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ho'sWho in Ancient Korea

김반굴(金盤屈)

by taeshik.kim 2018. 3. 20.
반응형

일통삼한기 전쟁에서 맹활약한 신라 장군 김흠순(김흠춘)의 아들이면서 김유신에게는 조카이자, 사위다.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군에 밀리자, 신라군 사기 진작을 위해 단기필마로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 전사했다. 그의 아들 령윤 역시 보덕성을 근거지로 훗날 신라에 반기를 든 고구려 유민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렬히 산화했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7년(660) ..가을 7월 9일에 유신 등이 황산(黃山) 벌판으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계백(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들은 힘이 다빠지게 되었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였다.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忠)과 효(孝)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 반굴이 “삼가 분부를 알아듣겠습니다.” 하고는 곧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김령윤 열전 : 김령윤(金令胤)은 사량(沙梁) 사람으로 급찬(級)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각간 흠춘(欽春)<흠순(欽純)이라고도 한다>은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어짐이 깊고 신뢰가 두터워 뭇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장년이 되어 문무대왕이 그를 올려 총재(冢宰)로 삼았다. 윗사람을 충으로 섬기고 백성에게는 관대하여 나라 사람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 했다. 태종대왕 7년 경신(660)에 당 고종이 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해 백제를 치게 하자 흠춘은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을 이끌고 나갔다. 가을 7월 황산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을 만나 싸움이 불리해지자 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말하기를 “신하로서는 충성이 제일 중요하고 자식으로서는 효가 제일 중요하다.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가 모두 이루어진다”고 했다. 반굴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적진에 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령윤은 대대로 고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므로 명예와 절개를 자부했다.



반응형

'Who'sWho in Ancient Korea'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흠춘(金欽春)  (0) 2018.03.20
반굴(盤屈)  (0) 2018.03.20
영윤(令胤)  (0) 2018.03.20
김령윤(金令胤)  (0) 2018.03.20
부례랑(夫禮郞)  (0) 2018.03.2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