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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HISTORY82

드루와! 거란을 농락하는 고려 몇 차례 걸친 고려 정벌전에서 거란이 얻은 소득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정벌전에서는 강감찬 강민첨 두 강씨한테 참패를 맛봤으니 가오만 열라 상하고 말았다. 그에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거란을 요동케 하는 내란이 발발한다. 발해 왕족 후손 대연림大延琳이 태평太平 9년(1029) 요 왕조 부수도 중 하나인 요양遼陽을 공격 점거하고 흥료국興遼國이라는 별도 왕조를 건국 선포하는 한편 자체 연호가 제정해 천경天慶이라 반포하기에 이른다. 이 흥료국은 이듬해 진압되고 말았지만, 이 반란은 반란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동아시아 국제정세까지 흔들어댔으니, 신국가 선포 직후 그 신왕조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주변국가의 승인을 받는 것이다. 대연림 역시 고려와 송나라 등지에 사신을 보내서 연합을 제안하게 되니, 고.. 2024. 1. 14.
둔전屯田 장착하고 북방으로 진격한 고려 고려사절요 권 제4> 정종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 8년(1042) 4월 조에 이르기를 ○ 여름 4월. 동여진東女眞 대상大相 오어달吳於達이 밭을 갈 소를 달라 하니 동로둔전사東路屯田司에 소속된 소 10마리를 하사했다. 이 무심한 증언이야말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기찬 북방 개척 그 실상에 대한 일대 증언이다. 동여진이라 하고, 동로東路라 했으니, 지금의 함경도 일대 동해안 쪽임을 유추한다. 저쪽은 여진 땅이다. 그 여진 땅을 향해 고려는 끊임없이 진격 북상해 올라갔다. 비록 윤관에 의한 여진 정벌이 한때 성공했다가 이내 실패하고 말았지만, 간단없이 전진 북상해갔다. 지금에서 저 모습을 바라보는 자들은 왜 한꺼번에 연해주까지 치고 오르지 않았느냐 하는 헛소리들을 해대지만(실제 백년 전 우리 조상들, 민족주의 역.. 2024. 1. 14.
식목대왕 고려 정종 : 허심한 기록, 하지만 중대한 증언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 제4 정종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 원년元年 4월 대목에는 아래와 같은 아주 짧은 기사가 무심하게 적기摘記되어 있다. ○ 禁京城名山樵採, 遍植樹木. 서울의 이름난 산에서 땔나무를 벌채하는 일을 금지하다. 이를 어찌 읽어야 하는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물어야 할 것은 왜 이 기록이 남았는가? 왜? 당연히 국가지대사라 생각한 까닭이다. 그래서 남겼다. 이를 통해 이를 편찬한 조선왕조는 무엇을 노렸는가? 이 물음이 곧 저 기록을 유독 대서특필한 이유다. 둘째 지극히 당연하다 개소리하겠지만 저때도 끊임없이 식목을 했다. 예서 관건은 어떤 나무를 심었는가겠지만, 이런 의문이 고려시대 증언에서는 잘 풀리지 않는다. 조선시대 기록들을 찾고, 특히 개경과 가까운 지점 서울 주변에 어떤 나무들을 심곤 .. 2024. 1. 14.
[김태식의 讀史日記] 지통의 천황 즉위식과 삼종신기三種神器 애초에는 아마도 천황의 족보를 그린 부록 1권이 있었다는 일본서기 현존본은 전 30권이다.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가 고천원광야희천황高天原廣野姬天皇, 곧 지통천황持統天皇이라 일컫는 女主다. 그의 존호를 풀면 고천원의 광야에 상거하는 여자 대빵이라는 뜻이다. 고천원이 무엇인가? 하늘이다. 그 하늘을 관장하는 이가 누구인가? 천황대제天皇大帝, 약친 천황이다. 朱鳥 원년(686) 9월 무술삭 병오일(9일)에 지통은 남편이자 삼촌인 천무천황天武天皇이 죽자 대권을 이어받았다. 다음 보위를 이을 황태자로 초벽草壁이 엄연히 있었지만, 어찌된 셈인지 그가 대권을 이어받지 못하고 그 어미이자 천무의 미망인인 지통이 수렴청정한다. 이 수렴청정을 일본서기 지통 즉위년 조에서는 임조칭제臨朝稱制라 했다. 임조란 남면하여 조정에.. 2024. 1. 13.
고려 현종은 불륜의 씨앗, 과부가 된 조카 며느리랑 바람난 왕욱王郁 고려사 권 제90 열전 권 제3 종실宗室에 실린 고려 현종 아버지 왕욱王郁 행적은 다음과 같다. (태조 왕건 아들인) 안종安宗 왕욱王郁은 살던 집이 왕륜사王輪寺 남쪽에 있었는데 경종景宗 비妃인 황보씨皇甫氏 사제私第와 가까웠다. 경종이 훙서하자 비는 〈대궐을〉 나와 그 집에 살았는데 왕욱과 더불어 드디어 불륜해서[烝] 임신하게 되었다. 일이 발각되자 성종成宗은 왕욱을 사수현泗水縣으로 유배 보내며 일러 말하기를, “숙부께서 대의大義를 범했기 때문에 유배 가게 되었으니, 삼가 애태우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내시알자內侍謁者 고현高玄에게 명령하여 압송하게 했는데, 〈고현이〉 돌아가게 되자 왕욱이 시를 지어 주어 이르기를, “그대와 함께 같은 날 서울[皇畿]을 나왔건만, 그대는 먼저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2024. 1. 10.
고려사절요 강감찬 졸기卒記, 그 고고학적 중요성에 대하여 고려사절요 권3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22년 8월 (이달에) 강감찬이 졸했다. ○시중侍中으로 치사致仕한 강감찬姜邯贊이 졸했다. 강감찬은 금주衿州 사람으로 성품이 청렴하여 살림을 돌보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기묘한 계략이 많았다. 체격과 용모가 작고 초라했으며 의복은 때가 끼고 해져 보통사람[中人]과 다를 바 없었으나, 엄정한 안색으로 조정에 서서 큰일에 임할 때마다 위대한 계책을 결정하며 굳건하게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었다. 나이 70세가 되자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3일에 한 번 조정에 나오도록 했지만, 결국 사직하고 도성 남쪽 별장으로 돌아갔다. 84세에 사망하니, 〈왕이〉 애도하면서 부의賻儀를 매우 후하게 보내주었고, 시호를 인헌仁憲이라고 하였으며, 백관에게 명하여 장례에 참례하도록.. 202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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