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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철감선사 부도탑(왼편)과 그 신도비(오른편)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산 191-1 번지에 소재하는 쌍봉사라는 사찰 서쪽 뒤편으로 올라간 쌍봉산 기슭에 통일신라말, 이곳을 무대로 이름을 떨친 철감(澈鑒)이라는 선사(禪師) 산소가 있다. 이 무렵이면 승려는 거의 예외없이 다비를 할 때라, 원성왕 14년(798)에 출생한 철감이 경문왕 8년(868)에 입적하자, 그 역시 다비식을 하고는 그 유골과 사리를 수습하고는 그것을 봉안할 산소를 조성하고 그 인근에는 선사의 공덕을 칭송하는 신도비를 세우니, 그것이 현재는 저리 배치되어 있다. 승려 무덤은 여타 직업 종사자 혹은 다른 신분과는 독특하게 다른 점이 있어, 역시 승려임을 표시하고자 그 모양을 탑으로 만들었으니, 불교에서 탑은 바로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산소인 까닭이라, 이 전통을 살린 것이다. 


저 두 석조물은 한눈에 봐도 소위 비례가 맞지 않음을 눈치챈다. 부도탑과 신도비가 비율이 맞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하도 저 모습이 익숙해 그런갑다 한다. 좀 자세히 보면 짜리몽땅 납딱이라, 뭔가 나사가 빠진 느낌이 난다.  




그 명패를 자세히 살피면 '쌍봉사 고 철감선사 비명'이다. 




 

비명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철감선사가 생전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를 적은 구절은 어디갔는가? 사라지고 없다. 


동아시아 모든 비碑, 특히 신도비神道碑는 패턴이 있다. 거북 모양 받침돌이 있고, 그 등 한복판을 직가각형으로 쪽개고 파낸 다음 그에다가 넓데데한 판석을 세우거니와, 이를 사람으로 치면 몸뚱아리에 해당한다 해서 비신碑身이라 하며, 그 위에다가는 머리 혹은 모자에 해당하는 머릿돌을 얹는다. 이 머릿돌에는 용 혹은 이무기를 새기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아 이를 이수螭首라 부른다. 이 이수 전면 복판에다가 문패를 달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 철감선사 신도비는 거북이 받침돌과 용 문양 머릿돌만 있고, 비신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이 똑같은 꼴이 여주 고달사지에서도 벌어진다. 아래가 이곳 원종대사 혜진 스님의 탑비다. 이 역시 몸뚱아리는 없고, 받침돌과 머릿돌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반면 아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몸뚱아리가 그대로 살아남았다. 저 거무틱틱한 몸뚱아리 전면과 뒷면, 그리고 때로는 측면까지 활용해 이 스님이 무척이나 훌륭한 분이었다는 찬송가를 잔뜩 써놓기 마련이다. 이 탑비와 세트를 이루는 그의 부도탑은 여러 곳을 전전하다 지금은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해제 보수 중인데, 그것이 끝나면 아마 본래 자리, 그러니깐 저 탑비 바로 앞쪽으로 올 것이다. 



그건 그렇고 대체 몸뚱아리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아가 왜 하필 몸뚱아리만 날아갔는가?


이런 현상과 관련해 밑도끝도 없는 일제 수탈 신화가 또 작동한다. 걸핏하면 일본놈들 악랄한 소행으로 밀어부치는 것이라, 이게 참으로 만병통치약과도 같아, 비석 몸뚱아리를 없앤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일삼은 자들이 일본놈이라는 신화가 강력히 작동한다. 이 경우 더욱 재미난 현상이 벌어지는데, 식민지시대에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고 할 때는 일본놈 소행이라고 하기도 힘들지만, 이 경우에도 참으로 기발난 왜놈 타령을 일삼게 되는데, 바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 소행이라고 밀어부치는 수법이 그것이다. 이런 수법은 조선후기 때 조선사대부들한테서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언설이다. 


실제 저와 같은 문화재 현장에서 저와 같은 일제 만행론은 개독 신앙보다 더한 확고한 위력을 뿜어내곤 한다. 이런 '신앙'에 의하면 모든 나쁜 짓은 다 일본놈이 해야 한다. 지금은 아마 문화재 안내판이 교체된 듯한데 당장 저 철감선사 신도비만 해도 그 안내판에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비신은 일제시대에 잃어버렸다고 전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놈이 때려 부수었다는 뜻이다. 


한데 일본놈 소행이라 밀어부치면 참 말끔해서 좋기는 한데 그래도 못내 찜찜한 대목이 있다. 첫째, 일본넘들이 할 일 없어서 멀쩡한 비석 중에서도 몸통만 쪼갠단 말인가? 그들이 극악무도하면 몸통만 아니라 대가리 받침 다 깨부셔야 하는 거 아닌가? 둘째, 일본넘들 역시 불교국가인데(물론 이 경우 신불습합이라 해서 신도 성향이 강하긴 하나, 일본 사회에서 부처가 차지하는 위치는 막중하기만 하다) 그런 불교도들이 감히 스님 신도비를 부순단 말인가? 이 무슨 개망나니인가? 


더불어 탑비는 언제나 부도탑과 쌍을 이루는데 많은 경우, 아니 거의 절대적으로 부도탑은 지광국사 혜린 스님의 그것처럼 전체를 몽창 뽑아가기는 하지만, 그 이유는 아름답기 때문에 완상하기 위함이었거니와, 어떻든 부도탑은 대부분 멀쩡하기만 하다는 사실을 도대체가 설명할 수가 없다. 기왕 때려부술 것 같으면 신도비만 아니라 부도탑도 때려부수어야 정상 아닌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놈 소행론은 눈꼽만큼도 눈길을 줄 필요도 없다. 다 개소리로 보고, 지나가는 똥개가 짓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비석 몸뚱아리만 날아갔는가? 신라 태종무열왕비도 왜 하필 몸뚱아리만 날아가고 없느냔 말이다. 이유는 딴데 있다. 일본놈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다. 


더불어 지진과 같은 자연의 힘과도 전연 무관계하다. 그렇다면 받침돌과 머릿돌도 만신창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렇다면 비신은 파편이라도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철저히, 이 비명은 몸통만, 그것도 처절히 파괴했다. 그것으로도 성이 안 차서 그 파편들은 가루로 만들다시피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누군가 일부러 그런 것이다. 몸통만 없애고자 하는 고의 혹은 저의가 있었던 것이다. 누구 짓인가?


볼짝없다.

유독 글자만 파괴해야 했던 이유가 바로 범인이다.

그렇다면 누가 글자를 필요로 했는가?


탁본이다.


탁본의 고통에 시달린 자들이 그걸 없앤 것이다. 이 탁본의 고통은 한겨울에 그걸 딱 한 번만 해보면 안다. 탁본의 고역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이 역사를 인멸했다. 


결론한다. 


서예에 미친 놈들이 걸핏하면 비석 글씨가 좋다고 소문나니, 그리하여 걸핏하면 그것을 관리하는 현지 지방관한테 부탁해서는 탁본 좀 떠서 보내라 하니, 그 탁본의 고통에 시달린 현지 주민들이 에랏, 내가 이 한겨울에 이게 무슨 짓이냐 해서 도끼로 깨뜨려 버린 것이다. 첨엔 깨뜨려서 괜찮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 파편들이라도 탁본해서 보내라는 명령이 자주 내려왔다. 열받은 현지 주민들, 니미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하며 그 파편들조차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몸통이 사라진 저런 고대의 비석들에서 우리는 탁본의 고통에 시달린 이른바 민초의 고통을 읽어내야 한다. 나는 이런 고통을 읽어내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 역사학의 책무 중 하나라고 본다. 더불어 걸핏하면 왜놈 소행으로 밀어부치는 내셔널리즘의 욕망도 낱낱이 그 민낯을 까발려야 한다고 본다. 


동국대학교불교문화연구원이 역주한 《조선불교통사》 제4권(동국대학교출판부. 376~377쪽)에 실린 다음 이야기를 부록으로 첨부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감한다. 추후 이 글은 계속 보강해 나가기로 한다. 잠시 덧붙이건대 인각사비도 같은 이유로 훼멸되었다. 


<중국의 탁본 요구에 지친 백성들이 비를 동강내다>


단목端目스님이 김생의 글자를 모아 「백월선사비白月禪師碑」를 썼다. 본래 봉화군 타자산駝子山 석남사石南寺에 있었는데, 절이 폐허되고 비만 남은 지 오래되었다. 영천군수 이항李沆이 그 필적을 보배처럼 아껴, 정덕正德4년(1509) 8월 영천군 자민루子民樓 아래로 옮겼다. 원 ‧ 명 이래 중국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오는 사람들은 매번 다 인출印出하여 돌아가 지극한 보배로 삼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도강渡江하고 제일 먼저 김생 글씨의 시詩를 물으니, 이는 곧 『영천읍지永川邑誌』에 말한 바대로 명明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조선 땅에 찾아와 먼저 「백월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1천 장을 인출하여 돌아갔다고 하는 것이다. 그 후 (인출하는 일이) 백성들의 고충이 되자, 비를 두 동강 내서 땅속에 묻어버렸다. 숙종 19년(1693)에 다시 꺼냈다. 



문화재 분야에서 때마다 빈발하는 주장 중 하나가 국보 1호를 교체해야 한다는 말이다그것을 교체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항용 말하기를 국보 1호가 주는 상징성이 있으므로, 남대문(숭례문)으로는 그 상징성을 충분히 보여줄 수 없으니, 한민족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 훈민정음으로 바꾸자고 말한다

실제 이를 교체하기 위한 움직임이 노도와도 같아, 문화재청이 그에 끌려들어가 이를 위한 설문조사라는 것을 하기도 했으며, 그 결과에 따라 실제 이를 문화재위원회 심의에 부의했다가 무산된 일도 있으니, 내 기억에 그런 근자의 가장 가까운 시도가 유홍준 문화재청장 시대에 있었다. 

이들에게 국보 1호니, 보물 1호니, 사적 1호니 하는 것들은 단순한 행정관리번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도 이제는 필요 없어, 그건 이젠 잘 아니, 그래도 바꾸라고 주장한다. 문화재 민족주의라 이름할 만한 이들과, 문화재는 자고로 그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복무해야 한다는 내셔널리즘 일반의 욕망이 작동한 결과다. 

그래 그렇다고 하자. 남대문으로는 쪽팔리니, 그 자랑스런 1호를 예컨대 훈민정음으로 교체한다 치자. 그리하여 무엇을 어찌하려는가문화재 줄세우기 하려는가그리하여 훈민정음이 1등이고 2등이 석굴암, 3등이 팔만대장경판 뭐 이런 식으로 백미터 달리기 하려는 수작인가? 그에다가 죽을 맞추려는 문화재청도 나는 제정신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들이 말하는 국보 1호 훈민정음이란 무엇인가그것은 자격이나 있는가? 일언이폐지한다.

훈민정음은 자격 상실이다. 

국보 1호를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그런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말하는 훈민정음이란 훈민정음과는 하등 관계가 없고, 간송미술관이라는 사립박물관이 소장 중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말한다. 

단언한다저 해례본이 한글은 아니다. 

착각하지마라훈민정음 해례본과 한글은 전연 별개다. 

훈민정음, 혹은 한글이란 무형유산이다. 무형유산을 유형유산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현행 문화재보호법상, 국보니 보물 사적은 오직 유형문화재에만 해당한다. 그런 유형문화재에만 해당하는 국보 목록에 훈민정음이 들어간다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훈민정음과 훈민정음 해례본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주에서 출현했다가 그 소장자가 내놓지 않는다는 이른바 상주 훈민정음 해례본과 관련해서도 한 마디 해둔다. 이 문제는 결국 돈과 소유권 문제인데, 법원에서는 현재 그 소장자가 그것을 소장한 과정이 불법이며, 그런 까닭에 그것은 국고 소유라 판결했다그건 그거고, 그것이 무슨 천억원이네 하는 헛소리가 횡행하거니와, 이것도 소위 이 문화재 업계 일부 발을 담근 놈들이 그런 주장을 일삼아 현 사태를 꼬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힘을 보탰으니, 문화재가 아무리 상황에 따라 가격이 정해진다는 특수성을 고려한대도, 그렇다고 해서 상주 해례본이 무슨 천 억원이라는 말인가? 

왜 이런 뻥튀기가 나왔는가단언커니와 훈민정음과 훈민정음 해례본을 혼동한 까닭이다. 훈민정음과 훈민정음 해례본은 눈꼽만큼도 관계없다.  

  1. b 2018.05.14 19:19 신고





    <한글을 절름발이로 만들어버린 국어학자들>




    그러고 세종대왕께서 그 다음에 ...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들었는데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전부 창제하신건 아닙니다. 그전에도 그 비슷한 소리가 글자가 비슷하게 전해 내려오던 것인데, 그 어른이 확실하게 여러가지를 다 맨들어 놓은 것이지. 그런데 지금은 세종대왕께서 ..하게 만들어 놓은 한글은 몇줄이 없어지고 부호가 없어지고 그랬습니다. 그래 몇 줄이란 것은 여기 한글학자가 계신지는 몰라도 한글학자들은 혹 봤을는지 몰라요. 귀찮으니까 요새 철자법처럼 귀찮아요. 귀찮으니까 예전엔 그걸 언문(諺文)이라고 해가지고 ‘조수 이름을 닮아 가지고 있다. 새나 짐승이나 소리 지르는 소리를 들어서 이걸로 그려주면 고대로 나갈 수가 있다. 요새 말로 악센트를 고대로 표를 다할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 지금의 한글 가지고는 국문학자가 얼마나 .... 하다는 한글 가지고 다 그걸 흉내 낸다고 못합니다. 요걸 뺏기 때문에 그러구 여기 그려 논 글자가 왜 무슨 까닭에 요렇게 생긴 글자를 왜 가라고 불러야 하느냐? 이렇게 생긴걸 왜 ‘아’라고 불러야하느냐? ...에 점 하나만 찍든지 해도 ‘아’자가 되고 이렇게만 허는데도 ‘가’자가 될거 아닙니까? 헌데 이게 왜 그러느냐 원인이 있을거예요.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부터 죽 내려져 ... 해도 그 대답해 주신 이 한번도 못봤습니다. 왜 여기 동그래미하고 여기 ‘아’가 돼야 똑바르냐? 요렇게 하는건 왜 ‘하’라고 부르느냐? 그게 원인이 있을꺼 아닙니까? 괜히 그냥 덮어 놓고 그려 놓은건 아닙니다. 모양 보기 좋으라고 부호 그냥 그려 놓은건 아니라는 말이여. 그러니까 우리들이 조상이 하시던 것을 허기 힘들다고 한쪽으로 들여 빼버리고 이것 빼버리고 저것 빼버리면은 세종대왕께서 그 고생을 허시고 맨들으신 것이 문화가 절름발이 문화가 돼버리고 말죠. 이것만 가지고 쓰시긴 다 쓰지만 예전엔 그걸가지고 오음음계(五音音階:한 옥타브 안에 다섯 음으로 구성된 음계)를 다 했습니다 오음음계를 다 글로 쓰고 그러면 글로 써내면 아 그것만 보고도 올랐다 내렸다 요새말로는 뭔가 다 나왔었는데 지금은 그것보고 우리들 하나도 못합니다.




    그러면 역학(易學)도 예전에 하던 역학하고 지금서 역학이 다른데 이치를 .. 하기 위해서 이런 철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만든 역학인데, 그 역학은 중간에 와서 무슨 소린고 하니 이건 점쳐보고 있어 길하고 흉한거 좋고 낮은거 알기 위하는 점서(占書) 쓰려고 행세가 전락이 되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 그때 그 모시던 사람들 그 역학 만들때 그렇게 맨든건 아닙니다. 천지사물의 이치 원리를 알라고 한 것이지 그거 저 점이나 쳐먹을라고 하는 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조상들이 해 내려오던 그 문화라는 것은 가장 좋은 문화 우리에게 가장 여러가지가 다 곱게 지은 문화를 갖다놓고도 중간에 와서 손에 지지고 왈가 지지고 해가지고 우리가 지금 절름발이 문화를 만들었어요.







    <전래무예를 잘 모르고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인용하는 한심한 학자들>




    그러고 예전에 고구려가 당나라하고 손잡고 싸우지 않았습니까? 당나라하고 손잡고 싸울적에 당나라가 그때 여기 나올때나 주나라가 나올때나 저 자기 말로 천하 중국전체를 들어가지고 여길 나온거야. 나왔는데 여와서 ..하고 다 패전하고 당태종이 여기와서 첫번에 와서 여지없이 눈이 빠져가지고 들어갈 정도니까 아주 다 죽게 망해 들어갈적에 ... (설인귀가) 우리나라 저 개소문[연개소문(淵蓋蘇文)]의 부장이니까 부장으로써 부장이니까 개소문이하고 합쳐내려서 싸운 덕분에 빠져나와서 싸움터에서 죽을걸 살았습니다. 그래 살았는데 그때 무예가 우리나라 재래 무예가 있었다. 지덕체(智德體)하는데도 체(體)도 지(智)도 물론 그랬고, 덕(德)도 그랬지만, 체도 우리나라 재래 무예가 있었는데 재래무예를 저쪽보다 훨씬 나으니까 우리가 크게 이긴거예요.

    중국.. 중국 가서 사신 자기라고 자기들이 전해 내려온 야사로 해 놓은걸 보면 개소문이하고 당태종하고 싸울적에 다 거기서 나온 것이 중국을 400주(州)를 다 점령해 가지고 통일하던 그 명장(名將)들이 왔는 데 일창(一槍)에 자삼장(刺三將:세명의 장수를 꿰다) 개소문이가 창 한번 가지고 들어가면서 빌리면 한꺼번에 산적꼬치 꿰듯이 장수를 셋씩이나 꿰서 집어 내버리니까 (당태종이 장수들더러) 싸우라고 하고 자기는 내뺐단말여. 그럼 그 사람(연개소문)이 힘만 세고 무슨 재주만 부리고 그러는게 아니고 무술이 나으니까 그런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책에 고증한게 책이라고 한다면 무예도보(武藝圖譜)2) 서문을 보십시요 이 내각판(內閣板)3)에 무예도보 서문(序文)을 보십시오.

    ...조때라고 우리나라에서 문장으로 손꼽는 박제가(朴齊家) 그 어른이 어명을 받아 가지고 여기 서문을 냈는데 “우리나라에 그전에는 무기가 없었다. 우리나라가 그전에는 무기가 없었고 무예를 몰랐는데 중국서 나온 그 무예를 그대로 배웠다.”는게야. 그러니까 무슨도(刀) 무슨도 무슨도라는게 .. 까정 가르치고 뭣하고 뭣하고 하는 것이 여섯가진가 되는데 일본 .... 놈들이 일본놈들이 쓰던 칼 그 일본도도 좀 있다 이래서 말썽입니다.

    그렇게 그전에 무예가 하나도 없었으면 어떻게 당나라에서 나오고 수나라에서 나왔는데 거침없이 당했을까요? 여기 무예가 그렇게 없었으면 그러니 내각판으로 ... 은 임금이 명령해 가지고 내라했으니 너 서문을 ...당대의 한(큰) 문장으로 .... 우리나라의 재래역사 체육사(體育史) 무슨사 우리 역사를 알게 되면 그렇게 쓸리가 없어요. 한심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지금 사학자(史學者)들이 보면 아 이거 봐라 내각판에 해 놓은 것이 이렇게 썼는데 이런 증거가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전에 뭐가 있느냐? 이 소리를 으레껏 하게 됩니다








    2) 조선 정조 때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백동수(白東修) 등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종합무예서. 4권 4책. 목판본. 1790년(정조 14)에 완간되었다. ≪무예통지≫·≪무예도보≫·≪무예보≫라고도 한다.
    3) 옛날 규장각(奎章閣)에 있던 철주자로 판을 짜서 박은 책(冊)










    --봉우권태훈 ----


<Alphonse Daudet>


아래는 2002년 오마이뉴스 기고문이다. 이에서 제시한 문제의식을 정식으로 다룬 학술논문도 나중에 나왔더라만......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의 진실

도데의 추악한 내셔널리즘과 그 한국적 변용 

02.04.26 09:17l최종 업데이트 03.08.27 10:07l


1945년 8월15일 서울의 어느 보통학교 국어 교실를 무대로 삼은 한 일본인의 단편소설 끝장면이다.


히로히토 천황의 무조건적인 항복 선언을 방금 전해 들은 일본인 선생님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조선인 학생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일본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언어임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국민이 설혹 노예의 처지에 빠지더라도 국어만은 잘 지키고 있으면 스스로의 손에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때 창 밖에서 호각소리가 울려왔다. 일본인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하고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선생님은 끝내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칠판으로 돌아서 분필로 "일본 만세"라고 큼지막한 글을 썼다.


이것은 19세기 후반에 활약한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1840-1897)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의 마지막 장면을 1945년 한국 상황으로 패러디화해 본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패러디가 아니다. <마지막 수업>이 묘사하는 시대적 배경, 즉 1871년 보불전쟁으로 패한 프랑스가 독일계 주민이 다수인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 넘겨주고는 퇴각해야 했던 배경과 연합국에 패한 일본이 조선에서 물러나야 했던 상황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단편소설이 패전 뒤 어떻게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서까지 중·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을까? 이 소설이 실리는 것이 식민지시대 향수를 잊을 수 없는 일본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 해방 직후 1989년 무렵까지 중·고교 국어교과서에 버젓이 실렸던 것이다. 그 후 이 소설이 갖는 영향력은 아직도 남아 있다. 비록 이 소설이 교과서에서 사라졌다고는 해도 도데라는 이름까지 잊혀졌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동화라든가, 세계명작 같은 형태로 지금도 국내에서 '도데 신화'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Alphonse Daudet> 


일본의 경우 1936년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을 통해 번역소개된 이 작품은 1939년에 국어(일본어) 교과서에 채택됐으며, 패전 이후에도 우리처럼 한동안 국어교과서에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다가 1970년대 초반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재미 있는 것은 <마지막 수업>이 교과서에서 도태되기까지 한일 두 나라가 전혀 판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도데와 <마지막 수업>이 추악한 프랑스 내셔널리즘을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임이 역사학계의 집요한 추적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교과서에서 축출된 데 비해 한국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실려 신선미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이 교과서에서 탈락하고 난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도데는 여전히 사랑받는 작품, 사랑하는 작가로 통용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전세계적으로 프랑스 작가로서 2류, 3류 축에도 들지 못하고 일본에서마저 배척을 당하고 있는 도데가 한국에서만은 새천년을 맞이한 지 2년이 되는 지금까지 '식지 않은 열풍'을 지속하고 있는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의 작품은 흔히 서정성이 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부 프랑스 프로방스 출신인 그는 국내에서는 <마지막 수업>말고도 <별>이라는 단편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런 표면적인 서정성과 함께 <마지막 수업>은 식민지 경험과 결부돼 도데가 말하는 '잃어버린 프랑스어'와 '잃어버린 알자스-로렌'이 각각 '일본에게 잃어버린 조선말'과 '일본에게 잃어버린 조선 강토'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러한 증거가 23년만에 다시 빛을 본 소설가 고 이병주의 <동서양고전탐사>(원제는 「허망과 진실」)에 나오는 그의 이 작품에 대한 감상문에서 포착된다.


이 글에 따르면 이병주는 일제 식민강점 치하인 열두 살 때 일본인 교장 부인에게 선물로 받은 소년소녀 동화집 같은 책에서 <마지막 수업>을 처음 접했다고 하면서 "그 작품은 내게 있어서 심각한 충격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이병주의 설명은 이렇다.


"어린아이에게도 나름대로의 의식은 있다. 열두 살 소년인 나는 그 소설에서 받은 충격으로 그때까지 전혀 해보지도 않은 생각에 차례차례로 말려 들었다. 첫째 생각한 것은 알자스와 로렌이 어쩌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알자스와 로렌처럼 슬픈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한마디로 <마지막 수업>을 통해 조선은 일본식민지로 있을 수 없으며 우리 언어를 살려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 대다수는 지금까지도 <마지막 수업>을 프랑스의 민족의식, 나아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명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작품은 프랑스의 추악한 내셔널리즘을 가장 극명하게 표출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이미 30년 전에 추방됐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는 알자스는 14세기 이래 프랑스령이었으나 그 주민 대부분은 독일계로 언어 또한 독일어를 사용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언어 통제 정책은 더욱 강화돼 학교에서는 프랑스어를 강제로 가르쳤다.


그러다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다음 알자스는 프로이센에게 넘어갔다. 이로써 이 지방 주민들은 일상 언어, 곧 독일어를 되찾게 됐다.


<마지막 수업>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면서 알자스는 독일 땅일 수 없으며 세계 언어 중에 오직 프랑스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임을 강변했던 것이다.


실제 도데는 국내에는 '서정작가'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극렬한 왕당파였으며 그의 아버지 또한 우익 왕당파의 수괴였다.


도데가 더욱 악랄한 것은 보불전쟁 당시 알자스 주민 대부분이 프랑스어를 모르는 독일계였음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 <마지막 수업>은 프랑스어를 모르는 알자스 주민들을 대상으로 프랑스어 교사가 마지막 수업을 진행하는 장면을 설정하면서 "프랑스 만세"라는 말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 프랑스 교사는 비유컨대 일제의 패망으로 식민지 조선땅에서 할 수 없이 물러나면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일본 만세"라는 큼지막한 글을 남긴 일본인 국어교사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한국에서 <마지막 수업>은 외세에 저항하는 민족의식을 가장 극적으로 '대리표출'한 작품으로 통하고 있다.


이는 '적대적 문화변용'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 제국주의 논리를 고스란히 답습한 희극적인 현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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