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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니, 20세기에 활발히 출간되고 있는 우리나라 각 교사校史라든가 지방지를 보면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항목이 '우리 학교(혹은 고장)를 빛낸 인물들'이라는 곳인데, 이것만 보면 우리는 마치 그 학교, 그 고장 출신자 전체가 모두 독립투사이며 의병장이며 뛰어난 학자인 줄 착각하게 되는 착시현상에 견줄 수 있다. 하지만 특정 집단 전체와 그 집단을 구성하는 구성원 하나하나가 그 학교, 그 고장을 빛냋 인물이 될 수는 결코 없다. 개중에는 일제에 빌붙어 나라와 동포를 팔아먹은 놈이 있는가 하면 협잡꾼도 있을 것이고 천하의 난봉꾼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설혹 김대문(金大問)이 현좌충신(賢佐忠臣) 양장용졸(良將勇卒)은 모두 화랑도 출신이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화랑세기》가 그런 인물들로만 득실댈 것이며 나아가 화랑도 전체가 이런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하면 커다란 착각이다. 어떤 집단이나 어떤 인물이 어떤 기준으로 부각되려면 그렇지 않은 인물들이 그 반대편에 항상 존재해야만 한다. 이완용이 없으면 신채호도 없다. 화랑도 모두가 정말로 현좌충신이고 양장용졸이었다면 김대문은 그런 인물들로만 채운 《화랑세기》라는 열전을 쓸 까닭이 없다. 모두가 현좌이고 충신이고 양장이며 용졸인데 뭣하러 현좌충신 양장용졸로 득실대는 《화랑세기》를 쓴단 말인가?"


김태식,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김영사, 2001) 중 프롤로그 '순국무사 화랑을 해체하며' 중 한 대목이다. 



이에서 보이는 "화랑도 모두가 정말로 현좌충신이고 양장용졸이었다면 김대문은 그런 인물들로만 채운 《화랑세기》라는 열전을 쓸 까닭이 없다"는 구절이 애초엔 "화랑도 모두가 정말로 현좌충신이고 양장용졸이었다면 김대문은 그런 인물들로만 채운 《화랑세기》라는 열전을 미쳤다고 쓴단 말인가"였다.  


내가 이 얘기를 왜 굳이 하는가? 《삼국사기》에는 신라시대를 살다간 김대문이라는 사람이 그의 단행본 중 하나인 《화랑세기》에서 했다는 말 중에서도 굳이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賢佐忠臣]가 이(화랑)에서 우뚝 빼어났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良將勇卒]이 이(화랑)에서 생겨났다"는 말을 인용했다고 했거니와, 《화랑세기》가 이미 일실(逸失)한 마당에, 이 구절을 접한 근현대 역사학도들이 너도나도 가릴 것 없이, 이런 말을 남긴 《화랑세기》는 화랑 출신 중에서도 그러한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 그리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만을 골라 열전으로 세운 충신 전기일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라진 《화랑세기》가 홀연히 출현한 지금에도 이런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이영표의 그것을 능가하는 완연한 헛다리 짚기에 지나지 않는다. 첫째, 저런 말을 김대문이 남겼다는 《화랑세기》는 '花郞世記'라,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화랑을 역임한 사람들의 순차적인 전기'라는 뜻이거니와, 그 제목만으로도 벌써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처럼 초대 이래 마지막까지 특정한 직위, 예컨대 왕 혹은 제후들의 순차적인 전기라는 의미이니, 아무렇게나 화랑 출신자들이라 해서 나열한 전기가 아닌 것이다. 세기(世記)라는 말은 본기(本記) 혹은 세가(世家)라는 말과 같다. 이 평범한 용어조차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연 눈치채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화랑세기》를 곡해한 제1의 원흉이다. 


둘째, 세기는 본기 혹은 세가인 까닭에 그러한 직책을 차례로 역임한 사람들은 여러 군상이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다. 신라본기를 보면 초대 혁거세 이래 마지막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56명에 달하는 왕이 있었으니, 개중에는 성군聖君도 있고 현군賢君도 있지만, 패악무도한 임금도 있고, 어려서 즉위해 아무 것도 못하고는 죽어간 애송이 왕도 있는 것이다.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 순차로 등장하는 왕들 역시 그러했다. 


자연 화랑들의 본기이자 세가인 '화랑세기' 역시 초대 화랑 이래 마지막 화랑에 이르기까지 이런 다양한 군상의 화랑들 열전이어야 한다. 이건 지금 홀연히 다시 출현한 《화랑세기》와는 전연 관계가 없다. 지극히 상식 수준의 추단만으로도 《화랑세기》에 등장할 화랑들은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함에도 삼척동자도 간취하는 이런 특성을 정작 역사로 업을 삼는다는 자들(우리는 그들은 역사학자라 한다)만이 유독 그것을 몰라, 현좌충신 양장용졸 운운하는 구절이 《화랑세기》를 인용한  《삼국사기》에 보인다 해서, 이 말을 확대 왜곡하고는 《화랑세기》에는 현좌이면서 충신이고, 양장이면서 용졸인 신라 화랑이 그득할 것이라는 믿음은 단 한 순간도, 지금 이 순간에도 놓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화랑세기》를 망친 두 번째 원흉이다. 


셋째 원흉은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를 구별하지 못한 죄다. 기전체인 《삼국사기》를 구성하는 여러 편 중에서도 인물 전기인 열전이 정리한 인물 중에는 신라 화랑 출신이거나, 그렇게 추정되는 인물이 제법 있으니, 그런 사람들은 하나 같이 현좌이며 충신이고, 양장이고 용졸이니, 김유신이 그러하고, 그의 조카 김반굴과 반굴의 아들 김령윤이 그러하며, 사다함이 그러하다. 실제 이들을 보면 용맹한 전사戰士들이다. 하지만 《삼국사기》가 정리한 신라 화랑들이 이런 인물 일색이라 해서, 《화랑세기》가 정리했을 신라 화랑들 역시 이런 인물들로 점철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다. 한데 그 위험천만한 생각들이 근현대 역사학 지난 100년을 정답처럼 군림하고 말았다. 


'현좌충신 양장용졸'은 김대문이 생각한 바람직한 화랑상(像)일 뿐이며, 실제 모든 신라 화랑이 저러했던 것은 단연코 아니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김대문 자신이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저 말이 김부식으로 넘어오면서는 일대 변신을 꾀해, 김부식이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할 사람들을 추리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같은 현좌충신 양장용졸이라 해서, 그 맥락은 전연 달랐던 것이다. 


말한다. 


김대문이 말한 현좌충신 양장용졸과 김부식이 그것을 굳이 끄집어 낸 맥락은 전연 다르다. 이 다름을 인지하지 못한 데서 신라 화랑을 둘러싼 거대한 곡해가 빚어졌던 것이다. 김대문의 이데올로기와 김부식의 이데올로기, 이걸 구별할 줄 모르는 것은 똥과 된장을 구분치 못하는 일과 같다. 




아래 원고는 2010년 11월 6일 가브리엘관 109호에서 한국고대사탐구학회가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제로 개최한 그해 추계학술대회에 '욕망의 변주곡, 《화랑세기》'라는 제목을 발표한 글이며, 그해 이 학회 기관지인 《한국고대사탐구》 제6집에는 '‘世紀의 발견’, 『花郞世紀』'라는 제목으로 투고됐다. 이번에 순차로 연재하는 글은 개중에서도 학회 발표문을 토대로 하되, 오타를 바로잡거나 한자어를 한글병용으로 하는 수준에서 손봤음을 밝힌다. 



1. ‘괴물怪物’의 출현 


 역사는 두 개의 축을 갖는다. 둘 중 하나만 무너져도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소설’이 된다. 그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축으로 인간과 자연이 얽어내는 파노라마다. 시간 혹은 공간을 무시한 역사 구축은 이미 역사의 영역을 탈출해 신화, 혹은 판타지의 영역이 된다. 이런 점에서 작금 인기리에 방영한 MBC 사극 《선덕여왕》은 이 두 개의 축을 모두 붕괴한 토대에서 구축한 ‘소설’이요 판타지다. 


 우선 드라마는 공간을 무시한다. 예컨대 드라마 초창기에 진평왕의 쌍둥이 딸 중 동생으로 설정한 선덕은 아마도 지금의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쯤으로 생각되는 사막을 여행하면서 여기에서 온갖 간난을 겪는 것으로 설정한 점이 그것이다. 나아가 《선덕여왕》은 시간을 무시한다. 이 드라마를 엮어가는 주된 축 중 한 명인 김유신은 595년생임이 각종 기록에서 명백하며, 나아가 나중에 또 다른 축으로 등장한 김춘추는 604년생이지만, 이런 ‘시간’은 오직 9살 차이인 김유신과 김춘추 두 명의 관계에 대해서만 설득력을 지닐 뿐, 그 외 우수마발牛溲馬勃은 모조리 시간 무시다. 선덕에게 시종 맞서 권력욕의 화신처럼 그리는 미실美室은 드라마에서 10대 때 김유신이나 20대 때 김유신이나 똑같은 모습이다. 더불어 미실의 가장 주된 참모 역할을 한다고 묘사한 설원랑은 이 드라마의 원전 격인 《화랑세기》에 의하면 549년에 태어나 건복建福 23년, 즉, 606년 7월에는 향년 58세로 죽어 이미 퇴장해야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계속 생존했다. 문노라는 인물 또한 같은 《화랑세기》에는 설원랑과 같은 해에 저승길로 가거니와, 이 무렵 김유신은 12살에 지나지 않지만, 드라마는 이런 김유신이 청년이 되어서야 문노를 독화살에 맞아 죽은 것으로 처리해 퇴출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선덕여왕》은 사극이라면 으레 숙명과도 같은 논란, 즉, 드라마가 역사를 왜곡했느니 아니했느니 하는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이 나로서는 기이하기만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대하사극을 표방한 드라마는 언제나 이런 논란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일까? 


  이 드라마는 이 괴물의 출현 없이는 태동을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드라마 《선덕여왕》이 《화랑세기》라는 이 괴물을 충실히 재현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선덕여왕》은 시간 무시, 공간 무시라는 기법을 통해 《화랑세기》를 파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드라마는 《화랑세기》를 벗어날 수는 없다. 언제나 《화랑세기》로 돌아온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선덕여왕》에 《화랑세기》는 족쇄다. 


 이 괴물은 여타 괴물이 그렇듯이, 그리고 봉준호가 탄생시킨 ‘한강 괴물’이 그랬듯이, 1989년에 홀연히 등장했다. 왜 홀연이라 하는가? 이름만 전해지다가, 혹은 그 편린 중 한두 조각만이 희미하게 전해지다가 갑자기 그 전모에 가까운 모습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홀연은 필연적으로 혼란을 낳는다. 


 일서(逸書)의 출현. 이런 사건은 늘 대하드라마가 역사 왜곡 논란이 휘말리듯이 ‘괴물’ 《화랑세기》 또한 텍스트 그 자체가 이미 출현과 더불어 거센 진위 논쟁에 휘말렸다. 이 논쟁은 그것이 출현한지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의 기미는 없다. 《화랑세기》라는 말은 삼국사기 권 제46 열전 제6에 보인다. 이에 이르기를 “김대문金大問은 본래 신라 귀문貴門의 자제로서 성덕왕聖德王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다. 그가 쓴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했다. 이에 의한다면 《화랑세기》 외에도 여타 김대문의 저술은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 인종 시대 무렵(1134)에도 남아있었던 듯하다. 


 더불어 《삼국사기》권제4 신라본기 4 진흥왕 37년(576) 조에서는 신라에 화랑 제도가 창설된 연원을 기술하는 와중에 金大問이 《花郞世記》에서 했다는 말로써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라고 하고, 같은 인용 구절이 같은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7 김흠운 열전에도 보인다. 


 이 외에도 김대문을 인용한 구절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더러 보이거니와,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남해차차웅 조에 이르기를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에 올랐다.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金大問이 말했다. (차차웅은) 방언(方言)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니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일컬어 자충이라 했다”고 하며 이와 흡사한 언급이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남해왕南解王 조에도 같은 김대문을 인용한 구절이 있다. 


 또 《삼국사기》 권 1 신라본기 제1 유리니사금 條에서는 유리니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음을 언급하면서, 김대문의 말을 인용해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 많은 이가 왕위를 이을지어다’고 했다. 그 뒤에 김씨 성 또한 일어나 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고 하고,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눌지마립간 조에서는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 다음에 金大問의 말이라면서 “마립麻立은 방언에서 말뚝을 일컫는 말이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거니와 위계位階에 따라 설치됐다. 왕의 말뚝이 주(主)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에 배열되었기 때문에 이 때문에 (왕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했다. 


 김대문에서의 인용은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조에서 이 왕 15년(528)에 불교가 공인된 사실을 전하면서, 이를 마련한 그 유명한 사건, 즉, 이차돈의 순교를 전하거나와 《삼국사기》는 이것이 “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에 의거한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김대문 혹은 《화랑세기》의 흔적이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아직도 남아있다”는 김대문의 저술은 《화랑세기》를 포함해 모조리 멸종됐다. 이렇게 멸종됐다는 그의 저술 중 홀연히 《화랑세기》가 출현했다는 데 이것이 어찌 ‘사건’이 되지 않겠으며 ‘괴물’이지 않겠는가? 



생몰년 미상. 신라인.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에 임명되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화랑 집단 우두머리인 풍월주를 배출했다.  아버지 오기는 27세 풍월주이며, 할아버지 예원은 20세, 증조부 보리는 12세, 고조부 이화랑은 4세, 5대조 위화랑은 초대 풍월주였다.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김대문 열전 : 김대문(金大問)은 본래 신라의 귀문(貴門)의 자제로서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다. 그가 쓴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


삼국사기 권제1(신라본기 제1) 남해차차웅 :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에 올랐다.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말했다. (차차웅은) 방언(方言)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니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일컬어 자충이라 했다>


해동고승전 권 제1 법운(法雲) 전 : (진흥왕) 37년(576)에는 처음으로 원화(原花)를 받들어 선랑(仙郞)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나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할까 근심하다 많은 사람을 무리지어 놀게하고는 그들의 행실을 보아 천거하여 쓰고자 했다. 마침내 미녀(美女) 두 사람을 가려 뽑으니 남무(南無)와 준정(俊貞)이라 하니 무리를 300명이나 모았다. 두 여자는 서로 미모를 다투다가 (준)정이 남무를 유인해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강물에 던져 죽이므로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져 버렸다. 그 뒤에는 미모의 남자(美貌之男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받들어 화랑으로 삼으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혹은 도의로 서로 탁마하고 혹은 노래와 풍류로 서로 즐기니 산수를 찾아 다니며 유람하니 먼 곳이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이를 조정에 천거했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세기(世記)에 이르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에서 나오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나왔다”고 했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실로 3교를 포함한 것이니 모든 백성을 상대로 교화했다. 또한 들어오면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했으니 이는 노나라 사구의 뜻이고 무위의 사태에 처하고 무언의 가르침을 행하였으니 주나라 주사의 종지였으며, 모든 악한 일은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만 받들어 행하니 천축 건태자의 교화였다”고 했다. 또 당나라 영호징은 신라국기에서 이르기를 “귀인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자를 가려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해 받을어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나라 사람들이 다 받들어 섬겼다”고 했다. 이는 대개 왕의 정치를 (돕기 위한) 방편이었다. (선)랑이었던 원(화)에서 신라말에 이르기까지 무릇 200여 명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4선(仙)이 가장 어질었으니, 저 세기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1 제2대 남해왕(南解王) : 김대문(金大問)이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 한다”면서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를 김대문(金大問)이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位)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이 주(主)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삼국사기 권제1(신라본기 제1) 유리니사금 :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김대문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 많은 이가 왕위를 잇거라'라고 했다. 그 뒤에 김씨 성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삼국사기 권제3(신라본기 제3) 눌지마립간 :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김대문(金大問)이 말했다. “마립(麻立)은 방언에서 말뚝을 일컫는 말이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거니와 위계(位階)에 따라 설치됐다. 왕의 말뚝이 주(主)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에 배열되었기 때문에 이 때문에 (왕의) 명칭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 15년(528)에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했다. 일찍이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으로 왔는데, 그 고을 사람 모례(毛禮)가 자기 집 안에 굴을 파 방을 만들어 있게 했다. 그 때 양에서 사신을 보내와 의복과 향을 보내주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다 쓸 지를 모르므로 사람을 보내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물었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대면서 말했다.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나니, 신성(神聖)에게 정성을 도달케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째가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이며 셋째가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사르면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왕녀가 병이 심했으므로 왕은 묵호자에게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했더니, 왕녀가 병이 곧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며 음식과 선물을 많이 주었다. 묵호자가 나와 모례를 찾아보고 얻은 물건들을 그에게 주면서 “나는 지금 갈 곳이 있어 작별하고자 합니다” 라고 말했으니 잠시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중드는 이 세 사람과 함께 모례 집에 또 왔다.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으니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 병(病)도 없이 죽었다. 시중들던 세 사람이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하니 믿고 받드는 자가 가끔 생겼다. 이 때 와서 왕 또한 불교를 일으키고자 했으나 뭇 신하가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불평을 많이 하므로 왕이 어쩔줄 몰라 했다. 왕의 가까운 신하 이차돈(異次頓)<처도(處道)라고도 한다>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하찮은 신(臣)을 목베어 뭇 사람의 논의를 진정케 하십시오”.  왕이 말했다. “본래 도(道)를 일으키고자 하는데 죄없는 사람을 죽임은 잘못이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를 불러 의견을 물으니 모두 말했다. “지금 중들을 보니 깍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었고, 말하는 논리가 기이하고 괴상해 일상적인 도(道)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 이를 그대로 놓아두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차돈 혼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불교가 심오하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뭇 사람의 말이 견고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는데, 유독 너만 다른 말을 하니 양 쪽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 드디어 이차돈을 관리에게 넘겨 목을 베게 하니, 이차돈이 죽음에 임해 말했다. 나는 불법(佛法)을 위해 형(刑)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만약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내 죽음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구치니 그 색이 우유빛처럼 희었다. 뭇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를 헐뜯지 않았다.<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에 의거한 것이지만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흥왕 :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일찍이 임금과 신하들이 인물을 알아볼 방법이 없어 걱정하다가, 무리들이 함께 모여 놀게 하고 그 행동을 살펴본 다음에 발탁해 쓰고자 하여 마침내 미녀 두 사람 즉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을 뽑고 무리 300여 명을 모았다.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이 사형에 처해지자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다시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게 되어, 착한 사람을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김흠운 열전 : 논(論)한다. 신라 사람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음을 염려해 무리끼리 모여 함께 놀게 하고는 그 행동을 지켜본 다음에 뽑아 쓰고자 해서 마침내 미모의 남자를 뽑아 분장을 시켜 화랑이라 이름하고 받들게 하니 무리가 구름떼처럼 모였다. 서로 도의로써 갈고 닦았고, 혹은 노래로써 서로 즐기고, 산수를 유람하며 즐기어 멀리라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해 사람됨의 그릇됨과 바름을 알아 선택해 조정에 천거했다. 대문(大問)이 말하기를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겨났다』 한 것은 이를 말함이다. 삼대(三代) 화랑이 무려 200여 명이었는데 훌륭한 이름과 아름다운 일은 모두 전기와 같다. 흠운 같은 자는 또한 낭도로서 능히 왕사(王事)에 목숨을 바쳤으니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은 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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