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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철감선사 부도탑(왼편)과 그 신도비(오른편)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산 191-1 번지에 소재하는 쌍봉사라는 사찰 서쪽 뒤편으로 올라간 쌍봉산 기슭에 통일신라말, 이곳을 무대로 이름을 떨친 철감(澈鑒)이라는 선사(禪師) 산소가 있다. 이 무렵이면 승려는 거의 예외없이 다비를 할 때라, 원성왕 14년(798)에 출생한 철감이 경문왕 8년(868)에 입적하자, 그 역시 다비식을 하고는 그 유골과 사리를 수습하고는 그것을 봉안할 산소를 조성하고 그 인근에는 선사의 공덕을 칭송하는 신도비를 세우니, 그것이 현재는 저리 배치되어 있다. 승려 무덤은 여타 직업 종사자 혹은 다른 신분과는 독특하게 다른 점이 있어, 역시 승려임을 표시하고자 그 모양을 탑으로 만들었으니, 불교에서 탑은 바로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산소인 까닭이라, 이 전통을 살린 것이다. 


저 두 석조물은 한눈에 봐도 소위 비례가 맞지 않음을 눈치챈다. 부도탑과 신도비가 비율이 맞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하도 저 모습이 익숙해 그런갑다 한다. 좀 자세히 보면 짜리몽땅 납딱이라, 뭔가 나사가 빠진 느낌이 난다.  




그 명패를 자세히 살피면 '쌍봉사 고 철감선사 비명'이다. 




 

비명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철감선사가 생전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를 적은 구절은 어디갔는가? 사라지고 없다. 


동아시아 모든 비碑, 특히 신도비神道碑는 패턴이 있다. 거북 모양 받침돌이 있고, 그 등 한복판을 직가각형으로 쪽개고 파낸 다음 그에다가 넓데데한 판석을 세우거니와, 이를 사람으로 치면 몸뚱아리에 해당한다 해서 비신碑身이라 하며, 그 위에다가는 머리 혹은 모자에 해당하는 머릿돌을 얹는다. 이 머릿돌에는 용 혹은 이무기를 새기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아 이를 이수螭首라 부른다. 이 이수 전면 복판에다가 문패를 달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 철감선사 신도비는 거북이 받침돌과 용 문양 머릿돌만 있고, 비신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이 똑같은 꼴이 여주 고달사지에서도 벌어진다. 아래가 이곳 원종대사 혜진 스님의 탑비다. 이 역시 몸뚱아리는 없고, 받침돌과 머릿돌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반면 아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몸뚱아리가 그대로 살아남았다. 저 거무틱틱한 몸뚱아리 전면과 뒷면, 그리고 때로는 측면까지 활용해 이 스님이 무척이나 훌륭한 분이었다는 찬송가를 잔뜩 써놓기 마련이다. 이 탑비와 세트를 이루는 그의 부도탑은 여러 곳을 전전하다 지금은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해제 보수 중인데, 그것이 끝나면 아마 본래 자리, 그러니깐 저 탑비 바로 앞쪽으로 올 것이다. 



그건 그렇고 대체 몸뚱아리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아가 왜 하필 몸뚱아리만 날아갔는가?


이런 현상과 관련해 밑도끝도 없는 일제 수탈 신화가 또 작동한다. 걸핏하면 일본놈들 악랄한 소행으로 밀어부치는 것이라, 이게 참으로 만병통치약과도 같아, 비석 몸뚱아리를 없앤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일삼은 자들이 일본놈이라는 신화가 강력히 작동한다. 이 경우 더욱 재미난 현상이 벌어지는데, 식민지시대에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고 할 때는 일본놈 소행이라고 하기도 힘들지만, 이 경우에도 참으로 기발난 왜놈 타령을 일삼게 되는데, 바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 소행이라고 밀어부치는 수법이 그것이다. 이런 수법은 조선후기 때 조선사대부들한테서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언설이다. 


실제 저와 같은 문화재 현장에서 저와 같은 일제 만행론은 개독 신앙보다 더한 확고한 위력을 뿜어내곤 한다. 이런 '신앙'에 의하면 모든 나쁜 짓은 다 일본놈이 해야 한다. 지금은 아마 문화재 안내판이 교체된 듯한데 당장 저 철감선사 신도비만 해도 그 안내판에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비신은 일제시대에 잃어버렸다고 전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놈이 때려 부수었다는 뜻이다. 


한데 일본놈 소행이라 밀어부치면 참 말끔해서 좋기는 한데 그래도 못내 찜찜한 대목이 있다. 첫째, 일본넘들이 할 일 없어서 멀쩡한 비석 중에서도 몸통만 쪼갠단 말인가? 그들이 극악무도하면 몸통만 아니라 대가리 받침 다 깨부셔야 하는 거 아닌가? 둘째, 일본넘들 역시 불교국가인데(물론 이 경우 신불습합이라 해서 신도 성향이 강하긴 하나, 일본 사회에서 부처가 차지하는 위치는 막중하기만 하다) 그런 불교도들이 감히 스님 신도비를 부순단 말인가? 이 무슨 개망나니인가? 


더불어 탑비는 언제나 부도탑과 쌍을 이루는데 많은 경우, 아니 거의 절대적으로 부도탑은 지광국사 혜린 스님의 그것처럼 전체를 몽창 뽑아가기는 하지만, 그 이유는 아름답기 때문에 완상하기 위함이었거니와, 어떻든 부도탑은 대부분 멀쩡하기만 하다는 사실을 도대체가 설명할 수가 없다. 기왕 때려부술 것 같으면 신도비만 아니라 부도탑도 때려부수어야 정상 아닌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놈 소행론은 눈꼽만큼도 눈길을 줄 필요도 없다. 다 개소리로 보고, 지나가는 똥개가 짓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비석 몸뚱아리만 날아갔는가? 신라 태종무열왕비도 왜 하필 몸뚱아리만 날아가고 없느냔 말이다. 이유는 딴데 있다. 일본놈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다. 


더불어 지진과 같은 자연의 힘과도 전연 무관계하다. 그렇다면 받침돌과 머릿돌도 만신창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렇다면 비신은 파편이라도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철저히, 이 비명은 몸통만, 그것도 처절히 파괴했다. 그것으로도 성이 안 차서 그 파편들은 가루로 만들다시피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누군가 일부러 그런 것이다. 몸통만 없애고자 하는 고의 혹은 저의가 있었던 것이다. 누구 짓인가?


볼짝없다.

유독 글자만 파괴해야 했던 이유가 바로 범인이다.

그렇다면 누가 글자를 필요로 했는가?


탁본이다.


탁본의 고통에 시달린 자들이 그걸 없앤 것이다. 이 탁본의 고통은 한겨울에 그걸 딱 한 번만 해보면 안다. 탁본의 고역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이 역사를 인멸했다. 


결론한다. 


서예에 미친 놈들이 걸핏하면 비석 글씨가 좋다고 소문나니, 그리하여 걸핏하면 그것을 관리하는 현지 지방관한테 부탁해서는 탁본 좀 떠서 보내라 하니, 그 탁본의 고통에 시달린 현지 주민들이 에랏, 내가 이 한겨울에 이게 무슨 짓이냐 해서 도끼로 깨뜨려 버린 것이다. 첨엔 깨뜨려서 괜찮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 파편들이라도 탁본해서 보내라는 명령이 자주 내려왔다. 열받은 현지 주민들, 니미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하며 그 파편들조차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몸통이 사라진 저런 고대의 비석들에서 우리는 탁본의 고통에 시달린 이른바 민초의 고통을 읽어내야 한다. 나는 이런 고통을 읽어내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 역사학의 책무 중 하나라고 본다. 더불어 걸핏하면 왜놈 소행으로 밀어부치는 내셔널리즘의 욕망도 낱낱이 그 민낯을 까발려야 한다고 본다. 


동국대학교불교문화연구원이 역주한 《조선불교통사》 제4권(동국대학교출판부. 376~377쪽)에 실린 다음 이야기를 부록으로 첨부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감한다. 추후 이 글은 계속 보강해 나가기로 한다. 잠시 덧붙이건대 인각사비도 같은 이유로 훼멸되었다. 


<중국의 탁본 요구에 지친 백성들이 비를 동강내다>


단목端目스님이 김생의 글자를 모아 「백월선사비白月禪師碑」를 썼다. 본래 봉화군 타자산駝子山 석남사石南寺에 있었는데, 절이 폐허되고 비만 남은 지 오래되었다. 영천군수 이항李沆이 그 필적을 보배처럼 아껴, 정덕正德4년(1509) 8월 영천군 자민루子民樓 아래로 옮겼다. 원 ‧ 명 이래 중국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오는 사람들은 매번 다 인출印出하여 돌아가 지극한 보배로 삼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도강渡江하고 제일 먼저 김생 글씨의 시詩를 물으니, 이는 곧 『영천읍지永川邑誌』에 말한 바대로 명明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조선 땅에 찾아와 먼저 「백월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1천 장을 인출하여 돌아갔다고 하는 것이다. 그 후 (인출하는 일이) 백성들의 고충이 되자, 비를 두 동강 내서 땅속에 묻어버렸다. 숙종 19년(1693)에 다시 꺼냈다. 



문화재와 국가주의 망령 - 석굴암과 무령왕릉의 경우  

*** 이 글은 사단법인 한국박물관협회가 발간하는 소식지인 《박물관소식》 2002 3․4호에 ‘특별기고’ 형태로 투고한 글 전문이다.  

석굴암을 감도는 유령이 있다. 국가주의와 국민주의가 응결된 국민국가주의라는 망령이 그것이다. 한국인은 석굴암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TV는 장중한 애국가를 들려주며 그 배경으로 석굴암을 빼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석굴암이 훌륭한 문화유산의 하나임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다만 여기서 이런 의문을 품어봐야 한다. 석굴암을 ‘반만년유구한 한민족의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만든 주인공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했는지를 이제는 되짚어보아야 한다.

이러한 반추 과정이 왜 필요한가? 석굴암을 둘러싼 일연의 논쟁, 예컨대 현재의 석굴암 전실이 잘못 복원됐다느니, 전실 수호상이 원래는 몇 개였는데 지금은 몇 개라느니 하는 논쟁도 따지고 보면 국가주의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

또 최근에는 석굴암 모형전시관 건립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경주시와 불국사가 중심이 돼 석굴암 모형전시관을 세우기로 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회의까지 통과한 상황에서 일부에서 환경파괴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난감해진 문화재청은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문화재위원회를 통과하고 국가예산까지 배정돼 있음에도 사업자체를 재검토하려 하고 있다.

요컨대 석굴암과 관련한 이러한 각종 논쟁과 논란의 밑바닥에는 항상‘한민족의 가장 위대한 유산을 이렇게 방치, 혹은 파괴할 수 있느냐’는 질타가 깔려 있다. 국사교과서나「한국사신론」을 비롯한 각종 한국사통론은 물론이려니와 이 분야 전문가라는 불교미술사학자들이 쓴 거의 모든 글에서 도출되는 석굴암에 대한 등식 두 가지는‘신라의 호국사찰이자 왕실사찰’이라는 것이다. 아주 이름 높은 국내 어느 미술사학자가 쓴 글에서 뽑은 구절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성왕이며 항일정신이 투철하던 문무대왕은 평화로운 신라를 항상 노략질하는 왜구를 저주한 나머지 ‘내가 죽으면 동해의 호국룡이 되어 왜적을 무찌르겠노라. 부디 나의 뼈를 동해바다에 장사지내 달라􀀀는 뜻의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신 애국심의 화신 같은 위인이었다...(중략)..신라 사람들은 문무대왕의 지극한 듯을 받들어 이 문무대왕릉을 중심으로 감은사, 석불사(=석굴암) 같은 큰 절들을 세워서 호국룡으로 화한 문무대왕의 힘과 불법(佛法)의 힘을 빌려 항상 바다로 침노해 오는 왜적들을 물리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 석굴암은 바로 그러한 신라 사람들의 염원이 스며있는 국가적인 절이었으므로 이 절과 불상 조각에 나타난 신라 예술가들의 정성은 너무나 간절한 기도 같은 것이었다.】  

1300년 전 신라시대에 항일정신이 웬말이며, 군주가 곧 나라이던 시대에 군주의 애국심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또한 석굴암이 신라인의 염원이 스며 있는 국가적인 절이라는 말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석굴암을 이렇게 평가하는 이는 비단 고인이 된 불교사학자만이 아니다.

어떻든 우리는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석굴암이 실은 신라시대의 석굴암이 아니요, 더구나 김대성(金大成)이라는 한 개인의 사찰이 아님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들이 말하는 석굴암은 근대에 들어와 비로소 태동한 근대 국민국가주의의 표상에 불과하다. 요컨대 석굴암은 껍데기였을 뿐이요, 학계는 석굴암이라는고리를 통해 국가와 민족, 국민이라는 근대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석굴암이 한민족의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신라 호국정신을 대표하는 불교유적으로 자리매김된 가장 결정적인 시기가 박정희 유신정권 시대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무렵‘화랑의 순국무사 정신을 본받아 국민 총화단결을 이룩하며 민족주체성을 되살리며 조국근대화를 이룩하자’는 구호가 열병처럼 한국사회 전반을 휘감았다.

박정희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전과 이후 독재정권 시절에도 개인과 인권, 자유는 전체와 국익, 의무라는 구호에 질식했다. 이러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과 인권, 자유를 말살했을뿐만 아니라 석굴암 같은 문화유산 또한 짓눌렀다. 이 분야 종사자들은 못내 인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으나 여러 학문 중에서도 역사학과 고고학, 미술사학은 문화재라는 고리를 통해 박정희 장권의 통치기반을 강화, 혹은 정당화시켜주는 일정 구실을 맡았다. 이와 관련된 다른 보기를 우리는 무령왕릉에서도 쉽사리 찾을 수 있다.

1971년 7월 공주 송산리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거기에서 무덤 주인공이 누구이지 알려주는 지석 두 장이 발견됐다. 그 중 하나가 무령왕의 지석이었는데 첫 대목에는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영동대장군 사마완(무령왕)께서 62세에 붕(崩)하셨다’ 중국천자에나 쓸 수 있는 ‘崩’으로 무령왕의 죽음을 표현한 사실을 발견한 학계는 이렇게 난리법석을 떨었다.  

▲ ‘崩’은 중국에서 황제에 한해서 쓰는 것이다. 백제에서 이 글자를 사용한 것은 역시 정치적으로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 지위를 가지고 중국황제나 대등한 태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 무령왕릉 발견의 의의로서 둘째로 들어야 할 것은 백제의 주체의식이 뚜렷이 나타난 것을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종래 생각해온 것과 같이 백제를 사대주의 국가라고만 할 수가 없고 도리어 주체의식이 강한 국가였다는 점이 드러났다고 믿는다. 

이런 말은 누군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너무나도 유명한 학계 원로들이 버젓이 학술논문에서 뱉은 말이다. 이처럼 학계는 무령왕릉을 통해 민족주체성과 민족자주성을 부르짖었다.여기서 우리가 심각히 고민해야 할 문제는 그들이 무령왕릉을 통해 외친 민족주체성이 실은 백제의 주체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붕이라는 글자 한 글자를 쓰고 안 쓰고 했다는 점에서 그 나라가 자주적이었느니 종속적이었느니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민족 주체성이며 사대주의라는 개념은 근대 역사학의 창조물이다. 더욱 범위를 좁히자면 무령왕릉에서 찾아냈다고 요란을 떤 민족주체성은 실은 박정희 정권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이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그 무렵 입만 열었다 하면 민족주체성 회복을 외쳤다. 이런 현상은 북한 또한 마찬가지였다.

1500년 전에 축조된 무령왕릉을 박정희 이데올로기를 제창하는 선전도구로 삼고 있으니 이것이 역사학이 권력과 야합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제국주의 성장과 궤를 같이하며 19세기말에 태동한 근대 역사학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제국주의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했으며 특히 이 과정에서 문화재는 그 집중 타깃이 되기에 이르렀다.

영국 출신 유대인 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본은 역사학의 이런 어용성을 갈파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권력이 요구하는 전통, 다시 말해 권력이 요구하는 이데올로기 확립에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다시 석굴암 얘기로 돌아가면 석굴암이 호국 혹은 왕실 사찰이라는 근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석굴암은 김대성의 개인사찰이었으며 애국심과도 하등 관련이 없다. 설혹 그것이 왕실사찰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신라 애국심을 발로가 되는 것이 아니며 항일정신과도 눈꼽만큼 연관이 없다.

더불어 우리는 석굴암의 원형이 어떠했는지도 알 길이 없다. 겨우 20세기 초반에 찍거나 그린 사진이나 도판 몇 장을 찾았다고 해서 그것을 토대로 석굴암 원형이 이러했는데 지금과는 다르다고 논의하는 것 자체도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석굴암은 처음 축조된 지 1천300년이나 흘렀다. 이 장구한 역사에서 어느 시점을 석굴암의 원형으로 삼을 것인지도 논의하지 않으면서 원형과 다르다, 틀린다고 말하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20세기 초반의 사진이나 도판에 나타난 석굴암은 20세기 초반의 석굴암일 뿐이요, 그것이 신라 당대의 석굴암 원형이라고 생각한다면 망상이다. 석굴암 모형 전시관 건립을 극력 반대하는 어떤 학자는 석굴암이 완벽한 조각품이라고 외치면서 모형 전시관은 이러한 완벽성을 해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 있다는 말인가?

석굴암은 인정하기 싫건 말건 상관없이 20세기 초반에 일본 건축가에 의해 재발견됐다. 당시 사진 자료를 보면 석굴암은 몰골이 형편없다. 그것이 지금처럼 번듯하게 재단장된 것은 식민강점기였다. 그런데 지금 석굴암의 무에가 완벽하다는 말인가?

문화유산 보존의 절대원칙은 지금 상태보다 더 파괴, 인멸되는 것을 막는 것이지, 실체가 없는 원형을 억지로 만들어 꿰맞추는 것도 안 된다. 더불어 완벽이라는 없는 개념을 억지로 만들어 석굴암은 완벽하다고 강변해서는 안 된다. 더더군다나 없는 이데올로기를 억지로 끌어내는 것 또한 그 문화유산은 물론이려니와 그 나라, 그 국민에게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령왕릉에서 어거지로 민족주체성을 찾아내고, 석굴암에서 없는 애국심과 항일정신을 어거지로 창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어거지 창출이 우리가 그토록이나 비판하고 있는 일본 우익 역사교과서의 사관과 본질적으로 무에가 다르다는 말인가, 우리는 억지로 쓰면서 누구를 욕한다는 말인가?

석굴암과 무령왕릉을 비롯한 문화재를 이제는 국가와 민족, 국민이라는 망령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그래야 문화재도 살고, 국민도 살며, 나라도 산다. 

<강릉 선교장 송림(松林)>


<기자수첩> 소나무에는 국경도, 국적도 없다

2014/01/03 18:05 송고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문화재 보수 현장을 소재로 하는 사건마다 거의 늘 빠지지 않는 논리가 국수주의다. 우리 것이 마냥 최고로 좋다는 믿음이 지나쳐 우리의 문화재 현장에 들어가는 재료는 반드시 국산이어야만 한다는 믿음은 외국산에 대한 혐오로 발전하곤 하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 자주 본다.


그런 극명한 보기가 단청 훼손으로 촉발한 숭례문 복구 부실논란 사건이다. 총체적 복구 부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 중 하나로 외국산, 특히 일본산 아교나 안료 사용을 들었다. 국보 1호인 우리의 자존심 숭례문을 복구하는데 어찌 일본산을 쓸 수가 있느냐는 질타가 쏟아진 것이다.


숭례문 복원에 쓰인 목재 중에서도 기둥이나 들보처럼 덩치가 큰 주축 건축 소재인 대경목(大梗木)이 국산이 아니라 러시아산이라는 의혹에도 이런 국수주의의 짙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물론 애초에 사용하기로 한 삼척 준경묘의 이른바 금강송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고, 이보다 헐값이라는 러시아산을 썼다면 이는 국민에 대한 믿음을 배신한 중대 범죄 행위이며, 그에 대한 중벌은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경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면 알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란과 관련해 만약에 러시아산을 썼다면 지금의 숭례문을 헐어버리고 새로 지어야 할지도 모른다느니, 국산 금강송은 잘 건조하면 균열 현상도 발생하지 않는 세계 최고의 소나무이며, 러시아산을 비롯한 여타 외국산 소나무에 견주어 가장 훌륭한 건축 소재라는 주장이 나오고, 더구나 그런 말이 정답인 것처럼 통용되는 현상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국내에서 흔히 '금강송'으로 통하는 소나무는 동해안 일대 백두대간을 따라 자라는 육송을 지칭하는 비학술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금강송이 좋은 목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세계 최고의 목재일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 금강송은 좋은 목재 중 하나인 것이다.


그것과 바꿔치기했다는 의혹이 이는 러시아산 소나무만 해도 유라시아 대륙을 걸치는 그 광활한 대륙의 어느 곳에서 생산된 소나무인지에 따라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 소나무가 혹여 두만강 건너편 연해주산이라면 그 소나무 역시 이른바 금강송의 일종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경주 경덕왕릉 솔숲>


그리고 설혹 러시아 다른 지역 소나무라 해서, 그리고 그 가격이 국내산 금강송보다 훨씬 싸다 해서 품질 또한 국산보다 저급이라는 주장은 적어도 이 분야 전문가들은 코웃음을 친다. 나아가 금강송은 충분히 건조하면 건물을 세워도 갈라지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적어도 고건축학자나 식물학자들에게는 비웃음을 산다.


우리 소나무가 세계에서 제일 좋고, 전통건축에서 그런 소나무만 썼다면 종묘와 창덕궁을 비롯해 적어도 수백 년을 버틴 전통건축물의 기둥과 들보가 곳곳에서 균열이 간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금강송이라 해서 갈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외국산 소나무 중에서도 전문가들은‘더글러스 소나무’라 불리는 캐나다산 소나무는 건축재료로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실제로 이 소나무는 광화문 복원에도 쓰였다. 하지만 광화문에 캐나다산 소나무가 쓰였다고 해서 그것이 부끄럽다고 저 건물을 헐어내고 국산 소나무로만 채운 새 건물을 지을 수는 없다.


설혹 숭례문에 러시아산 소나무가 쓰인 의혹이 사실로 밝혀졌다고 하자. 그것은 애초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므로 그 행위가 범죄행위가 될지언정, 그렇기에 그것을 부수고 새로 지어야 한다는 논리는 될 수가 없다.


숭례문, 광화문이 대한민국 문화유산이라는 국적이 부여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무가 국적을 갖는 것은 아니다. 소나무에는 국경도, 국적도 없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한국사회에 좌우를 막론하고 팽배한 내셔널리즘에 대한 심각한 비판은 내 기억에 2000년대 접어들어 비로소 가능했다. 이 비판에 이른바 진보 계열로 통하는 쪽이 당혹감 혹은 타격이 더 컸다. 그 이전까지 내셔널리즘은 보수 꼴통들의 전유물로 알았다가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데 당혹하지 않을 사람 있겠는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명칭 개정이다. 이 단체는 역사를 보면 1974년 출범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인데 그것이 민주화운동이 특히 거센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명칭을 변경한다. 그러다가 2007년 12월 8일 현재의 한국작가회의(The Association of Writers for National Literature)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꾼다. 이들이 바꾸게 된 사건 중 하나는 '민족문학'이 그것이 내세우는 저항정신과는 전연 딴판으로 영어로 번역할 적에는 '내셔널'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이 내셔널을 외국에서는 나찌즘으로 오인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민족문학...명칭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이들이 보인 행태는 실은 나찌즘의 그것을 방불한다. 그들이 지고지순하게 신봉한 민족, 이것이 실제는 차별 없이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내이션 혹은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에 표적이 된 자들은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심적으로는 엄청난 압박으로 작동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민족이라는 슬로건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버린 사건은 실은 굴욕적인 패배였다. 이와 궤를 같이해 이 무렵 부쩍 이들 내셔널리스트들이 부르짖은 말이 "열린 민족주의"였다. 이는 곧 그네들이 그때까지 견지한 민족주의가 열림을 지향하는 민족주의였다는 것이며, 이는 곧 그네들이 그토록이나 집요하게 공략한 민족주의와는 결이 다르다는 구분 지음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열린 민족주의를 들고 나오자 이 역시 얼토당토 않은 말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나 역시 그에 대해 격렬한 혐오감을 표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민족주의는 태생적으로 열릴 수가 없다." 


민족주의가 열린다는 것은 지나가는 똥개도 웃어버릴 일이다.

<Alphonse Daudet>


아래는 2002년 오마이뉴스 기고문이다. 이에서 제시한 문제의식을 정식으로 다룬 학술논문도 나중에 나왔더라만......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의 진실

도데의 추악한 내셔널리즘과 그 한국적 변용 

02.04.26 09:17l최종 업데이트 03.08.27 10:07l


1945년 8월15일 서울의 어느 보통학교 국어 교실를 무대로 삼은 한 일본인의 단편소설 끝장면이다.


히로히토 천황의 무조건적인 항복 선언을 방금 전해 들은 일본인 선생님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조선인 학생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일본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언어임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국민이 설혹 노예의 처지에 빠지더라도 국어만은 잘 지키고 있으면 스스로의 손에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때 창 밖에서 호각소리가 울려왔다. 일본인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하고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선생님은 끝내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칠판으로 돌아서 분필로 "일본 만세"라고 큼지막한 글을 썼다.


이것은 19세기 후반에 활약한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1840-1897)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의 마지막 장면을 1945년 한국 상황으로 패러디화해 본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패러디가 아니다. <마지막 수업>이 묘사하는 시대적 배경, 즉 1871년 보불전쟁으로 패한 프랑스가 독일계 주민이 다수인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 넘겨주고는 퇴각해야 했던 배경과 연합국에 패한 일본이 조선에서 물러나야 했던 상황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단편소설이 패전 뒤 어떻게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서까지 중·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을까? 이 소설이 실리는 것이 식민지시대 향수를 잊을 수 없는 일본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 해방 직후 1989년 무렵까지 중·고교 국어교과서에 버젓이 실렸던 것이다. 그 후 이 소설이 갖는 영향력은 아직도 남아 있다. 비록 이 소설이 교과서에서 사라졌다고는 해도 도데라는 이름까지 잊혀졌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동화라든가, 세계명작 같은 형태로 지금도 국내에서 '도데 신화'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Alphonse Daudet> 


일본의 경우 1936년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을 통해 번역소개된 이 작품은 1939년에 국어(일본어) 교과서에 채택됐으며, 패전 이후에도 우리처럼 한동안 국어교과서에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다가 1970년대 초반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재미 있는 것은 <마지막 수업>이 교과서에서 도태되기까지 한일 두 나라가 전혀 판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도데와 <마지막 수업>이 추악한 프랑스 내셔널리즘을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임이 역사학계의 집요한 추적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교과서에서 축출된 데 비해 한국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실려 신선미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이 교과서에서 탈락하고 난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도데는 여전히 사랑받는 작품, 사랑하는 작가로 통용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전세계적으로 프랑스 작가로서 2류, 3류 축에도 들지 못하고 일본에서마저 배척을 당하고 있는 도데가 한국에서만은 새천년을 맞이한 지 2년이 되는 지금까지 '식지 않은 열풍'을 지속하고 있는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의 작품은 흔히 서정성이 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부 프랑스 프로방스 출신인 그는 국내에서는 <마지막 수업>말고도 <별>이라는 단편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런 표면적인 서정성과 함께 <마지막 수업>은 식민지 경험과 결부돼 도데가 말하는 '잃어버린 프랑스어'와 '잃어버린 알자스-로렌'이 각각 '일본에게 잃어버린 조선말'과 '일본에게 잃어버린 조선 강토'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러한 증거가 23년만에 다시 빛을 본 소설가 고 이병주의 <동서양고전탐사>(원제는 「허망과 진실」)에 나오는 그의 이 작품에 대한 감상문에서 포착된다.


이 글에 따르면 이병주는 일제 식민강점 치하인 열두 살 때 일본인 교장 부인에게 선물로 받은 소년소녀 동화집 같은 책에서 <마지막 수업>을 처음 접했다고 하면서 "그 작품은 내게 있어서 심각한 충격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이병주의 설명은 이렇다.


"어린아이에게도 나름대로의 의식은 있다. 열두 살 소년인 나는 그 소설에서 받은 충격으로 그때까지 전혀 해보지도 않은 생각에 차례차례로 말려 들었다. 첫째 생각한 것은 알자스와 로렌이 어쩌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알자스와 로렌처럼 슬픈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한마디로 <마지막 수업>을 통해 조선은 일본식민지로 있을 수 없으며 우리 언어를 살려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 대다수는 지금까지도 <마지막 수업>을 프랑스의 민족의식, 나아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명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작품은 프랑스의 추악한 내셔널리즘을 가장 극명하게 표출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이미 30년 전에 추방됐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는 알자스는 14세기 이래 프랑스령이었으나 그 주민 대부분은 독일계로 언어 또한 독일어를 사용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언어 통제 정책은 더욱 강화돼 학교에서는 프랑스어를 강제로 가르쳤다.


그러다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다음 알자스는 프로이센에게 넘어갔다. 이로써 이 지방 주민들은 일상 언어, 곧 독일어를 되찾게 됐다.


<마지막 수업>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면서 알자스는 독일 땅일 수 없으며 세계 언어 중에 오직 프랑스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임을 강변했던 것이다.


실제 도데는 국내에는 '서정작가'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극렬한 왕당파였으며 그의 아버지 또한 우익 왕당파의 수괴였다.


도데가 더욱 악랄한 것은 보불전쟁 당시 알자스 주민 대부분이 프랑스어를 모르는 독일계였음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 <마지막 수업>은 프랑스어를 모르는 알자스 주민들을 대상으로 프랑스어 교사가 마지막 수업을 진행하는 장면을 설정하면서 "프랑스 만세"라는 말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 프랑스 교사는 비유컨대 일제의 패망으로 식민지 조선땅에서 할 수 없이 물러나면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일본 만세"라는 큼지막한 글을 남긴 일본인 국어교사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한국에서 <마지막 수업>은 외세에 저항하는 민족의식을 가장 극적으로 '대리표출'한 작품으로 통하고 있다.


이는 '적대적 문화변용'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 제국주의 논리를 고스란히 답습한 희극적인 현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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