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이름. 

☞문무왕

'고대한국인명지명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도(茂刀)  (0) 2018.03.19
문호왕(文虎王)  (0) 2018.03.19
법민(法敏)  (0) 2018.03.19
인문(仁問)  (0) 2018.03.19
흠순(欽純)  (0) 2018.03.19
흠춘(欽春)  (0) 2018.03.19

신라 30대 문무왕 본명이 김법민(金法民)이므로, 생전 그의 재위시에는 이렇게 부른 듯하다. 

삼국사기 권 제43 (열전 제3) 김유신下 : 그 전에 법민왕(法敏王)이 고구려의 반란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소유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보내 치게 하였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가락국기(駕洛國記) :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 3월에 왕이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伽耶國) 시조(始祖)의 9대손 구형왕(仇衡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庶云) 잡간(匝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宗廟)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리라.” 

☞김법민(金法敏) ☞문무왕(文武王)



'고대한국인명지명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유신(金庾信)  (0) 2018.03.15
구근(仇近)  (0) 2018.03.15
법민왕(法敏王)  (0) 2018.03.15
거도(居道)  (0) 2018.03.15
검군(劍君)  (0) 2018.03.15
거질미왕(居叱彌王)  (0) 2018.03.15

발견 50주년

문무왕 수중릉은 실재인가 신화인가?


김태식 |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2017년 03월 호


문무왕 수중릉으로 알려진 대왕암문무왕 수중릉으로 알려진 대왕암. 바닷물에 잠긴 바위가 관을 덮은 뚜껑돌로 추정되고 있다. [문화재청]


2001년 4월 28일 오후 KBS 역사스페셜 ‘최초 발굴, 신라 대왕암’ 편을 시청하다 눈을 의심하는 장면을 마주했다. 대왕암을 발굴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방송사가 말이다. 물론 발굴 자격이 없는 방송사가, 그것도 신라 문무왕 수중릉이라 해서 1967년 5월 15일에 소위 ‘발견’되고 같은 해 7월 24일 국가사적 제158호로 이름을 올린 대왕암을 직접 발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에 방송사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해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분명 발굴 시행처는 KBS였다.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방송사가 나서서 직접 발굴하는 일은 견문이 짧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금시초문이었다. 더구나 그것이 대왕암이라니. 



방송사가 공개한 대왕암 속살



그렇게 해서 바닷물을 빼내고 마침내 대왕암이 속살을 드러낸 장면을 보고 또 놀랐다. 그에 대한 막연한 동경 혹은 신비 같은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프로그램을 보니 조사단은 바닷물이 넘나드는 네 군데 대왕암 수구(水口)를 모래주머니로 틀어막고는 양수기로 안쪽에 고인 물을 퍼냈다. 그러자 대왕암 내부에 남북으로 길게 놓인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로 발굴에 참여한 이은석 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연구과장의 말. 


“양수기는 넉 대를 동원했지요. 모래주머니 500개를 가져가 아침부터 열심히 막았어요. 대왕암 내부로 들어오는 물길은 희한하게도 동서남북 쪽에 있더군요. 점심 무렵 작업은 거의 마무리됐지만 큰 파도가 치니 가장 큰 동쪽 수구가 한 방에 뚫렸어요. 점심도 굶어가며 제가 다시 막았어요. 거의 3시간 만에 물을 퍼내고 겨우 촬영하고, 탐사도 했지요. 계속 들어오는 물 때문에 바닥까지 물을 다 빼지는 못했지만 뚜껑돌이라고 하는 바위 바닥까지 봤어요. 바위는 바닥에 박힌 상태였어요. 이것이 무덤의 개석(蓋石·뚜껑돌)처럼 보인 것은 물속에 있을 때 일어나는 착시 현상 때문이었어요.”  


그에 따르면 20t 정도로 추정되는 이 바위가 바닥에 박힌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육상 어딘가에서 이곳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또한 파도가 일면 물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대왕암 내부에 무슨 인위적인 시설을 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역사스페셜은 조사에 참여한 한 지질학자를 불러내 그 성과를 홍보했다. 다른 말들은 기억에 남지 않으나, 대왕암 내부에서 인위적으로 바위 면을 갈무리한 흔적이 발견됐으며, 이를 통해 이곳이 문무왕 유해를 화장하고서 그 유골을 안치한 곳임을 알 수 있다는 요지로 그 지질학자가 인터뷰한 장면은 지금도 또렷하다. 


하지만 이은석 과장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이를 의심한다. 과연 대왕암 내부 바위에 손을 댄 흔적이 있는가. 아무리 훑어봐도 그런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어쩌면 역사스페셜이 시청자 구미에 맞게 대왕암이 ‘유골 산포처’임이 발굴조사 결과 드러났다는 성과를 극대화하려고 끼워 맞춘 억측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문무왕의 유훈이 깃든 감은사 터에서 아주 가까운 경주 감포 앞바다에 똬리를 튼 대왕암(大王巖)은 4개 덩어리가 뭉치를 이룬 화강암 바위섬이다. 현재 해변으로부터 약 200m 떨어진 수중섬인 대왕암은 크기가 동서 35m, 남북 36m로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방형에 가깝다. 해수면에서 높이는 대략 5.3m. 바위는 네 개 돌덩이로 갈라져 있고 복판에 웅덩이가 있다. 수심은 대략 1.5m. 그 웅덩이 안에는 동서 최장 2.47m, 남북 최장 3.75m, 두께 최대 약 1.35m 크기에 무게 대략 20t인 큰 돌덩이 하나가 있다.   


방송사가 주도한 이 발굴을 통해 대왕암은 마침내 신비의 영역을 벗어났다. 돌이켜 보면 그전에도 대왕암 속살을 보고자 하는 시도가 없지 않았다. 1982년, 문화재청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내부를 조사하기로 하고는 수중 다이버를 입수시키기 직전에 중단한 일이 있다. 이를 추진한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중단 이유로 “신비의 영역에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한다. 



신라삼산오악학술조사단


1964년 10월 24일, 한국일보는 광복 이후 국내 언론사 역사상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싶은 문화재 사업 시작을 알린다. 신라오악학술조사 사업이 그것이다. 말 그대로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보이는 신라 오악 일대에 산재하는 유적들을 조사한다는 것이었다. 오악(五嶽)이란 동악인 토함산, 남악인 지리산, 서악인 계룡산, 북악인 태백산 그리고 중악인 팔공산을 말한다. 이들 다섯 군데 산은 신라가 신으로 섬겨 때마다 제사를 지낸 영산(靈山)이었다. 그런 까닭에 오악 주변에는 신라시대 유산이 더욱 많이 포진한다.  


3년 뒤 이 사업은 성과가 쌓이면서 조사 대상 범위도 삼산(三山)으로 확대된다. 삼산은 신라가 국가 차원에서 지내는 제사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대사(大祀)를 지낸 곳이다. 중사에 속하는 오악이 신라 전 국토에 고루 퍼진 데 비해 삼산은 수도 경주 주변에 위치한다. 구체적으로는 경주 일대의 나력산(奈歷山)과 영천 일대의 골화산(骨火山) 그리고 청도 일대의 혈례산(穴禮山)을 말한다. 조사 구역이 넓어지자 조사단 이름도 ‘신라삼산오악학술조사단’이라 부르는 일이 많아졌다.  


1962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1980년까지 이 언론사에서 줄곧 경주 주재 기자를 지낸 언론인 우병익(84) 씨는 사업 기간 내내 일선 현장에서 취재를 담당했다. 사업 시작 당시만 해도 신생 신문사로서 기존 동아·조선일보와 경쟁해야 했던 한국일보는 그의 회고에 따르면 돌파구를 문화재에서 찾았다. “언론에서 문화재를 의도적으로 키운 것은 한국일보이고, 한국일보 역시 문화재 때문에 엄청 컸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더불어 한국일보 창업주이자 사주인 장기영 사장 역시 문화재 사업에 과감한 투자를 했다고 한다. 우 기자는 “신라삼산오악조사 사업은 정부에 돈 한 푼 지원받지 않은 순수 한국일보 지원 사업”이었다고 한다. 그 성과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광복 이후 새로 찾아냈다는 신라사 관련 보물들은 거의 이 사업이 이룩한 성과였으니 말이다.  


조사단 출범 당시 면면을 보면 한국일보에서는 문화부장 예용해 씨가 주무였다. 그는 한국문화재 역사에서 ‘인간문화재’라는 말을 만들어낸 인물이며, 영향력 역시 막강했다. 출범 당시 단장은 체육인이자 사회학자이면서 역사학자인 상백(想白) 이상백(李相佰·1904~1966) 박사였고, 위원으로 당시 미술사학계와 역사학계 그리고 고고학계 중추인 황수영·진홍섭·김원룡·이기백·최순우·김영하 교수가 위촉됐다. 조사단 창설 이래 해체될 때까지 간사는 미술사학자인 정영호 전 단국대 교수 몫이었다. 초창기 자신의 역할에 대해 정 교수는 “모든 기획과 진행, 한국일보와의 연락 등”이었다고 기억한다. 이상백 박사가 2년 뒤 타계하자 단장에 당시 서울대 교수이자 역사학자인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1901~1977)가 취임했다. 더불어 홍사준 국립부여박물관장과 박경원 부산시립박물관장을 위원으로 보강했다. 사업 기간 역시 1972년까지로 연장됐다. 대왕암 ‘발견’은 바로 이 오악학술조사의 성과였다. 



고유섭과 ‘대왕암의 노래’  


이 사업에 대왕암이 포함된 것은 정영호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식민지 시대 한국미술사를 개척한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1905~1944)에 뿌리를 둔다고 한다. 인천 출신인 우현은 서울 보성고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한국미술사 연구에 뛰어든다. 1933년 이후 타계할 때까지 조선총독부박물관 산하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있었다. 이 기간에 그의 문하에서 사숙(私淑)한 제자들이 황수영·진홍섭·최순우다. 이 중에서 우현과 황수영·진홍섭을 한국미술사 개성 삼인방이라 부르기도 하고, 제자 세 명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한국미술사는 공교롭게도 모두 개성 출신인 이들이 체계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영호 교수는 이 우현 제자들에게 배웠다. 따라서 그는 우현의 재전제자(再傳弟子)다. 이렇게 보면 신라삼산오악조사단은 우현 제자들이 핵심을 이룬 셈이다.    


한데 우현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제목으로 대왕암을 노래한 시를 발표했다. 현재 대왕암을 내려다보는 정자인 이견대(利見臺)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노래 1절만 본다.  


“대왕의 憂國聖靈(우국성령)은 / 燒身後(소신후) 龍王(용왕)이 되자/ 저 바위 저 길목에 / 숨어들어 계셨다가 / 海天(해천)을 덮고 나는 / 賊鬼(적귀)를 調伏(조복)하시고”  


이 시는 ‘고려시보(高麗時報)’라는 개성 지방신문 1939년 8월 1일자에 실렸다. 우현은 또 같은 매체 1940년 7월 16일자에는 ‘경주기행의 일절(一節)’이라는 자못 흥분한 색채가 짙은 산문을 기고하거니와, 이에서는 “무엇보다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을 찾으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신라오악조사단은 우현이 남긴 이런 대왕암 관련 글들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하다.  



“대왕암 발견”  


한국일보[한국일보]


대왕암 발견 사실은 1967년 5월 16일자 한국일보 보도를 통해 대대적으로 공개된다. 이날 신문은 1면 사이드 ‘문무대왕릉 발견, 해방 후 최대의 문화재 수확’이라는 제하 기사를 통해 이것이 자사가 주관하는 신라오악조사단의 역사적 개가(凱歌)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무왕을 “신라 통삼(統三) 호국의 영주(英主)”라고 하는가 하면, 이것이 “세계 유례없는 수중(水中) 경영식 장치”라고 했다. 경주발로 남욱·우병익 두 기자가 작성한 기사는 “15일 하오 신라오악조사단(한국일보 주관)은 지금까지 그 형태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신라 통일의 영주 문무대왕의 능을 경북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대왕암에서 발견함으로써 해방 후 가장 거대한 문화사적 개가를 올렸다”는 첫 줄로 시작한다. 


나아가 이번 발견이 갖는 의미라든지 구조적 특징 등은 3면에 따로 박스기사를 실어 부연했다. 이 기사에는 “‘화룡방일(化龍防日·용이 되어 일본을 막겠다)’의 유언 따라” “해조음(海潮音) 속 숙연한 환경” “왜구 막으려던 투철한 왕도(王道)의 결정(結晶)” “석굴암 대불(大佛)도 대왕암을 정시(正視)” “감은사 등은 호국 사찰로 지어”와 같은 제목 혹은 부제로 뽑은 문구가 가득하다.  


이런 문구들에서 이들이 대왕암을 통해 무엇을 읽어내려 했는지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의 시대정신을 표상하는 호국(護國)과 극일(克日)과 통일(統一)이었다. 문무왕과 그가 묻혔다는 대왕암을 통해 민족통일의 열망과 이를 위한 방편으로 호국과 극일 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곳이니 당장 사적으로 지정해 보호해야 했다. 이 박스 기사에 인용된 김상기 박사의 말에는 “보호대책이 시급하다”는 대목이 보인다. 실제 대왕암은 그해 7월에 사적이 됐다.  


대왕암 발굴은 이를 주도한 조사단이 한국일보 주관인 까닭에 당연히 이 신문의 특종이었다. 다른 신문에서는 그 이튿날이 돼서야 관련 기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아는 대왕암은 화려하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발견인가 재발견인가


한국일보를 필두로 하는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모든 보도가 이때 대왕암을 발견했다고 하지만, 이 점이 의아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이때 오악조사단이 발견했다는 대왕암은 현재 남아 있는 증거들을 볼 때도 고려시대 이래 줄곧 문무왕의 유골을 뿌린 대왕암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려 말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7~1392)이 쓴 ‘초옥자전(草屋子傳)’이라는 글을 보면 임인년(1362·공민왕 11) 가을에 도은 자신이 초옥자라는 사람과 함께 “감응사(感應寺·감은사의 오류)에서 노닐며 용혈(龍穴)을 들여다보았으며, 이견대에 올라가고, 배를 타고는 대왕암까지 갔으니, 이 또한 동해의 기관(奇觀·기이한 볼거리)이었다”고 한다. 도은이 말하는 대왕암이 지금의 대왕암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의 대왕암을 문무왕 수중릉으로 간주한 조선시대 글도 부지기수에 달한다. 조선 초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慶州府)를 보면 이견대를 소개하면서 “(이견)대 아래 10보(步) 바다 가운데 네 뿔이 우뚝 솟은 돌이 네 문과 같은 곳이 있는데, 이것이 그(문무왕)를 장사한 곳이다. 지금까지 대왕암(大王巖)이라고 일컫는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대왕암 모양은 지금의 대왕암과 똑같다. 그럼에도 신라오악조사단에서는 대왕암을 새로 발견한 듯이 홍보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이때의 ‘발견’이란 위치나 실체를 알지 못한 대왕암을 새로 찾았다기보다 엄밀히는 그 구조를 이때 와서야 비로소 밝혀낸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말하자면 재발견이었다. 실제 대왕암 내부 조사는 이때 비로소 이뤄졌다. 정영호 교수의 회고. 


“1967년 5월 15일 오전 10시에…필자는 김원룡·김기웅 선생님과 함께 해중 능역(陵域)에 들어가 3t 무게의 복개석(覆蓋石) 밑에 용혈(龍穴)이라 칭할 수 있는 큼직한 암혈(巖穴)이 있음을 확인하여 길이 6m가 넘는 대나무 장대가 다 들어가도 모자람을 알게 되었다. 5월 중순 동해수(東海水)는 역시 냉기로 몸이 떨렸으나, 흥분된 1시간의 작업을 끝내고 나니 오히려 훈기가 들었다.” 


정영호 교수를 포함한 3명이 팬티 바람으로 대왕암 내부 웅덩이에 들어가 장대를 쑤셔 그 복판 바윗돌 밑에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런 조사 성과를 토대로 조사단이 그린 대왕암 내부 모식도가 5월 18일자 한국일보 5면에 실렸다. 이를 보면 대왕암 내부 복판 바닥에는 관 같은 시설을 안치하기 위한 홈을 파고, 그 위를 복개석이라 칭한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덮은 모양이다. 이것만 보면 대왕암은 흡사 무덤이다.  


하지만 2001년 역사스페셜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직접 내부를 발굴조사한 결과는 이와는 전연 딴판이다. 소위 복개석 아래에는 유골을 안치했을 만한 용혈 또는 암혈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50년 전 대왕암 ‘재발견’을 굳이 폄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고 확신은 하기 힘드나, 지금의 대왕암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에 의하는 한 고려시대 이래 줄곧 문무왕 수중릉으로 통했다. 이 역사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반세기 전 조사 방법이 지금의 눈으로 볼 때 아쉽기는 하지만 그 시대의 한계였다. 



입력 2017-02-28 13:24:43

김태식 |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문무왕, 초강대국 唐에 당당히 맞서 한민족 토대 마련

[중앙선데이] 입력 2017.04.02 02:39 수정 2017.04.02 03:47 | 525호 23면 

  

신라가 일통삼한(一統三韓)을 위해 국운을 건 전쟁에 나섰을 때, 당(唐)은 유일한 세계제국이었다. 당시 당은 냉전시대 동서 양쪽을 양분한 맹주들인 미국과 구소련을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비축한 세계제국이었다. 혼자 힘으론 숙적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하기 버거웠던 신라는 이 세계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일통삼한 전쟁으로 나아가기로 하고, 이를 위한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당과 연합한 신라는 660년 백제를 정복하고, 668년에는 마침내 고구려마저 쓰러뜨림으로써 통일을 달성한다.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신라 차지’

밀약 깨고 야욕 드러낸 당에 맞서

일진일퇴의 기나긴 전투 끝에 승리

  

이민족 당 끌어들여 통일했지만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영토 상실

“사대주의, 불완전한 통일” 시각도


이런 신라의 정복 전쟁이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한국 근대 역사가들에게는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신라가 독자적으로 통일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민족인 당을 끌어들인데다가, 그 전쟁이 끝났을 무렵 고구려 영토 중 대동강 이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단재는 신라를 사대주의 국가라고 몰아붙였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사대주의자의 전형으로 폄훼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시각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불완전한 민족통일로 규정하는 사관(史觀)의 토대가 됐다. 그리하여 한국사는 백제·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통일신라시대’가 되지 못하고, 당이 차지한 대동강 이북 옛 고구려 땅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발해를 신라와 병렬로 놓고는 ‘남북국 시대’라 부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은 한국사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 사건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말하는 ‘한민족’은 이때 와서 비로소 생성 토대를 마련했으며, 비록 대동강 이북 옛 고구려 땅 상당 부분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북한을 합친 현재의 대한민국 영토는 이때 사실상 그려졌기 때문이다. 신라·고구려·백제를 아울러 ‘한민족의 고대국가’로 부르는 시대 구분 인식은 신라가 일통삼한을 달성한 이후 형성된 개념이다. 삼국은 무려 700년이나 각기 다른 역사문화 전통을 유지한 별개의 국가였다. 당시의 삼국 관계는 오늘날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쓰러뜨려야 하는 적대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외교특사 김춘추, 당 태종에게 읍소


당시의 동북아 정세를 살펴보면, 당이 유일 제국으로 군림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삼국은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신라가 급속도로 당과의 결합을 강화하는 가운데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를 협공했으며, 배후에선 왜(이후 일본으로 개칭)가 백제와 밀착해 신라를 압박했다. 신라로서는 당 외엔 우군이 없다시피 했다.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김춘추는 험한 바닷길을 이용해 당과 왜국을 오가면서 국익을 지키기 위한 외교를 벌였고, 국내에선 김유신이 전장을 누비며 국토를 수비했다. 그러나 신라는 당에 대해 굴종과 아부만 일삼은 사대주의자가 아니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당 역시 신라의 맹방은 아니었다. 『삼국사기』 신라 진덕왕본기는 진덕왕 2년(648), 외교 특사로 당 태종 이세민을 만난 김춘추가 읍소한 장면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신의 나라는 멀리 바다 모퉁이에 치우친 채 천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한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해 여러 차례 침략을 자행하다가 더욱이 지난해에는 병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 성을 함락하고는 (신라가) 대국에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폐하께서 대국의 병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적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산과 바다를 거쳐 조공을 드리는 일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은 김춘추의 읍소가 매우 옳다고 여겨 군사 파견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급부로 신라는 당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한 듯하다. 신라는 관리들의 복식을 중국식으로 고칠 것을 맹세했는가 하면, 김춘추는 데리고 간 아들 문왕(文汪)을 눌러앉혀 황제를 호위하는 숙위(宿衛)로 삼기도 했다. 신라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꼽히던 김춘추에게 이는 인질 공작이었다. 아들까지 인질로 받치면서 당을 배반할 뜻이 없음을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외교는 주고받는 것이다. 이쪽에서 무엇을 약속하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있게 마련이다. 진덕왕본기가 전하는 이때 외교전 모습은 실로 단순하지만 이후 전개된 사태와 그 와중에 폭로된 신라-당 간 외교 밀약 중 하나를 보면 신라도, 당도 매우 계산적이었다. 힘을 합쳐 백제와 고구려를 같이 멸한 신라와 당은 직후 기나긴 전쟁에 돌입한다. 당은 애당초 백제도, 고구려도 신라에 내줄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직접 통치나 다름없는 괴뢰국을 백제와 고구려에 세웠는가 하면, 우방국 신라조차도 다 먹을 속셈임이 점점 확실해졌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당은 비록 실질적 권한이 없기는 했지만,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편제하고, 문무왕을 그 도독으로 임명하는 초강수를 뒀다. 이제 신라에 남은 카드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자주 외교와 자주 국방은 포기한 채 당 제국에 편입되어 제후국으로 전락하든가, 아니면 칼을 들고 결사항전하든가 해야 했다. 문무왕을 필두로 하는 신라 수뇌부는 결사항전의 길을 택했다. 세계제국 당을 향해 칼과 창을 빼어든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신라는 마침내 당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게 된다.


이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신라 문무왕 .11년(671), 각자의 선전 포고 정당성을 주장하는 외교문서가 문무왕과 당군 사령관 설인귀(薛仁貴) 사이에 오가던 중, 외교 특사 김춘추가 이세민과 합의한 외교 밀약의 일단이 폭로된다. 이보다 33년 전인 648년에 있던 일이다. 『삼국사기』 문무왕본기에 실린 설인귀에게 보낸 문무왕 외교 답서 한 구절은 이러하다.

  

“선왕(先王·태종무열왕)께서 정관(貞觀) 22년(648)에 입조하여 태종 문황제(이세민)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습니다. 그 조칙에서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라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늘 침범을 당하여 평안한 날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하는 바가 아니며, 재물과 사람은 내가 이미 지닌 것들이니,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는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영원토록 평안하게 하리라’고 하시고는 계획을 지시하고, 군사를 낼 기일을 정해 주셨습니다.”


648년 신라와 당 사이에 오간 외교 밀약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데서 성사되었음을 알 수 있게하는 대목이다. 신라로서는 숙적 백제 정벌이 염원이었으며, 당은 연개소문이 철권통치를 휘두르며 시종 당에 대항한 고구려 정벌이 오랜 꿈이었다. 당으로서는 고구려 배후에 있는 신라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밀약에는 이행 약속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른바 전후처리 협상도 진행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영유하고, 그 이북은 당이 차지한다는 약속이 그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약속이 30여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양국 관계를 구속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맹방이요, 어쩌면 주군이라 할 세계제국 당을 향해 칼을 빼들고는 결사항전에 임하는 정당성을 선전하는 구호가 된 것이다. 신라는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직접 통치를 꾀하는 당을 향해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던 것이며, 그것이 이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침내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김유신 “개도 주인이 다리 밟으면 무는 법”


신라는 한반도 곳곳에서 당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기나긴 전투에서 마침내 승자가 되었다. 문무왕 15년(675), 신라는 칠중성(七重城) 전투에서는 유인궤(劉仁軌)에게 패했지만, 설인귀가 이끄는 대군을 천성(泉城) 해상에서 만나 대파했는가 하면,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매초성(買肖城)에서 철저히 무너뜨렸다. 완전히 승기를 잡은 신라는 마침내 이듬해 겨울 11월,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이끈 수군이 설인귀 휘하 당 수군을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만나 4000여 명을 수장함으로써 기나긴 나당(羅唐)전쟁의 승자가 되었다.

  

그에 앞선 660년, 백제를 함께 정벌한 직후 당군에서는 이참에 동맹국 신라조차 정벌할 마음을 품었다. 이를 간파한 김춘추는 군신을 불러 대책을 숙의했다. 화의책이 논의되자 김유신이 나서 쐐기를 박는다.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자기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이(당과의 전쟁)를 허락하소서.”


강대국에 둘러싸인 채 ‘새우등 터지는’ 신세가 된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며 세계 제국이던 당을 향해 칼을 빼들었던 신라의 담대함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김태식 소백산맥 기슭 산골에서 태어났다. 연세대영문학과에 들어가 한때는 영문학도를 꿈꾸다 가난을 핑계로 접었다. 23년간 기자로 일했는데, 특히역사와 문화재 분야에서 한때 ‘최고의 기자’로 불리며 맘껏 붓끝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비화를 파헤친 『직설 무령왕릉』을 비롯해 『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풍납토성』 등의 단행본을 냈다.

당에 사신 갔던 전쟁 영웅의 옥사, 나당 전쟁 부르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6.10.23 00:42 | 502호 23면

  

『삼국유사』 중 ‘흥법(興法)’이라는 이름이 달린 챕터가 있다. 불교를 일으킨 일화를 묶어놓은 것으로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厭觸滅身)’이라는 제목을 단 것이 있다. 원종이라는 사람이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이라는 사람은 스스로 몸을 희생했다는 의미다. 원종은 신라사에서 불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법흥왕이요, 염촉은 바로 이를 위해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을 말한다. 불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맞서고자 법흥왕과 이차돈이 벌인 게임, 다시 말해 이차돈이 스스로 목숨을 청해 잘려나간 그의 목에서 흰 피가 솟는 이적(異蹟)이 일어남으로써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게 되었다는 그 이야기가 골자를 이룬다. 이차돈 순교 이후 법흥왕이 전개한 불교 포교 사업을 소개한 글이 있다.

  

“법흥왕이 없어진 불교를 다시 일으키려 절을 세우고자 했다. 절이 낙성하자 면류관을 벗어버리고 가사를 걸치고는 궁궐 친척들을 절의 노비로 삼는 한편 임금은 그 절에 주석하면서 몸소 (불법의) 교화를 널리 펼치는 일을 했다.”

  

중간에 일화가 삽입됐다. “이 절 노비들은 지금도 왕의 후손이라 일컫는다. 뒷날 태종왕(太宗王) 때 이르러 재보(宰輔·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에 귀의했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어 이름을 화보(花寶)와 연보(蓮寶)라 하니, 이들은 자기 몸을 바쳐 절의 노비가 되었다. 역신(逆臣) 모척(毛尺)의 가족 또한 몰입하여 절의 노예로 삼았다. 두 집안 자손들은 지금도 끊어지지 않는다.”

  

이차돈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이 세운 절이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다. 그 터가 정확히 어딘지는 논란이 없지는 않으나 지금의 경주 평야에 있었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전부터 불교는 이미 신라사회에 침투해 있었다. 따라서 암자 비슷한 포교당 혹은 미니 사찰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흥륜사야말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이래 왕실에서 처음으로 세운 거찰(巨刹)이었다. 그처럼 역사가 유구하기에 법흥왕은 일부 왕족을 절에 희사해 부처를 시봉하는 ‘노비’로 삼기도 했을 것이며, 더 나아가 태종무열왕 김춘추 시대에는 재상을 역임한 김양도라는 사람의 두 딸까지 스스로 절에 들어가 노비가 됐던 것이다.

  

화보와 연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김양도의 두 딸이 절의 노비가 되는 과정을 『삼국유사』는 ‘사신(捨身)’이라 표현했다. 다시 말해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자발적으로 절의 노비, 다시 말해 부처님의 노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문장·서화·중국어 능통한 팔방미인]

김양도는 신라가 국운을 걸고 일통삼한(一統三韓)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는 혁혁한 전과를 낸 전쟁 영웅이면서, 대(對) 중국 외교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이런 그의 두 딸이 자발적으로 흥륜사 노비가 된 과정은 아마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노비가 된 모척의 가족과는 사뭇 사례가 다르지 않을까 한다. 모척은 누구인가? 앞선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643년 대야성 전투에서 신라를 배신하고 백제에 빌붙어 성문을 열어준 바로 그 사람이다. 이로써 신라는 서쪽 변경 백제와 맞서는 가장 중요한 전진기지인 대야성, 즉 지금의 경남 합천 일대를 백제에 빼앗기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서 대야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고타소는 바로 김춘추의 딸이었다. 백제와 내통한 모척은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사로잡혀 능지처참됐다.

  

이런 모척이 느닷없이 흥륜사에서 부활했다. 물론 모척은 죽고 없었지만, 그의 자손들은 노비로 함몰되어 흥륜사에 배속되었던 것이다.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의 모척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었던지, 그 후손들 역시 대대로 흥륜사 노비로 사역되는 운명을 맞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김춘추의 유명(遺命)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김양도는 누구인가? 그에 대한 언급은 『삼국사기』 두어곳에서 발견된다. 먼저, 권제44 열전 제4에 수록된 ‘김인문(金仁問) 열전’ 말미를 보자.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아들이자 문무왕 김법민의 동생인 김인문이 당나라의 장안에서 죽은 사실을 전하면서 “그 무렵 해찬(海飡) 양도(良圖) 역시 여섯 번 당에 들어갔다가 서경(西京)에서 죽었는데 그 행적의 시말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 권제46 열전 제6에도 흡사한 기록이 보인다.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의 순으로 3명의 전기를 정리해 싣고 있는데,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문장가들이다. 그 말미를 보면 『신라고기(新羅古記)』라는 정체불명의 문헌을 인용해 “문장으로는 강수(强首)와 제문(帝文)·수진(守眞)·양도(良圖)·풍훈(風訓)·골답(骨沓)이 유명하다고 하나, 제문 이하 인물들은 행적이 전하지 않아 전기를 세울 수 없다”고 돼있다.

  

두 곳 다 김양도를 언급하고 있다. 서경은 장안을 지칭한다. 파진찬(波珍飡) 혹은 파미간(破彌干)으로도 불렸던 해찬은 신라의 17개 관위(官位) 체계에서 네 번째 서열로,재상급이다. 그러나 수상한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뒤져보면 열전을 세우고도 남을 정도로 행적이 많이 나와있는데도 “행적이 전해지는 것이 충분하지 않아 열전을 세울 수 없다”고 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수수께끼 같은 인물, 김양도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우선, 그는 당시 중국어 실력이 출충했던 대중국 외교관이자 문장가였다는 걸 유추해볼 수 있다.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여섯 번이나 당나라에 사절로 파견된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어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 당시 외교관의 절대 구비 조건이 문장력이었다는 점에서 탁월한 문장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양도는 백제 멸망 이듬해인 태종무열왕 8년(661)에 채 진압되지 않은 백제군이 사비성을 공격해 오자, 대아찬으로서 대장군 품일(品日)을 보좌한 장군이었다. 나아가 문무왕 2년(662)에는 고구려 평양성 공략에 나선 당나라 군대에 군량을 조달해 주는 군량 수송 작전에 대장군 김유신을 보좌하는 장군으로 참전했다. 이어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한 문무왕 8년(668) 전쟁에는 역시 대아찬으로 대당총관에 임명돼 출전했다. 요컨대 김양도는 일통삼한기 신라를 대표하는 장군 중 최상위층을 형성한 전쟁영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와 당이 일촉즉발의 대결을 앞둔 문무왕 10년(670) 정사(正使)이면서 김유신의 동생인 흠순과 함께 부사(副使)로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들어갔다가 억류됐다 끝내 옥사하면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 사건을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에서는 “봄 정월에 (당) 고종이 흠순에게는 귀국하라 하고 양도는 억류해 감옥에 가두니,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했으므로 황제가 책망하고 노하여 거듭 사신을 억류했던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통이라 해서 특사로 선발돼 사죄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가 억류되어 변을 당하고만 것이다.

  

김양도는 뛰어난 조각가이기도 했다. 『삼국유사』 권제5 신주(神呪)편에 실린 ‘밀본이 요사한 귀신을 물리치다(密本?邪)’라는 제목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어렸을 적에 벙어리였다. 요망한 귀신의 농간으로 벙어리가 됐으나 밀본법사라는 법력이 뛰어난 스님의 도움으로 귀신을 물리쳐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나아가 이를 계기로 독실한 불교 신도가 되어 “흥륜사 오당(吳堂)의 주불(主佛)과 아미타불 존상, 그리고 좌우 보살을 빚어 만들었으며 그 불당을 금색 그림으로 채우기도 했다”고 전한다. 조각가이자 화가이기도 했던 김양도는 문장과 서화·외국어에 능통한 팔방미인이었던 것이다.

  

[백제·고구려 멸망 후 일촉즉발의 상황]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진노한 당 황제에 의해 옥사했다는 대목에서, 당시 백제와 고구려 멸망 직후 신라와 당 사이에 움트기 시작한 전쟁의 기운을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관례상 사신은 죽이지 않는 법이다. 한데 당은 힘을 믿고 신라 사신, 그것도 재상을 죽여 버렸다. 사신을 죽이는 일은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협상은 없으며, 오로지 굴복 혹은 무력 징벌의 협박만 남았음을 당나라는 신라에 보여준 사건이다. 이 사건이 당시 신라 사회 내부에 미친 충격파가 어떠했는지는 증언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후 전개된 전쟁 양상을 보면 신라가 가진 당에 대한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직감할 수 있다.

  

신라 문무왕 10년(670) 3월에 사찬 설오유(薛烏儒)는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당을 진격하고, 다음달 4일에는 당군 수중에 들어가 있던 말갈군을 개돈양(皆敦壤)에서 대파했다. 고구려를 직접 지배하려는 당에 대한 신라의 반격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곧이어 신라는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인 안승(安勝)을 받아들여 지금의 전북 익산에 있던 금마저(金馬渚)에 그 유민들과 함께 안치한 다음 고구려 국왕으로 책봉함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직접 지배를 관철하려 했다.

  

신라는 또 백제 옛 땅에 대한 공격도 개시해 82개 성을 일시에 탈취했다. 당이 저버린 약속을 신라는 무력으로 관철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기나긴 전쟁에서 신라는 마침내 문무왕 15년(675) 가을 9월15일 매초성(買肖城)에서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당군 20만을 대파하고, 이듬해 겨울 11월 기벌포(伎伐浦)에서는 크고 작은 22회에 걸친 전투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당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게 된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에 의하면 그 재위 4년(664) 


"봄 정월에 김유신이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고 하거니와, 이때 김유신은 70세가 되는 해였다.

예기 왕제王制편에 70세가 되면 치정致政한다 했거니와, 이는 정확히 그 예법이 문무왕 당시에 통용함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 시대 신라는 예기가 대표하는 예법이 그대로 법률 혹은 관습으로 강제되고 있음을 본다.


한데 이에서 주목할 점이 있거니와 하필 김유신이 치정을 요청한 때가 그해 시작 시점인 정월인가 하는 대목이다.

고래로 70 치정에 관련해서는 70세가 되는 시점을 어디로 잡을 것이냐가 문제로 대두했다.

70세가 되는 그해 첫날인가 아니면 70세를 꽉 채운 그해 마지막인가 하는 논쟁이 그것이었다.

후자를 따르면 71세가 되기 전날이 퇴직 시점이 된다.

김유신을 볼 때 70세에 도달한 그 해 첫날에 치정을 결행하고자 했으니 당시 신라 사회 공무원 정년 퇴직은 69세였다.


또 하나 유의할 대목은 이때 신라 사회엔 아직 생일이 없다는 사실을 유추한다는 점이다.

김유신은 생일을 기점으로 따지지 않았다.

생일은 훨씬 후대에 생긴 통과의례다.

하기야 중국에서 생일은 당 현종 이륭기 때 비로소 생겼다.


허심한 기술 하나로도 역사는 이리 풍부해진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