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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이며 기사 입력시간은 2016년02월22일 14시15분이다. 


고려를 창건한 신라인 

 

 왕건은 고려 왕조를 개창한 까닭에 그 이름만 들으면 우리는 대뜸 ‘고려인’으로 단정하기 십상이지만, 실은 뼛속까지 신라인이다. 그가 태어나기는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4년이니 이해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877)이다. 청장년기를 신라에서 배반한 궁예에서 복무하기는 했지만, 그가 자발적 헌납이라는 형식으로 신라를 접수한 때가 59살 때인 935년이며, 그로부터 8년 뒤인 943년 향년 67세로 눈을 감는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왕건은 신라인이다. 이런 그가 고려라는 새로운 왕조 혹은 국가를 만들 때 그 절대적 토대는 신라의 그것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가 죽어 묻힌 곳을 현릉(顯陵)이라 하거니와, 이에는 그의 무수한 부인 중에서도 조강지처는 오직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 한 명뿐이니 같이 묻힌 여인은 오직 이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왕건이 복지겸, 신숭겸, 홍유 등과 더불어 쿠데타로 궁예 정권을 타도하고자 도모할 적에 그 반란 모의를 몰래 듣고는 장막을 걷어차고 나타나 남편한테 갑옷을 입혀 주었다는 그 여인이다. 유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건보다 먼저 떠나 다른 어딘가에 묻혀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왕건이 세상을 떠나면서 내린 유언에 따라 유씨를 합장했다 하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가 묻힌 현릉이 정식 발굴조사나 도굴 등을 통해 타율적으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으므로, 그 내부 구조를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무덤이 석실분(石室墳)임을 안다. 더 정확히는 석실로 통하는 무덤길을 별도로 마련한 소위 횡혈식(橫穴式) 석실분임을 안다. 


 그것은 첫째, 그가 9~10세기를 살다간 신라인이기 때문이요 둘째, 그 무덤이 부부 합장릉이며 셋째, 이후 유사시에 툭하면 무덤 문을 따고는 그 재궁(梓宮)을 걷어냈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무덤은 석실분밖에 없다. 


 아직도 한국고고학계에는 밑도 끝도 없는 신화가 횡행하니, 무덤은 보수성이 강해서 잘 바뀌지 않는다는 말도 개중 하나다. 쉽게 말해 무덤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덤처럼 유행에 민감한 것도 없다. 말한다. 무덤은 유행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팽팽 옷을 잘도 갈아입어 그 형식은 순식간에 변모한다. 무덤이라고 유행을 싫어할 줄 아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석실분은 엄밀히는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라고 해야 한다. 석실분이라는 말은 무덤 주인공을 매장하는 무덤방 내부 구조가 돌로 만들어 쌓아올린 점만을 드러낸 것으로써, 이런 석실 위로는 흙으로 덮어 대체로 둥근 봉분을 만들기 마련이다. 나아가 그 전면에는 비교적 넓은 평탄 대지를 만들어 왕릉의 경우 이곳에다가 정자각이며 하는 각종 제향 관련 시설들을 만든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무슨 고대 일본의 전매특허처럼 선전하지만, 동아시아 고대 무덤은 거의가 실은 전방후원분이다. 현릉 역시 이에서 크게 어긋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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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굳게 닫힌 현릉은 안쪽으로 통하는 무덤길을 어디에다가 마련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내가 현장을 둘러본다면 낌새를 채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있지만, 자신은 없다. 하지만 무덤길은 틀림없이 석실 남쪽에다가 마련했을 것이다. 다만 정남방인지 혹은 한쪽으로 비켜난 남쪽인지는 알 수가 없다. 현재 그 앞에 혼유석이 놓인 점으로 보아 여타 이 무렵 석실분 발굴 사례를 견주어 볼 때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다가 마련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상상해 본다. 여담이지만 이런 궁금증이 결국은 멀쩡한 무덤을 무수하게 파헤치지는 데 이르렀다. 고고학 발굴조사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왕건릉 구조가 어떠했을지 그것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는 지금 그것을 짐작하기 위해서는 동시대 왕릉급 신라 무덤을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근자에 이런 발굴조사가 몇 군데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먼저 경주 남산 능선이 동쪽으로 흘러내린 한지봉 구릉 말단부에 소재한 헌강왕릉이 있다. 이곳이 헌강왕릉이라 알려졌지만 정말로 그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떻든 왕릉이 아니라 해도 그에 준하는 신라 말기 무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1993년 8월 초순 집중호우에 봉분 일부가 붕괴하면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이미 무덤은 무참한 도굴 피해를 여러 차례 본 것으로 드러났다. 그에 따라 돌로 만든 시신 발 받침대와 베개 그리고 금판과 금실 조각 말고는 내부에서는 이렇다 할 유물을 건지지는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무덤 구조는 확실히 들여다보게 되었으니, 역시나 석실분으로 드러났다. 봉분은 밑지름 기준으로 15.6m이니 그다지 규모가 크지는 않다. 석실은 남북 길이 2.9m, 동서 너비 2.9m이니 정방형에 가까우며 그 바닥에는 관을 놓는 시설인 시상(尸床)은 화강암 판석 2매로 만들었다. 이 무덤방으로 통하는 무덤길은 역시 남쪽이지만,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 발견됐다. 아마도 합장분이었을 것이다. 


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


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


 또 다른 신라 시대 왕릉급 석실분으로는 계림문화재연구원이 2013년 공장 부지에 포함된 경주시 천북면 신당리 산7번지 일대에서 확인한 무덤이 있다. 원형 봉토 안에 석실을 마련한 이 고분은 봉분 바깥에다가 3단 석축으로 호석(護石)을 쌓아 돌리고, 일정한 구간마다 받침돌을 세웠다. 무덤 주인공을 매장한 석실은 봉토 중앙에서 발견됐다. 호석 기준으로 고분은 지름 14.7m이며, 둘레는 현재 4분의 1 정도가 유실되고 35.5m가량 남았지만 원래는 46.3m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라 받침돌은 원래 정확히 몇 개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 남은 상태를 감안할 때 모두 24개를 안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극심한 도굴 피해를 보아 출토 유물은 거의 없다. 호석에서 120㎝ 떨어진 남동쪽 지점에서는 돌로 만든 상석(동서 216㎝, 남북 133㎝)의 바닥 흔적도 완연히 드러났다. 이 고분은 8세기 무렵 축조했다고 추정됐다. 


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발굴전경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발굴전경 (사진제공=한울문화재연구원)


 이런 통일신라 시대 석실분이 2013년에 들어 울산-포항 복선 전철 구간에 포함된 경북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 야산에서도 발견됐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조사 결과 호석 기준 동-서 11m, 남-북 11.2m 규모의 원형 봉분을 갖춘 이 무덤에서는 봉분 주위를 따라 12개 띠 동물을 넣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묘역(墓域)을 갖추었으며, 암반을 굴착해 대규모 배수로까지 완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호석은 정교하게 6단 이상을 축조했으며, 그 바깥으로 따라가며 일정한 간격으로 덧댄 돌인 지대석은 24개 받쳤지만 일부는 훼손되고 17개가 확인됐다. 12지 동물 조각은 방위별로 지대석 2칸마다 1개씩 배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추정 토끼상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추정 토끼상 (사진제공=한울문화재연구원)


 일부는 결실돼 말을 비롯한 7개 동물 조각이 드러났다. 남쪽에 마련한 무덤으로 통하는 길인 묘도(墓道) 입구에는 호석에 잇댄 상태로 만든 제단 흔적도 드러났다. 시신은 봉분 중앙쯤에 마련한 석실에다가 안치했다. 이곳에서는 대퇴골로 추정되는 인골까지 발견됐다. 내부에서는 극심한 도굴로 다른 출토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 신라 시대 왕릉급 무덤이 바로 왕건 시대에는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어 곧바로 이를 기준으로 왕건릉 구조를 대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왕건이 신라인이요, 고려 건국 초기에는 대부분 신라의 유산을 계승했으며, 여타 기록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석실분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나아가 이런 석실분이었기에 처음 무덤을 만들어 무덤 문을 봉한 다음에도 수시로 열었던 것이며, 이런 편리성에서 주로 부부 합장에 사용됐다. 그에 더해 현릉의 경우 전란이나 반란과 같은 일단 유사시에 관을 통째로 꺼내어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살아있는 신 


 그렇다면 왜 역대 왕 중에서 고려 사람들은 유독 왕건에 그리 집착했을까? 더러 왕건의 아버지로서 나중에 고려 건국 뒤에는 세조(世祖)라는 묘호(廟號)를 받은 왕륭(王隆) 역시 같은 대접을 받기도 했지만, 왕건의 그것에 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순히 고려 태조이기에? 이렇게 만은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왕건은 결코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아니 되는 생신(生神)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귀신이 아니었다. 죽어서도 의지가 있고, 그런 까닭에 무엇인가 결단이 필요한 시점에는 후세들에게 그 방향을 점지하는 막강의 신이었다.


 역대 왕의 신주를 봉안하는 제사 시설을 종묘(宗廟) 혹은 태묘(太廟)라 한다. 한데 이 종묘 시스템은 역대 왕조가 조금씩은 달라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왕조는 어쩌면 가장 무식한 방법을 썼다. 태조 이성계 이래 역대의 왕들과 그 왕비에다가 각각 신실(神室) 하나씩을 주게 되니 무한정 폭이 늘어나는 기현상을 빚게 된다. 지금의 종묘 정전은 동서 폭이 120m에 달하게 된 이유는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종묘에 천자는 7묘(廟), 제후는 5묘라 해서 종묘에는 최대 7명까지만 신주를 모셨다. 신라가 신문왕 시대에 중국식 종묘 제도를 처음 도입하고는 오묘제를 도입한 이유가 당의 제후국으로 자처했기 때문이었다. 고려 왕조 역시 제6대 성종 시대에 종묘를 처음으로 만들면서 5묘제를 도입했다. 한데 실제 종묘 각 실(室)을 어떻게 꾸몄으며, 어떻게 안치했는지는 500년 장구한 왕조 역사만큼이나 변화가 무쌍해 나로서는 도대체 그 변화상을 종잡기가 힘들다. 종묘에 신주가 들었다가 나중에는 들어내기도 하는 등의 변화가 많다. 내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을 살피니 신주가 종묘에 들었다가 나중에는 산릉(山陵)으로 옮겨가는 일도 있는가 하면, 정전에는 들지 못한 왕들의 신주를 위한 별묘(別廟)도 있었던 듯하다. 조선 시대 종묘에 정전과 더불어 이런 왕들을 위한 신주 안치 공간인 영녕전이 따로 있듯이 말이다. 시대별로 넘다듦이 이렇게 변화무쌍하지만 단 한 사람만큼은 변동이 있을 수 없다. 조선 시대 가묘(家廟) 관점에서 보면 불천위(不遷位)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가 바로 태조 왕건이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이 왕건에 대한 추숭 작업은 누층적이었다. 종묘에다 모시고, 산릉인 현릉에다가도 모시며, 궁궐 안에는 그를 비롯한 역대 왕들의 어진각인 경령전(景靈殿)이 있었는가 하면, 그만을 위한 어진각인 효사관(孝思觀)도 있었다. 나아가 주요 사찰과 서경을 비롯한 주요 거점 도시마다 어진각을 별도로 세워 때마다 제사를 지냈다. 또한 이상하게도 왕건의 조각을 만들어 마치 부처님처럼 봉향하기도 했다. 이는 역대 왕 중에서도 태조가 차지하는 위치가 난공불락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면모들을 편년체 고려사인 《고려사절요》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숙종 7년(1102) 12월에는 동전을 주조 유통케 하고는 그 사유를 태묘와 여덟 개 역대 왕릉에 고했다. 이어 예종(睿宗) 재위 2년(1107) 겨울 10월에는 북방의 골칫거리로 등장한 여진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태묘에 물어 결정한다. 좋게 달랠 것인가 아니면 군사를 동원해 토벌할 것인가를 두고 난상토론이 벌어진 것이다. 양쪽 의견이 하도 팽팽히 갈리니 왕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럴 때 묘약은 역시나 태조 왕건이었다. 이 대목을 “왕이 망설이며 결정을 짓지 못하고는 최홍사에게 명하여 태묘에서 점치게 하였더니, 감(坎)이 기제(旣濟)로 변하는 괘를 얻자 드디어 출병하기로 의논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 점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나, 이 자리에서는 태묘에서 점을 친 결과 출병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기로 한다. 이에 의해 그 유명한 윤관과 오연총에 의한 여진 정벌이 있게 되고 그 결과 이른바 윤관 9성을 쌓게 된다. 태조가 중앙에 정좌한 태묘는 이처럼 죽어도 결코 죽지 않은 결단의 신이었다. 


 인종 4년(1126)에는 거란을 대신하고 북방의 패자로 등장한 여진족의 금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섬길 것인지 가부를 태묘에서 점을 쳐서 결정했다. 이어 고종 8년(1221), 점점 군사적 압박을 높이며 조여 오는 몽고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몰라 문하시중 이항(李抗)과 사천감(司天監) 박강재(朴剛材)를 태묘에서 점치게 했으며, 몽고의 군사적 압박이 극에 다다른 같은 왕 41년(1254) 겨울 10월에는 재신들을 보내 태묘에 빌며 “큰 재앙이 거듭 이르렀습니다”라고 고하면서 선령들이 하늘의 위엄을 내려주시어 “오랑캐 군사가 스스로 무너져 섣달이 되기 전에 돌아가고, 백성의 힘은 여유가 있어 봄이 되면 농사지어 안도하기를 전과 같이 하여 배부르게 먹고 모두 화평토록”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공민왕 2년(1360) 가을 7월에는 왕이 임진현 북쪽 5리 지점 백악(白岳)에 거둥해 이곳이 도읍을 옮길 만한 곳인가를 알아보았다. 이보다 앞서 공민왕은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으로 천도하려고 대대적인 공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에 따른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게 일자 할 수 없이 태묘에 사람을 보내 점을 친 결과 불길하다는 점괘를 얻어 남경을 포기했다. 그 대타로 고른 곳이 백악이었으니, 그런 까닭에 이곳을 신경(新京)이라 불렀다고 한다. 백악 천도 계획도 결국 무산되었지만, 도읍 옮기는 일에도 왕건을 포함하는 조상신들이 관여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핀 일화가 왕건이 다른 후대왕들과 더불어서 함께 결정한 사안이라면, 이제는 그 혼자서 내린 사안들을 본다.  


 공민왕은 재위 6년(1357) 봄 정월에 봉은사(奉恩寺)로 거둥해 그곳에 마련된 태조 진전을 배알하고는 한양 천도가 옳은 일인지 친히 점을 친다. 그 결과 안 된다는 ‘정(靜)’이라는 글자를 얻자, 다시 이제현한테 점을 치게 한 결과 천도해도 좋다는 ‘동(動)’ 자를 얻어 천도를 단행한다. 공민왕이 이미 남경 천도를 결정한 상태에서 점괘가 처음에는 안 된다고 나오자 당혹했을 것이다. 


 우왕 시대인 신우(辛禑) 원년(1375) 여름 4월에는 당시 실권자 이인임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태조 어진 봉안처인 효사관에 나아가 태조의 혼령한테 맹세하기를 “본국의 무뢰배들이 심왕(瀋王)의 손자를 끼고 북쪽 변방에 와서 왕위를 엿보니, 우리 동맹하는 신하들은 힘을 다하여 막아서 새 임금을 돕고 받들겠나이다. 이 맹세에 변함이 있으면, 천지와 종묘 사직이 반드시 은밀한 주벌을 내릴 것입니다”라고 한 일도 있다. 심왕은 원나라가 임명한 제후왕 중 하나로서 언제가 그 혈통은 고려왕의 잠재적 경쟁자였다.  


 이성계가 옹립한 공양왕은 즉위 원년(1389) 12월 계해일에 효사관에 나아가서 신돈의 아들들이라고 매도되어 쫓겨난 우왕과 창왕을 죽인 일을 태조 어진을 바라보며 고하기도 했다. 


 이는 왕건이 고려왕조가 계속하는 한 그 왕국과 후손 왕들을 보호하는 살아있는 신이었음을 보이는 증거들이다. 그런 까닭에 비단 신주와 어진뿐만 아니라 아예 그 생전 모습을 본뜬 동상을 만들어 봉향하기도 했다. 



송충이를 잡는 고려 태조 


 이런 전통은 종교로 보면 도교의 색채가 무척이나 짙다. 동상을 만들어 추숭하는 일로 보면 불교의 전통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죽어서도 죽지 않은 사람, 생전에 무수한 공덕을 쌓고는 죽어서도 천상의 절대 신이 되어 누군가를 보호하는 존재는 신선(神仙)에 다름 아니다. 실제 도교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무수한 신을 만들어냈다. 생전에도 신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드높았던 역대 제왕 중에서도 진 시황제와 한 무제 같은 이는 위진남북조 시대 도교에서는 천상을 지배하는 중요 신선들이기도 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왕건 역시 천상의 신이 되어 고려라는 왕국을 보호하는 후견인 노릇을 한 것이다. 


 이런 면모가 도교와 밀접하다는 점은 우선 왕건이 팔관회 개최와 구요당(九曜堂)이라든가 신중원(神衆院)과 같은 각종 도교 사원 창건으로 대표하듯이 도교에 심취했던 데다가, 그의 어진을 모신 궁궐 전각을 효사관(孝思觀)이라 했으니, 이는 효사관을 도교의 사원인 도관(道觀)으로 인식했다는 단적인 증거다. 


 이런 점에서 특이한 사건이 창궐하는 송충이 퇴치에도 왕건이 동원된다는 점이다. 《고려사절요》 숙종 7년(1102)조를 보면 이해 5월에 송충이가 무성하게 출현하자 왕이 금중(禁中), 곧 궁중에서 뭇 신하를 거느리고 상제에게 친히 초제(醮祭)를 올리는데 태조를 배향하고 사흘 밤 만에 파했다고 한다. 초제란 밤에 지내는 별 제사의 일종으로 도교를 대표하는 종교 행사다. 한데 이런 도교 행사에 태조를 초대해서 그 위신을 빌려 송충이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왕건이 도교의 신격으로 숭배받았다는 내 지적은 이래서 단적으로 증명된다. 


 송충이 얘기 나온 김에 그래서 어찌 되었을까? 왕건까지 동원했지만 송충이 퇴치는 실패한 듯, 그 다음달에는 재상에게 명해 5방(五方)의 산신과 해신에게 세 곳으로 나누어 제사 지내어 송충이 없어지기를 빌면서 죄수들을 사면했는가 하면, 그래도 여의치 못했던 듯 이번에는 군졸 5백 명을 풀어 송악산의 송충이를 잡도록 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박정희 시대에 송충이 잡으러 나간 어린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하기만 하다. 



<참고문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헌강왕릉보수수습조사보고서》, 1995



김태식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이다. 기사 입력은 2016년01월25일 12시16분이다. 


 근자에 《고려사절요》를 통독하며 고려사 500년을 훑다가 중·말기로 갈수록 짜증 혹은 분노가 치솟는 걸 보니 나 역시 어찌할 수 없는 한국 사람이다. 고려가 직접 지배나 다름없는 원나라 간섭을 무려 100년간이나 받으며 왕을 필두로 하는 고려인들이 갖은 굴욕을 감내해야 했던 데다 그 후기에 이르러서는 왜구가 주는 고통까지 덤터기로 썼으니 아마도 이때가 한국사 가장 참혹한 시대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런 감정은 비단 지금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줄로 안다. 굴곡의 근현대 한국이 겪은 참상이 아마도 고려 시대 그때로 오버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유의할 점이 있다. 역설적으로 나는 한국사가 이때만큼 세계를 향해 더 열려 있던 때가 없다고 본다. 전근대 언제나 그러했듯 중국은 그때도 세계의 중심이었고, 특히나 칭기즈칸의 유산으로 이룩한 원(元)은 그야말로 세계 제국이었다. 어쩌면 이 몽고 원 제국이 당시 세계에 미친 영향은 지금의 미국이 현대 세계에 가하는 영향보다 더 컸을 것이다. 원 제국이 주는 고통에 고려인들은 신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듯하지만, 그 넓은 중국 대륙을 앞마당 드나들 듯 한 시대 역시 이때였음을 잊어서도 안 된다. 고려와 고려 사람들은 원 제국 일원으로 강제 편입되고, 그에 따른 혹독한 희생을 감내해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편입이 주는 열매 역시 그보다 더 달콤할 수는 없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고려왕이나 왕족들은 인사권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처지에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르지만, 그 대부분은 원 황실의 사위가 되어 종래에는 누리지 못한 세계 권력의 중심에 들어서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를 증언하는 《고려사절요》를 훑다 보면 충숙왕 16년(1329)에서 이상한 사건 하나를 마주한다. 이에서 이르기를 이해 봄 정월에 “심왕(瀋王)의 공주 눌륜(訥輪)의 상(喪)이 원에서 도착했다(瀋王公主訥倫之喪, 至自元)고 했다. 이 경우 ‘상(喪)’은 그 시신을 실은 운구 혹은 상여 행렬을 말한다. 왜 이 기록을 이상하다 하는가? 느닷없기 때문이다. 눌륜이 누구인지 설명도 없고, 더구나 그 앞 어디에도 눌륜이 죽었다는 언급도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원문을 보면 ‘심왕 공주 눌륜’이라 해서 언뜻 보면 ‘심왕의 공주(딸)인 눌륜’처럼 읽힌다. 어떻든 눌륜의 운구가 원나라에서 이르렀다 했거니와, 이 경우 도착한 지점은 틀림없이 당시 고려의 서울 개경을 말할 것이다. 또한 눌륜이라는 이름도 영 생소하다. 한자 그 자체로도 도무지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 원 간섭기라는 시대 사정을 고려할 때 어쩐지 몽고 냄새가 짙다. 이런 궁금증들은 뒤에서 풀어보기로 하고 우선 그 뒤에 일어난 관련 사건을 같은 《고려사절요》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타난다. 

 

 “여름 4월에 눌륜공주(訥輪公主)를 장사지냈다. 이튿날 도적이 그 묘를 도굴했다.(夏四月, 葬訥倫公主, 翼日, 盜發其墓)”


 ‘발(發)’이라는 동사는 기본이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 경우는 ‘도굴’을 말한다. 요즘 고고학도들이 땅을 파서 과거의 흔적을 찾는 일을 ‘발굴(發掘)’이라 하는데, 발굴이라는 말 자체가 실은 ‘도굴’과 이종사촌임을 여실히 확인한다.  눌륜공주 운구가 개경에 도착한 시점이 1월이고, 최종 매장된 때는 4월이니 대략 3개월간 어딘가에 임시로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죽어서 최종 매장하는 시점까지 어딘가에 시신을 두고 조문 등을 하는 행위를 ‘빈(殯)’이라 한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한 공간, 혹은 시설을 ‘빈전(殯殿)’이라 하거니와 요즘은 ‘빈소(殯所)’라는 말을 흔히 쓴다. 동아시아 세계의 각종 의례(儀禮), 곧 세레모니를 지배한 절대 경전인 《예기(禮記)》 왕제(王制) 편이라는 곳을 보면 “천자는 죽고 나서 7일 지나 빈(殯)했다가 7월이면 장사지낸다. 제후는 죽은 지 5일 뒤에 빈하고 5개월 만에 장자지내며 대부(大夫)와 사(士), 그리고 일반 백성은 죽은 지 3일 만에 빈했다가 3개월 뒤에 장사지낸다”고 했다.


 눌륜은 공주라고 했고, 또한 지금 심왕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원 제국의 제후왕임이 확실한 이상, 《예기》에 따른다면 5개월 뒤에 시신을 묘소에 최종 안치했어야 하겠지만, 보통의 관료라든가 일반 백성에 준해서 장례를 치렀다고 추정된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는 법이다. 법대로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다만, 눌륜이 실제로 죽은 날을 기점으로 삼을 때는 빈 기간이 5개월일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눌륜의 운구가 개경에 도착하고, 3개월 뒤에 묻힌 일은 또 다른 고려 정사인 《고려사》에도 보인다. 《고려사절요》에는 운구가 개경에 도착할 날과 묻힌 날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고려사》에는 그것이 확실히 드러난다. 즉, 운구가 개경에 도착한 날을 정월 기미일이라 하고, 그를 묻은 날을 4월 경인일이라고 한다.


 이제 앞에서 미뤄둔 문제, 다시 말해 눌륜이 누구인지를 해명할 때가 되었다. 눌륜은 당시 심왕(瀋王)인 왕호(王暠)라는 사람의 정비다. 심왕이란 ‘심양(瀋陽)의 왕’이라는 뜻이니 원 황제가 고려왕 혹은 그 왕족에게 책봉한 제후 칭호 중 하나다. 나는 앞에서 원의 본격적인 간섭을 받게 된 일이 고려에는 고통이기는 했지만, 그 열매 역시 달콤했다고 말했다. 충선왕은 당시 원 제국 서울에 체류하면서 황위 계승에도 깊이 관여해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된다. 그 대가로 새로 즉위한 원 제국 황제 무종에게서 심양을 중심으로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 일대를 통치하는 심양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왕호는 삼촌인 충선왕에 이은 제2대 심왕으로 재위한 기간은 1316년 이래 1345년까지 무려 30년에 이른다. 그 위세 역시 막강해서 고려왕을 시종 위협하며, 실제로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기도 했다. 


 심왕 왕호는 충렬왕 손자다. 충렬왕은 아들 셋을 두었다. 원 제국 쿠빌라이 칸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아내로 맞아들어 충선왕을 낳았고, 정신부주(貞信府主)라는 후궁에게서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를 두었으며, 그 외에도 반주(盤珠)라는 또 다른 후궁한테서 왕서(王湑)라는 아들을 얻었다. 맏이는 왕자였지만, 원 황실을 등에 업은 정비 소생 충선왕에게 권위가 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왕자는 살아남고자 승려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환속해서 왕호를 비롯한 아들 셋을 두었던 것이다. 다행히 왕호는 삼촌인 충선왕에게 총애를 받아 이를 발판으로 심왕 자리를 이어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왕호가 성공 가도를 달리는 데는 그 역시 원 황실의 적극적인 도움이 받았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그의 장인은 원 제국 황족 일원으로 양왕(梁王)에 책봉된 송산(松山)이라는 사람이다. 송산은 쿠빌라이(1215~1294)의 증손자이면서 할아버지는 진금태자(眞金太子, 1243~1286)다. 진금태자는 형이 일찍 죽자 일찌감치 다음 보위를 이을 태자가 되었지만, 그에게 불행은 아버지 쿠빌라이가 무려 80세로 지나치게 장수했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죽기만을 기다림이 너무 애탔는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다만 이후 원 제국 황제는 모두 진금태자 후손에게서 나온 일로 사후 보상을 받게 된다. 


 진금태자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맏이가 카마라(甘麻剌). 처음에는 양왕(梁王)에 책봉되었다가 나중에는 진왕(晉王)으로 옮겼다. 그의 딸 중에 계국공주(薊國公主) 보탑실리(寶答失里)가 충선왕에게 시집갔다. 충선왕과 보탑실리는 금슬이 아주 나빠 이것이 결국 빌미가 되어 느닷없이 왕위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카마라 역시 아버지 진금태자처럼 그 자신은 황제가 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의 둘째아들이 10대 황제가 되니 그가 태정제(泰定帝)다. 카마라가 지닌 진왕이라는 타이틀은 그의 맏아들 송산(松山)에게 넘어간다. 심왕 왕호의 부인 눌륜은 바로 송산의 딸이다. 계보가 매우 복잡하니 간단히 할아버지 충렬왕 이래 그 아들 충선왕, 그리고 충렬왕 손자이면서 충선왕에게는 조카인 왕호 모두 원나라 황실 공주를 아내로 맞았다는 사실만 기억하기로 한다. 


 고려 왕실이 원 황실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은 구속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엄청난 힘이었다. 이들 고려 왕족이 때로는 원 제국에서 갖은 모욕을 당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엄청난 파워를 휘둘러 그 정치를 좌지우지하기도 했다. 충선왕 같은 이는 황위 계승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마침내 승리함으로써 당대 정치를 주름잡았다. 오죽하면 아버지 충렬왕이 죽고 난 뒤에도 고려왕이 싫다 하면서 원나라에 계속 머물고자 했겠는가? 


 기록에 확실치 않은 면이 있지만, 심왕 왕호의 부인 눌륜은 내가 보기에는 원나라 서울인 연경(燕京)에서 나고 자랐으며, 남편 왕호를 따라 심양에서 생활했거나 어쩌면 연경에서 죽 생활한 듯하다. 고려 혹은 개경하고는 인연이 남편이 그쪽 출신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한데도 막상 눌륜은 원나라 땅에서 죽어서는 그곳에서 잠들지 못하고 개경으로 왔다. 그 이유는 ‘출가외인’이라는 그 시대 관습에서 말미암는다. 남편이 죽을 땅에 묻혀야 했던 것이다. 한데 생전에는 각종 호사를 누렸겠지만, 이것이 역설적으로 그의 사후 생활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가 묻히고 무덤 문이 닫힌 그 다음날 그 무덤으로 밤 손님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앞서 본 기술이 전부다. 도굴 피해는 어떠한지, 관련 수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전연 말이 없다. 이 사건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까닭에 추가 언급을 뺏을 수도 있다. 이는 영원히 미궁으로 묻혀 버렸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을까? 도굴이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 무덤에는 어떤 물건들이 묻혔을까? 범인이 안 잡힌 미제 사건인지 모르나, 나는 누가 범인인 줄은 대강은 안다. 누구인가? 무덤을 만드는 데 관여한 사람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도굴은 단독 범행이 없다. 도굴은 한밤중에 하므로, 촛불을 비춰주거나 하는 공범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범인 중 적어도 한 명은 틀림없이 그 전날 눌륜공주를 안장하는 의식에 참여한 사람이다. 무덤 구조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른바 면식범 소행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무덤이 어떠했기에 이렇게 간단히 도굴되었을까? 눌륜공주의 무덤 소재지와 그 실물이 밝혀졌는지 모르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 무덤은 안 봐도 돌방무덤이다. 이 시대에는 왕릉을 비롯해 거의 모든 무덤이 합장분이라 해서 대체로 부부를 같은 무덤방에다가 묻었다. 부부가 몰사하거나 동시에 자살하지 않는 한 죽는 시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때도 평균 연령은 여자가 높아 남편이 먼저 죽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눌륜은 남편보다 먼저 죽었다. 나중에 남편 왕호는 죽어서 눌륜이 기다리는 무덤으로 틀림없이 먼저 들어갔을 것이다. 이런 부부 합장묘는 대체로 돌방무덤으로 만든다. 그 돌방무덤은 한 쪽에다, 거의 예외 없이 남쪽에다가 무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마련한다. 이 무덤 문을 통해 나중에 죽어서 들어오는 남편이나 부인 시신을 들이게 된다. 그러니 돌방무덤은 도굴에 취약하다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비록 무덤 문을 튼튼하게 마련하고 자물쇠를 채운다 하지만, 구조를 아는 사람들한테 이 문을 따기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그렇다면 왜 도굴했을까? 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덤에 묻힌 사람은 더구나 원나라 황실의 공주다. 도굴 우려 때문에 이 시대 한편에서는 박장(薄葬)이라고 해서 껴묻거리를 일부러 적게 묻는 일도 있지만, 대체로 후장(厚葬)이라 해서 잔뜩 묻는 일이 흔했다. 더구나 껴묻거리가 아무리 적다해도 원 황실의 공주 무덤 아닌가? 서민들한테는 엄두를 낼 수 없는 보물로 찾을 것임에 틀림없다. 도굴꾼은 이를 노린 것이다. 


▲ 가릉 ▲ 천장 덮개돌 상부에서 노출된 가릉 8각호석 모습 ▲ 가릉 석실 내부 벽석 축조 상태 ▲ 공릉 입구 막음석 노출상태사진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 가릉 ▲ 천장 덮개돌 상부에서 노출된 가릉 8각호석 모습 ▲ 가릉 석실 내부 벽석 축조 상태 ▲ 공릉 입구 막음석 노출상태 (사진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이 무렵 고려 시대 왕릉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실물이 있다. 고려 시대 왕릉은 대부분 개경에 소재하는 까닭에 그 실체적 접근이 우리로서는 지극히 어렵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강화도에는 그 왕릉 몇 기가 다행히 남아있고, 그 대부분은 정식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이들 왕릉은 강도(江都)시대, 그러니깐 강화도에 도읍한 시기에 만든 것이다. 널리 알려졌듯이 고려왕조는 개경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옮겨 몽고 침입에 30년 이상을 버텼다. 개중 하나로 석릉(碩陵)이라는 곳이 있다. 제21대 희종(재위 1204∼1211) 무덤이다. 이곳은 2001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 조사 결과 묘역(墓域)을 어떻게 꾸몄으며 시신을 묻은 공간인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봉분 주위로는 ‘∩’ 자 모양 담장(曲墻)이 둘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주목할 만 한 점은 무덤방 천장을 길이 300㎝, 너비 120㎝ 안팎인 대형 판석 3장을 놓고 그 위에 다시 평면 8각형 호석(護石)을 둘렀다는 대목이다. 담장과 호석 사이에는 납작한 작은 돌을 깔았다. 이는 아마도 왕릉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구조로 판단된다. 돌로 만든 무덤방은 길이 310㎝, 너비 210㎝, 높이 220㎝ 규모이며 양측 벽과 뒷벽에는 깬돌을 이용해 7단으로 쌓았다.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은 양측 벽 전면에 장대석 각각 1개씩을 놓아 기둥처럼 사용했고 대형 판석 1개로 막음 처리를 했다. 시신을 안치한 관을 놓은 바닥인 시상부(屍床部)는 풍화암반층 위에 두께 20㎝ 안팎의 장대석을 이용했다. 이미 여러 차례 도굴 피해를 본 까닭에 출토 유물은 많지 않으나 온전한 모양의 청자탁잔(靑磁托盞) 3점을 비롯해 꽤 많은 청자 제품을 수습했다. 나무 널에 사용한 철못과 널 부착물로 판단되는 금박(金箔) 조각, 구슬류 몇 점도 확인됐다. 이로 보아 원래 이 무덤에는 부장품이 상당했을 것으로 판단됐다. 


강화 고령왕릉 가릉 곤릉 출토유물강화 고령왕릉 가릉 곤릉 출토유물 (사진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이 석릉은 남한에서는 최초로 실시된 고려 왕릉이다. 이후에도 인근 고려 시대 왕릉 혹은 그에 버금가는 무덤이 추가로 더 조사됐다. 2004년 조사한 고려 제22대 강종(康宗)의 비 원덕태후(元德太后) 무덤인 곤릉(坤陵)과 제24대 원종(元宗)비 순경태후(順敬太后) 무덤인 가릉(嘉陵), 그리고 2007년 조사한 능내리 고분이 그들이다. 이들은 기본 무덤 구조가 같다. 눌륜공주의 무덤 역시 시대가 비슷하므로 틀림없이 석릉과 비슷했을 것이다. 껴묻거리 역시 상당했을 것이다. 도굴꾼들이 이를 몰랐을 리 만무하다. 


강화 능내리 석실분강화 능내리 석실분 (사진제공=김태식)


 도굴은 앞서 보았듯이 그것을 의미하는 행위를 ‘발(發)’이라는 동사로 표현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는 파낸다는 뜻이다. 도굴이나 발굴은 결국 무엇인가를 땅에서 파내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정식 고고학 발굴 역시 ‘보물’을 캐내고자 하는 점에서는 예외가 없다. 다만 도굴과 발굴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를 통해 노리는 보물이 다르다는 점이다. 고고학은 발굴을 통해 그 시대 문화사를 ‘발굴’하고자 한다. 이것이 고고학이 노리는 보물이다. 물론 고고학이라 해서 값비싼 금붙이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요새야 고고학 역시 홍보와 뗄 수가 없어 금붙이가 많이 나오는 발굴을 일러 ‘대박쳤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역시 그 시대 문화상 복원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금붙이를 비롯한 유물의 습득과 그 판매를 통한 실질적 금전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도굴과는 길이 다르다. 


강화 능내리 석실분 출토 유물강화 능내리 석실분 출토 유물 (사진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강화 능내리 석실분 출토 도기강화 능내리 석실분 출토 도기 (사진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하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발굴을 근간으로 하는 고고학 역시 도굴에 분명히 뿌리가 있다. 도굴 없이 오늘날의 고고학 발굴이 존재할 수는 없다고 나는 본다. 그 시대를 증언하는 유적과 유물이 땅속에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도굴이 길을 열어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고리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도굴은 과연 언제쯤부터 있었을까? 또 무엇 때문에 도굴은 성행했을까? 도굴이 성행함에 따라 그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어떠했는가? 나아가 그런 대응들은 얼마나 성공했는가? 혹여 그런 대응에 대해 우리의 도굴꾼들은 또 어떻게 대처했는가? 


 이런 점들을 함께 고려하면 도굴은 단순히 보물 캐기가 아니다. 도굴 역시 문화현상 중 하나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것이 범죄 행위라는 점에서는 이론이 있을 수는 없지만, 그런 점을 들어 단순히 성토하기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사회사를 탐구해 보아야 한다. 이를 훑다 보면 도굴에도 피눈물이 있다. 도굴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소위 민초들의 고뇌가 있다. 그런 점에서 주로 무덤을 대상으로 하는 도굴은 한편으로는 분노이며 눈물이기도 하다. 다음 호에서는 이런 여러 도굴 양상을 점검하기로 한다. 



김태식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1. 2018.03.30 17:11 신고

    잘 읽었습니다. 전문가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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