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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계절의 노래(169)


무후 사당(武侯廟)(사당은 백제성 서쪽 교외에 있다<廟在白帝西郊>)


 당 두보 / 김영문 選譯評


남은 사당에

단청은 퇴락


텅 빈 산엔

초목만 가득


후주를 떠나는 소리

들려오나니


다시는 남양 땅에

눕지 못했네


遺廟丹靑落, 空山草木長. 猶聞辭後主, 不復臥南陽.


사천 성도 무후사



중국 남양(南陽), 성도(成都), 양양(襄陽), 기주(夔州) 등지에 모두 제갈량 사당이 있다. 이 시에 나오는 제갈량 사당은 기주에 있는 고묘(古廟)다. 옛 백제성 서쪽 교외로 지금은 충칭시(重慶市) 펑제현(奉節縣)에 속한다. 백제성이 어떤 곳인가? 촉한 선제(先帝) 유비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유비가 세상을 떠난 곳에 자리한 무후사(武侯祠)이므로 한층 더 비장하고 엄숙하다.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응하여 남양 땅을 떠나올 때 제갈량은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아마 그 떠남이 마지막인 줄 알고 있었으리라. 역사에는 공자처럼 “안 되는 줄 알면서 행하려는 사람(知其不可而爲之者)”들이 있다. 제갈량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조자룡 등 모두 우리 이웃 집과 이웃 마을에 살던 평범한 이웃사촌이었다. 그들이 의리 하나로 뭉쳐 새 세상을 꿈꿨다. 유비는 원통하게 세상을 떠나면서 제갈량에게 자신의 아들 유선이 변변찮으므로 직접 보위에 오르라고 권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어린 임금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가 북벌에 나서며 어린 임금에게 올린 「출사표」는 천고의 명문으로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북벌에 나섰으나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오장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출병하여 승리하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었다.(出師未捷身先死)” 우리와 우리 이웃의 꿈은 그렇게 끝이 났으나 그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시작이었다. 두보는 퇴락한 사당에서 꿈결처럼 들려오는 제갈량의 『출사표』 낭송 소리를 들었다. 제갈량은 끝내 남양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천지사방을 치달리는가? 우리는 언제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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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본기 : 66년(478) 백제의 연신(燕信)이 항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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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절 탐하는 개로왕에게 월경 핑계 대고 도망쳐

[중앙선데이] 입력 2017.06.04 01:44 수정 2017.06.04 16:23 | 534호 23면

  

서기 475년. 이 해는 백제 제21대 개로왕(蓋然性鹵王) 재위 21년째요, 고구려는 100세 장수를 누린 장수왕 재위 63년째가 되는 해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장수왕본기를 보면 “(가을 9월에) 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를 들이쳐 그 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몰하고 백제왕 부여경(扶餘慶)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포로로 삼아 돌아왔다”고 돼 있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까닭에 왕족은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부여경이란 개로왕의 이름이다. 500년 사직이 거의 문을 닫을 위기에 놓인 백제는 신라의 도움을 얻어 허겁지겁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충남 공주 부근 웅진에 터를 새로 잡았다.


개로왕, 남편에게 누명 씌워 추방

도미 부인 불러 욕보이려던 순간

“온 몸 더러우니 다른 날 …” 모면

남편과 극적 상봉, 고구려로 도망


많은 죽음이 그렇듯이 한성백제의 최후 또한 비참하기만 했다. 『삼국사기』 백제 개로왕본기에 그 처참한 광경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이를 보면, 고구려군이 한성을 네 갈래로 나누어 포위하자 개로왕은 성문을 걸어 잠근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기병 수십 명만 데리고 성문을 탈출해 도망가다가 사로잡혀 결국 지금의 서울 광진구 아차산 아래에서 참수되고 말았다.


개로왕, 고구려군에 잡혀 참수

그런데 백제를 누란의 위기로 빠뜨린 적국 고구려군 수뇌부에는 뜻밖에도 백제에서 도망친 두 사람이 있었다. 고구려군에 사로잡힌 개로왕은 참수 직전 이들에게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겪는다. 그것을 개로왕본기는 이렇게 적었다.


“이때 고구려의 대로(對盧·제1등 관직)인 제우(齊于)와 재증걸루(再曾桀婁)·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왕도 한성의) 북쪽 성을 공격해 7일 만에 함락시키고, 군사를 옮겨 남쪽 성을 공격하자 성안이 위기와 공포에 빠지니 임금이 탈출해 달아났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임금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는 임금 얼굴에다가 세 번 침을 뱉고는 죄를 헤아린 다음 묶어서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들이다.”


개로왕에게 치욕을 가한 재증과 고이는 복성(複姓, 2음절 이상으로 된 성씨)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들이 본래 백제에서 어떤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쳐야 했는지 언급이 없다. 한데 그렇게 도망쳐 고구려 침략군 앞잡이가 되어 돌아온 그들이 개로왕을 사로잡은 뒤 침을 뱉고 어떤 죄를 지었는지 따졌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로서는 백제에서 대단히 억울한 일을, 그것도 개로왕에게서 직접 당한 게 아닌가 하는 심증을 깊게 한다.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으면 한때의 주군을 그리 대했겠는가.


같은 개로왕 시대, 재증·고이와 비슷한 운명을 걸어온 부부가 또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고구려로 도망친 일은 같으나, 이들은 복수는커녕 비참한 최후를 맞은 점이 다르다. 『삼국사기』에 열전 형태로 그 행적이 정리된 그 유명한 도미(都彌) 부부가 그들이다. 이 열전은 도미라는 남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주인공은 그 부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도미는 개로왕 시대를 산 평범한 백성이다. 그러나 그에겐 매우 아름답고 지조가 있는 아내가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미모가 그만 비극의 씨앗이되고 말았다. 소문이 퍼져 나가 마침내 왕이 아내를 탐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실 개로왕은 단순히 도미 부인의 아름다움을 탐한데 그치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에게는 특유의 ‘여성 정절 파괴 본능’ 같은게 있었던 것 같다. 왕은 도미부인에 앞서 도미를 먼저 불러 이렇게 말한다. “흔히 부인의 덕은 정결을 으뜸으로 친다지만 으슥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달콤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여자는 드물다”고 말이다. 제아무리 정절을 외치지만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뜻이다. 더구나 왕이 부르는데 정절을 바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느냐는 투였다. 개로왕은 그 정절을 거꾸러뜨리고 싶은 심리가 발동했던 것이다.


이런 개로왕이지만 막상 쉽사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달이 난 그는 남편인 도미에게 죄를 덮어씌워 두 눈을 뽑아 버리고는 강배에 실어 강제 추방해 버렸다. 그러고는 기어이 부인을 불러다가 강제로 욕보이려 했다. 그러나 지혜로웠던 도미 부인은 이 위기에서 빠져나온다. 도미 열전에 따르면 도미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남편을 잃어 혼자는 부지할 수 없는데다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제가 월경으로 온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을 기다려 깨끗이 몸을 씻고 오겠습니다.”


이 말을 곧이 믿은 왕은 그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도미 부인은 그 길로 배를 타고 강물로 탈출해 천성도(泉城島)라는 섬에 이르러 풀뿌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다가 장님이 된 남편과 극적으로 재상봉했다고 한다. 이후 부부는 배를 타고 고구려 땅 산산(䔉山)이라는 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구차하게 살다가 생을 마친 것으로 열전은 전하고 있다. 비장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엔 월경 중인 여성의 몸은 더럽다고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온몸이 더럽다’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원문을 보면 ‘혼신오예(渾身汚穢)’다. 오예란 간단히 말해 오물(汚物)이다.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소설 중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이 있는데, 예덕 선생이란 수도 한양에서 인분을 푸는 일로 살아가는 사람을 극화한 표현이다. ‘예덕’은 글자 그대로는 ‘똥의 덕’이다.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떠오른다. 첫째, 월경을 지금 흔히 쓰는 용어 그대로 ‘월경(月經)’이라 했다. 둘째, 그러한 월경이 혼신오예라 해서 더러운 일로 인식됐다는 사실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조선시대에 편찬된 문헌들에도 그대로 전재됐지만 용어에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은 저 도미 열전을 그대로 베끼면서도 ‘월경’ 대신에 ‘월사(月事)’라는 말을 썼다. 이러한 용어 변경이 시대별 단순한 선호도 때문인지, 혹은 ‘월경’에 비해 ‘월사’라는 말이 덜 직설적이었다고 생각했음인지는 언뜻 판단이 서지 않는다.


또한 월경 중인 몸은 더러우며, 그런 까닭에 그런 여자는 남자를 모시지 못한다는 스토리는 고대 일본 정사인 『일본서기』에도 보인다. 이곳 제7권 경행천황(景行天皇) 4년 봄 2월 갑자일(甲子日) 조에는 미농(美農)이라는 곳으로 행차한 천황이 이곳에 근거지를 두었다고 추측되는 팔판입언(八坂入彦)이라는 황자(皇子)의 첫째 딸인 팔판입원(八坂入媛)을 만나 비로 삼게 된 사연이 흥미롭게 소개돼 있다. 이에 의하면 천황은 입원(入媛)의 동생인 제원(弟媛)을 먼저 만나 추파를 던졌다. 하지만 장막까지 불러들이는 데 성공한 제원은 막상 다음과 같은 말로 천황의 수청 요구를 거부한다.


“첩은 성격이 교접(交接)의 도를 바라지 않으니, 지금은 황명(皇命)의 위엄에 못 이겨 잠시 장막 안으로 들었습니다만, 마음이 내키지 않고 모습 또한 더럽고 누추해 오래도록 후궁에서 모실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첩의 언니 팔판입원은 얼굴이 아름답고 마음이 정결하니, 후궁에 넣게 해 주십시오.”


『일본서기』 형자예루도 월경의 은유


이에 마침내 그 언니가 천황비가 되었다고 한다. 모습이 추하고 더럽다는 말에 해당하는 『일본서기』 원문을 보면 ‘형자예루(形姿穢陋)’다. ‘형자’란 몰골이란 뜻인데 그것이 예루하다 했으니, 도미 열전에서 본 ‘오예(汚穢)’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다시 말해 ‘형자예루’라는 말은 ‘월경 중’이라는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스토리는 ‘추적, 한국사 그 순간’ 의 제1편 ‘김춘추와 문희의 혼인’(2016년 6월 26일자)편에서 다룬 바 있다. 김유신이 처음에는 큰누이 보희를 김춘추와 짝지어 주려 했으나 그가 월경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급히 작은누이 문희를 대타로 삼았다는 내용이었고, 이 대타 작전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다.


김춘추의 배필이 될 뻔한, 나아가 왕비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한꺼번에 날린 보희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를 짐작케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화랑세기』 18세 풍월주 춘추공 전에 보인다.


“(춘추와 문희가) 포사(鮑祀·포석정)에서 길례(吉禮·결혼식)를 치렀다. 얼마 안 있어 (김춘추 조강지처인) 보량궁주(寶良宮主)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문희가 뒤를 이어 정궁(正宮)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화군(花君·풍월주 부인)이 되어 아들(법민)을 낳았다. 보희는 꿈을 바꾼 일을 후회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시집가지 않았다. (춘추)공이 이에 (보희를) 첩으로 삼아 아들 지원(知元)과 개지문(皆知文)을 낳았다. 이 이야기는 『문명황후사기(文明皇后私記)』에 나온다.”



김태식 소백산맥 기슭 산골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영문학과에 들어가 한때는 영문학도를 꿈꾸다 가난을 핑계로 접었다. 23년간 기자로 일했는데, 특히 역사와 문화재 분야에서 한때 ‘최고의 기자’로 불리며 맘껏 붓끝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 비화를 파헤친 『직설 무령왕릉』을 비롯해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풍납토성』 등의 단행본을 냈다.

백제 멸망, 김춘추 사위의 치정이 부른 복수극

[중앙선데이] 입력 2016.08.21 00:46 | 493호 23면

  

백제는 660년 음력 가을 7월 18일, 사비성(泗?城)에서 북쪽 웅진성(熊津城)으로 도망친 의자왕이 나당(羅唐)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700년 사직에 종언을 고했다. 이때 일은 『삼국사기』 신라 태종무열왕본기 7년(660)조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이에 의하면 의자왕은 이달 13일 포위망을 뚫고서 가까운 신하들만 데리고 야음을 타 웅진성으로 들어갔다. 현지에 남은 의자왕의 아들 융(隆)은 대좌평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 항복했다. 그리고 닷새가 지난 18일, 의자왕마저 태자를 데리고 웅진성을 나와 항복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같은 달) 29일 금돌성(今突城)에서 소부리성(所夫里城)에 도착해 제감 천복(天福)을 당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보고했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금돌성은 지금의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에 있었고, 소부리성은 백제 마지막 수도로 지금의 충남 부여에 있던 사비성을 말한다.

  

그에 앞서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치욕의 현장을 태종무열왕 본기는 이렇게 적었다.

  

“법민(法敏)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는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예전에 네 아비가 억울하게 내 누이를 죽여 옥중(獄中)에 파묻은 일이 나를 20년 동안 마음이 고통스럽고 머리가 아프도록 하더니, 오늘에야 네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게 되었구나’라고 하니,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법민, 항복하는 부여융에게 침 뱉어우리는 백제 개로왕에게 앙심을 품고 고구려로 도망가서 나중에는 그 침략군 앞잡이가 되어 나타난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萬年)이라는 두 사람이 개로왕을 사로잡고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임금 얼굴을 향해 침을 세 번 뱉고는”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인 장면을 기억한다. 실상 그와 똑같은 치욕을 훗날의 문무왕이 되는 신라 태자 김법민은 백제 왕자 부여융(夫餘隆)에게 가한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개로왕을 모욕한 이들은 말에서나 내렸지, 김법민은 말 위에 그대로 걸터앉은 채 침을 뱉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20년 전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죽인 일’이란 무얼 말하는가.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 백제 의자왕 2년(642)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대야성 전투를 마주한다.

  

이 무렵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양국의 협공에 내내 시달리는 중이었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몰아치고, 백제는 신라 서쪽 변경을 들이쳤다. 이해만 해도 7월에 의자왕이 병사를 크게 일으켜 미후(??)를 비롯한 신라 서쪽 변경 40여개 성을 빼앗았는가 하면, 그 다음 달에는 백제가 다시 고구려와 합세해 신라가 당과 교유하는 서해안 창구인 당항성(?項城)을 침범해 당과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한 일도 있었다. 이 와중에 저 유명한 대야성 전투가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신라는 치열한 공방 끝에 대야성을 내준 것은 물론 이곳을 지키던 성주(城主) 품석(品釋) 부부가 죽임을 당하고, 남녀 1000명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대목을 『삼국사기』 백제 의자왕 본기는 이렇게 전한다.

  

“8월에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 대야성을 치니 성주인 품석이 처자식을 데리고 나와 항복했다.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품석은 목을 베어 그들의 서울로 보냈다. 남녀 1000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 주(州)와 현(縣)에다가 나누어 살게 하고는 병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했다. 임금이 윤충이 공로가 있다 해서 말 20필과 곡식 1000섬을 주었다.”

  

더 상세한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와 있다.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품석 외에도 그를 보좌한 사지(舍知) 죽죽(竹竹)과 용석(龍石) 등이 함께 죽었다. 사지란 17등급으로 나뉜 신라 관위(官位)의 제10번째 명칭이다. 죽죽의 용맹함을 『삼국사기』는 별도로 그의 열전을 세워 표창했다. 한데 이 대야성 전투의 패배가 김춘추에게 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던 듯 싶다. 한국사의 흐름을 바꿔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명장면이 여기 펼쳐진다.

  

“(대야성 전투에서 패배한 그해) 겨울, 임금이 장차 백제를 정벌하여 대야성 패배를 보복하고자 이찬(伊飡)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대를 청하고자 했다. 그에 앞서 대야성이 패배했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그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딸의 죽음을 듣고는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김춘추의 딸이자 품석의 부인은 누구인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으로 가보자.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격파했을 때 춘추공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스럽게 여겨 고구려에 청병함으로써 백제의 원한을 갚으려 하자 왕이 허락했다.” 

  

딸 죽음 듣고 하루종일 기둥에 기대 슬퍼해그는 다름아닌 고타소였다. 고타소는 김춘추의 딸이지만 그의 생모가 누군지는 베일에 가려있었다. 고타소 역시 김법민·인문 형제나 마찬가지로 김유신의 동생 문희(文姬) 소생 정도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고타소의 생모가 문희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타소가 만약 문희의 소생이라면 오빠 김법민(626년생)보다 늦게 태어났다는 얘기가 된다. 그 이듬해에 태어났다 손치더라도 대야성에서 죽을 때 고타소는 기껏해야 만 15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고타소가 많아봐야 죽을 때 15세라는 뜻이며, 그보다 더 어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그가 김품석과 혼인해 대야성을 지키는 성주의 부인이 돼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고타소는 문희의 딸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된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김춘추의 딸 고타소는 문희의 소생이 아닌 정실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대목을 예리하게 간파한 것이 『화랑세기』다. 춘추공(春秋公) 열전에는 문희와의 결혼을 미적댈 당시 김춘추에게는 보량(寶良)이라는 아름답기 짝이 없는 부인이 있어 그와의 사이에는 고타소라는 딸이 있었다고 전한다. 20년 뒤, 더 정확히는 그로부터 18년 뒤에 김춘추의 아들이자 태자인 김법민이 백제를 멸하면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붙잡아 말 아래 꿇게 하고는 침까지 뱉은 이유를 비로소 헤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김법민에게 고타소는 이복 누이였지만, 고타소의 죽음으로 인한 아버지의 고통을 지켜보았기에 이리 행동했으리라.

  

대야성 전투 패배가 김춘추에게 안긴 ‘내상(內傷)’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다른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죽죽 열전에 의하면 대야주 현지 출신인 죽죽은 선덕여왕 때 사지(舍知)가 돼 대야성 도독 김품석 휘하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642년 가을 백제군에 대야성이 함몰할 때 죽는다. 한데 이 열전을 보면 대야성 함락을 부른 장본인은 다름 아닌 김품석임을 알 수 있다.

  

내막은 이렇다. 품석이 거느린 막객(幕客)으로 역시 사지(舍知)인 검일(黔日)이란 사람이 있었다. 품석은 검일의 아내의 빼어난 미모에 반해 그만 아내를 빼앗아버렸다. 이를 갈던 검일은 마침 윤충이 거느린 백제군이 대야성을 공격해 들어오자 적과 내응해 창고를 불태우며 성안을 혼란에 빠뜨린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품석은 고타소와 아이들을 죽이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이후 죽죽은 용석과 함께 마지막까지 대야성을 지키며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포로가 된 의자왕에게 술 따르게 해 이 전투에서 검일 이외에도 백제와 내응한 자가 있었는데, 바로 모척(毛尺)이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본기 7년(660) 조에 의하면, 백제를 멸한 직후인 그해 8월 2일, 김춘추는 주연을 크게 베풀어 나당 참전 용사들을 위로했다. 이때 김춘추는 당나라 사령관인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단상에 앉고 포로가 된 의자왕과 그 아들 부여융은 그 아래 앉히고는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이를 지켜보던 다른 백제 신하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얼마나 비참한 장면인가.

  

한데 김춘추는 모척을 붙잡아 목을 베게 했다. 나아가 검일도 잡아다가 문초하기를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해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 질러 없앰으로써 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해서 싸움에 지도록 했으니 그 죄가 하나요,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했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다”라고 하면서 사지를 찢어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고 한다. 아내를 빼앗긴 검일은 모척과 함께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군과 내응해 성이 함락되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뒤 백제로 들어가 호의호식하다가 18년 뒤에 백제가 함락될 때 붙잡혀 능지처참을 당한 것이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했던가. 김춘추는 사랑하는 딸을 백제에 잃은 복수심에 불타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굳은 다짐을 한다. 돌이켜 보면 다름 아닌 사위가 빌미를 준 셈이지만 김춘추에겐 그보다 복수가 더 중요했다. 복수심에 불타 숙적 백제를 멸한 신라는 이어 고구려까지 멸함으로써 일통삼한(一統三韓)을 달성했다. 한국사의 획을 가른 위대한 역사가 치정(痴情)이 부른 복수극의 결말이었다는 건 아이러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ts1406@naver.com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시간은 2016년03월09일 13시55분이다.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이 대부분 찬술한 가운데 그 일부는 그의 제자 무극(無極)이라는 승려가 보충했다는 주장이 이제는 적어도 학계에서는 대세를 이룬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도 군데군데 있다. 특히 그 맨 앞에 붙은 가야를 포함한 네 나라 왕들과 후삼국 왕들의 계보인 왕력(王曆)이 그 이하 본문과는 어떤 관계인지는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지금 살피고자 하는 백제 무왕(武王) 역시 그러하다. 


미륵사지 전경미륵사지 전경 (사진제공=김태식)


 이곳 왕력 편에서는 백제 제30대 왕인 그를 일러 “무강(武康)이라고도 하는데 헌병(獻丙)이라고도 한다. 혹은 어릴 때 이름을 일로사덕(一耆篩德)이라고도 한다. 경신년(600)에 즉위해 41년을 다스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 본문 중 한 편에 해당하는 기이(紀異) 편 제2에 ‘무왕’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한 이야기에 의하면 당장 이를 부정한다. 기이란 글자 그대로는 신이(神異)한 이야기를 정리했다는 뜻이니 이 경우 '紀'는 기록하다, 적는다는 같은 발음의 글자 ‘記’다. 그 전체 편명에 어울리게 이곳에 저록(著錄)한 무왕 관련 이야기는 그 유명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연애담과 그에 따른 미륵사 창건 이야기다.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를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겠거니와, 이 기이 편에서 《삼국유사》는 그 제목 ‘무왕’ 아래에 그것을 주석하기를 “옛날 책에서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지만 잘못이다. 백제에 무강은 없다”고 했다. 분명히 왕력 편에서는 그의 다른 이름으로 무강(武康) 혹은 헌병(獻丙), 나아가 어릴 적 이름으로 일로사덕(一耆篩德)을 들었음에도 본문에서는 이를 스스로 부정했으니 말이다. 이런 주석이 《삼국유사》 편찬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후대 누군가가 보충해 넣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한데 이에 등장하는 무강을 백제의 무왕이 아니라 위만에게 내쫓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라는 주장 또한 억세게 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예컨대 조선 후기 역사서들에 집중적으로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그 불후의 편년체 역사 대작인 《동사강목》에서 그 정설화를 시도하니 본문에서 기준이 “마한을 공략하여 격파하고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했다”고 하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왕이 남으로 달아나 마한을 공략하여 격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니, 곧 무강왕(武康王)이다. 지금의 익산(益山) 오금사봉(五金寺峰) 서쪽에 쌍릉(雙陵)이 있으니 《고려사》에 후조선(後朝鮮) 무강왕과 비(妃)의 능이라 하고, 세속에서는 영통대왕릉(永通大王陵)이라 부른다. 또 기준성(箕準城)이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이 쌍릉이 지금의 익산 쌍릉이다. 한데 세속에서 이를 영통대왕릉이라 부른다는 증언은 조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永通’은 말할 것도 없이 ‘末通(말통)’의 오기다.   글자가 비슷한 데 따른 인쇄 착오다. 이 말통은 곧 서동(薯童)이니, 이는 저 《삼국유사》 ‘무왕’에 보이는 대목, 다시 말해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니… 항상 마[薯]를 캐다 파는 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는 데서 비롯한다. 서동은 곧 마동, 혹은 맛동일 것이니 이것이 곧 저 말통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실제 그 뿌리가 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관련 기록을 보면 분명 말통이다.   


 나아가 순암은 같은 《동사강목》  고려 숙종 7년(1102) 조에서는 고려가 이해 겨울 10월에 기자를 모시는 사당인 기자사(箕子祠)를 세운 사실을 특기하고는 그에다가 자신의 주장을 붙이는데 그에서 이런 내용이 보인다. 


마한 시조인 무강왕 기준(箕準)은 곧 기자의 41세손으로 남쪽 땅에 나라를 열어 2백 년이나 지속되었다.


미륵사지미륵사지 (사진제공=김태식)


 이에서는 아예 마한의 시조로 발전했으며, 더구나 그가 기자의 41세손이라는 주장까지 등장한다. 무강왕을 둘러싼 이런 인식은 순암과 동시대 인물인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대저(大著) 《연려실기술(然黎室記述)》에도 보인다.   이곳 권 제19 ‘역대전고(歷代典故)’ 중 ‘삼한(三韓)’ 조에는 “조선왕 기준이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한 나라 혜제(惠帝) 원년 정미(BC 194)에 좌우 신하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달아나 마한을 쳐서 격파하고 스스로 서서 한왕(韓王)이 되어 국호를 마한이라 하고 금마산(金馬山)에 도읍하고는 54국을 거느리니 세상에서 무강왕(武康王)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긍익은 금마산 기슭 용화산(龍華山)을 일러 “일명 미륵산(彌勒山)이라 하는데 석성(石城)이 있어 둘레 3천900 척인데 세상에서는 기준이 쌓았다고 전해진다”고 했다. 


 한데  《연려실기술》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이상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무강왕이 이미 인심을 얻고 나라를 세워 마한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왕이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용화산 위 사자사(獅子寺)에 가려고 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니, 세 미륵이 연못 가운데에서 나왔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이곳에 절을 지으소서”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연못을 메울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신력(神力)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우니 이에 불전(佛殿)을 창건하고 또 세 미륵상을 만드니, 신라 진평왕이 백공(百工)을 보내 도왔다. 석탑이 있는데 굉장히 커서 높이가 몇 길이나 되니, 동방 석탑 중 최고이다. 


 이를 보면 기자조선과 그 마지막 왕 기준, 그리고 백제 무왕과 선화부인이 아주 뒤범벅을 이룬다. 이는 기록이 어떻게 한데 뒤엉켜 이상한 신화를 만들어내는지 그 생생한 장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흥미롭다. 


미륵사지 당간지주와 복원 동탑미륵사지 당간지주와 복원 동탑 (사진제공=김태식)


 그렇다면 도대체 백제 무왕과 마한, 그리고 기자조선은 어떤 고리로 이렇게 연결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공교롭게도 백제 무왕이 미륵사라는 대찰을 창건한 지역과 위만에 쫓긴 기자조선 마지막 왕 기준이 도망쳐 정착한 곳이 같은 지역으로 인식된 데서 유래한 착종(錯綜) 혹은 착란(錯亂)의 소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준이라 하는 기자조선 준왕(準王)이 위만에 쫓겨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들어가 마한 땅에 들어갔다는 기록은 고대 중국 문헌 곳곳에서 보이거니와, 이것이 나중에는 그 정착지가 금마(金馬)라는 등식으로 발전한다. 이런 기록이 애초 등장하는 중국 문헌들을 보면 기준은 마한 땅에 들어가 그곳을 공략하여 정착했다고 하지만, 이것이 후대로 갈수록 역사가 조작되어 그가 바로 마한이라는 왕국을 창설한 시조로 둔갑하기에 이른다. 당장 《삼국유사》만 해도 기이 제1에 ‘마한’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한 이야기에서 그 정체를 종잡기 힘든 《위지(魏志)》를 끌어다가 “위만(魏滿)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왕 준(準)이 궁인과 좌우 신하들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했다”고 했다.  


 이런 혼란은 현재까지 주어진 자료에 의하는 한 조선 초기 완성된 팔도지리 총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인 듯하다. 이곳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조를 보면 그 싹이 보인다. 예컨대 이 지역 사찰 관련 기록을 모은 불우(佛宇) 조를 보면 미륵사(彌勒寺)를 이렇게 설명한다. 


용화산(龍華山)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무강왕(武康王)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고자 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세 미륵불이 못 속에서 나왔다. 부인이 임금께 아뢰어 이곳에 절을 짓기를 원하였다.…


 나아가 같은 대목 고적(古蹟) 조를 보면 쌍릉(雙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오금사(五金寺) 봉우리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 《고려사》에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과 그 비(妃)의 능이라 했다.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인데, 말통(末通)은 곧 서동(薯童)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이 쌍릉이 오늘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지역이다. 이로써 보건대 늦어도 조선 초기에는 이미 기자조선 준왕과 백제 무왕이 혼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견주건대 신라 시대 김태식과 대한민국 시대 김태식, 혹는 대한민국 시대 권투선수 김태식과 연합뉴스 기자를 역임한 김태식이 짬뽕된 것과 같다 하겠다. 


 《승람》 외에도 조선 시대 그런 흔적을 보면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쓴 ‘익산 미륵사 석탑을 보며(益山彌勒寺石浮屠)’라는 시가 있다. 



귀신의 공인지 백성의 힘인지 끝내 아득하네

위로는 용화산 만 길 능선 넘어섰네

천년 두고 석재는 죄안을 이루었으니

가련토다 금마의 무강왕이여



鬼功民力竟茫茫

上軼龍華萬仞岡

千載石材成罪案

可憐金馬武康王



해체 이전 미륵사 석탑해체 이전 미륵사 석탑 (사진제공=노기환)


 이때만 해도 미륵사 석탑은 온전했나 보다.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기에 그 뒤편 용화산보다 높게 보였겠는가? 실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반드시 그리 볼 수도 없는 까닭은 그것을 관람하는 위치에 따라 그리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점필재는 이 거대한 석탑을 백성의 고혈을 짜내 이룩한 결과물로 본다. ‘죄안(罪案)’이라는 말은 범죄 사실 기록부, 요즘 말로 치환하면 범죄 사실 판결문 정도를 의미한다. 


 점필재는 주자성리학에 충실한 인물이라 이런 사람들은 불교는 경멸한 특징이 있다. 그 시조처럼 통하는 주희 자신이 이미 격렬한 반불교주의자라, 그를 따르는 후학들도 자연 반불교 정신으로 무장하게 되거니와, 이 시에서도 점필재의 그런 성향은 유감없이 드러난다. 한데 이를 만든 이를 점필재는 금마의 무강왕이라 했다. 실제는 백제 무왕인데도 말이다. 그에게는 아마도 금마국 무강왕과 백제 무왕이 아무런 갈등도 없이 같은 인물로 인식되었으리라. 


 비단 이런 전승이 아니라 해도 실제 익산 금마면 일대는 백제 무왕과 밀접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곳에는 그가 창건한 미륵사 터가 있고, 실제 이는 근자 그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봉영사리기(逢迎舍利記), 다시 말해 사리를 맞이하여 석탑에 안치하면서 남긴 기록에서 더욱 분명한 사실로 확인됐다. 미세한 차이라면, 문헌에는 이 절을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창건했다 했지만, 백제 시대에 이를 실제로 창건하고 남긴 사람들이 작성한 이 사리장엄기에 의하면 선화공주가 아닌 다른 왕비, 다시 말해 좌평(佐平) 사타적덕(沙陀積德)의 딸이 창건 주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 인근 쌍릉은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 무덤이라 전한다. 실제로 이 무덤이 백제시대, 특히나 사비 도읍기 왕릉 무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으니 정말로 이곳이 무왕 부부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고려 충숙왕 재위 16년(1329) 여름 4월에 대규모 도굴단이 이 무덤을 도굴한 까닭은 바로 이곳에 바로 금은보화가 다량으로 묻혀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도움받은 곳>

한국고번역원 한국고전 종합DB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으로 보는 백제의 고분》, 2015



김태식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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