 표기하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다. 기원전 59년 혹은 64년 파타비움(Patavium) 출생이니, 이곳은 베네치아(Venetia), 현재의 이탈리아 파두아(Padua)다. 서기 17년 고향에서 죽었다. 가이유스 살루티우스 크리푸스(Gaius Sallustius Crispus, 혹은 살루스트Sallust), 그리고 타키투스(Tacitus)와 더불어 고대 로마 3대 역사가로 꼽힌다. 그를 이리 만든 저작은 《로마사History of Rome》다. 그의 역사서술 방식과 역사철학은 서구 역사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초기 생애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출신 가문도 알 수가 없다. 고향 파타비움은 부유한 도시로 엄격한 도덕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리스어를 배우려 했지만, 삼두정치에 따른 내전과 기원전 44년 줄리어스 시저 암살 등으로 초래한 불안정한 사태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간주된다. 그의 그리스 번역에서는 오류가 심심찮게 발견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수사학과 철학을 배우고 철학 대화록도 썼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일실하고 말았다. 젊은 시절 경력은 알 수가 없다. 그의 가문은 다 불확실하지만 대단하지는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이름이 로마에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훗날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일컫는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승리하고 차츰 정국이 안정되고 나서다. 그의 저술을 통해 그가 기원전 29년 혹은 그 직전 로마사 저술을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그가 로마로 주거를 옮겼으니 관련 자료 습득을 위해서였다. 그리스인 Dionysius of Halicarnassus도 같은 목적을 위해 기원전 30년 로마에 정착했다. 


이후 생애 대부분을 리비우스가 로마에서 보낸 것은 분명하다. 로마생활 초창기에는 아우구스투스 요청으로 훗날 황제가 되는 어린 Claudius의 선생 역할을 했으니, 이때가 아마도 서기 8년 무렵이었던 듯하다. 당시 로마에는 시인들인 Horace, Virgil, Ovid, 그리고 이들을 후원한 Maecenas와 활동했지만 리비우스가 그들과 밀접한 관계는 아니었던 듯하니, 저들의 글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관한 기록 중에 아우구스투스가 그를 ‘폼페이 사람(Pompeian’이라 불렀다는데, 이는 그의 솔직하면서 독립적인 성격을 암시한다. 그의 필생 일은 로마사 저술이었다. 


그의  《로마사》는 라틴어 원제가 'Ab urbe condita libri'이니, 글자 그대로는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of Rome)"라는 뜻이다. 리비우스는 이를 5권씩 출판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때 권이란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작업이 복잡해지자 이런 순차적 출간 패턴을 버리고는 총 142권을 완성했으니. 개중 11~20권과 46~142권은 망실됐다. 


근자에 시작한 국내 완역본(아래 소개)에 붙인 로마사 전공자 김덕수에 의하면 "두루마리 1개에 담긴 분량은 오늘날 단행본의 63쪽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리비우스 로마사 142권은 오늘날 책으로 환산하면 9230쪽 정도이고 단행본 한 권을 평균 300쪽이라고 가정하면 약 31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다"고 한다. 그러면서 김덕수는 리비우스가 이 책을 거의 43년 동안 썼으니, 산술적으로 보면 1년에 215쪽, 3.3개 두루마리 책을 쓴 셈이라고 본다고 한다.(아래책 9쪽) 


권별 구성은 다음과 같다. 


1~5 로마 건설 이후 갈리아인들(the Gauls)에 의한 로마 약탈(기원전 386)

6~10 The Samnite wars

11~15 이탈리아 정복

16~20 제1차 카르타고 전쟁

21~30 제2차 카르타고 전쟁(기원전 201년까지)

31~45 Perseus와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들(기원전 167까지)

46~70 내전 때까지 일들(기원전 91년까지)

71~80 Marius 사망 때까지 내전(기원전 86년까지)

81~90 Sulla의 죽음(기원전 78)까지 내전

91~103 Pompey의 승리(62 BC)까지 

104~108 공화국의 마지막 시대

109~116 시저 암살(기원전 44)까지 내전

117~133 시저의 죽음에서 악티움 해전까지

134~142 기원전 29~기원전 9년까지


망실된 권들도 일부는 다른 사람들이 인용한 형태로 찔끔 전하기도 하며, 120권이 다룬 웅변가이자 정치가인 Cicero 죽음에 대한 내용도 파편 형태로 전한다. 45권 이후 나머지 권들은 줄거리만 남았다. 


이들 권은 서기 1세기에 접어들면서 계속 쓰였으니, 그 까닭은 전체 분량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연설문집과 요약집도 있었으니, 개중 2건 일부분이 남아 있으며, 37~40권과 48~55권 요약을 포함하는 서기 3세기 이집트산 파피루스와 Periochae로 알려진 4세기 무렵 책 전체 요약분도 있다. 


121권 Periochae에 남은 주석으로 볼 때 아마도 그 이후 권들은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수 사망 이후 발간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악티움 해전 이후 기원전 9년까지 다루는 마지막 20권이 애초 리비우스가 생각한 책 체제에서 나중에 추가된 것이며, 아울러 아우구스투스 생전에는 출판이 정치적으로 출판이 힘들었음을 암시한다. 


구상은 원대했고 실제 작업도 방대하니 1년에 평균 3권씩 쓴 셈이다. 정치가 小Pliny한테 보낸 그의 편지를 보면 이 일을 포기하고 싶지만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라 그리 할 수 없다는 말이 보인다. 나아가 이 편지에는 Cádiz 한 시민이 오로지 그를 만나고 싶다며 냅다 로마로 달려온 일도 있다고 말한다. 


                   <Roman expansion in Italy..from https://en.wikipedia.org/wiki/Roman_expansion_in_Italy>


그 창립에서 현재에 이르는 로마사를 쓴다는 계획이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런 일은 로마의 첫 역사가로 평가되는 Quintus Fabius Pictor 이래 로마에서 200년간 유행했다. 그의 로마사 저술은 두 가지 동기를 지적할 수 있다. 호사가적 취미와 더불어 정치적 동기가 그것이다. 특히 기원전 100년 이후 고대 의식과 가문 족보, 종교 전통 등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이 일었다. 이런 관심에서 많은 전문 저작이 나왔으니, Cicero의 친구이자  correspondent인 Titus Pomponius Atticus는 트로이족에 대한 연대기를 썼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에트루리아 종교(Etruscan religion)를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그의 시대 위대한 학자인 Marcus Terentius Varro는 백과사전인 Divine and Human Antiquities를 출판했다. 


이전 역사가들은 대중적 인물이었고, 국가 업무랑 연관이 있었다. Fabius Pictor는 praetor였으며, 大Cato는 consul이자 censor였고, Sallust는 praetor였다. 더불어 Sulla라든가 Caesar는 권력자로서 한가한 시간에 역사를 썼다. 어떤 이들에게 역사 저술은 정치적인 합리화 도구이기도 했으니 Caesar의 갈리아 정복기가 이에 해당한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역사는 교양 오락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의 전망과 배경을 포함한다. 역사는 현재를 설명하거나 변명하는 정치적 학문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리비우스는 정치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역사가라는 점이 이채롭다. 이는 그의 역사저술에서는 약점이기도 했으니, 로마 정부가 어떻게 운용되는지 그 시스템을 알지 못했으며, 이런 무지가 그의 저술에서도 때론 드러난다. 나아가 힘이 없었기에 정부 소장 각종 자료를 열람할 수 없었다. 


이상 설명은 다음을 참조해 대폭 축약한 것이다.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Livy


로마사 서문에서 리비우스는 고대사를 쓰는 이류를 "나는 고대시대가 보람을 안겨주는 연구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고대에 물두하고 있는 동안에는 오늘날의 세계를 오랫동안 괴롭혀 온 여러 난제들로부터 잠시 시선을 돌릴 수 있고, 또 현대 생활을 다루는 작가에게 엄습하는 불안감-물론 이런 불안감으로 인해 역사가가 진실을 은폐하는 일은 없다-을 느끼지 않으면서 글을 써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아래책 16쪽)고 썼다. 


나아가 리비우스는 "나는 독자들이 우리의 조상이 어떤 종류의 삶을 살았고,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로마의 권력이 처음 획득되어 그 후 계속 확장되어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정치와 전쟁의 수단을 사용했는지 등을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해 보기를 촉구한다. 그런 다음 우리나라의 도덕적 쇠퇴의 과정을 살펴보기를 권한다"(16쪽)고 하면서 "역사의 연구는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약이다. 왜냐하면 역사서는 모든 사람이 뚜렷이 볼 수 있는 무한히 다양한 인간 경험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 기록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나라를 위한 모범적 사례와 경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좋은 일들은 모범으로 삼고, 철저히 부패한 지저분한 일들은 타산지석으로 삼아 피해야 할 것이다"(17쪽)고 해서 동시대 동아시아 역사학이 그런 것처럼 철저한 역사 감계주의 전통에 섰음을 본다. 요컨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자는 역사학이다. 


그의 로마에 대한 찬사는 신앙에 가까웠던지 "우리나라보다 더 위대하거나 순수한 나라는 없다고 생각하며 또 훌륭한 시민들과 고상한 업적의 관섬으로 볼 대 우리나라를 따라올 나라는 없다고 진심으로 믿는다"(17쪽)이라고 말한다. 



리비우스  《로마사History of Rome》는 국내 번역이 없다가 최근에야 선보이기 시작했으니 이종인이 옮기고 도서출판 현대지성에서 이번 달에 첫 권으로 나온  《리비우스 로마사》가 그것이다. 이 첫 권은 제1권 이래 제5권까지에 해당한다. 


출판사 예고를 보면 이 번역은 전 4권으로 번역될 모양이다. 추천글을 로마사 정통 전공자로 현재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이면서 역사학회장인 김덕수가 썼다. 


역자는 전력을 보니 1954년 서울 태생으로, 고려대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영어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보니 영어본을 옮겼다. 그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이종인은 그 자신을 소개하기를 "전문번역가로 활동한 이래 지금까지 140권의 책을 번역했으며, 500권을 목표로 열심히 번역하고 있다"고 했으니, 그 기개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이 번역본을 토대로 향후 이 분야 직업적 학문종사자에 의한 좀 더 완벽한 라틴어 원전 번역이 나왔으면 싶다. 

594쪽, 2만2천원. 



국가전자도서관 검색 결과는 아래와 같다. 


http://www.dlibrary.go.kr/JavaClient/jsp/ndli/Search/rda_52.jsp?menu=1

내가 이곳에서 영정조 때 활약한 이용휴(李用休.1708~1782)-이가환(李家煥.1742~1801) 부자의 글을 소개했거니와, 이번에는 이용휴가 두 살 아래 친동생 이병휴(李秉休.1710~1776)가 향년 67세로 먼저 세상을 떠나자 이를 애도하면서 지은 제문(祭文) 두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당시 용휴는 서울에 머물고, 동생은 고향인 충청도 덕산현(德山縣) 고산면(高山面) 장천리(長川里)라는 곳으로 낙향해 있다가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아우가 죽은지 한 달이 지났으나 병이 들고 길이 멀어 가지 못하고 제문을 지어 애도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이병휴는 字가 경협(景協)이요 號는 정산(貞山)이다. 성호 이익의 수제자로 역학(易學)과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둘째 제문은 첫 대목에서 서울과 장천이 멀어 아우의 상에 가서 직접 영결하지 못하는 심정을 서술했다. 죽음에 임박해 벼슬과 문집과 자식 가운데 무엇이 가장 소중하냐는 토론은 당시 사대부의 가치 관념을 엿보는데 귀중하다.


제문 1 : 아우 정산처사(貞山處士)를 여의고(祭舍弟貞山處士文)


아아! 너는 경인년(庚寅年. 1710)에 태어나 나보다 두 살 아래다. 그러나 내가 병을 잘 앓고 허약하여 3년이 지나도록 어머니 품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너와 함께 한 젖을 먹어야 했으며, 한 강보에 누워야 했다. 조금 커서는 같은 책을 공부했고, 같은 제목의 글을 써야 했다.

장성해서는 행동과 학업을 서로 본보기 삼아 실천했으며, 도리와 의로움을 서로 권장했다. 몸은 비록 나뉘어 있었으나 기상과 뜻은 서로 통했다. 늙은 뒤로는 나는 황화방(皇華坊) 옛 집에 살고, 너는 호서(湖西)의 이산(伊山)에 사니 300리나 떨어져 지냈으므로 늘 울적하게 지내는 쓸쓸함을 느껴야 했다. 그렇지만 때때로 서찰을 주고받으며 목소리를 전하곤 했는데 이제 삶과 죽음이 영원히 갈렸으니 슬프도다!

형제라는 이름이 적지 않다. 과거에 같이 합격한 사람도 형제라 부르고 의형제를 맺은 사람도 형제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인위적인 결합일 뿐이요 인위적 결합은 잃게 되면 다시 얻을 수도 있다. 또 사촌형제도 있고 고종사촌, 이종사촌 형제도 있다. 이들은 하늘이 맺어준 형제이긴 하나 입는 상복(喪服)에 차등이 있는 것처럼 그들과 얽힌 감정 또한 차등이 있게 마련이니 모든 게 친형제와 같지는 않다.

나는 기묘년(己卯年.1759)에 누님을 여의었고 신사년(辛巳年.1761)에 형님을 여의었다. 그래도 그분들이 나이 순서를 따라 돌아가심을 위안으로 삼았다. 이번에는 또 너를 잃었으니 순서를 거스른 일이라 위안을 삼을 길이 없구나. 태평한 세상에서는 형이 아우를 잃고 哭하는 일이 없다 하더니 그 말도 빈발이구나.

너는 나이 67세이니 벌써 하수(下壽)를 넘겼다, 우리 10대조 부승공(副丞公)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라 아무런 유감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네가 남긴 고아는 겨우 네 살. 네가 계사년(癸巳年.1713)에 고아라 칭하던 나이와 공교롭게도 똑같구나. 이것이 떠나는 너를 가슴 아프게 하고 살아남은 자에게 무궁토록 눈물을 떨구게 하는 이유가 아니더냐?

오호라! 너는 하늘이 부여한 자질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집압에서 학문을 물려받아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그 학문을 세상에 펼쳤다면 필시 볼 만했으련만 때를 만나지 못해 숨기고 감추어 버렸다. 세상에 펼치고 펼치지 못한 것이 너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만 군자들이 사적으로 한탄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아! 무시(無始) 이래로 다행히 자네와 함께 한번 만났으니 무종(無終) 이전에 혹시라도 다시 자네와 만날 수는 없을런지? 그 여부를 기약할 수 없구나.

오직 저 덕풍(德豊) 한 구비에 산은 고요하고 구름은 한가로이 떠 있을 터인데 그 모습이 네가 뒤로 남긴 초상이로구나. 그것을 보면서 네 모습을 상상이나 할 뿐이니 아아! 슬프도다.


제문 2 : 다시 아우를 애도하며(再祭舍弟文)


서울에서 덕산(德山)까지 가려면 열 한 번은 쉬어야 한다. 비록 네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내가 즉시 길을 나선다 해도 네 살아있는 얼굴은 보지 못하고 네 죽은 얼굴만 볼 수 있을 것이다. 부고가 도착한 뒤에 아무리 빨리 말을 달려간다 해도 죽은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벌써 염습하고는 입관(入棺)했을 것이다. 지금 시간에는 또 관을 들어올려 무덤에 집어 넣었을 터이니 사람으로서의 일은 벌써 끝이 났으련만 나는 묘혈(墓穴)을 내려다보 보고 슬픔을 쏟아내지도 못하겠구나. 비록 밥을 먹고 숨을 쉬며 세상에 몸을 붙여 산다고 하나 눈을 감은 채 아무 것도 모르는 자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아아! 우리 현제가 어머니 어굴을 뵙지 못한 지가 벌써 한 세대가 흘렀다.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는 반드시 어머님을 뵈올 수 있으련만. 30년 동안 어슴푸레 떠올리며 한숨을 쉬던 일이 시원스레 풀릴 테고 이 못난 자식의 지금 살아가는 꼴도 그 김에 들으실 수 있으리라.

아! 내 일찍이 너와 더불어 죽고 사는 것의 우열을 논할 때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 최고위 직책과 제 키 높이의 문집과 슬하의 자식 세 가지 가운데 무엇이 가장 소중하겠는가?”

너는 그 때 대답했다.

“관직은 외물(外物)에 불과하고 자식 역시 나를 벗어나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문집은 이름을 영원히 남기는 데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글은 입으로 토해내긴 했으나 자식은 피를 나눠준 것이니 크게 차이가 날걸쎄”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7월 27일 신시(申時)에 두 눈을 힘겹게 뜨고 원아(元兒)를 쳐다보았다고 하니 응당 내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으련만. 내 너를 마주하고 그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으니 안타깝구나.


아아! 너는 장천(長川)에서 태어나 장천에서 죽고 또 장천에 묻힌다. 그 중간에 노닌 곳으로는 아현동(阿峴洞), 정동(貞洞), 구호(鷗湖), 섬리(剡里)가 있긴 하지만 모드 그저 지나친 곳이요 뜬구름 같은 풍경일 뿐이다. 네 신기(神氣)가 내려오고 네 넋을 묻을 곳으로 모두 장천에 있다. 그곳은 바닷가에 있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으나 우리 두 사람을 태어나게 했으니, 땅의 신력을 욕되게 하지는 않았다 하겠구나.


漢書 권제 28下는 地理志 第八上이라, 이에는 아래와 같은 전한시대에 설치한 郡별로 그 호수와 인구, 그리고 속현 명단이 저록됐거니와,

遼西郡 : 戶七萬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萬二千三百二十五。縣十四:且慮,海陽,新安平,柳城,令支,肥如,賓從,交黎,陽樂,狐蘇,徒河,文成,臨渝,絫。

遼東郡 : 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縣十八:襄平,新昌,無慮,望平,房,候城,遼隊,遼陽,險瀆,居就,高顯,安市,武次,平郭,西安平,文,番汗,沓氏。

玄菟郡 : 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上殷台,西蓋馬。

樂浪郡 : 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縣二十五:朝鮮,俨邯,浿水,含資,黏蟬,遂成,增地,帶方,駟望,海冥,列口,長岑,屯有,昭明,鏤方,提奚,渾彌,吞列,東傥,不而,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당시 중국 한 왕조 서울 서안 혹은 낙양을 기준으로 보면 동북방 지역에 속한 이들 지역을 일별하면, 현토군이 인근 지역 다른 군들에 견주어 지닌 유별난 특징이 있으니, 면적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속현 숫자가 턱없이 적어 3개에 지나지 않아 이는 요서군 14개, 요동군 18개, 낙랑군 25개와 비교된다.

이는 현토군 지역이 다른 인근 지역 군들에 비해, 땅 덩어리는 넓으나, 인구는 희박하다는 증거가 된다. 더불어 속현에 고구려가 있으니, 그 위치는 아마도 후대에 고구려가 출현하는 중심 구역일 수도 있음을 내비친다. 

나아가 이는 낙랑군 특징이 유감없이 드러나거니와, 속현 숫자가 25개나 된다 함은 말할 것도 없이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뜻이다. 내가 자세히 검토하지는 않았지만, 속현 숫자로는 전한시대 전체 군을 통털어 낙랑군이 최다가 아닐까 한다. 

더불어 요서와 요동이 호수는 7만 어간으로 6만 어간인 낙랑에 견주어 많지만, 당시 파악안 인구는 역전이 이뤄져 낙랑이 물경 40만을 헤아린다.

전통시대 인구센서스를 액면으로 믿으면 안된다. 내가 항용 말하듯이 저보다 최소 곱하기 2는 해야 한다. 누락이 많은 까닭이니, 특히 노비는 물건으로 취급된 까닭에 센서스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기생? 당근 빠따로 누락한다. 그러니 저 통계치 작성 시점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낙랑은 물경 100만을 헤아리는 초고도 인구 밀집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속현 이름들을 세심히 살피면, 그 지정학적 특징을 살린 명명법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요서군에 신안평新安平이 있고, 요동에 서안평西安平이 있으니, 이건 뭔가 이상하다.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安平을 기준으로 해서 생겨난 지명들이거니와, 안평이 있고 그 신도시로 건설된 곳이 신안평이요, 그 서쪽을 떼어내 만든 곳이 서안평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요서군 신안평과 요동군 안평은 두 군을 가르는 기점이다. 다시 말해 요서군과 요동군 경계 지점에 안평이 있었다!

지명을 볼짝시면, 漢式인 것들이 있으니, 이는 아마도 저들은 한 왕조가 저들을 점령하면서 새로 붙인 명칭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반면 그 뜻을 종잡기 힘든 지명들도 즐비하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전 시대, 다른 왕조가 사용한 행정구역 혹은 지명들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樂浪郡 속현을 기준으로 할 때 朝鮮,俨邯,含資,黏蟬, 提奚,渾彌,東傥,不而 등이 후자에 속할 것이며, 遂成,增地,海冥,列口,昭明,鏤方,吞列,蠶台,華麗 등은 전자로 분류할 여지가 크다. 

문제는 지명 혹은 그 지리적 특징을 살린 지명들이다. 樂浪郡을 기준으로 할 때 그 속현 중 浿水는 말할 것도 없이 패수라는 강이 흐르는 연안에 있다 해서 이리 이름 붙였을 것이며, 遂城은 말할 것도 없이, 만리장성이 끝나는 지점에 있다 해서 이런 지명을 붙였으니, 수성현을 볼짝없이 만리장성이 끝나는 지점 해변과 붙어야 한다. 

增地는 말할 것도 없이 새로 개간한 땅, 혹은 새로 불어난 땅이라는 뜻에서 이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니, 바다를 매립해서 만든 땅이거나, 혹은 천재지변으로 생겨난 지역일 것이다. 帶方은 그 의미가 확실치는 않으나, 아마 방형으로 구획한 까달에 이런 명칭이 붙었을 것이며 海冥은 뭐 볼 거 없이 해변 지역이요, 列口는 말할 것도 없이 열수라는 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입구요, 鏤方은 말할 것도 없이 누금 기법으로 대표하는 광산 지역이라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을 것이니, 고려시대 관점으로 보면 향소부곡이 설치된 지역이었다. 

吞列은 말할 것도 없이 열수라는 강을 머금는 곳이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으니, 열구와 더불어 열수가 지나는 곳에 위치한다. 蠶台는 아마 잠신을 제사하는 곳이 있었거나, 뽕나무밭 밀집 지역이었을 것이요, 華麗는 뭔지 모르나 암튼 화려한 곳, 삐까뻔쩍한 곳임에는 틀림없다. 암튼 낙랑군을 관통하는 두 강은 패수와 열수다. 이 두 강이 낙랑의 젓줄이다.

이런 작명법 특징을 간취하면,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으리라 본다.

  1. 연건동거사 2018.04.15 21:40 신고

    그런데 저 군의 인구가 중원 쪽으로 가면 절대로 많은게 아닙니다.. 제 기억으로는 지금 하남성 지역에는 인구 백만짜리 한나라 군도 있었어요 .

  2. 연건동거사 2018.04.15 21:41 신고

    개인적인 생각에는 저 때 낙랑군의 현이 많은것은 아마 진번군하고 임둔군을 합쳐버려서 그럴걸요.. 도망갈 넘들 다 도망가고 남은 빈껍대기 현을 같이 낙랑군에 합쳐서 저리 보이는것이 아닌가 합니다만..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의 불후한 야담필기류인 《용재총화(慵齋叢話)》 에 보이는 각종 공무원 신참 신고식 백태(百態)다. 신참 신고식을 면신례(免新禮)라 하니, 말 그대로 아마추어 티를 벗는 의식이라는 뜻이다. 그 폐단을 극력 주창하면서 그 개선을 촉구한 율곡 이이의 글은 이 블로그에 따로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제1권

○ 옛날에 신입자(新入者 새로 문과에 등과한 사람)를 제재한 것은 호사(豪士)의 기를 꺾고 상하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규칙에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바치는 물품이 물고기면 용(龍)이라 하고, 닭이면 봉(鳳)이라 하였으며, 술은 청주이면 성(聖)이라 하며, 탁주이면 현(賢)이라 하여 그 수량도 제한이 있었다. 처음으로 관직에 나가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10여 일을 지나 구관(舊官)과 자리를 같이하는 것을 면신(免新)이라 하여 그 정도가 매우 분명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관(四館 성균관ㆍ예문관ㆍ승문관ㆍ교서관)뿐만 아니라, 충의위(忠義衛)ㆍ내금위(內禁衛) 등 여러 위(衛)의 군사와 이전(吏典)의 복예(僕隸)들까지도 새로 배속된 사람을 괴롭혀서 여러 가지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졸라서 바치게 하는데 한이 없어 조금이라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한 달이 지나도 동좌(同坐)를 불허하고, 사람마다 연회를 베풀게 하되 만약 기악(妓樂)이 없으면 간접으로 관계되는 사람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끝이 없다.

古者制馭新來。所以折豪士之氣。嚴上下之分。使就規矩也。其徵物。魚則稱龍。雞則稱鳳。酒則淸稱聖。而濁稱賢。其數亦有限。初出官曰許參。纔過十餘日。與之同坐。則曰免新。其程度甚明。今也非徒四館。如忠義衛內禁衛曁諸衛軍士吏典僕隷。侵毒新屬之人。凡十貴味。皆督徵之。無有紀極。少或不適於己。雖過一朔。不許同坐。人人皆令設宴。若無妓樂。則侵責無已。

○ 감찰이라는 것은 옛날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의 직책인데, 그 중에서 직급이 높은 자가 방주(房主)가 된다. 상ㆍ하의 관원이 함께 내방(內房)에 들어가 정좌하며 그 외방(外房)은 배직한 순위에 따라 좌차(坐次)를 삼는데, 그 중에서 수석에 있는 사람을 비방주(枇房主)라 하고, 새로 들어온 사람을 신귀(新鬼)라 하여, 여러 가지로 욕보인다. 방 가운데서 서까래만한 긴 나무를 귀(鬼)로 하여금 들게 하는데, 이것을 경홀(擎笏)이라 하며 들지 못하면 귀는 선생 앞에 무릎을 내놓으며 선생이 주먹으로 이를 때리고, 윗사람으로부터 아랫사람으로 내려간다. 또 귀로 하여금 물고기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귀가 연못에 들어가 사모(紗帽)로 물을 퍼내서 의복이 모두 더러워진다. 또 거미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귀로 하여금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지르게 하여 두 손이 옻칠을 하듯 검어지면 또 손을 씻게 하는데, 그 물이 아주 더러워져도 귀로 하여금 마시게 하니 토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또 귀로 하여금 두꺼운 백지로 자서함(刺書緘)을 만들어 날마다 선생 집에 던져넣게 하고, 또 선생이 수시로 귀의 집에 몰려가면 귀는 사모를 거꾸로 쓰고 나와 맞이하는데, 당중(堂中)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선생에게 모두 여자 한 사람씩을 안겨주는데, 이를 안침(安枕)이라 하며, 술이 거나하면 〈상대별곡(霜臺別曲)〉을 노래한다. 대관(臺官)이 제좌(齊坐)하는 날에 이르러서 비로소 자리에 앉는 것을 허용한다. 이튿날 아침 일찍 청에 나아가면 상관인 대리(臺吏)가 함께 뜰 안으로 걸어 들어가 뵙는데, 예가 끝나기도 전에 밤에 숙직한 선생들이 방안에서 목침을 가지고 큰 소리를 지르며 치는 짓이 있으므로, 신귀(新鬼)가 달아나다가 지체하면 그 몽둥이에 얻어맞기도 한다. 이런 풍습의 유래는 이미 오래되었는데, 성종(成宗)이 이를 싫어하여 신래(新來)를 괴롭히는 모든 일을 엄하게 금하니, 그 풍습이 조금 숙어졌으나 아직도 구습 그대로 폐하지 않은 것이 많다.

監察者。是古殿中侍御史之職。其中級高者爲房主。與上下有司。入內房正坐。其外房則以拜職久近爲座次。其中居首者。爲枇房主。新入者呼爲新鬼。侵辱萬狀。房中有長木如椽。令鬼擧之。名曰擎笏。不能擧則鬼以膝納于先生前。先生以拳歐之。自上而下。又令鬼作捕魚之戲。鬼入池水中。以紗帽挹水。衣服盡汚。又令作捉蛛之戱。鬼以手捫摩廚壁。兩手如漆。又使盥手。水甚穢黑。令鬼飮之。無不嘔吐。又鬼以厚白紙作刺書緘。日日投先生家。又先生無時到鬼家。鬼倒着紗帽出迎。設酌堂中。先生各挾一女而坐。謂之安枕。酒酣唱霜臺別曲。至臺官齊坐之日。始令許坐。翌日凌晨詣廳。上官臺吏齊行入謁庭中。禮未畢。夜直先生自房內持木枕。大呼擊之。新鬼走出。如或遲回。必遭其捧。風俗所由來者已久。 成宗惡之。凡侵虐新來者痛禁。其風小戢。仍舊不廢者亦多。


제2권

○ 삼관(三館) 풍속에는 남행원(南行員 조상의 덕으로 하던 벼슬아치)이 그 두목을 상관장(上官長)으로 삼아 공경해서 받들었고, 새로 급제하여 분속된 자는 신래(新來)라 하여 욕을 주어 괴롭혔으며, 또 술과 음식을 요구하되 대중이 없었으니 이는 교만한 것을 꺾으려 함이었다. 처음으로 출사(出仕)하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예(禮)를 끝내면 신면(新免)이라 하여 신면을 하여야만 비로소 구관(舊官)과 더불어 연좌(連坐)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말관(末官)이 왼손으로 여자를 잡고 오른손으로 큰 종을 잡아 먼저 상관장을 세 번 부르고, 또 작은 소리로 세 번 불러서 상관장이 조금 응하여 아관(亞官)을 부르면, 아관이 또한 큰 소리로 부른다. 하관(下官)이 이기지 못하면 벌이 있었으나, 상관이 이기지 못하면 벌이 없었다. 지위가 높은 대신이라도 상관장의 위에는 앉지 못하고, 세 관원 사이에 끼어 앉아서 부르되, 정일품에는 오대자(五大字), 종일품에는 사대자(四大字), 이품에는 삼대자(三大字), 삼품 당상관에는 이대자(二大字), 당하관은 다만 대선생(大先生)이라 부르고, 사품 이하는 다만 선생이라 부르되, 각각 성(姓)을 들어 이를 칭하였고, 부르고 난 뒤에는 또 신래자를 세 번 부르고, 또 흑신래자(黑新來者)를 세 번 부르는데, 흑(黑)은 여색(女色)이다. 신래자는 사모(紗帽)를 거꾸로 쓰고 두 손은 뒷짐을 하며 머리를 숙여 선생 앞에 나아가서 두 손으로 사모를 받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였는데, 이것을 예수(禮數)라 하였다. 직명(職名)을 외우되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 순함(順銜)이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면 역함(逆銜)이며, 또 기뻐하는 모양을 짓게 하여 희색(喜色)이라 하고, 성내는 모양을 짓게 하여 패색(悖色)이라 하였으며, 그 별명(別名)을 말하여 모양을 흉내내게 함을 ‘3천 3백’이라 하였으니 욕을 보이는 방식이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방(榜)을 내걸고 경하(慶賀)하는 날에는 반드시 삼관(三館)을 맞이한 뒤에 연석(筵席)을 베풀고 예를 행하였는데, 만약 신은(新恩)이 불공하여 삼관에게 죄를 지으면, 삼관은 가지 아니하고 신은도 또한 유가(遊街 급제자가 풍악을 앞세우고 웃어른이나 친척들을 찾아보는 것)하지 못하였다. 삼관이 처음 문에 이르러 한 사람이 북을 치면서 ‘가관호작(佳官好爵)’이라고 부르면, 아전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이에 응하고 손으로 신은을 떠받쳐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이를 경하(慶賀)라 하였고, 또 부모와 친척에게 경하하는 것을 생광(生光)이라 하였으며, 또 최후에 여인(女人)을 받들어 경하하는 것을 유모(乳母)라 하였다. 또 신은(新恩)은 방(榜)이 나는 대로 의정부ㆍ예조ㆍ승정원ㆍ사헌부ㆍ사간원ㆍ성균관ㆍ예문관ㆍ교서관ㆍ홍문관ㆍ승문원 등 여러 관사의 선배를 배알하고, 포물(布物)을 많이 걷어 이것으로 연회를 위한 음식을 만드는데, 봄에는 교서관이 먼저 행하되 홍도음(紅桃飮)이라 하고, 초여름에는 예문관이 행하되 장미음(薔薇飮)이라 하였으며, 여름에는 성균관이 행하되, 이를 벽송음(碧松飮)이라 하였다. 을유년 여름에는 예문관이 삼관(三館)을 모아 삼청동(三淸洞)에서 술을 마셨는데, 학유(學諭) 김근(金根)이 몹시 취하여 집으로 돌아가다가 검상(檢詳) 이극기(李克基)를 길에서 만났는데, “교우(交友)는 어디서 오는 길이기에 이렇게 취하였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장미(薔薇)를 먹고 온다.”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냉소(冷笑)하였다.

三館風俗。南行員尊其首爲上官長。敬謹奉之。新及第分屬者。謂之新來。侵辱困苦之。又徵酒食無藝。所以屈折驕氣也。始仕曰許參。終禮曰免新。然後與舊官連坐。開筵設酌。則末官以左手執女。右手執大鍾。先呼上官長者三。又細聲呼者三。上官長微應呼亞官。則亞官亦大聲呼之。下官不勝則有罰。上官不勝則無罰。雖位高大臣。不得坐上官長之上。與三官間坐呼。正一品五大字一品四大字二品三大字三品堂上二大字。堂下官只呼大先生。四品以下泛呼先生。各擧姓而稱之。呼畢。又呼新來者三。又呼黑新來者三。黑者女色也。新來倒着紗帽。以兩手負背低首至就先生前。以兩手圍紗帽而上下之。名曰禮數。誦職名。自上而下則順銜。自下而上則逆銜。又令作喜形曰喜色。作怒形曰悖色。言其別名。使爲其狀曰三千三百。其侵辱多端。不可勝言。放榜慶賀之日。必邀三館。然後設筵行禮。若有新恩不恭。得罪於三館。則三館不往。新恩亦不得遊街。三館初到門。一員擊鼓唱佳官好爵。諸吏齊聲應之。以手擎奉。新恩下上之曰慶賀。又慶父母族親曰生光。最後又奉女人。而慶之曰乳母。又新恩聯榜。拜謁于議政府禮曹承政院司憲府司諫院成均館藝文館校書弘文館承文院諸司先生。多徵布物。以爲飮宴之需。春時校書館先行之。曰紅桃飮。初夏藝文館行之。曰薔薇飮。夏時成均館行之。曰碧松飮。乙酉夏。藝文館聚三館飮于三淸洞。學諭金根泥醉還家。檢詳李克基路遇之。問交友從何來。何醉之至此。根答曰食薔薇而去。人有聞者皆齒冷。


제4권

○ 새로 급제한 사람으로서 삼관(三館)에 들어가는 자를 먼저 급제한 사람이 괴롭혔는데, 이것은 선후의 차례를 보이기 위함이요, 한편으로는 교만한 기를 꺾고자 함인데, 그 중에서도 예문관(藝文館)이 더욱 심하였다. 새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배직(拜職)하여 연석을 베푸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50일을 지나서 연석 베푸는 것을 면신(免新)이라 하며, 그 중간에 연석 베푸는 것을 중일연(中日宴)이라 하였다. 매양 연석에는 성찬(盛饌)을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시키는데 혹은 그 집에서 하고, 혹은 다른 곳에서 하되 반드시 어두워져야 왔었다. 춘추관과 그 외의 여러 겸관(兼官)을 청하여 으레 연석을 베풀어 위로하고 밤중에 이르러서 모든 손이 흩어져 가면 다시 선생을 맞아 연석을 베푸는데, 유밀과(油蜜果)를 써서 더욱 성찬을 극진하게 차린다. 상관장(上官長)은 곡좌(曲坐)하고 봉교(奉敎) 이하는 모든 선생과 더불어 사이사이에 끼어 앉아 사람마다 기생 하나를 끼고 상관장은 두 기생을 끼고 앉으니, 이를 ‘좌우보처(左右補處)’라 한다. 아래로부터 위로 각각 차례로 잔에 술을 부어 돌리고 차례대로 일어나 춤추되 혼자 추면 벌주를 먹였다. 새벽이 되어 상관장이 주석에서 일어나면 모든 사람은 박수하며 흔들고 춤추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부르니, 맑은 노래와 매미 울음소리 같은 그 틈에 개구리 들끓는 소리를 섞어 시끄럽게 놀다가 날이 새면 헤어진다. 

新及第入三館者。先生侵勞困辱之。一以示尊卑之序。一以折驕慢之氣。藝文館尤甚。新來初拜職設宴。曰許參。過五十日設宴。曰免新。於其中間設宴。曰中日宴。每宴徵盛饌於新來。或於其家。或於他處。必乘昏乃至。請春秋館及諸兼官。例設宴慰之。至夜半諸賓散去。更邀先生設席。用油蜜果尤極盛辦。上官長曲坐。奉敎以下與諸先生間坐。人挾一妓。上官長則擁雙妓。名曰左右補處。自下而上。各以次行酒。以次起舞。獨舞則罰以酒。至曉。上官長乃起於酒。衆人皆拍手搖舞。唱翰林別曲。乃於淸歌蟬咽之間。雜以蛙沸之聲。天明乃散。 

어우동 이야기는 사건 발생 당대에 이미 유명했다. 그 무렵 다른 사건이 있었다. 성현의 용재총화 제6권에 보이는 이야기다. 

손님을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볼기를 맞은 수원 기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우동(於宇同)은 음란한 것을 좋아하여 죄를 얻었는데, 나는 음란하지 않다 하여 죄를 얻었으니, 조정의 법이 어찌 이처럼 같지 아니한가.”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옳은 말이라 하였다. 

매우 간단한 이 증언을 우리가 주시해야 하는 까닭은 어우동 이야기가 이미 누항까지 퍼졌다는 것이며, 나아가 그것이 기생 사회에는 어우동 이야기가 이미 하나의 성전으로 군림하기 시작한 증좌라는 사실이다. 

이 예화에서 수청을 거절하는 관 소속 기생은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데 그 처벌에 대한 해당 기생의 반발이 심상치 않다. 그의 말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니미랄, 어우동이란 년은 몸 함부로 놀렸다 해서 죄를 얻었는데, 난 몸 함부로 안 놀린다 해서 왜 얻어터지냐? 이것이다. 

이 기생의 심리, 이걸 어찌 볼 것인가? 법 집행의 평등의식이 이미 발동하고 있음을 본다. 




아무리 첩이라 해도, 그가 어떤 남성과 과거에 살았건 그건 전연 흠이 되지 않았다. 그가 기생이었다 해서, 그것이 그를 첩으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떤 주저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이것이 조선사회다. 어떤 점에서는 요즘의 한국사회 성관념과 비교해도 훨씬 혁신적이었고, 훨씬 선진적인 면도 있었다. 과거를 묻지 않았다.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다음 이야기는 그런 사정을 증거한다.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하던 중에 기생 금개(今介)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금개의 나이 겨우 20살인데, 성질이 약삭빠르고 영리하였다. 전주에서 돌아올 때 정오가 되어 우정(郵亭)에서 쉬고 있는데, 기생 또한 따라와 송별하기에 내가 시를 지어 주기를,

봄 내내 병중에서 보내다가 / 一春都向病中過

이별하기 어려운 것 넌들 어찌 하리 / 難思無端奈爾何

침상에서 몇 번이나 눈썹을 찡그렸고 / 枕上幾回眉蹙黛

술자리에서는 그저 애교의 눈웃음이었네 / 酒邊空復眼橫波

객사에 늘어진 버들 애타게 보며 / 愁看客舍千絲柳

참고 양관의 한 곡조 들어 주소 / 忍聽陽關一曲歌

문밖에 해가 져도 떠나지 못하겠으니 / 門外日斜猶未發

좌중에 누가 고민이 많음을 알아주랴 / 座間誰是暗然多

하였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서 내가 첩(妾)을 잃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전주 기생 금개가 일찍이 사람을 따라 상경했다가 그 사람이 죽어 과부로 지내는데, 마침 공의 첩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옛정을 사귀고자 한다.” 하기에, 내가 허락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사고가 있어서 이루지 못하였으니, 헤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도 운수가 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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