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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4대 왕.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며, 501년 시해됐다. 재위기간은 479~501년. 이름은 모대(牟大) 혹은 마모(摩牟)·마제(麻帝)·말다(末多) 등이 있고, 간혹 여대(餘大)라 하지만, 이는 '부여대'의 줄임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22대 문주왕(文周王) 아우 좌평(佐平) 곤지(昆支)의 둘째아들이라 하나, 계보에 의심이 많다. 


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동성왕본기 : 동성왕(東城王)은 이름은 모대(牟大)<마모(摩牟)라고도 한다>이며 문주왕 동생인 곤지(昆支) 아들이다. 담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삼근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4년(482) 봄 정월에 진로(眞老)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兵馬事]를 아울러 맡겼다. 가을 9월에 말갈(靺鞨)이 한산성(漢山城)을 습격해 깨뜨리고 300여 집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겨울 10월에 눈이 크게 내려 한 길 남짓 쌓였다. 5년(483) 봄에 왕이 사냥나가 한산성(漢山城)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을 위문하고 10일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에 웅진(熊津) 북쪽에서 사냥해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았다. 6년(484) 봄 2월에 왕이 남제(南齊) 태조 소도성(蕭道成)이 고구려 왕 거련(巨璉)을 책봉(冊封)해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내부(內附)하고자 청하니 허락했다. 가을 7월에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려 했다. 약사(若思)는 서해 바다에 이르러 고구려의 군사를 만나 가지 못했다. 7년(485) 여름 5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했다. 8년(486) 봄 2월에 백가(苩加)를 위사좌평(衛士佐平)으로 삼았다. 3월에 사신을 남제에 보내 조공했다. 가을 7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했다. 우두성(牛頭城)을 쌓았다. 겨울 10월에 궁궐 남쪽에서 크게 사열했다. 10년(488)에 위(魏)가 군사를 보내 침공해 왔으나 우리에게 패했다. 11년(489) 가을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나라 남쪽 바닷가의 사람[海村人]이 이삭이 합쳐 있는 벼를 바쳤다. 겨울 10월에 왕이 제단을 만들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11월에 남당(南堂)에서 여러 신하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12년(490) 가을 7월에 북부(北部) 사람 중에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해 사현성(沙峴城)과 이산성(耳山城)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은 나라 서쪽 사비(泗=) 벌판에서 사냥했다. 연돌(燕突)을 달솔(達率)로 삼았다. 겨울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13년(491) 여름 6월에 웅천(熊川)의 물이 넘쳐서 서울[王都]의 200여 집이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겼다. 가을 7월에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해 들어간 자가 600여 집이었다. 14년(492) 봄 3월에 눈이 내렸다. 여름 4월에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혔다. 겨울 10월에 왕이 우명곡(牛鳴谷)에서 사냥하다 손수 사슴을 쏘아 맞혔다. 15년(493) 봄 3월에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신라 왕은 이찬(伊)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냈다. 16년(494) 가을 7월에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薩水) 벌판에서 싸웠다.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견아성(犬牙城)을 지키자 고구려가 이를 에워샀다. 왕이 군사 3천을 보내 구원해 포위를 풀어 주었다.17년(495) 여름 5월 초하루 갑술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에 고구려가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해 오자 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이 장군 덕지(德智)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사가 물러나 돌아갔다. 19년(497) 여름 5월에 병관좌평(兵官佐平) 진로(眞老)가 죽자 달솔 연돌(燕突)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여름 6월에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무너졌다. 20년(498)에 웅진교(熊津橋)를 가설했다. 가을 7월에 사정성(沙井城)을 쌓아 한솔(扞率) 비타(毗陁)에게 지키게 했다. 8월에 왕은 탐라(耽羅)<탐라는 탐모라(耽牟羅)다>가 공물과 조세[貢賦]를 바치지 아니하자 친히 정벌하러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렀다.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빌었으므로 그만두었다. 21년(499)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많이 일어났다. 신하들이 창고를 열어 진휼(賑恤)하여 구제하자고 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한산(漢山) 사람 중에  고구려로 도망해 들어간 자가 2천 명이었다. 겨울 10월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22년(500) 봄에 임류각(臨流閣)을 궁궐 동쪽에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장(丈)이었으며, 또 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 간언하는 신하[諫官]들이 반대하며 상소(上訴)하였으나 응답을 하지 않았고[不報], 또 간언하는 자가 있을까 하여 궁궐 문을 닫아버렸다. 논한다.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는 이로우며, 바른 말은 귀에 거슬리나 품행에는 이롭다. 이로 말미암아 옛날의 현명한 임금은 자기를 겸허하게 하여 정사를 물었고, 얼굴을 부드럽게 하여 간언을 받아들이면서도 오히려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감히 간쟁할 수 있는 북[敢諫之鼓]을 달고, 비방하는 나무[誹謗之木]를 세우기를 마지 않았다. 지금 모대왕(牟大王)은 간하는 글이 올라와도 살펴보지 않았고, 또 궁궐 문을 닫고서 이를 막았다. 장자(莊子)에 『허물을 보고도 고치지 않고, 간언을 듣고도 더욱 심해지는 것을 사납다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모대왕이 바로 이에 해당할 것이다. 여름 4월에 우두성(牛頭城)에서 사냥하였는데 우박을 만나 그만두었다. 5월에 가물었다. 왕은 근신[左右]들과 더불어 임류각(臨流閣)에서 연회를 하였는데 밤새도록 환락을 다하였다. 23년(501) 봄 정월에 서울[王都]의 늙은 할멈이 여우가 되어 사라졌다. 두 마리 호랑이가 남산(南山)에서 싸웠는데 잡고자 했으나 잡지 못했다. 3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여름 5월에 비가 오지 않았는데 가을까지 계속됐다. 7월에 탄현(炭峴)에 목책(木柵)을 설치해 신라를 대비했다. 8월에 가림성(加林城)을 쌓고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에게 지키게 했다. 겨울 10월에 왕이 사비(泗)의 동쪽 벌판에서 사냥했다. 11월에 웅천(熊川)의 북쪽 벌판에서 사냥했고, 또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다가 큰 눈에 막혀 마포촌(馬浦村)에서 묵었다. 이보다 앞서 왕이 백가(苩加)에게 가림성을 지키게 했으나 백가(苩加)는 가지 않으려고 병을 핑계 삼아 사양하고자 했으나 왕이 허락치 않으니 이 때문에 왕을 원망하다가 이 때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렀다. 12월에 이르러 훙하니 시호(諡號)를 동성왕(東城王)이라 했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제(南齊) 건원(建元) 2년(480)에 백제 왕 모도(牟都)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니 조서(詔書)를 내려 말했다. 「보배로운 명령이 새로와 은택이 먼 지역에까지 미쳤다. 모도는 대대로 동쪽 변경의 번국(蕃國)이 되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직분을 지켰으니 곧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을 수여하노라.」 또 영명(永明) 8년(490)에 백제 왕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렸다. [남제는] 알자복야(謁者僕射) 손부(孫副)를 보내 모대를 책명(冊命)하여 돌아가신 조부 모도의 작호를 잇도록 하고 백제왕으로 삼아 말하였다. 「아아 그대는 대대로 충성과 근면을 이어받아 정성(精誠)이 먼 지역에서도 드러났고, 바다 길이 조용하게 되어 조공을 바침에 변함이 없었다. 떳떳한 법전[彛典]에 따라 천명을 이어가도록 하니 경계하고 조심할지어다[往敬]. 아름다운 위업을 받는 것이니 가히 삼가지 않으랴. 행도독백제제군사(行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백제왕(百濟王)을 삼는다.」』그러나 삼한고기(三韓古記)에는 모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었다. 또 살펴보니 모대는 개로왕(蓋鹵王) 손자요, 개로왕 둘째 아들인 곤지(昆支)의 아들로서 그 할아버지를 모도라고 하지 않았으니 제서(齊書)에 실린 것은 의심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4대 동성왕(東城王)은 이름이 모대(牟大)인데 마제(麻帝)라도고 하며 여대(餘大)라고도 한다. 삼근왕(三斤王)의 당제(堂弟)이다. 기미년에 즉위해 22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무령왕 : 무령왕(武寧王)은 이름이 사마(斯摩)<융(隆)이라고도 한다>이고 모대왕(牟大王) 둘째 아들이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5대 호령왕(虎寧王)은 이름이 사마(斯摩)이니 동성(東城)의 둘째 아들이다. 신사년에 즉위해 22년을 다스렸다. 남사(南史)에 이르기를 이름을 부여륭(扶餘隆)이라 했으나 틀렸다. 륭(隆)은 보장왕(寶藏王)의 태자이다. 자세한 것은 당사(唐史)에 보인다.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말다(末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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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동성왕의 본명에 대한 표기 중 하나이다. 모대(牟大)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동성왕본기 : 동성왕(東城王)은 이름은 모대(牟大)<마모(摩牟)라고도 한다>이며 문주왕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이다. 담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삼근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동성왕(東城王) ☞모대(牟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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