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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미시(未尸)

by taeshik.kim 2018.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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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지왕 때 어린 나이에 우두무리 화랑인 국선(國仙)이 되었다는 미스테리한 인물.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고아지만, 그를 미륵불 화신으로 여긴 흥륜사(興輪寺) 승려 진자(眞慈)가 받들어 왕한테 청해 국선을 삼았다고 한다. 7년 동안 국선으로 재직한 점, 활동연대가 진지왕 대라는 점에서 화랑이 폐지되고, 원화가 부활한 다음 다시 화랑이 부활하고 그 초대 풍월주가 된 설원랑(薛原郞)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그의 비천한 출생담은 설원랑의 아버지 설원을 실제 모델로 삼은 듯하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 진지왕(眞智王) 때에 이르러 흥륜사(興輪寺) 중 진자(眞慈·정자貞慈라고도 한다)가 항상 이 당(堂)의 주인인 미륵상(彌勒像) 앞에 나가 발원(發願)하며 맹세하기를 “우리 대성(大聖)께서는 화랑으로 화(化)하시어 이 세상에 나타나 제가 항상 수용(수容)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을 들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두터워지자, 어느날 밤 꿈에 중 하나가 말했다. “네가 웅천(熊天)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자(眞慈)가 꿈에서 깨자 놀라고 기뻐하여 그 절을 찾아 열흘 길을 가는데 발자국마다 절을 하며 그 절에 이르렀다. 문 밖에 탐스럽고 곱게 생긴 한 소년이 있다가 예쁜 눈매와 입맵시로 맞이하여 작은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객실로 안내하니, 진자가 올라가 읍(揖)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평소에 나를 모르는 터에 어찌하여 이렇듯 은근하게 대접하는가”라고 하니 소년이 대답했다. “나 또한 서울 사람입니다. 스님이 먼 곳에서 오시는 것을 보고 위로했을 뿐입니다.” 이윽고 소년이 문 밖으로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속으로 우연한 일일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 중들에게 지난밤 꿈과 자기가 여기에 온 뜻만 얘기하면서 또 이르기를 “잠시 저 아랫자리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소”라고 하니 절에 있는 중들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근실한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예부터 현인(賢人)과 철인(哲人)이 살고 있어서 명감(冥感)이 많다고 하오. 그곳으로 가 봄이 좋을 게요.” 진자가 그 말을 쫓아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山神靈)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면서 말했다.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는가.” 진자가 대답하기를 “미륵선화를 보고자 합니다”고 하니 노인이 또 말했다. “저번에 수원사(水源寺)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무엇을 보려는 것인가.”  진자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내 달려 본사(本寺)로 돌아왔다. 그런지 한 달이 넘어 진지왕(眞智王)이 이 말을 듣고는 진자를 불러 그 까닭을 묻고 말했다. “그 소년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니 성인(聖人)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왜 성 안을 찾아보지 않았소.” 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두루 마을을 돌면서 찾으니 단장을 갖추어 얼굴 모양이 수려한 한 소년이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거닐며 놀고 있었다. 진자가 그를 만나보자 놀라서 말하기를 “이 분이 미륵선화다”고 했다. 그가 나가 묻기를 “낭(郎)은 댁이 어디시며 성(姓)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고 했다. 낭이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미시(未尸)며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어 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고 했다. 이에 진자가 그를 가마에 태워 들어가 왕을 뵈니 왕은 그를 존경하고 총애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았다. 그는 자제(子弟) 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예의(禮儀)와 풍교(風敎)가 보통사람과 달랐다. 그의  풍류(風流)가 빛남이 거의 7년이나 되더니 어느날 갑자기 간 곳이 없어졌다. 진자가 몹시 슬퍼하고 그리워했다. 그러나 미시랑(未尸郎)의 자비스러운 혜택을 많이 입었고 맑은 덕화(德化)를 이어 스스로 뉘우치고 정성을 다하여 도(道)를 닦으니, 만년에 그 역시 어디 가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명하는 이가 말했다. “미(未)는 미(彌)와 음(音)이 서로 같고 시(尸)는 역(力)과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 가까운 것을 취해서 바꾸어 부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들을 미시(未尸)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진자의 유풍(遺風)이다. 노방수(路傍樹)를 지금까지도 견량[수](見郎)[樹]이라 하고 또 우리말로 사여수(似如樹·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 한다. 찬(讚)한다. “선화(仙花) 찾아 한 걸음 걸으며 그의 모습 생각하니, 곳곳마다 재배함이 한결같았네. 문득 봄 되돌아가고 찾을 곳 영영 없으니, 누가 알았으랴, 상림(上林)의 一時春을”  

설원랑(薛原郞) ☞설화랑(薛花郞) ☞미륵선화(彌勒仙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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