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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타소(古陀炤)는 앞서 여러 번 다루었고,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이나 사건은 이곳 내 블로그에서 '고타소' 혹은 그의 남편 '품석'으로 검색하면 되거니와, 혹 그것들이 모두 필요하신 분들은 참고바란다. 고타소란 이름은 내 조사가 철저한지 아닌지는 자신이 없거니와, 일단 내 추산대로라면 《삼국사기》 권 제41 열전 제1 김유신上에 보이거니와,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은 다음과 같다.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격파했을 때, 춘추공(春秋公)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스럽게 여겨 고구려에 청병함으로써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하자 왕이 허락했다. 


이것이 삼국시대 말기, 삼국 관계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대량주, 곧 지금의 합천 전투를 말함이거니와, 이 전투를 고비로 삼아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은 국운을 건 일전들을 치루거니와, 조금 과장하면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 그 불씨는 대야성에서 출발한다. 나아가 더 세부로 들어가면, 이 전투에서 신라가 패하고 고타소가 죽임을 당한 일이 그 거대한 출발점을 삼는다. 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 전재한 글에서 내가 전론(傳論)한 바 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로 한다. 


이런 고타소가 비록 고타소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맥락은 이 한 곳에 지나지 않으나, 이 당시 비극의 행적은 《삼국사기》 등지의 다른 곳에서도 산발적으로 보이니, 이런 여타 행적들과 버무림으로써 우리는 이 고타소의 족보를 둘러싼 비밀 하나를 풀게 된다. 아무튼 저 인용문을 통해 우리는 김춘추한테는 642년 당시 품석이라는 대야성주(이는 다른 대목에 보인다)한테 출가한 이미 출가한 고타소라는 딸이 있었음을 안다. 


이 고타소는 아비만 드러날 뿐, 어머니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이에서 관건은 고타소 어미가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 소생인가 아닌가로 모아진다. 현재 우리의 첫번째 관심은 고타소 어미가 문희냐 아니냐다. 이를 판별하기 위해 김춘추 출생년과 김법민(훗날 문무왕), 그리고 김법민 바로 아래 남동생 김인문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고타소가 문희 소생인가 아닌가는 거의 90% 이상 단안할 수 있다. 


첫째 김춘추 생년이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 는 침묵하나,  《삼국유사》는 달라 이곳 기이(紀異)편 제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전에 의해 그것이 밝혀진다. 이곳에 이르기를 김춘추는 "영휘 5년 갑인(654)에 즉위해 8년을 다스리다가 용삭 원년 신유(661)에 붕崩하시매 수壽 59세였다"고 하니, 말할 것도 없이 이때 나이는 소위 한국식이라 서양식 관념으로는 만 58세라는 뜻이다. 따라서 661년에서 58을 빼면 603이니, 이것이 바로 김춘추가 태어난 해다. 595년 생인 김유신과 비교하면 8살 어리다. 


따라서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딸 고타소가 죽었을 때, 김춘추는 만 39세, 신라식으로는 마흔살이었음을 안다. 이 무렵에 대개 스무살 안팎이면 거의 다 장가를 갔을 것이므로, 이때 김춘추가 사위를 봤다 해서 하등 이상한 점은 없다. 


한데 관건은 김법민과 김인문이다. 이 두 형제가 문희 소생임은 너무나 분명해 그에 대해 더는 물을 것이 없다. 이 중 형 김법민은 626년 생이요, 동생 김인문은 629년 생이다. 두 형제간에는 3년 차이가 난다. 김법민은 아들딸 통털어서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첫번째임은 하늘이 두쪽 나도 변함이 없다. 그것은 김유신이 기획한 저 유명한 축국쇼, 다시 말해, 김유신이 일부러 김춘추를 끌어들여 축구시합을 하다가 부러 옷고름을 찢어발겨 그것을 기워준다는 구실로 미혼인 누이동생 문희와의 소개팅을 주선해, 그에서 쿵딱쿵딱 해서 문희가 처녀 몸으로 밴 애가 바로 김법민인 까닭이다. 따라서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는 626년 태어난 김법민 이전에 태어난 자식은 있을 수가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면 그가 태어난 시점은 626년 생인 김법민보다 때려 죽어도 늦어야 한다. 얼마나 늦어야 하는가? 년년생이 전통시대에 드물지는 않았으므로 년년생이라 해도 고타소는 627년생이다. 한데 그렇게 봐도 영 석연찮은 대목이 있다. 다름 아닌 김인문 때문이다. 김인문은 김법민보다 3살 적은 629년 생이다. 626년과 629년 사이에 다른 자식이 없으란 법은 없으나, 문희가 무슨 애 낳는 벤딩머신이란 말인가? 상식으로 봐도 얼토당토 않다. 결론은 하나다.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고 하면, 626년생인 김법민, 629년생인 김인문보다 동생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고타소는 때려죽여도 630년 이후에 태어나야 한다. 


 그래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고 하고, 모든 가능성 고려해서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자! 630년 이전에는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넉넉잡아 630년 생이라고 해도, 고타소는 642년 대야성 전투 당시 나이가 고작 만으로 12살, 신라 나이로 13살밖에 되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치자. 저 나이에 얼마든 지아비는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넉넉잡아 13살이라고 하고, 그 나이에 김품석과 결혼해 남편 따라 대야성으로 갔다가, 불행하게 백제군에 성이 함몰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치자!  


같은 《삼국사기》 권제 47, 열전 제7이 저록著錄한 죽죽竹竹 전 다음 기술은 대체 무슨 개뼉다귄가? 


殺妻子而自刎 


죽죽은 이 대야성 전투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신라 군인이다. 품석의 부하들이 배반하여 백제군과 밀통하고 항복하려는 움직임에 분연히 반대하고 일어나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신라를 배신한 품석 부하들이 성문을 열고 백제군으로 투항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백제는 배신했다. 항복하러 나온 신라군을 복병을 시켜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저 인용문은 그 장면을 보고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성주 김품석이 취한 행동을 말한다.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품석은) 먼저 자기 마누라(고타소)와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어랏? 김품석과 고타소 사이에 아들이 있었네? 말이 안 되잖아? 고타소가 문희 소생이라면 아무리 많아 봐야 13살인데, 13살짜리가 아들을 낳았다고? 물론 이조차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과 그렇다는 건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다. 


결론은 오직 이 하나 뿐이다. 


김춘추에게는 문희 이전에 다른 부인이 있었다!!!!  


이 명확함이 오직 《화랑세기》에서만 드러난다.  《화랑세기》 논쟁? 끝났다. 뭐 그냥 단순히 문희 이전에 김춘추한테 부인이 있었다? 그건 누구나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그 맥락이 어찌 드러나는지 눈이 있으면 똑똑히 보고 말해라.  


  


 

본래 신라 사람이나, 642년 대야성 전투 때 신라를 배반하고 검일과 더불어 백제와 내통해 성이 백제에 함락되도록 하고, 아울러 이때문에 대야성주 김품석 부부를 죽임에 이르게 했다.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 정벌 때 신라군에 잡혀 처형됐다. 그의 가족들은 절 노비로 적몰되었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본기 : 7년(660)…8월 2일에 주연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왕과 정방(定方) 및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隆)은 마루 아래 앉혀서 때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모척(毛尺)을 붙잡아 목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서 백제에 도망한 자인데, 대야성의 검일(黔日)과 함께 도모하여 성이 함락되도록 했기 때문에 목벤 것이다. 또 검일을 잡아 [죄목을] 세어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질러 없앰으로써 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 품석(品釋)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이다." 이에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해동고승전 권 제1 법공(法空) : 21년(534) 천경림의 나무를 베고 정사를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주초와 석감(石龕)과 섬돌을 발견하니 과연 그곳은 옛날 초제(招提)의 옛 터였다. 대들보감으로 쓸 재목은 다 이 숲에서 나왔다. 공사를 다 마치자 왕은 왕위를 사양하고 스님이 되어 이름을 법공이라고 고치고 삼의(三衣)와 와발만을 생각했다. 뜻과 행은 원대하고 고매하였으며, 일체 자비를 가졌다. 그리고 그 절 이름을 대왕흥륜사라고 했는데, 이는 대왕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것이 신라에서 절을 창건한 시초이다. 왕비도 또한 부처님을 받들어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 이로부터 큰 (불)사를 열어 일으켰으므로 왕의 시호를 법흥이라 한 것은 헛된 찬사가 아니다. 그 뒤로는 염촉의 기일을 맞이할 때마다 흥륜사에서 법회를 열어 그의 지난날을 추모했다. 태종왕 때에는 재상 김량도가 서방을 신앙하여 두 딸을 희사했다. (두 딸은) 화보와 연보라 했으며 이 절의 사비로 삼았다. 또 역신이  모척 일족도 천역에 충당하였으므로 구리와 주석 두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천역을 맡고 있다.

삼국유사 제3권 흥법 제3 아도기라(阿道基羅) : 그 뒤 태종왕(太宗王) 때 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佛法)을 믿어 화보(花寶)와 련보(蓮寶) 두 딸을 바쳐 이 절의 종으로 삼았으며, 또 역신(逆臣) 모척(毛尺)의 가족을 데려다가 절의 노예로 삼으니 이 두 가족 후손은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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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 사위로서 선덕왕 11년(642), 이찬이자 대야성 도독으로 있다가 백제군 침략에 성은 함락되고 그 자신도 부인 고타소와 함께 죽었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선덕왕 : 11년(642)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에 백제 왕 의자(義慈)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 서쪽 40여 성을 쳐서 빼앗았다. 8월에 또 고구려와 함께 모의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당] 태종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도독 이찬 품석(品釋)과 사지(舍知) 죽죽(竹竹)·용석(龍石) 등이 죽었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성에서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곧 왕을 찾아 뵙고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 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7) 죽죽 : 죽죽(竹竹)은 대야주 사람이다. 아버지 학열(郝熱)은 찬간(撰干)이 되었다. 죽죽은 선덕왕 때 사지(舍知)가 되어 대야성도독 김품석(金品釋) 휘하에서 보좌역을 맡고 있었다. 왕 11년 임인(백제 의자왕 2: 642)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그 성을 공격했다. 이보다 앞서 도독 품석이 막객(幕客)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가 예뻐 이를 빼앗았으므로 검일이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백제군과 내응해 그 창고를 불태웠으므로 성중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굳게 막지 못하였다. 품석의 보좌관 아찬 서천(西川)<또는 사찬(沙) 지삼나(祗彡那)라고도 한다>이 성에 올라가 윤충에게 소리치기를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원컨대 성을 들어 항복하겠다!” 하니 윤충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대와 더불어 우호를 함께 하겠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밝은 해를 두고 맹서하겠다!” 하였다. 서천이 품석 및 여러 장수에게 권하여 성을 나가려 하니, 죽죽이 말리며 말했다. “백제는 자주 번복을 잘하는 나라이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반드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으로 만약 성을 나가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쥐처럼 엎드려 삶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호랑이처럼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품석이 듣지 않고 문을 열어 병졸을 먼저 내보내니 백제의 복병이 나타나 모두 죽였다. 품석이 장차 나가려 하다가 장수와 병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죽죽이 남은 병졸을 모아 성문을 닫고 몸소 대항하니 사지(舍知) 룡석(龍石)이 죽죽에게 말하기를 “지금 군대의 형세가 이러한데 반드시 온전할 수 없다. 항복하여 살아서 후일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합당하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지어 준 것은 나로 하여금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절조를 지켜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말게 한 것이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여 살아서 항복하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힘써 싸워서 성이 함락되자 용석과 함께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죽죽에게는 급찬, 용석에게는 대나마 관등을 내리고 처자에게 상을 내려 서울로 옮겨 살게 했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7년(660)...8월 2일에 주연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왕과 정방(定方) 및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隆)은 마루 아래 앉혀서 때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날 모척(毛尺)을 붙잡아 목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서 백제에 도망한 자인데, 대야성의 검일(黔日)과 함께 도모하여 성이 함락되도록 했기 때문에 목벤 것이다. 또 검일을 잡아 [죄목을] 세어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질러 없앰으로써 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 품석(品釋)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번째 죄이다.이에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삼국사기 권제28(백제본기 제6) 의자왕 : 2년(642)...8월에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케 했다. 성주 품석(品石)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왕도(王都)에 전하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 주·현(州縣)에 나누어 살게 했다. 군사를 남겨 두어 그 성을 지키게 했다. 왕은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삼국사기 권제41(열전 제1) 김유신上 :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격파하였을 때, 춘추공(春秋公)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으로 여겨, 고구려에 청병하여 백제의 원한을 갚으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춘추가] 장차 떠나려 할 때 유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공과 한 몸이고 나라의 팔다리이다. 지금 내가 만약 저 곳에 들어가 해를 당하면, 공은 무심할 수 있겠는가?” 유신이 말하였다. “공이 만일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백제 두 임금의 뜰을 짓밟을 것이다. 진실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라 사람을 대할 것인가?” 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공과 더불어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여 말하였다.“내가 날짜를 계산하여 보건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다. 만약 이 기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만나 볼 기약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서로 작별하였다. ...진덕왕 태화(太和) 원년 무신(648)에... 그때 유신은 압량주 군주(軍主)로 있었는데 마치 군사에 뜻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놀며 몇 달을 보내니, 주(州)의 사람들이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생각하여 헐뜯어 말하기를 “뭇 사람이 편안하게 지낸 지가 오래되어 남는 힘이 있어 한번 전투를 해봄직한 데 장군이 용렬하고 게으르니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유신이 이 말을 듣고 백성을 한 번 쓸 수 있음을 알고는 대왕에게 고하였다. “이제 민심을 살펴보니 전쟁을 치룰 수 있습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량주 전쟁에 대한 보복을 합시다!” 왕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건드렸다가 위험을 당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소?”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전쟁의 승부는 대소에 달린 것이 아니고 인심이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紂)에게는 수많은 백성이 있었으나 마음과 덕이 떠나서 주(周)나라의 10명의 신하가 마음과 덕을 합친 것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백성은 뜻을 같이하여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는데 저 백제는 두려워할 바가 못됩니다.” 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주의 군사를 선발 훈련시켜 적에게 나가게 하여 대량성(大梁城)[현재의 경남 합천]에 이르니 백제가 맞서 대항하였다. 거짓 패배하여 이기지 못하는 척하여 옥문곡(玉門谷)까지 후퇴하니 백제측에서 가볍게 보아 대군을 이끌고 왔으므로 복병이 그 앞뒤를 공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백제 장군 여덟 명을 사로잡고 목베거나 포로로 잡은 수가 1천 명[級]에 달하였다. 이에 사신을 백제 장군에 보내 말하였다.“우리의 군주(軍主) 품석과 그의 아내 김씨의 뼈가 너의 나라 옥중에 묻혀 있고, 지금 너희의 부장 여덟 명이 나에게 잡혀 있어 엎드려 살려달라고 하였다. 나는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에는 고향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말을 생각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대가 죽은 두 사람의 뼈를 보내 산 여덟 사람과 바꿀 수 있는가?”  백제의 좌평 중상(仲常)<또는 충상(忠常)이라고도 썼다.>이 왕에게 아뢰었다.“신라인의 해골을 남겨 두어도 이로울 바가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약 신라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우리의 여덟 명을 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이 저쪽에 있고, 곧음이 우리 쪽에 있으니 어찌 걱정할 바가 있겠습니까?” 이에 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어 관에 넣어 보냈다. 유신이 말하기를 “한 잎이 떨어진다고 하여 무성한 수풀이 줄어들지 않으며, 한 티끌이 쌓인다고 하여 큰 산이 보태지는 법이 아니다.” 하고는 여덟 사람이 살아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드디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백제의 영토에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을 목베고, 9천 명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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