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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아들로 백제 멸망 이후 당이 백제왕으로 책봉한 부여륭의 아들로, 즉천무후에 의해 백제왕에 책봉되긴 했지만, 허울뿐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의봉(儀鳳) 연간에 (부여)륭을 웅진도독(熊津都督)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무리들을 안정시키게 하고,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때 신라가 강성하므로 융은 감히 고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의탁하여 다스리다가 죽었다. 무후(武后)가 그의 손자 경(敬)으로 왕위를 잇게 하였으나 그 땅은 이미 신라ㆍ발해말갈(渤海靺鞨)에게 분할되어 나라의 계통이 드디어 끊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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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운동에 가담한 백제인으로, 임존성을 마지막까지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용삭 2년(662) 7월에…왕인 부여풍이 몸을 빼서 달아났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혹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하는데 [당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얻었다.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함께 모두 항복했으나 홀로 지수신(遲受信)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침내 그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고 나머지 무리도 모두 평정됐다.


삼국사기 권 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上 : 3년(663)…5월에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을 웅진성에서 에워쌌다. 당나라 황제가 조칙으로 유인궤(劉仁軌)에게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를 겸직케 하여 이전의 도독 왕문도(王文度) 군사와 우리 군사를 통솔하고 백제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번번이 싸울 때마다 적진을 함락시켜 가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가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합치고 아울러 배반한 무리들을 불러 모아서 세력이 매우 커졌다. 인궤는 인원과 합하여 잠시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당 황제가] 조칙으로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왕은 김유신 등 28명<또는 30명이라고도 하였다.>의 장군을 거느리고 그와 합세하여 두릉윤성(豆陵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을 차지하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11월 4일에 이르러 군사를 돌렸다. 설리정(舌利停)에 이르러 싸움의 공을 따져 상을 차등있게 주고 크게 사면하였다. 의복을 만들어 남아서 지키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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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지상지(黑齒常之)가 이끄는 백제부흥운동군에서 별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나중에 당군에 항복했다. 사타(沙陁)는 복성(複姓)이며, 이름이 상여인데, 아마 고대 중국 저명한 정치가 인상여(藺相如)나 전한시대 저명한 문학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에서 따온 듯하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이보다 앞서 흑치상지(黑齒常之)가 흩어진 무리를 불러 모으니 10일 만에 돌아와 붙은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보내 쳤으나 상지가 막아 싸워 이겼다. 다시 200여 성을 빼앗으니 정방은 이길 수 없었다. 상지가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陁相如)와 함께 험한 곳에 의지해 복신에게 호응하다가 이때가 되어 모두 항복했다. 인궤(仁軌)가 진심을 보이면서 임존성을 빼앗아 스스로 공을 나타내게 하고는 갑옷과 무기와 군량을 주었다. 인사(仁師)가 말하기를 “야심(野心)을 믿기 어려운 데 만일 무기와 군량을 얻는다면 도적의 편의를 도와주는 꼴이 될 것입니다”고 했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충성스럽고 지모가 있다. 기회를 틈타 공을 세운다면 오히려 무엇을 의심하리요”라고 했다. 두 사람이 마침내 그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고 나머지 무리도 모두 평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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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신과 도침이 주도하는 백제부흥운동 진압을 위해 출동한 신라 장수. 백제군에 패하여 갈령도에서 도망쳤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무왕(武王)의 조카 복신(福信)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렸는데 이때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古王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신라왕 김춘추가 조서를 받고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인궤 등을 구하게 하였다. [김흠이] 고사(古泗)에 이르자 복신이 맞아 쳐서 이기니 김흠이 갈령도(葛嶺道)로부터 도망하여 돌아갔고, 신라는 감히 다시 출병치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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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멸망하자, 무왕의 조카 복신을 도와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한 승려. 주류성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고 왜국에 볼모로 간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 부흥운동이 기세를 올리자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복신의 의심을 샀는지, 그에게 죽임을 당했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무왕(武王)의 조카 복신(福信)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렸는데 이때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古王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서북부(西北部)가 모두 응하자 [그들은] 군사를 이끌고 인원(仁願)을 도성(都城: 사비성)에서 포위하였다.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 (檢校帶方州刺史)로 기용(起用)하고, 왕문도(王文度)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便道]로 신라 군사를 일으켜 인원(仁願)을 구하게 하였다. 인궤가 기뻐서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 한다.”고 말하고는 당나라의 책력(冊曆)과 묘휘(廟諱)를 요청하여 가지고 가면서 말하였다. “내가 동이(東夷)를 평정하여 대당(大唐)의 정삭(正朔)을 해외에 반포하고자 한다.” 인궤가 군사를 엄하고 정연하게 통솔하고 싸우면서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熊津江) 어구에 두 목책을 세우고 막았다. 인궤가 신라 군사와 합쳐 이를 치니 우리 군사는 퇴각하여 목책 안으로 달려 들어왔는데 물이 막히고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져 죽거나 전사한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복신 등은 이에 사비성[都城] 포위를 풀고 물러나와 임존성(任存城)을 보전하였고, 신라 사람도 군량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때가 용삭(龍朔) 원년(661) 3월이었다. 이에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면서 무리들을 불러모으니 그 형세가 더욱 떨쳤다. 사람을 보내 인궤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듣건대 당나라[大唐]가 신라와 서약(誓約)하기를 백제인은 늙은이 젊은이를 묻지 않고 모두 죽인 연후에 우리 나라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 하니 [앉아서] 죽음을 받는 것이 어찌 싸워서 죽는 것만 같으랴? [이것이 우리가] 모여 스스로 굳게 지키는 까닭이다.” 인궤가 글월을 지어 화와 복[禍福]을 자세히 말하고 사자를 보내 타일렀다. 도침 등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서 인궤의 사자를 바깥 객관[外館]에 두고 업신여기면서 대답하였다. “사자의 관등이 낮다. 나는 바로 일국의 대장이니 만나기에 합당치 않다.” [도침은] 서한에 답하지 않고 [사자를] 그대로 돌려보냈다.인궤는 군사가 적으므로 인원과 군사를 합쳐서 군사들을 쉬게 하고 [고종에게] 표를 올려 신라와 세력을 합하여 도모하기를 청하였다. 신라왕 김춘추가 조서를 받고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인궤 등을 구하게 하였다. [김흠이] 고사(古泗)에 이르자 복신이 맞아 쳐서 이기니 김흠이 갈령도(葛嶺道)로부터 도망하여 돌아갔고, 신라는 감히 다시 출병치 못하였다. 얼마 아니하여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군사를 아우르니 풍(豊)은 능히 제어하지 못하고 다만 제사를 주관할 뿐이었다. 복신 등은 인원(仁願) 등이 고립된 성에서 원병이 없으므로 사자를 보내 위로하여 말하였다. “대사(大使)들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는가? 마땅히 사람을 보내 전별하여 보내겠노라[餞送].”


삼국사기 권 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上 : 3년(663)…5월에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을 웅진성에서 에워쌌다. 당나라 황제가 조칙으로 유인궤(劉仁軌)에게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를 겸직케 하여 이전의 도독 왕문도(王文度) 군사와 우리 군사를 통솔하고 백제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번번이 싸울 때마다 적진을 함락시켜 가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가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합치고 아울러 배반한 무리들을 불러 모아서 세력이 매우 커졌다. 인궤는 인원과 합하여 잠시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당 황제가] 조칙으로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왕은 김유신 등 28명<또는 30명이라고도 하였다.>의 장군을 거느리고 그와 합세하여 두릉윤성(豆陵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을 차지하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11월 4일에 이르러 군사를 돌렸다. 설리정(舌利停)에 이르러 싸움의 공을 따져 상을 차등있게 주고 크게 사면하였다. 의복을 만들어 남아서 지키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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